[2000년] 한미주둔군지위협정(SOFA) 개정
← 한국측 송민순 대표와 미국측 프레드 스미스 대표가 SOFA 개정 협상에서 만나 악수하고 있다.
주한미군에 관한 한미행정협정(SOFA) 개정 협상이 5년 만에 타결됐다. 양국의 협상 수석대표인 송민순 외교부 북미국장과 프레드 스미스 미국 국방부 아시아·태평양 담당 부차관보는 2000년 12월 28일 서울에서, 미군 피의자의 신병 인도 시기를 앞당기고 환경조항을 신설하는 것 등을 골자로 하는 개정 내용에 가서명했다.
양국은 살인·강간 등 흉악범죄는 미군 피의자를 한국이 체포 때부터 계속 구금할 수 있게 했으며, 마약거래·강도 등 12개 중요 범죄에 대해서는 미군 피의자의 신병을 한국이 넘겨받는 시점을 종래의 `재판 종결 후`에서 `기소시`로 앞당기도록 했다. 양국은 또 SOFA의 `합의의사록`에 `미군은 한국의 환경법령을 존중한다`는 환경조항과 `한국은 미군과 군무원의 안전을 고려한다`는 요지의 조항을 신설하기로 했다.
양국은 이 조항에 근거해 별도의 특별 양해각서를 만들기로 하고, 여기에 1.환경관련 정보공유 강화 및 공동조사 2.환경관리실적 평가 및 오염제거 등의 내용을 포함시키기로 했다. 이번 협상에서는 한국 내에서 미군이 사용하는 모든 토지를 연1회 합동 실사하기로 합의해 미군이 사용하지 않거나 사용계획이 없는 토지를 돌려받을 수 있는 근거를 확보했다. 또 미군이 한국 내 지역사회의 건강과 공공안전에 영향을 미치는 시설을 신·개축할 때는 한국측에 사전 통보하고 협의하도록 규정했다./조선
[1991년] 나진-선봉 자유경제무역지대 선포
1991년 12월 28일 북한은 함경북도 나진시와 선봉군 일대를 나진-선봉자유무역지대로 지정한다고 발표했다. 중국의 경제특구를 닮은 이 조치는 외국의 자본과 기술 투자를 유도하기 위한 것이었다. 1994년에는 인근의 인덕군 일부까지 편입, 확충하여 나진-선봉직할시로 승격되었다. 주요 프로젝트로는 사회간접자본시설 부문에서 나진항 확장, 청진서 확장, 선봉공항 신설, 나진-새별고속도로·나진통신 센터·선봉화력발전소·위성통신지구국 신설 등이 있으며, 공업 부문에서는 정유공장, 자동차조립공장, 오토바이 공장, 집적회로공장, 텔레비전 공장, 청량음료공장의 설립 등이 있다. 1993년 이후 북한 당국은 독일과 홍콩 등지에서 투자설명회를 개최하고 자본주의식 경제운용을 배우기 위해 오스트레일리아와 싱가포르에 시찰단을 보내기도 했다./브리태니커
[1989년] 체코슬로바키아 의회, 두브체크를 의장으로 선출
두브체크는 서(西)슬로바키아 출생, 공산당원인 부친과 함께 1925~1938년 러시아에서 지냈다. 그곳에서 교육을 받고 1938년 귀국하여 1939년 공산당에 입당, 대독(對獨)저항운동에 참가하여, 제2차 세계대전 후 지구당(地區黨) 서기가 되었다. 1955년 모스크바 최고당학교(最高黨學校)에 유학, 졸업 후 브라티슬라바 지방위원회 제1서기를 시작으로 하여, 1959년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중앙위원, 1966년 슬로바키아 공산당 제1서기, 1968년부터는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제1서기로 민주화 노선의 지도자가 되었다. 1969년 연방의회 의장에 취임하였으나 체코슬로바키아의 민중봉기 후 해임되어 1970년 터키대사를 마지막으로 당에서 추방되었다. 1988년 시민민주화운동의 재연으로 개혁이 추진되고 1989년 추방된 당원이 복권되는 등 ‘프라하의 봄’이 이루어지면서 연방의회 의장에 선출되어 20년 만에 정계에 복귀하여 1992년 6월까지 재임하였다. /naver
[1974년] 대구 상이군경 200여명. 신민당 경북지부당사서 난동
대한상이군경회 소속회원 2백여명이 1974년 12월 28일 신민당 경북지구당사를 점거하고 ‘병신육갑운운’ 발언에 대해 김영삼 신민당 총재가 공개 사과할 것을 요구하는 난동을 벌였다.
