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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황손 이석(이해석) 이야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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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황손 가수’ 이석이 全州에서 조용한 인기를 얻고 있다. 그의 삶에는 “나라는 망했지만 사람은 살 수밖에 없는 비극”이 드리워져 있다. 그를 탐구하는 것은 오랫동안 외면했던 우리의 비극을 들여다보는 일이다. 그것은 우리가 역사의 뿌리, 비극적 뿌리도 이제는 대면할 수 있는 힘을 갖게 되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번 호에서는 그가 걸어온 삶의 궤적을 담담하게 추적해 본다. 그것은 우리의 ‘살아 있는 역사(living history)’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지금은 밤 11시, 나는 ‘빛을 계승하는 집’이라는 이름을 가진 ‘승광재(承光齋)’에서 이 글을 쓰고 있다. 승광재는 지난해 10월 전주 한옥마을에 문을 연 ‘황실테마생활관’인데, 전주시가 민가 네 채를 매입해 조성한 대지 130평 규모의 작은 한옥을 말한다. 승광재와 한 울타리, 같은 마당을 쓰는 전통생활 체험관 ‘설예원’까지 함께 놓고 보면 200평 남짓한 땅에 두 채의 한옥이 잘 어우러진 한집처럼 보인다. 승광재의 ‘광(光)’은 그냥 빛이 아니라 1897년 성립된 대한제국 연호인 광무(光武)의 빛을 말한다. 승광재는 고종(1863~1907) 황제의 손자이며 ‘마지막 황손’인 이석(64·본명 李海錫) 선생의 전주 정착을 위해 조성한집이며, 관광객들이 한옥생활을 체험할 수 있는 방도 4개 있다. 내가 머무르던 기간에 이곳에 머무른 사람들은 하나같이 초등학생을 데리고 온 젊은 부부들이었다. 이 작은 집이 대한제국을 계승할 수는 없지만, 지금 이곳에서는 우리가 몰랐던, 외면했던 일들이 새로운 빛깔을 띠며 부활하고 있다.
“그것은 이석 당신의 실패!”라는 은근한 비난과 함께…. 하지만 황실 사람들이 처했던 상황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1910년 조선은 망했지만, 황실 사람들은 그것과 함께 사라질 수 없었다. 사람의 역사는 나라의 역사와 같지 않다. 황실 사람들은 일제 강점기→이승만 정부→박정희 정부 등 정치적 변화가 올 때마다 급격하게 비참해졌다. 10년 동안 만주국 황제였다 1945년 이후 정원사의 삶을 살아야 했던 중국의 마지막 황제 ‘푸이(賻儀)’의 삶은 이들에게도 정확하게 겹쳐진다. 놀랍게도 황실 사람들은 1979년까지 황족의 외양을 유지하며 집단적 삶을 영위했다. 이석만 해도 1941년 사동궁에서 태어나 사동궁→(성북동 별장 성낙원)→별궁→(창덕궁 낙선재)→칠궁으로 옮겨 다니며 살았고, 1979년까지 궁에서 살았다. 조선 황실의 마지막 상황
이석의 정체성은 누가 뭐라고 해도 황족이며, 그 신분은 그가 원한다고 해서 벗어던질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고종은 사실상 세 아들을 두었다. 순종(1874~1926, 명성황후 소생)·의친왕(1877~1955, 장귀인 소생)·영친왕(1897~1970, 엄귀인 소생)이 그들이다. 이석은 의친왕의 11번째 아들이다.순종은 임금이 되었지만 후사가 없고, 영친왕은 이방자 여사와 결혼해 이구 씨를 낳았지만 집안 전체가 일본화됐다. 영친왕은 일본군 중장을 지냈고, 그 외아들 이구 씨는 스탠퍼드대학 공학박사가 되었지만 한국말을 할 줄 모르고 후사가 없다. 지금은 무속에 조예가 있는 일본 여인과 살고 있다.반면 의친왕은 매우 흥미로운 인물이다. 기골이 장대했고 일본 황실 여자와 결혼하는 것을 한사코 거부했다. 대동단이라는 독립운동단체에 참여해 중국에 망명정부를 세우려다 발각되기도 했다. 