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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2월14일
말씀: 고후2:14-17
제목:신비함으로 이끄심
우리 세대에서는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일들로 인해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상대적이기는 하지만 자영업자들은 대부분 고난을 겪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에 따라 정부도, 병원도, 담당 공무원들도 많은 고생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어려운 시기를 맞으면서 서로가 몹시 어려운데 이 어려움이 장기화하니까 한계성을 드러내는 모습들을 보이면서 격렬해지는 양상도 보입니다.
그러나 모든 상황이 다 나쁜 것은 아닙니다.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마는 4차산업혁명 시대를 좀 더 앞당겼고, 변화의 시대가 빨라진 부분들도 있습니다. 가정에서 사람들을 만나는 일들이 줄어드니까 가정에서 가족과 함께 있는 시간도 길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운동도 가정에서 하고, 취미생활도 가정에서 할 수 있는 취미생활을 하게 되면서 가정에서 시간을 보내는 경우가 늘어났다고 봐야 합니다. 그리고 생활비도 조금씩 줄이는 계기도 된 것으로 앎니다. 특히 야외생활이 줄어드니까 자연 훼손이 덜되어지고 있다는 것 아십니까? 나아가서 세계적으로 대기 질이 좋아지고 있다는 보고도 들었습니다.
가정에서는 아내 요리 솜씨가 늘었다는 부분과 세끼를 집에서 먹으니까 솜씨가 늘기도 하고 냉장고도 자동으로 정리도 된다고 합니다. 또한, 부부이혼율도 확연하게 줄었다는 통계 보도도 있었습니다. 공연 표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 정도의 수준에 있는 공연을 집에서 무료로 보는 호사도 누릴 수 있었다고 합니다. 예를 들면, 피아니스트 조성진이 유튜브로 무료 공연을 열어 30만명이 집에서 보는 기쁨을 누렸다는 것이지요. ‘시댁 행사에 당당히 안 갈 수 있어 좋다’ ‘화장할 필요가 없으니 피부가 좋아졌다’는 얘기도 많습니다. 그다음에는 독감 환자가 눈에 띄게 줄었다는 것입니다. 집에 있고 밖으로 나가면 마스크를 착용하니 바이러스가 들어올 틈이 없어졌다는 말입니다.
물론 상대적으로는 아주 힘든 상황이 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예를 들면 감기 환자가 줄어들면 의사들이나 병원에서 코로나 때문에 현장에서 앞장서서 수고하셨는데 정작 병원의 영업이 안 되어 문을 닫게 되는 병원과 약국이 생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코로나가 인류의 재앙이라고 합니다마는 이것을 통해 하나님이 세상을 이끄는 도구로 사용하고 있다는 관점에서도 볼 수 있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좀 더 기다리고 시간이 지나면 우리의 고통이 유익으로 다 가 올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지요. 우리 모두가 힘듭니다. 물론 코로나로 호황을 누리는 사업도 있습니다마는 전체적으로 보면 모두가 힘든 시기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특히 삶의 행복권이 침해되고 있고, 예를 들면 명절날 부모님도 뵙지 못하고 함께 여행도 가지 못하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또한, 관계가 단절되어 나타나는 심리적 격리는 많은 스트레스를 주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이런 어려움이 우리에게 어떤 유익으로 다가올 수 있고 어떤 변화의 기점으로 삼을 수 있고 다른 도전을 할 기회도 될 수 있고, 이 코로나 때문에 나라가 새로운 방향으로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갈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결국 코로나로 말미암아 영적으로는 더욱더 주님을 의지하며 믿음을 세워나가는 계기가 될 수 있어서 영적으로는 오히려 더 훈련되고 다듬어지는 은혜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의 현장 속에서는 더 유익이 되고 좋은 점들을 볼 수 있는 상황도 올 수 있다는 기대를 가지고, 인내하며 기다려 볼 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일로 절대 망하지 않는다는 하나님을 아는 믿음 위에, 말씀 위에 세워지기를 원합니다. 고후 1:14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대단히 중요한 표현입니다.
고후1:20절을 보면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14절에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신다’는 말씀이나 고린도후서 1:20의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된다고 하는 것은 같은 뜻의 말씀으로 우리에게 얼마나 큰 위로인지 모릅니다. 왜 이 말씀이 위로의 말씀이 되는지 알면 이 뜻을 알게 되리라 믿습니다.