이들은 이날 5시간 반 동안 당사의 창문을 부수고 진입해 의자와 당기, 플래카드 등을 부수고 저지하는 당원들을 폭행, 실신시키는 등 무차별 폭행을 가했다. 이들은 당사 옥상에 올라가 ‘북괴남침 위협 있다’ ‘국가유공자 모독 발언을 공개사과하라’는 플래카드를 내걸고 연좌에 들어갔다.
이들이 당사를 점거하고 있는 동안 김영삼 총재와 신민당원들은 숙소인 금호호텔를 나와 50분동안 개헌과 독재헌법개정을 요구하는 가두행진을 벌였다. /조선
[1947년] 이탈리아의 마지막 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3세(Vittorio Emanuele III) 사망
1869. 11. 11 ~ 1947. 12. 28
부왕 움베르토 1세(Umberto I)가 무정부주의자에게 암살되자,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당시 이탈리아는 독일 ·오스트리아와 삼국동맹을 맺었으나 경제적인 면으로는 프랑스와 제휴하는 것이 유리하였기 때문에, 1900년 프랑스와 비밀협정을 맺고 독일 ·오스트리아와의 삼국동맹에서 탈퇴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 후 베니토 무솔리니(Benito Mussolini)가 거느린 파시스트당(黨)이 점차 세력을 확장하여 1922년 10월 로마 진군(進軍)을 강행하자, 이러한 사태에서 무솔리니가 내란을 유발시킬 우려가 있다 하여 이를 승인하지 않았다. 그러나 결국 대권(大權)은 무솔리니에게 돌아가고, 그뒤 그는 사실상 유명무실한 존재가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말기에 미 ·영 연합군이 이탈리아에 상륙하자, 무솔리니를 몰아내고 무조건 항복하였으나 왕권을 회복하지 못하였다. 1946년 6월 총선거 결과 왕정은 폐지되었고 이탈리아 공화국이 출범하였다. /naver
[1937년] 프랑스 작곡가 라벨(Ravel, Maurice) 사망
← 라벨
1875. 3. 7 ~ 1937. 12. 28
바스크 지방의 시부르 출생. 생후 3개월 때 파리로 이주, 14세 때 파리음악원에 입학하여, 피아노 ·대위법(對位法) ·작곡 등을 공부하였다. 고전적인 형식의 틀을 활용하는 것과 새로운 피아니즘의 개척이라는 두 가지 요인(要因)은 그가 일생 동안 지녀온 경향으로, 이 경향은 최초의 대표작이라고도 할 수 있는 그의 재학 중의 작품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1899)과 《물의 장난》(1901)에 잘 나타난다.
작곡계의 등용문인 로마대상에 1901년에 응모하여 2위로 입상하였으나, 그 후로는 그의 작풍(作風)에 반감을 품은 심사위원회로부터 응모조차 거부당했으며, 이것이 스캔들로 발전, 파리음악원장 사직으로까지 확대되어, 결국 1위는 하지 못했다.
그러나 피아노를 위한 소나티네와 《거울》(1905) 등에서 대담한 화성과 음색의 표현법을 확립하여 높은 평가를 받았다. 또 이국을 동경하고 환상을 좋아하는 그의 취미는 《셰라자드》(1898), 《박물지(博物誌)》(1906), 《마다가스카르섬의 노래》(1925∼1926) 등의 가곡과, 오페라 《스페인의 한때》(1909), 《어린이와 주문(呪文)》(1920∼1925), 그리고 《스페인광시곡》(1907)과 《볼레로》(1928) 등의 관현악곡과 결부되었다.
그는 흔히 드뷔시와 함께 인상주의 작곡가로 분류된다. 사실 새로운 화성어법(和聲語法)과 음역의 확대 등, 새로운 음색법에서 두 사람은 공통점이 있으나, 윤곽이 명료한 선율선(旋律線), 규칙적인 프레이즈 구조, 고전적인 형식의 활용이라는 점에서 드뷔시와는 다르다. 주요 작품으로 앞에 열거한 것 외에 발레음악 《다프니스와 클로에》(1912), 《마 메르 루아》(1913)와 현악사중주곡 ·피아노곡 《밤의 가스파르》(1918), 《쿠프랭의 무덤》(1917) 등이 있다. /naver
[1926년] 나석주,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투탄 후 자결
← 일제시대 동양척식회사에 폭탄을 던진 나석주 의사
중국 천진에 본부를 두고 활동하던 항일독립단체인 의열단 소속 나석주가 1926년 12월 28일 일제의 경제침탈을 응징할 목적으로 경제침탈의 총본산인 동양척식주식회사, 조선식산은행에 폭탄을 던졌다.
