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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8.18. 성령강림 후 열셋째주일
예배 시편 / 시편 18편 25-28절
찬송 / 414장 · 주의 사랑 비칠 때에
성서 / 사사기 6장 25-32절, 마태복음 5장 13-16절
말씀 / 너희 빛을 사람에게 비추어서
그래서 그 날 사람들은 기드온을 여룹바알이라고 불렀다. 그가 바알의 제단을 헐었으니, 바알이 직접 그와 싸우게 하라는 말에서 그렇게 부른 것이다. (사사기 6장 32절)
이와 같이, 너희 빛을 사람에게 비추어서,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여라(마태복음 5장 16절)
김윤식 목사
Ⅰ
유대 랍비들의 성서 해설집인 미드라쉬에 아브라함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성경에는 나오지 않는 아브라함의 어린 시절에 대한 이야기이지요. 미드라쉬에 따르면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는 우상을 파는 상인이었는데, 어느 날 집을 나서며 아브라함에게 상점을 맡기곤 길을 나섰답니다. 그때 한 여인이 고운 가루가 가득히 들어있는 그릇을 들고 와선 우상들 앞에 그 가루를 놓아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순순히 가장 크고 위엄있는 우상 앞에 두었습니다. 그러곤 갑자기 한 편에서 막대기를 들고 와선 그 큰 우상을 빼곤 다른 우상을 모두 부숴 버렸답니다. 그다음 그 큰 우상의 손에 그 막대기를 쥐여 주었지요. 아버지 데라가 집으로 돌아 왔을 때, 큰 우상 하나를 빼곤 다 부숴져 있었지요. 아버지는 아들 아브라함에게 어떻게 된 일인지 물었습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떤 여인이 고운 가루를 가지고 와선 우상들 앞에 두었는데, 서로 먼저 먹겠다고 다투자 가장 큰 우상이 다른 우상들을 모두 부숴버렸다”고 말했습니다. 정말로 당돌한 꼬마 아이지요?
옛말에 “우상이 많으면 떡이 많이 생긴다”고 합니다. 물론, 우상이 직접 떡을 먹을 수는 없으니 그 그늘에 있는 사람들의 배가 부르겠지요. 오늘 우리는 우리 사회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우상화 현상들을 보고 있습니다. 주변의 힘 있는 나라들이 우상화되고, 동족을 적대시 하는 생각이 우상화되고, 소수자들을 혐오하는 생각들이 우상화되고, 독재자들이 하나둘 우상화되고 있지요. 물론, 그 우상화를 통해 그 그늘에서 누군가가 이익을 보려는 얄팍한 계획일 겁니다. 그 그늘에 숨어서 자신들의 죄악과 부패를 감춰보려는 몸부림일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이와 반대로, 언제나 우리의 참된 신앙은 헛된 우상을 멀리하고, 우리 주변의 잘못된 우상을 파괴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이 아닌 것이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을 거부하는 것, 바로 그것이 우리의 참된 신앙의 시작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성서는 우상에 대해서 격렬하게 반대합니다. 십계명의 제1계명에서는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말하고, 제2계명에서는 “내 앞에서 다른 것들을 우상으로 두지 말라고”, “내 얼굴 위에 다른 것을 신처럼 두지 말라고”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라고” 말하지요. 다른 신을 섬기는 일뿐 아니라, 하나님을 형상으로 만드는 것 자체가 금지되었습니다. 무엇보다 우상이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멀게 하고, 사람들 스스로를 노예화하기 때문일 겁니다. 그렇지만 놀랍게도 성서가 처음부터 말하길, 하나님께서 당신의 형상으로 만든 것이 있다고 합니다. 무엇이지요? 바로, 사람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졌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이것은 마치 고대사회에서 동상이 왕의 통치영역을 나타내는 것처럼 사람이 있는 곳에서, 그곳에서 하나님의 뜻이 드러나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졌다는 말씀은, 사람을 통해 하나님의 뜻과 사랑이 드러나고 전해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다만 우리가 주님 안에서 잘못된 우상을 멀리하고,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신 하나님의 뜻과 섭리대로 우리가 가는 곳마다 주님의 뜻과 사랑을 드러내며 살아갈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Ⅱ
오늘 우리가 함께 구약 말씀으로 읽은 이야기의 주인공은 기드온입니다. 기드온은 사사기의 중심을 이루는 지도자의 이름이지요. 그런데 기드온은 날 때부터 구분되거나, 걸출한 영웅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단지 두려움에 떨고 있는 우리와 같은 한 사람이었습니다. 사사기에 따르면 그의 시대에 어리석은 백성들이 하나님을 떠난 지 일곱 해나 지났습니다(삿 6:1). 미디안의 괴롭힘은 도무지 끝이 날 줄 몰랐지요. 씨앗을 뿌려 수확할 때가 되면 모조리 가진 걸 빼앗겼고, 괴롭힘을 견디지 못한 사람들은 동굴에 숨어서 살아야 할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수확할 시기가 되었을 때 기드온은 포도주를 짜는 틀 한쪽에 숨어서 혹여라도 미디안 사람들에 눈에 띌까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밀 이삭을 타작하고 있었습니다(삿 6:11).