12절과 13절에서 바울이 드로아에 갔을 때, 그 드로아에 복음의 문을 열었지만 고린도교회를 향한 안타까움 때문에 정당하고 기쁜 소식이 오기만을 기다리는 마음이 더 급해서 그 전도의 문이 열린 것을 놔두고 돌아왔다고 했습니다. 사실 이 문제는 우리가 좀 생각할 부분입니다. 어떻게 보면 바울이 고린도교회를 향한 사랑과 염려가 지극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의 사역에서 이 사건은 잘못 중의 하나가 아닌가 싶습니다. 고린도교회를 바울이 세우고 양육을 했습니다. 하지만 결과가 좋지 않게 나타난 것입니다. 그런데 드로아에서 복음의 문이 열렸습니다. 이것은 바울이 목적하는 삶이요, 헌신과 희생의 내용입니다. 바울을 생명 구원을 위해 자신을 하나님께 드린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그 복음을 포기하고 돌아온 것입니다. 이 점을 바울 자신도 많이 후회되는 부분이 아닌가 싶습니다.
하나님은 바울의 우유부단함, 혹은 갈팡질팡함에도, 여러 가지 좌절과 절망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것을 통하여 바울을 승리하게 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이 말씀이 우리에게 힘이 됩니다.
우리가 아무리 잘못하고 있다 할지라도, 우리가 어떻게 보면 염려와 두려움에 싸여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나를 포기하지 않으셨다는 것을 반드시 기억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포기하지 않으셨는데 우리가 포기해야 할 무엇인가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된다는 약속을 기억하는 한 우리는 절망할 수 없습니다.
바울도 절망할 수밖에 없고 고린도교회를 세우고 힘을 다 해 양육했는데 그들이 거짓 교사들에게 미혹되어 넘어지고, 바울에 대해 비난도 하고 여러 가지 잘못된 길을 가게 된 것에 안타까움이 커서 많이 마음이 아프고 염려스러운 그런 상황이었고, 그래서 손에 일이 잡히지 않아 드로아에서 복음 전하는 길이 열렸음에도 포기해야 했던 그런 실수가 있었는데도 하나님이 그를 승리케 하시고 그런데도 신자의 삶을 풍성케 한 열매에 대하여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상하게 아무 문제도 없고, 부족함도 없고, 실패도 없을 때는 우리의 속성이 하나님을 찾거나 그분으로 인한 감사나 은혜가 없습니다. ‘아닙니다. 늘 감사합니다.’이렇게 말을 하지만, 그래서 하나님이 주신 열매라고 이야기하지만, 결국은 그 열매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 이 열매가 빼앗릴까바 노심초사하고, 그러다 보니 그 열매를 주신 하나님을 외면하고 그 열매만 자랑하는 모습을 보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미련하고 부족함과 실패를 통해 하나님이 승리케하신 것을 인정하는 것은 결국 우리가 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는 것을 증거로 받은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하나님이 ‘하신 일이다’하는 것은 인정할 수밖에 없고 이 고백을 하나님이 받으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왜 이것이 중요하냐 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내 인생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고 그리스도의 향기가 이웃으로 흘러가는 것은 대단한 축복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주의 마음을 부어주시기를 바라고, 주의 능력을 주시기를 바라고, 주의 지혜를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은 당연한 요구 아니겠습니까? 모세의 온유, 엘리야의 능력, 다니엘의 담대함, 다윗의 겸비한 마음, 사도바울의 인내, 이런 것들이 다 있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래서 그들의 믿음과 훈련되어 짐과 삶을 언제나 교훈과 지혜로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조건들을 다 채워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지 않으신다는데 개인적으로 위로가 됩니다. 우리에게 어떤 능력도 채워주지 않고 혼자 일하게 하셔서 실패케 한 그 상황에서 영광을 받으셔서 우리로 하여금 할 말이 없게 하십니다.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입니다. 이 말씀이 드로아에서의 선교도 실패하고 고린도교회의 목회도 실패해서 우왕좌왕하고 갈팡질팡하고 스스로 비판에 젖어있는 이 상황 속에서 하나님이 도대체 무엇을 이루셨는가, 그리고 무슨 승리를 주셨고,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로 승리케 하셨다고 했는데, 어떻게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로 진동케 하셨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3장에서 6장까지 내용이 됩니다.
7장6절에서 이제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책망하며 보낸 서신을 가지고 갔던 디도가 옵니다. 바울이 책망을 다 받아 회개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는 기쁜 소식을 듣고 실패치 아니하시는 하나님, 결국 승리로 이끄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신자들이 무엇이 참다운 신앙생활인가 하는 신앙의 논쟁에서 어떤 사람들은 기도라고 하고, 어떤 사람들은 전도라고 합니다마는 저는 ‘사는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사는 곳에서 그리스도는 아는 냄새를 흘러보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설교를 할 때 삶에 대해 많이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삶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적용시키고 있습니까? 어려움이 있을 때, ‘주님이 힘주시는 그 약속을 붙들고 오늘도 하루를 버팁니다.’ 는 고백이 삶 속에서 나오고 있습니까? 자녀가 투정을 부리고 불평을 할 때, ‘우리 모두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 볼 때인 것 같다.’이런 말을 하십니까? 아이들이 성적이 떨어지고 공부가 안된다고 투정을 부릴 때, ‘애야,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셔, 하나님이 좋은 길을 여실 거야’하는 따뜻한 말씀으로 이끌고 계십니까? 우리는 삶 속에서 이런 예언의 말씀을 하셔야 합니다. 예언은 말씀으로 인도하고 이끌며 독려하고 위로하는 것입니다. 물론 말씀을 안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말씀이 희귀한 시대라 그럴 수 있습니다마는 그런데도 예언이 삶 속에서 묻어나고, 드러나고, 선포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가정에서부터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가 풍겨 나와야하는 것 이지요.