노동자 마중덕으로 변장을 한 나석주는 인천에 잠입하여 먼저 조선식산은행을 폭파하였으나 불발로 실패했다. 곧이어 동양척식주식회사로 가 권총으로 여러 명의 일본인을 사살하였으나 투척한 폭탄이 불발, 소기의 목적을 거두지 못하였다. 다시 조선철도회사에 가서 일본인들을 저격했다.
그는 일본경찰의 추격을 받으면서 자신을 추격하는 경찰과 접전을 벌여 일본인 경부 다바타 등을 사살한 뒤 자신도 권총으로 자살했다. 서른다섯의 나이였다. 나석주는 죽기 전에 일본경찰이 이름을 묻자 자신의 성명과 의열단원임을 밝히고 순국했다. 나석주 의사는 황해도 재령 출신으로, 23세 때 중국의 북간도로 망명한 뒤 이날 짧은 삶을 마감할 때까지 오직 항일의 한길을 매진했다
[1923년] 프랑스 건축가 에펠 사망
← ‘에펠탑’의 설계자 구스타프 에펠
‘철(鐵)의 마술사’ 구스타프 에펠이 1923년 12월 28일 뇌일혈로 숨졌다. 프랑스 파리의 독일계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원래 반평생을 유럽횡단철도 교량건설에 매달린 기술자였다. 그가 활동한 19세기는 하늘을 향한 인간의 꿈이 도처에서 꿈틀거리던 시기. 마침 프랑스혁명 100주년을 기념한 파리국제박람회가 1889년 개막 예정이었다.
박람회를 빛낼 건축물 설계전이 열려 700여개 작품이 응모했고, 에펠의 설계안이 최종 채택됐다. 당시로선 파격적이던 설계안이 공개되자 구노·모파상·졸라 등 프랑스 유력 문화계 인사 300여명이 반대 탄원서를 냈다. 기술자들은 ‘과학과 산업의 승리’라고 옹호한 반면 예술가들은 ‘추악한 철덩어리’ ‘철골 괴물’이라고 헐뜯었다.
1889년 3월 31일, 25개월간의 공사 끝에 완성된 에펠탑은 당시 최고 건물보다 2배나 높았고, 1930년 뉴욕 크라이슬러빌딩이 세워지기 전까지 세계에서 가장 높은 구조물이었다. 250만개 나사못으로 1만5000여 금속조각을 연결시킨 에펠의 공법은 근대 산업문명의 상징이었다. 계단 1652개, 높이 320.75m(안테나 포함), 무게 7000톤이나 됐다. ‘파리의 귀부인’이란 애칭을 얻은 에펠탑이 완성되자 모파상도 “흉측한 에펠탑을 안볼 수 있는 유일한 곳”이란 핑계로 자주 찾았다.
1909년 헐릴 위기에 처했으나 통신안테나 설치라는 새로운 용도 덕에 요절을 면했다. 그러나 라디오(1918년)와 TV(1957년) 안테나 설치로 몸무게가 1만1000톤으로 늘자 ‘귀부인’도 비만에 시달렸고, 1981년 2월 대대적인 다이어트에 들어갔다. 콘크리트 전망대를 강철로 바꾸고 엘리베이터를 전기식으로 교체해 1000톤의 군살을 뺐다./조선
[1908년] 동양척식회사 설립
일제가 1908년 서울 을지로 2가에 세웠던 `한국 경제 수탈의 아성` 동양척식회사
1908년 12월 28일 일본은 조선의 경제수탈을 목적으로 영국의 동인도회사와 유사한 동양척식회사를 설립했다. 동양척식회사는 농민에게는 진보된 농법을 제공하고, 기업가에게는 이자가 싼 자금을 제공한다는 명목을 내세웠지만 사실상 이 회사는 조선의 식민지화에 목적이 있었기에 한국민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동양척식회사의 설립으로 한국정부는 토지 1만7714정을 출자하고 1913년까지는 토지 4만7148정을 헐값으로 팔아야만 했다. 1920년대말에는 동양척식회사 소유지가 경작지의 3분의1인 9만7천여정이나 됐다. 또한, 일본은 국유지를 강제로 팔게 하여 우리나라의 산림지를 가로채, 1942년에는 16만여정의 임야를 가지게 됐다.