그리하여 일제의 혹독한 감시와 탄압을 받았다. 그러니까 오늘의 시점에서 황실의 정통성은 의친왕에게 있다. 의친왕은 7명의 여인에게서 13남9녀의 자손을 보았다. 하도 자손이 많아 의친왕 사후 “제가 깨떡어미 아들입니다” 하고 나타난 아들도 있었다. 그랬더니 의친왕의 정실부인인 수인당 연안 김씨가 “그래 깨떡어미 내가 알지!”라고 인준해 아들이 된 사람도 있다. 이석은 이 무겁고도 초라한 역사의 무게를 지고 의친왕의 11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필자: 사동궁(寺洞宮)은 어디에 있던 궁입니까? 황손: 지금 안국동에서 인사동길을 따라 내려가면 인사동 네거리가 나오는데, 그 오른쪽 일대가 다 사동궁터입니다. 지금의 조계사와 마주보고 있었지요. 그 안에 있던 서양식 건물에서 제가 태어났지요. 필자: 아, 거기에 궁이 있었군요.(지도 참조) 그런데 그 궁이 왜 없어졌습니까? 황손: 이승만 정부가 쪼개 민간에 불하했지요. 금싸라기 땅이니까…. 거기서 정치자금도 조달하고 그랬겠지요. 그 후 살았던 풍문여고 뒤의 ‘별궁’은 박정희 정부가 민간에 팔아치웠고요. 그 사람들에게 황실은 귀찮고 이상한 존재였죠. 필자: 그렇게 황실에서 살며, 황실의 법도를 유지했겠지요? 황손: 그럼요. 1926년 ‘6·10만세운동’의 도화선이 된 순종 서거 이후, 그 부인인 윤대비 마마가 황실의 최고 어른이었고, 남자로서는 의친왕께서 대들보 역할을 했지요. 윤대비 마마는 위엄이 대쪽같았고,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여러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왕자들에게 공평하고 엄했어요. 저도 마음으로부터 존경했고요. 필자: 황손께서는 아버지 의친왕으로부터 어떤 교육을 받았습니까? 황손: 교육이라고 말하면 좀 그렇고…. 아버지가 61세 때 제가 태어났으니 형님들은 어른이 되어 별채로 나가셨고, 저를 곁에 두고 귀여워하셨죠. 제 아명이 ‘영길’인데, 아침에 일어나시면 “Hi! Good Morning! 영길!” “영길아 말 타러 가자!”고 하시면서 저를 말에 태워 산책하셨어요. 하지만 감시가 심해 외출도 못하셨고, 약주를 드시면 천장에 권총을 쏘면서 괴로워하셨죠. 황손의 어린 시절
필자: 아버님이 미국 유학을 해서 영어를 잘하셨던 모양이군요? 황손: 예, 아버지는 권력투쟁 때문에 젊은 시절 외국으로 떠돌며 살았는데, 1900년부터 1905년까지 미국 웨스트 버지니아주에 있는 ‘로하누크’ 대학에 다니셨지요. 필자: 왕자란 어떤 대우를 받는 사람입니까? 황손: 제 칭호가 ‘아기씨 마마’ ‘애기씨 마마’였어요. 상궁이 4명 따라다녔지요. 어머니도 저를 그렇게 불렀어요. 윤대비 마마도 “사동궁 도령님”이라고 불렀지요. 초등학교 때는 상궁 4명이 교자상에 점심을 차려 왔어요. 필자: 교자상에다 점심을 차려와요? 그걸 어디에서 먹습니까? 황손: 교장실에서 먹었지요. 상궁 4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점심을 먹고 나면 음식이 굉장히 많이 남으니, 교장 선생님 등이 그것으로 매일 파티를 했어요. 상궁들이 법도를 지켜야 한다고 하니 선생님들하고 같이 먹을 수도 없었어요. 그래서 “따라오지 마, 따라오지 마!” 하면서 상궁들하고 싸움을 했지요. 필자: 꿈만 같은 이야기입니다. 해방 이후에도 그런 생활을 하셨다니…. 교장 선생님보다 계급(?)이 높았던 것 같고. 황실로서는 하루아침에 다른 방식을 선택하기도 어려웠을 것 같군요? 아무튼 다른 아이들하고 친구 관계를 맺기가 어려웠겠군요? 그렇게 특별대우를 받는다는 것도 고통일 텐데…. 황손: 큰 고통이었죠. 교장 선생님이 제 생활을 매일 점검했으니까요. 또 상궁들이 “아니 되옵니다” “아니 되옵니다” 하면서 따라오면 미칠 때도 있어요. 이미 세상이 바뀌었다는 것은 저도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었는데…. "무슨 개뼈다귀 같은 황실이냐”고 할지 모르지만, 사람의 삶이란 공식적인 역사와는 궤적을 달리한다. 개인의 삶도 세월의 흐름을 따라갈 수 없다. 