세속적인 원리와 세상적인 법칙과 질서와 논리로 살아가고 있는 지금, 우리는 삶 속에서, 우리 가정에서 하나님 말씀으로 움직이고 지배받고 있다는 것은 엄청난 축복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듣고 은혜를 구하며 갈 때 우리 가정이 여러 가지로 힘든 일이 있었지만, 하나님이 우리 가정을 사랑하시고 엮어 가셔서 주님 안에서 새길을 여시며 함께하심의 감동과 결국 이기게 하심을 보는 은혜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힘과 재능과 노력으로 안 되고 또한 사람들의 비협조와 배반으로도 흔들 수 없는, 세상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이미지가 비호감으로 인식되고 있다 할지라도 그들의 평가보다 그들의 조롱보다 그들의 비난보다 하나님이 더 크심을 우리는 믿고 나가는 과정 속에 영원한 승리, 영원한 하나님의 은혜가 자기도 모르게 삶 속에서 흘러나오는 일을 볼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전도나 갈 때, 지금처럼 어려운 시기가 없는 그런 상황이지만, 그리고 전도하면 얼마나 비난과 무시와 거부로 인해 속이 상하는지 모릅니다. ‘내가 왜 전도 나와서 이런 대우를 받고 마음 아파하나, 나는 아무리 전도해도 안 돼’이런 마음을 가지며 전도에 실패하고 낙심하고 있는데 이상하게 교회는 부흥된다는 말입니다. 그것으로 인해 정말 하나님이 일하시는 구나 하는 고백을 하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쉽게 쉽게 살아서 몰랐을 것들이 어려움과 염려와 실패와 좌절 속에서 승리는 우리 손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손에 있다는 것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의 손에 있다면 얼마나 삶이 어둡고 희망이 없겠습니까?
고후3:6-9 ‘그가 또한 우리를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하게 하셨으니 율법 조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
이 말씀은 바울이 속이 상했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고생했고, 그렇게 애를 썼는데 이게 뭐냐? 내가 이 꼴 보려고 그 고생을 했나?’이렇게 생각이 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깨닫게 되는 것이지요. 내가 지금 고생하는 것이 정권을 빼앗는 일도 아니고 남의 땅을 빼앗자는 것도 아니고, 남의 돈을 더 많이 갖자는 것도 아니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죽어가는 영혼과 주께서 부르신 한 영혼을 위해 안타까워하는 일인 것인데 그 자체가 얼마나 복이냐는 것입니다.
이 일에서 승리하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맡은 직분 자체의 고귀함이라는 것은 다른 데서 승리한 것과 비교가 되지 않은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안다는 것, 승리와 영광이 되지 못해도 내가 가진 직분은 어느 것과 바꿀 수 없는 고귀한 것임을 아는 것이 복입니다. 오랫동안 부흥이 안 되고 성도들이 성장하는 것 같지도 않고 변함이 없고 순종하는 자세를 찾기 힘들고 이런 시간이 오랫동안 흐르고 있지만, 이 고귀한 직분은 언제나 나에게 축복이었고 감사였고 살아가는 원인이었고 가치였습니다. 세간에 목사에 대한 이미지가 얼마나 안 좋습니까? 창피해서 얼굴을 들지 못하는 사건들이 참 많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일로 인해 더욱더 목사로서의 사명을 비추어보고 내 삶에 말씀이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기회가 되었다는 것은 이 고귀한 직분 때문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 속에서 늘 배우고 있습니다. 우리는 실패와 좌절을 끊임없이 맛보며 때로는 안타까워하기도 합니다. 코로나 정국은 그리 넉넉한 환경이 아닙니다. 많이 피곤하고 많이 힘들고 많이 긴장하며 두려움과 미래에 대한 불투명으로 잠 못 이루는 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김을 주신다는 말씀이 믿어지십니까? 결국에는 하나님이 인도하신 일이었구나, 하는 고백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저는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과정 속에서 하나님이 이김을 주신다는 이 말씀이 지금 이김이 없는데 지금 불안한데, 지금 답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이 말씀이 은혜가 되고 힘이 되시느냐는 말입니다.
