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과 2학년, 그러니까 1967년 11월. 동숭동 문리대 교정이 온통 샛노란 은행나무 단풍잎으로 쌓여 있을 때 재경 경북고등 문리대 동문들 모임, 모임이라 해 봤자 은행단풍 잎 위에서 책을 자리삼아 새우깡에 소주나 한잔 하자고, 이 오후 늦은 시간에 있었다.
나도 분명히 문리대 의예과이니까 참석을 하였는데. 거나하게 취한 김에 이차를 가자고 해서 간 곳이 그 유명한 중국집 進雅春. 지금은 혜화동 쪽으로 자리를 옮겨 2세가 영업을 한다는 소식이 들리고. 왜 음식 먹고 맡기고 안 찾아간 시계들로 한번 신문에 크게 난적이 있었지요.
고량주에 탕수육 등을 기분 좋게 먹고 마시고 일어날 때 돈을 아무리 모아보아도 몇 백 원이 되지 않는다. 계산은 1,800원. 당시 이 돈의 기치는 변두리에서 하숙비 한달분이고 학생 버스표 42장에 100원 하던 때이니 적지 않은 돈이 틀림없었지요.
할 수 없이 반짝 반짝 빛나는 내 시계를 풀었지요. 집에 연락을 하여 몸이 아프다고 거짓말을 해서 일주일 후 전신환(여러분들은 무엇인가 아시지요, 요즈음의 온라인 송금 같은 것)으로 특별용돈 2,500원을 송금 받고 시계를 찾으러 갔더니 누가 내 시계에 자장면 2그릇을 시켜 먹어 1,860원이 되었더라고요.
하도 억울해서 40년도 지난 얼마 전 후배들(권기홍과 박종기)과 저녁을 먹을 때 이야기하였더니 “흠 누구 겠구나.”하며 지금은 지방 모국립대학교수를 하고 있다고.
하나 더 역시 그 해 늦가을. 삼선교에서 하숙을 할 때 학교 앞 學林다방까지 슬슬 걸어와 달랑 커피 값만 들고 음악을 듣고 있는데 수원 농대에 있는 친한 후배 이상무가 올라온다. 나를 보더니 반갑게 “형님” 하며 불러 가슴이 철렁하였다. 나가자 하며 데리고 나왔더니 “형님 술 한 잔 사주이소”
혜화동에서 삼선교를 넘어가다 보면 옛날 일제시대에 방공호로 파 놓은 굴, 한 쪽은 “알타미라” 다른 한쪽은 “석굴암”이라고 막걸리 집이 있었지요.
대중가요 목로주점의 노래가사처럼 30촉 백열등이 그네를 타는 곳. 들어가서 “아저씨 우리 서울대학생인데요” 제가 가진 것은 이 라이터 하나 밖에 없으니 이걸 맡기고 술을 주시겠어요?
그 라이터는 지금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닌 나의 친구 손희찬(청록 동기)가 영남대학 학생회장시절 데모를 준비하다 졸지에 월남시찰명목으로 끌려가 한 달 만에 돌아와 보니 학교는 휴교, 그 때 친구가 기념으로 사다 준 나에게 유서 깊은 라이터이다.
막걸리 두되에 안주 한 접시로 150원에 라이터를 잡히고 매캐한 굴 속에서 술을 마셨다. 이상무후배는 지금도 나와 막역한 사이로 후배 덕에 아들과 같이 연길에 초청받아 백두산까지 산행을 하였다.
첫댓글 난 무얼 맡기고 외상 술이나 음식을 먹어본 적이 없어서 .....
참, 뱃장 좋았다고 생각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