그래서 노인문제가 생긴다. 황실 사람들은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거나 은둔생활을 하기도 했지만, 혈통의 인연을 끊어내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20여 명의 황실 남자들은 이런저런 유형의 삶을 시도했지만, 거의 모두 “미친 사람이 되었거나 정신병자와 유사한 삶”을 살았다. 세월의 변화를 황실 사람들처럼 고통스럽게 맞아야 했던 사람들도 드물 것이다. 사실 이석 씨는 고통스럽고 비참했던 황실의 역사를 견디고 살아남은 생존자(survivor)다. 그에게는 노래라는 탈출구가 있었기 때문이다.어머니 남양 홍씨는 궁중에서 전화 교환원으로 일하다 열아홉 살 때 의친왕의 눈에 들어 후궁이 되었다. 남양 홍씨는 왕의 자식을 낳았으나 후궁이어서 궁 안에서 살지 못하고 명륜동에 집을 얻어 따로 살았다. 왕은 39세 연하인 어린 아내를 지극히 사랑했다. 이석 씨 아래로 3명의 동생을 더 보았고, 1944년에는 성북동에 있던 별장 성낙원에 딴살림을 차려 1년 정도 함께 살기도 했다. 이때가 남양 홍씨와 이석 씨에게는 꿈같이 남아 있는 행복한 시절이다. 그렇게 의친왕은 어린 아내의 품에 안겨 1955년 78세로 세상을 마감했다.6·25가 끝나자 정부는 황실을 상갓집 개만도 못하게 취급했다. 이승만 정부는 황실재산관리법을 만들어 황실 재산을 국유화하고 압수했다. 구황실사무총국에서 윤대비에게 경제적 지원을 했으나, 그 지원은 다른 황실 사람들에게 미치지 못했고, 그나마 시간이 흐를수록 잘 나오지도 않았다. 이석은 경동중·고등학교에 다녔다. 야구선수 백인천이 동창이다. 그는 성장기 내내 고독했다. 친구가 없었다. 경동중·고에 다닐 때는 별궁에서 살았는데, 창덕궁(비원)을 거쳐 학교에 다녔다. 당시 창덕궁은 일반인에게 공개되지 않았고, 이승만 대통령과 이기붕 씨가 가끔 와서 낚시를 즐기고는 했다. 황실을 괴롭힌 장본인들이었다. 청년기의 고독과 예술
이석은 창덕궁을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었다. 창덕궁에 가면 수위들이 “왕자 마마 오셨습니까” 하고 경례를 붙이며 반겨주었다. 집으로 돌아올 때는 명륜동에 있는 어머니 집에 들렀다 다시 창덕궁을 거쳐 별궁으로 왔다. 어머니를 만나고 돌아서면 슬픔이 밀려왔다. 사람이 없는 숲속에 이르면 큰 소리를 질렀다. 그래서 “DJ를 해 보라”는 제안을 받아들였다. 한 달에 4,500원을 받았다. 당시 가장 좋은 직장이었던 은행 직원의 초임이 3,000원 정도였다. 1960년의 일이다. 그해 말 노래자랑에서 <베사메무쵸>를 불러 1등을 했다. 1만 원의 상금을 받았다. 그는 훌륭한 가수이자 사회자였던 것 같다. 1961년에는 미8군에 진출한다. DJ생활을 하며 약 200여 곡의 팝송을 외워 버린 것이 힘이 되었다. 월급은 8,000원으로 뛰었다. 미8군 무대에 서다 보니 영어를 잘하게 되었다. 곧 영어로 사회도 보았다. 당시 이런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한국인은 거의 없었다. 곧 워커힐로 무대를 옮겼다. 이때 만약 황손 이석이 황족이라는 족쇄를 벗어던지고 노래로 승부를 걸었다면, 자신에게 찾아온 기회가 얼마나 값진 것인 줄 느꼈다면, 그는 남진과 나훈아의 세계를 가볍게 넘어선 다음 그 뒤를 잇는 통기타 부대하고도 또 다른 음악세계를 펼쳤을 것이다. 그는 차고 넘치는 재능과 환경을 동시에 갖고 있었다. 하지만 황손이었고, 그 핏줄의 명령을 완전히 단절하지 못했다. 두 여인, 윤대비와 어머니 필자: 처음 노래를 시작했을 때 황실에서는 뭐라고 했나요? 황손: 발칵 뒤집혔지요. “아무리 황실이 망했다지만, 이렇게 망할 수 있느냐” “황손이 광대가 된다는 게 말이 되느냐”며 말이 많았습니다. 윤대비 마마의 노여움이 가장 컸습니다. 저는 “황손도 먹어야 하고, 돈이 필요하지 않으냐”며 노래를 계속했지요. 필자: 하지만 윤대비 마마 때문에 노래를 그만두셨다면서요? 황손: 1964년 말 윤대비 마마가 돌아가셨습니다. 그것은 한 시대가 갔다는 뜻이었지요. 