이런 과정 속에서 하나님의 계획을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계획을 어떻게 볼 수 있습니까? 지금까지 하나님의 계획을 깨닫지 못했다면 여러분들의 신앙 자세를 바꿔야 합니다. 신앙의 행위조차도 바꾸어야 합니다. 이럴 때일수록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와야 하고 그 말씀이 마음에 새겨져야 하며, 하나님을 구하고 찾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지금 실패하고 있지만, 지금 희망이 없어 보이지만, 하나님이 이김을 주심을 믿는 믿음 안에서 새길을 볼 것이며, 하나님이 하셨구나, 하는 놀라운 신비함을 볼 것이며, 이 말씀이 응함을 분명히 볼 것입니다.
우리 아이들이 예쁠 때가 언제입니까? 책상 앞에서 문제를 푸는데 잘 안 풀려서 책을 집어 던질 때, 부모가 볼 때는 예뻐 보이는 것입니다. 영어를 외우다 외우다 안 외워져서 영어사전을 불에 태워 가루를 마셔도 그것이 예쁘게 보입니다. 본인은 죽겠다고 하는데 부모는 이뻐 보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책상에 앉아서 세 시간이고 네 시간이고 같은 페이지를 펼쳐놓고 계속 거울 보고 머리카락 만지작거리며 화장실만 들락날락하면 아무리 잘 생겨도 밉습니다. 우리가 어쩌면 그러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가 세상 사람들과 자존심 경쟁하다가 속이 상한 것도 아니고, 무슨 돈이나, 명예나 다른 욕심 때문에 싸우는 것도 아니요, 다만 내가 하나님 안에서 거룩해지려고 아우성치고 있는 내 삶은 세상과 바꿀 수 없는 고귀함이며, 감격이며 삶의 가치며 기쁨의 근거입니다.
고후4:16-18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 사람은 낡아 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우리가 잠시 받은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은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은 것은 영원함이라’
자신의 삶을 배우라는 것입니다. 실패했지만 그 속에서 하나님의 깨우침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승리했는데, 왜 나는 안 될까? 이렇게 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어려움도 안 당해보고 구덩이에 안 빠지고 밖에서 이래라 저래라 하는 말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바울은 그 실패 속에서 하나님이 어떻게 이끄셨고 승리케 하셨는지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일차적으로 바울 자신에게 지금 말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고후5:16-17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왜 이런 말을 합니까? ‘왜 사람으로 인해 실망하는가? 왜 사람으로 인해 낙심하는가? 새로운 피조물이 아닌가? 하나님은 그를 위해 죽으셨고 그를 바꾸셨다, 그는 결국 승리하리라 하나님이 맡겨주신 일을 죽기까지 따르리라, 왜 내가 낙심하는고’ 이 부분도 자신을 꾸짖고 있는 내용이라고 봐야 합니다. 바울이 자신을 자꾸 말씀 속에 비추어 보는 것입니다. 왜 내가 사람을 보며 속상해하는가? 하나님이 이기게 하셨는데, 하나님이 함께하시는데, 하나님이 결국 그 계획을 이루실 것인데 왜 내가 낙망하고 있는가? 하는 자기 고백입니다.
이런 갈등을 바울도 했고, 저도 했고, 하고 있고, 여러분들도 하는 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 사실 교회구조가 목사는 교인들의 눈치를 안 보며 목회할 수 없는 구조입니다. 그럴 때마다 마음을 다잡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만져주셔야지 내가 안달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지 않느냐? 하나님이 영명교회를 향한 계획이 있는데 내가 너무 빨리 무엇인가 하려고 하는 것은 아닌가?’ 자신을 자꾸 말씀에 비추어보는 습관이 되어야 합니다.
왜 이런 말씀을 계속 드리느냐 하면 우리에게 이김과 승리를 주셨는데 왜 이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불안해하며 힘들어하는가? 하는 것에 대한 말씀이며, 하나님은 반드시 코로나나, 여러 가지 사건들을 통해 선으로 이끄시며 좋은 길을 여실 것을 믿고 그분을 붙들고 더 긴장하며 주의 뜻을 따라가며 말씀을 사모하며 나 자신을 십자가에 죽이며 가는 그 여정 속에 약속을 이루는 것을 보며, 승리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는 은혜가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힘드시고 어려워도 버티어 보십시오. 버티다가, 버티다가 여기까지 오게 했습니다. 여기서 나오는 은혜야 말로 돈으로 주고 바꿀 수 없는 귀한 것을 깨닫게 되고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새길을 여실 것입니다. 결과가 은혜로울 것입니다. 잊지 마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