일본은 강제로 빼앗은 토지를 영세 소작농에게 빌려주어 고액의 소작료를 징수했고, 일본인 이민 희망자에게는 각종 특혜를 주기도 했다. 1917년에는 동양척식회사 회사법을 개정하고 본사를 도쿄로 옮겨 조선뿐만 아니라 몽골, 러시아령 아시아, 중국, 말레이반도 등 대륙 침략의 범위를 넓혔다. 1937년 중일전쟁 후에는 한국을 병참기지화하기 위해 중공업에 투자하기도 했다
[1895년] 프랑스 뤼미에르 형제, 세계최초의 영화 상영
프랑스의 발명가 오귀스트 뤼미에르와 루이 뤼미에르 형제가 1895년 12월 28일 새로운 타입의 대중영화를 상영했다.
토요일 저녁. 카푸친느가 14번지 그랑 카페의 한 살롱을 빌려 1프랑의 입장료를 내고 처음 일반에게 영화를 상영했다. 난생 처음 스크린에서 `뤼미에르 공장` `바다` `열차도착` 등 10여 편의 영화를 보게된 관객들의 반응은 환호 그 자체였고, 바로 이날 영화의 시대가 시작됐다.
뤼미에르 형제는 ‘시네마토그라프’(Cinémato graphe:시네마란 단어가 여기에서 유래됨)라는 초창기의 영화 카메라 겸 영사기를 발명한 선구적인 제작가들로 20년간 그들은 무려 400편의 영화를 만들었다.
[1889년] 무르나우 F. W. Murnau 출생
1889년 12월 28일 태어남 / 1931년 3월 11일 죽음 "예술-정통 예술-은 단순하다. 그러나 단순성은 기교의 극대치를 요구한다. 카메라는 감독의 연필이다. 덧없이 스쳐가는 분위기의 조화를 기록하기 위해서는 가능한 한 최고의 기동성을 가져야 한다. 중요한 것은 관객과 영화 사이에 기계적인 요소가 끼어들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 F. W. 무르나우
무르나우는 1920년대 무성영화 시대에 활약한 독일의 영화감독이다. 제1차 세계대전 직후 독일에서 영화를 만들다가 1927년부터는 미국 할리우드로 옮겨 활동했다. 프리츠 랑과 함께 독일 표현주의 영화의 대표자로 꼽힌다. 표현주의 영화는 독특한 건축과 회화적 세트를 이용해 인간 내면의 리얼리티를 표현하고 전설이나 신화적 이야기를 다루는 경우가 많았다. 흡혈귀 백작을 소재로 했던 무르나우의 초기 대표작 <노스페라투 Nosferatu>(1922)가 여기에 속하며, 이는 공포영화의 첫 고전으로도 손꼽힌다. 영화작가 카를 마이어와 작업한 <마지막 사람 Der letzte Mann>과 <일출 Sunrise>(1927)에서는 부드럽고 표현주의적인 카메라 이동기법으로 인물의 감정을 섬세하게 묘사해내어 영화계의 주목을 받았다. 마지막 작품 <타부 Tabu>(1931)를 찍을 때에는 직업적인 배우를 거의 쓰지 않고 남태평양의 섬 주민을 기용해 다큐멘터리에 가깝게 만들었다.
[1537년] 권율장군 출생
(출신 및 관직생활)
본관은 안동. 자는 언신(彦愼), 호는 만취당(晩翠堂)·모악(暮嶽). 아버지는 영의정 철(轍)이고, 어머니는 창녕조씨(昌寧曺氏)이다. 이항복(李恒福)의 장인이다. 46세 때인 1582년(선조 15)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정자가 되었다. 이어 전적·감찰·예조좌랑·호조좌랑·전라도도사·경성판관(鏡城判官)·의주목사 등을 두루 지냈다.
(행주대첩)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광주목사로서 전라도순찰사 이광(李洸), 방어사 곽영(郭嶸)과 함께 서울을 회복하기 위해 북진했다. 용인에서 일본군과 마주치자 권율은 우선 임진나루를 확보할 것을 건의했으나 묵살되었고, 결국 일본군의 매복에 걸려 패전했다. 이후 광주에 되돌아갔다가 전라좌도도절제사로 임명되어 금산군 이치(梨峙)에서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의 정예부대를 크게 이기고 호남을 지켰다. 이 공으로 전라도순찰사로 승진했다. 이해 12월 병마절도사 선거이(宣居怡)를 부사령관으로 삼아 1만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서울로 진격하다가 수원 독왕산성(禿旺山城)에 견고한 진지를 구축하고 일본군의 보급로를 끊었다.