조선 황실의 영욕을 다 알고 있는 기둥뿌리가 다 뽑힌 거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워커힐 사장에게 “옛날 같으면 3년 상을 치러야 하지만, 한 달만 노래를 부르지 않고 쉬게 해 달라”고 했어요. 필자: 황손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였겠군요? 윤대비 마마를 존경하기도 하셨으니…. 황손: 그런데 뜻밖에 안 된다는 거예요. 나도 놀랐어요. 말끝마다 미국에서 호텔경영학을 배웠다며, 호텔경영학이 만병통치약인 줄로만 아는 신세대 사장은 “사회자가 없으면 어떻게 쇼를 하느냐”며 나오라고 하더라고요. 필자: 쇼요? 그렇군요. 황손께서는 쇼를 하고 계셨군요. 윤대비 마마와 쇼, 그 갈림길에 서신 거네요? 황손: ‘인생무상, 세상 종말’이 느껴져 사장의 명령을 걷어차 버리고 연예계 생활을 청산했습니다. 그때 그렇게 결심했습니다. 필자: 바로 이런 대목, 황실의 마지막 자존심이 상하는 대목에 이르면 선생님은 속절없이 거칠어졌던 것 같습니다. 그게 선생님의 정체성인 거지요. 황손: 맞아요. 그것 때문에 월남에도 다녀왔지요. 연예계 생활을 청산하고 빈둥거리고 있는데, 파월 국군 총사령관인 채명신 장군에게서 ‘군예대(軍藝隊)를 꾸려야 하니 월남으로 와서 노래도 하고 돈도 벌라’는 편지가 왔습니다. 그것 참 달콤한 유혹이었습니다. 전쟁터, 상처받은 젊은 영혼을 달래기에 그곳보다 더 좋은 곳이 어디 있겠습니까? 전쟁은 안 하고 노래를 부른다는 것도 유혹이었지요. 필자: 황손도 군 복무 의무를 치러야 했나요? 황손: 그럼요. “월남에 가면 죽는다”고 어머니가 울고불고했는데, 허무한 마음에 ‘한번 가 보자’는 심정으로 갔습니다. 3년4개월을 월남에서 보냈지요. 황손도 모르고, 황실도 모르는 베트남의 밤은 허무하고 사랑스러웠지요. 1968년 10월 귀국했습니다. 필자: 귀국하자마자 어머니가 돌아가셨지요? 어머니는 어떤 분이셨습니까? 황손: 어머니는 나이 차가 많았지만, 아버지와의 짧았던 사랑을 붙잡고 사신 분이었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명보극장 앞, 신당동 중앙시장, 영등포시장에서 국수장사를 하며 사셨지만, 마음은 황실의 법도를 놓지 않으셨습니다. 아마 어머니가 살아계셨더라면 나는 장가를 못 갔을 거예요. 현실은 그게 아닌데, 결혼에 대해 무척 까다로우셨어요. 마지막 황손의 여인들 더 이상 “애기씨 마마, 그렇게 하시면 아니 되옵니다”라고 꾸짖을 사람도 사라졌다. 그것은 무섭고도 우울한 절망이었다. 그때까지 이석은 정갈한 청년이었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할 정도로 마음이 순수했고, 과거의 끈을 놓지 않고 있었다. <뉴 월드> 시절부터 따르는 여자가 많았지만, 연애 한번 제대로 하지 못했다. 호기심이 있었으니 차를 마시고 밥까지 먹었으나 연애로 발전시키지 못했다. 연애야말로 황실의 법도를 지켜야 하는 영역이었다. 하지만 어머니를 보내고 나니 세상이 달라졌다. 그는 고아가 되어 있었다. 27세 청년이 무슨 고아냐고 할 수 있으나, 살아야 하는 이유가 없다는 점에서 그는 고아였다. 모든 경계의 끈이 단절되고 있었다. 그의 활동 무대는 KBS·MBC·TBC의 가요 프로에서 사회를 보는 것, 퇴계로의 퍼시픽 호텔 나이트클럽, 홀리데이 인, 명동의 오비스 캐빈 등으로 넓어졌지만, 매일 밤 술을 마셔야 했다. 그 무렵 조영남·송창식·윤형주 등 신세대 가수가 대거 등장했다. 그들은 좋은 친구가 되었지만, 이석은 그들과 같을 수 없었다. 이때부터 꼭 10년 동안 그의 삶은 바닥을 알 수 없는 나락으로 굴러 떨어졌다. 이때부터 모두 여덟 번이나 자살을 시도했다. 절망이 깊었으나 목숨을 끊어내기도 어려웠다. 아직 못다한 삶이 남아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많은 여인이 스쳐갔으나 제대로 사랑한 것은 아니었다. 결혼 비슷한 것을 여러 번 했는데, 모두 우연히 이루어진 일이었다. 누구하고 잠자리를 같이했는지 기억이 없었지만, 어느 날 자신의 아기를 뱄다는 여인이 찾아오고는 했다. 이석은 2녀1남 세 아이를 두었는데, 모두 그렇게 해서 얻은 자식이었다. 첫번째 여인 때는 성대한 결혼식을 올렸다. 나머지는 결혼식 없이 그냥 살았다. 결혼은 통속적이며 현실적인 삶이다. 결혼은 가족에 대한 사랑과 삶에 대한 투쟁이 있어야 한다. 그것도 아니면 무덤덤함을 견딜 수 있는 인내라도 있어야 한다. 이석은 이 점에서 보통사람들과 달랐다. 이석은 인터뷰 도중 결혼과 관련해 여인들이 “돈을 밝혔다”거나 “모든 것을 돈으로 생각한다”는 문제를 지적했고, 그 대목에 이르러 말할 수 없는 염증을 토로했다. 돈은 결혼생활에서 중요하다. 그 역시 “돈이 있어야 먹고산다”는 이유로 가수가 되었다. 하지만 자신의 삶이 여인에 의해, 다른 사업가에 의해 돈 문제로 전환되는 것을 견디지 못했다. 황손은 결혼생활에서 돈 이상의 그 무엇을 필요로 했다. 그럴수록 여인들은 돈에 집착하게 마련인데, 이석은 그런 여인들이 말할 수 없이 싫어졌다. LA의 깊고 푸른 밤 다시 한번 그의 인생에 전환점이 찾아왔다. 10·26이 터지고 12·12가 있기 직전, 일단의 헌병들이 청와대 옆 ‘칠궁(七宮)’으로 들이닥쳤다. 그들은 이곳에 살고 있는 30명 정도의 황실 가족과 거기에 딸린 식구들을 내쫓았다. 황실 사람들은 최소한의 인간적 격식을 갖추어 자신들의 존재를 인정하는 정부가 탄생하기를 기대했으나, 근대화와 민주화라는 역사의 흐름은 결코 그들의 편이 될 수 없었다. 10·26 직후의 권력 공백기에 누구에 의해, 어떤 이유에 의해 그들이 쫓겨났는지는 규명해 볼 문제지만, 황실의 존재 근거는 그만큼 희박했다. 그처럼 자의적 폭력에 유린당했다고 해도 하소연할 곳은 없었다. 아무런 법적 근거 없이 존재했던 황실의 역사는 그렇게 박살나고 말았다. 이미 여러 가족이 똑같은 이유로 미국에 살고 있었고, 10·26 이후에도 또 떠났다. 이석은 곧 불법 체류자가 되었고, 영주권을 얻기 위해 미군 중령의 부인이던 한국 여인과 서류상 결혼을 했다. 이 결혼은 장미희와 안성기가 주연한 영화 <깊고 푸른 밤>에 나오는 결혼과 똑같은 것이었다. 결혼 대가로 1만 달러를 지급했고, 이민국의 감시 때문에 한집에서 살았지만 하루 종일 말 한마디 나누지 않았다.이 시기에 많은 연예인, 특히 가수들이 미국행을 택했다. 양희은·이장희·한대수·태진아·송대관·이용 등. 박정희와 전두환 정권 때 민주화운동을 했던 사람만 정권의 탄압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자유로운 삶을 구가하려는 예술가와 연예인들에게도 이 땅은 살기 어려운 곳이었다. 이석은 꼭 10년 동안 미국에서 살았다. 그는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는 이민자들처럼 난생 처음 노동을 하며 살았다. 하루 네 가지 일을 했다. 아침 6시에 일어나 남의 집 잔디를 깎고, 오전에는 베벌리 힐스로 가서 수영장 청소를 했다. 오후에는 페인트칠을 하고, 밤이면 권총을 차고 경비를 섰다. 무섭게 보이기 위해 콧수염을 길렀다. 미국은 차라리 편한 곳이었다. 황손을 알아주는 사람도 없었고, 알아주기를 기대하지도 않았다. 소처럼 일할 수 있었다. 돈을 버는 것이 재미있었다. 그러고 보면 조국이란 이상한 곳이다. 조국에서는 각자의 신분이 있고, 자신에 대한 기대가 있어 신분을 유지하려고 한다. 조국에서도 아무 일이나 할 수 있다면 좀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겠지만, 사람이 산다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닌 듯하다. 그렇게 5년을 일하니 5만 달러가 모였다. 5만 달러를 모으자 은행에서는 20만 달러를 빌려 주었다. 그 돈으로 ‘리커 스토어’를 차렸다. 이익은 많이 남았지만 때때로 무장강도를 만나야 했다. 4년 동안 13번 강도를 당했다. 나중에는 돈통에 든 돈을 다 내주며, “Hi! My Friend, Thank You! See You Again!” 하고 인사까지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열세번째 강도가 한국인이었다. 