이 소식을 들은 왜장 우키다 히데이에[宇喜多秀家]가 대군을 보내 성을 공격했으나, 수비를 굳게 하면서 유격전술로 맞서 이를 격퇴했다. 이 전투로 일본군은 서울에 고립되었다. 1593년(선조 26) 2월에 선거이에게 5,000의 병력을 나눠주어 시흥 금주산(衿州山)에 진을 쳐 도성의 왜적을 견제하게 하고, 자신은 관군 2,300명과 처영(處英)의 승병 500명의 병력을 이끌고 한강을 건너 행주산성에 주둔했다. 이때 왜장 우키다가 지휘하는 3만의 적군이 7대로 나뉘어 맹렬히 공격했으나, 관민이 일체가 되어 싸워 적을 격퇴하고 크게 이겼다.
그뒤 파주산성으로 옮겨 주둔했다가, 명과 일본 사이에 강화회담이 진행되면서 휴전상태가 되자 전라도로 돌아갔다. 그해 6월 행주에서의 전공으로 도원수(都元帥)에 올랐으나, 도체찰사(都體察使) 및 순찰어사(巡察御使)와의 불화로 말미암아 도망병을 즉결처단한 일이 빌미가 되어 1596년 해직되었다. 그러나 바로 한성부판윤으로 기용되어 비변사당상을 겸직하고, 충청도순찰사를 거쳐 다시 도원수가 되었다.
(정유재란 때의 활동)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후퇴를 거듭하다가 이순신이 적의 해군을 저지한 틈을 타서 명나라 제독 마귀(麻貴)와 함께 울산까지 남하하여 적과 맞섰으나, 사령관 양호(楊鎬)의 갑작스러운 퇴각령으로 철수했다. 이어 순천 예교(曳橋)에 주둔한 왜병을 공격하려 했으나, 충돌을 꺼리던 명나라 장수들의 방해로 실패했다. 전쟁이 끝난 뒤인 1599년(선조 32) 노환으로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가 그해 7월에 죽었다. 1604년 효충장의선무공신일등훈(效忠仗義宣武功臣一等勳)에 책록되었다.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영가부원군(永嘉府院君)으로 추봉되었다. 1841년 행주에 기공사(紀功祠)를 건립, 그해 사액(賜額)되었으며, 그곳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그밖에
2006년 인간 면역 유전자 지닌 '복제돼지'가 새끼 출산
1994년 일본 동북구, 7.5도 강진 발생
1990년 중앙기상대, 기상청으로 발족
1989년 한국-유고슬라비아 국교 수립
1988년 강영훈 총리, 북한에 남북총리회담 제의
1982년 국무회의 공직자윤리법 시행령 확대
1978년 이란 반정부 폭동, 최대규모로 확대
1976년 정부, 국회평화통일협의회서 박동선 사건 등 한미3대현안 내용 보고
1976년 살인마 김대두 사형
1974년 파키스탄에 대지진. 4천700명 사망
1973년 솔제니친 소설 ‘수용소 군도’ 출간
1970년 외교관계에 관한 ‘비엔나협약’ 국회 동의
1967년 공화당 단독으로 68년도 예산안 강제통과(제2의 2.4파동)
1966년 중국, 5차 핵실험
1965년 일본, 재일교포 2명에 한국 여행 첫 허가
1965년 한국-프랑스 문화기술협정 체결
1959년 국회, 호적법 통과
1959년 미국의 노동운동 지도자 비버 출생
1956년 미국 캘리포니아대학, 저온하의 핵융합반응에 성공했다고 발표
1949년 대한농민회 결성
1948년 이집트 마후무드 노크라시 라샤 수상, 카이로서 피살
1929년 북아메리카 프로 아이스 하키 골키퍼 테리 소척 출생
1927년 조선토지개량령 공포
1925년 러시아 시인 세르게이 예세닌 자살
1924년 우간다 초대 대통령 오보테 출생
1921년 이승만 등 워싱턴 군축회의에 한국독립청원서 제출
1910년 주시경 등 한국어연구회 조직
1908년 이탈리아 시실리섬 메시나 대지진으로 12만명 사망
1905년 미국의 재즈 피아니스트 하인스 출생
1902년 중국의 현대 문학가 선충원 출생
1902년 미국 시카고 이러쿼이 극장서 화재, 602명 사망
1896년 미국의 교향곡 작곡가 세션슨 출생
1895년 대만북부도민, 일본군정에 반란
1894년 미국의 고생물학자 로머 출생
1885년 인도 국민회의파 창립대회
1882년 영국의 천문학자 스텐리 에딩턴 출생
1859년 영국의 역사가 매컬리 사망
1856년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 출생
1828년 일본 월후에 지진. 3만명 사망
1767년 스위스의 법학자 바텔 사망 - 국제관계에 자연법이론을 적용한 `국제법`(1758)의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