여자 스타킹을 쓰고 들어와 얼굴을 알아볼 수 없었는데, 돈을 모아 건네주려고 시간을 지체하자, “야, 이 새끼야. 빨리 해!”라며 한국말을 했다. 그 사건을 당하고 나자 갑자기 ‘장사’가 싫어졌다. 그 강도를 ‘자신의 백성’으로 착각한 것은 아니지만, “미국에서조차 한국사람끼리 이러고 살아야 하나” 하는 의문이 들었다. 헐값에 장사를 정리했다. 마침 영친왕 부인 이방자 여사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1989년 귀국했다. 그는 여전히 황실의 일원이었고, 그 마음의 신분을 버릴 수 없었다. “남대문시장은 지옥 같아요” 필자: 한국에 돌아와 살림을 차렸지요? 황손: 제 유일한 아들의 어머니하고 6~7년 살았지요. 필자: 그 아들은 어떻게 태어났습니까? 황손: 1979년 설날이었어요. 여러 남녀 친구들과 여의도에 있는 한 여자의 집으로 몰려갔지요. 이화여대 앞에서 양장점을 하던 이혼녀의 집이었습니다. 나중에 알았지만 7년 동안 결혼생활을 했는데, 아이가 없어 쫓겨난 여자였습니다. 친구들은 화투와 카드를 치며 놀았는데, 밤이 되자 돌아갔어요. 나는 술에 취해 잠이 들었다 그 집에서 3일을 보냈지요. 무슨 인연이 닿으려고 했는지 한참 후 그 여자가 “임신했다”며 찾아왔더군요. 필자: 그래서 뭐라고 했습니까? 아이를 지우라고 했나요? 황손: 그보다, 동대문시장에서 장사를 하던 장인(?)은 “내 딸이 여자임이 증명되었다”고 막 좋아하더라고요. 어떤 일이 있어도 아이를 낳는다고 했고, 어서 결혼하라고 난리를 쳤어요. 아이를 못 낳던 여자가 아이를 낳겠다니, 말릴 수도 없고 어중간했지요. 또 몇 달이 지나 병원에서 연락이 왔는데, 아들이라고 하더군요. 필자: 아들이라는 소리에 솔깃했겠군요? 황실에서는 남자의 탄생을 중요하게 생각할 테니까요. 황손: 솔깃했던 것이 아니라 좋았지요. 뿌듯했어요. 100만 원을 가불해 70만 원의 병원비를 치렀습니다. 그때 내 수입이 한 달에 7만 원이었습니다. 하지만 아이는 그 여인이 좋아서 낳은 것이었고, 가정까지 책임질 일은 아니었지요. 칠궁에서 쫓겨나자 모든 것이 싫어져 미국으로 달아나 버렸지요. 필자: 그럼 다시 한국에 돌아왔을 때, 어떻게 그 연인과 살림을 차렸습니까? 황손: 교통사고가 나서 병원에 입원했어요. 한참 뒤 연락이 닿아 그 여인이 간호해 주고 하다 보니…. 그 여자는 10년을 기다렸다고 하더군요. 필자: 6~7년씩이나 가정생활을 한 것은 어느 정도 맞았다는 뜻 아닙니까? 이제는 나이도 드셨고…. 황손: 그 여자는 장사꾼이에요, 장사꾼. 돈밖에 몰라요. 대화가 통하지 않았어요. 필자: 아니, 가정을 꾸리려면 돈이 있어야 하는 것인데, 장사꾼이라서 대화가 안 통했다는 말입니까? >황손: 그때 그 여자는 남대문시장에서 여자옷 도매를 했어요. 나이트클럽에서 노래 부르는 일이 끝나면 집에 가서 그 여자를 차에 태워 남대문시장까지 데려다 주었지요. 복작대는 남대문 새벽시장은 지옥 같았고 “지옥 같은 데서 살 수 없으니 다른 일을 하자”고 했습니다. 2,000만 원 주고 산 가게를 3억 원에 팔아 2억 원에 마포의 아파트를 사고 남는 1억 원으로 논현동에 ‘동신참치’라는 가게를 차렸습니다. 처음에는 잘됐어요. 한 달 매상이 5,000만~6,000만 원씩 되었어요. 그런데 IMF가 터져 장사를 접어야 했지요. 필자: 그분이 장사 수완은 있었던 것 같습니다? 황손: 장사 수완이야 좋았지. 그런데 살림이 쪼들리자 “골프가 다 뭐냐? 황손이 밥 먹여 주느냐? 나가서 돈을 벌어 오라”고 하는 거야. 몇 번 말다툼하다 “다 가져라” 하고 나는 맨몸으로 나와 버렸지. 인간적 삶과 혈통 의식 사이에서 아, 하지만 이것은 보통사람으로서는 용납하기 어려운 생활 감각이 아닐 수 없다. 보통사람들은 ‘지옥 같은 새벽시장’에서 일하고, 돈을 벌어 가정을 꾸려야 하지 않는가? 하지만 황손은 생업의 처절한 현장을 비천하게 여기는 데가 있다. 여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어떤 젊은 여자가 “나는 황손하고 살겠다”고 했을 때 “그럼 오라! 내가 귀빈(貴嬪)을 시켜줄 테니까”라고 했다고 한다. 두 사람이 그렇게 합의한다면, 그거야 남들이 뭐라고 할 일은 아니지만, 바로 그 같은 생각을 밖으로 표출하는 것은 이 사회의 정신에 맞지 않는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석은 황실의 관념을 갖고 있기 때문에 세상과 불화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절로 들어갔다. 양산 통도사에서 2년, 김해 육주사에서 1년을 지냈다. 여기서 사주나 운명풀이로 유명한 정다운 스님과 깊은 교분을 나누었다. 서울 갈현동에 있는 수국사에서도 1년을 지냈다. 아예 머리를 깎을 생각도 했지만, 세상에 대한 미련이 많은 운명이어서 절 생활은 체질에 맞지 않았다. 절에서 나와 떠돌이 생활을 했다. 지프에 개인 짐을 싣고 전국을 떠돌아다녔다. 밤이 되면 찜질방에 들어가 간단한 세수를 하고 약간의 잠을 잤다. 하지만 대중탕 속에는 들어가지 않았다. 여러 사람이 함께 사용하는 물은 불결하기 때문이다. 그는 아무리 삶이 비참해져도 귀족의 태도와 관념을 버리지 못했다. 2003년 마지막으로 자살을 기도했는데, 그 방법은 차를 몰고 경복궁 대문을 들이받고 죽는 것이었다. 세상이 너무 황손을 몰라 주는 것에 대한 항변인 셈이었다. 그런데 마지막 황손이 찜질방을 전전한다는 소식이 언론을 타고 조금씩 알려졌다. “그분을 그렇게 만들면 안 된다”는 여론도 조금 생겼다. 그러던 차에 전주시가 “마지막 황손은 ‘살아있는 역사(living history)’이고 전주 이씨이니 전주가 조선 왕조의 본향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알리는 데 효과적인 상징적 인물이 될 수 있다”며 그의 전주 정착을 추진했다. ‘승광재’를 지어 거기에 살도록 하고, 그를 전주대 교양학부 교수로 임명하여 ‘전주시 문화대사’로 가꾸어갈 생각이다. 주 정착 6개월이 지난 지금 황손 이석은 만족해 한다. 사람들이 조선 역사에 관심을 보이니 “살 맛이 나고 의욕이 생긴다”고 했다. 그러니까 그가 원했고 바랐던 것은 어떤 정신적인 것이었다. 민주공화국이라고 해도 조선 황실의 역사를 복원하고, 황실에 관련된 사람들을 백안시하지 말고 이 사회의 구성원으로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사실 그가 경복궁 대문에 머리를 처박고 죽고 싶었다는 것은, 우리 사회가 얼마나 물질 위주, 능률 위주, 획일화 속에서 살아왔는가를 말해주는 사건이다. 사람이란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돕고 의지하며 사는 존재다. 그래서 사람은 의지하고 감정을 나눌 상대가 없을 때 사는 것 같지 않고 죽고 싶게 된다. 마지막 황손과 그 모든 가족들이 비참한 삶을 살았다는 것은 늦었지만 반성하고 새로운 대안을 모색해 볼 일이다. 예의 도시, 전주의 부활 전주는 조선 황실의 역사를 복원하기에 적당한 주체로 보인다. 이곳에는 태조 이성계의 얼이 새겨진 ‘오목대(梧木臺)’와 ‘이목대(梨木臺)’가 있고, 역대 임금의 어진을 모신 경기전(慶基殿)과 왕조실록을 보관했던 전주사고 등 문화 유적이 존재한다. 그리고 이들 문화유적이 위치한 풍남동·교동은 전주천의 상류에 위치해 깨끗한 강이 흐르는 등 입지조건이 뛰어나다. 이미 전주시는 그 같은 조건에 착안해 이 지역에 막대한 자금을 쏟아부어 한옥마을의 보존·개발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현재 1단계 사업이 마무리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는데, 그 성과는 전주 시민과 이 사업을 추진했던 관계자들조차 놀랄 정도로 대단하다. 서울의 인사동이나 사간동·가회동 같은 전통에 익숙한 내 눈으로 보면 전주의 한옥마을은 경이롭기까지 하다. 이곳에 와 보니 서울의 전통지역들은 상업주의와 외국물이 곁들여진, 비좁고 혼탁한 공간일 뿐이다. 하지만 전주의 한옥마을은 한층 간결하게 처리된 지붕의 선, 아주 굵은 나무를 사용한 기둥, 더 널찍하고 개방적인 창문, 2층 한옥의 모습을 한 찻집과 상업용 한옥들이 ‘전주 양식’이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우리 전통의 아름다움을 한껏 뽐내고 있다. 전주 양식의 압권은 경기전 앞의 ‘태조로(太祖路)’다. 나는 2박3일 승광재에 머무르는 동안 틈만 나면 봄밤의 태조로를 배회했는데, 이 거리에 들어서면 질박하면서도 끈끈하고, ‘예(禮)’를 갖춰 사람을 대하려는 전주 사람들의 멋이 잘 드러난다. 뭐랄까? 전통의 멋, 과거의 끈을 놓아서는 안 된다고 말하면서도, 지금 이 순간의 기쁨과 생활 또한 누리겠다는 인간미가 이 거리에는 있다.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한 것은 전주 사람들이다. 거리에 있는 찻집·술집·밥집에서 일하는 사람과 그곳을 찾은 사람을 만나보면 특별한 즐거움이 있다. 그들에게서는 전주가 전통을 간직한 문화예술도시라는 자부심이 넘쳐난다. 이 도시에 황손 이석이 정착했다는 것은 여러 의미가 있다. 그것은 역사에 대한 인간의 부활이다. 우리는 그동안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다하느라 사람을 너무 무시해 왔다. 역사적 사명만 다하면 인간이야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었다. 그런 역사 속에서 사람은 고통받았고 연예인은 이 땅을 떠났었다. 그 한복판에 소중하게 보존해도 시원치 않을 황실 사람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석이 전주에 정착했다고 해서 사람의 역사가 저절로 살아나는 것은 아니다. 우선 전주시는 철종에서 대가 끊기고, 대원군과 고종에서 새롭게 시작되는 황실의 역사를 복원하는 일에 신경 써야 할 것 같다. 전주 이씨 종친회도 기념사업과 지원사업을 마련해 황실을 예우하고, 전주라는 지역의 사람 역사를 되살려야 할 것이다. 그 일을 하다 보면 또 다른 중요한 사업들이 생각날 것이다. 고종시대 우선 복원의 대상 삼아야 이 주장은, 지금 대중적으로 알려져 있지 않지만, 젊은 학자들 사이에서 뜨거운 쟁점이 되어 있다. 사실 황실만 단절된 역사를 살았던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단절된 역사를 살았다. 앞만 보고 뛰었지 뒤를 돌아보지 못했다. 그 과정에서 무수히 많은 사람이 상처를 입고 삶을 마감했다. 우리가 역사를 복원한다고 할 때, 그 시기는 고종시대사가 가장 우선 복원할 대상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석의 전주 정착은 고종시대사를 사람의 관점에서 복원하는 첫 발걸음에 해당된다 생각해 보라. 어디 다른 방법이 있는가를. 이제 고종시대사가 정리되어 대중의 사랑을 받는 역사 주제가 될 날도 머지않았다. 그 시대는 그만한 역사의 무게를 지니고 있다. 우리의 삶이 나아지니 그 시대의 밝은 면도 보이는 것이다. 그때가 되면 단절된 역사 의식은 이어지고, 경기전 같은 역사 유적은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될 것이다. 전주시의 전통 복원사업과 황손 이석의 투쟁은 머지않아 결실을 맺게 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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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 덕에
우리나라 역사에 진한 관심이 생겨납니다

싸부님
송구스럽사옵니다
우리나라는 전통과 역사를 가볍게 보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소중함을 알아야 할텐데...
네
묻혀있는 전설을 줄줄이 꺼내는 느낌으로 읽었습니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덕분에 모르고 있던 먼 지난 이야기를 알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