바로 그때 주님의 천사가 기드온에게 나타나서 말했습니다. “힘센 장사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삿 6:12) 그런데 기드온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 말씀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지요. 그래서 기드온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사기 6장 13절입니다. “감히 여쭙습니다만,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면, 어째서 우리가 모든 어려움을 겪습니까? 우리 조상이 우리에게, 주님께서 놀라운 기적을 일으키시어 우리 백성을 이집트에서 인도해 내셨다고 말하였는데, 그 모든 기적이 다 어디에 있단 말입니까? 지금은 주님께서 우리를 버리기까지 하셔서, 우리가 미디안 사람의 손아귀에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그를 바라보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너에게 있는 그 힘을 가지고 가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하라” 하고 말씀하십니다(사 6:14). 주님께서는 기드온에게 확신의 말씀을 주셨지만, 기드온은 또 물었습니다. 제가 감히 어떻게 이스라엘을 구할 수 있겠냐는 것이었지요. 기드온의 집안은 이스라엘에서 가장 작은 집안이고, 기드온도 아버지의 집에서 가장 나이 어린 사람이라는 답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반드시 너와 함께 있겠다고”고 재차 강조해서 말씀하십니다(삿 6:15). 하지만 기드온은 주님의 이 말씀도 확실하게 믿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음식을 차려 놓은 뒤에 주님께서 함께하시는 증거를 보여 달라고 애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음식을 불사르셔서 기드온에게 하나님께서 함께하신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삿 6:17-24).
그리고 이제 하나님께서는 기드온에서 한 가지 임무를 주십니다. 바로, 우상 파괴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드온에게 말씀하시길, 아버지의 외양간에서 어린 수소와 일곱 해 된 수소를 끌고 오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섬기는 바알 제단을 파괴하고, 아세라 상도 찍어버리라고 하시지요. 그리고 산꼭대기에 올라 찍어 낸 우상을 태워서 그 수소를 제물로 바치라고 하십니다. 다음 날 아침, 기드온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바알의 제단을 파괴하고, 신상을 찍어버렸습니다. 그리곤 산 위에 올라 그 신상 조각으로 불을 내 제물을 바쳤지요. 온 동네에 난리가 났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누가 이런 일을 벌였냐며 물었습니다. 사람들은 기드온의 아버지에게 찾아와 당신의 아들이 죽어 마땅하다고 항의합니다. 그런데 바로 이때, 기드온의 아버지 요아스가 아들을 감쌌습니다. 기드온의 아버지는 사람들을 향해서 바알이 신이라면, 바알이 나의 아들을 벌하지 않겠냐고 물었습니다. 이때부터 기드온은 “바알이 싸우는 사람”이라는 뜻의 ‘여룹바알’이란 별명이 생겼습니다. 이제 기드온 앞에 주어진 과제는 자신들을 괴롭히는 미디안과의 싸움만이 아니라, 그들이 섬기고 믿는 신 바알과의 싸움이 되었습니다.
미디안의 군대가 몰려오기 시작할 때, 주님께서는 당신의 영으로 기드온과 함께해 주셨습니다(삿 6:34). 그는 자기가 속한 므낫세 지파와 주변 지파의 사람들을 나팔을 크게 불어 불러 모았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모였습니다. 그런데도 기드온은 여전히 주님을 확실히 믿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양털 뭉치를 만들어 양털 뭉치에만 이슬이 내리고 주변 땅은 말라 있으면 주님께서 이스라엘을 구하시려는 것으로 알겠다며 주님을 시험했지요. 그러자 정말 다음날 그렇게 되었습니다. 양털 뭉치를 짜보니 양털 뭉치에 이슬이 쏟아져 그릇에 물이 가득 찬 것입니다(삿 6:37-38). 그런데도 기드온은 주님을 아직도 온전히 믿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기드온은 이번에는 반대로 양털은 마르고 사방 땅에 이슬이 내리도록 기도드렸지요. 그날 밤에 하나님은 그대로 해 주셨습니다. 두려움과 의심 가운데 있던 기드온에게 하나님께서는 ‘용사’라고 부르시며, “너에게 있는 그 힘을 가지고 가서 이스라엘을 구하라”고 말씀하시며, 의심하며 두려워하는 기드온을 거듭해서 힘을 주시고, 그의 의심을 믿음으로 끊임없이 바꾸어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기드온의 이야기에는 반전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드온에게 군대의 수가 많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네가 지금의 군대로 승리를 한다면, 네가 힘이 세서 이긴 줄 알고 오만해질까 걱정이 되어서’라고 말씀하십니다(삿 7:1-2).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기드온에게 두려워하고 있는 사람을 모두 돌려보내라고 하시지요. 두려움과 의심 많은 기드온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삼만 이천 명 가운데 이만 이천 명이 돌아가고, 만 명이 남았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것도 많다고 하셨지요. 주님께서는 물가에 이르러 손으로 움켜서 물을 마시는 자들과 엎드려 물을 마시는 사람들을 나누라고 하셨지요. 손으로 움켜서 마시는 사람은 단 300명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기드온에게 많은 무리가 아니라 300명과 함께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을 돌려보낼 때 기드온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하지만, 기드온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과 믿지 않는 선택만이 남아 있었습니다. 다만 기드온은 하나님을 믿고, 순종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가 아는 것처럼 기드온은 믿음으로 순종할 때 대적과의 싸움에서, 또한 바알과의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이 동화 같은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기드온의 무기는 항아리에 감춘 횃불과 나팔과 함성이었습니다. 기드온은 칠흑같이 어두운 밤, 무수히 셀 수 없는 군대 앞에서, 비교할 수도 없는 그 군대 앞에서 항아리에 감춘 횃불을 들고 나갔습니다. 그리고 항아리를 깨뜨리며 하나님의 이름을 소리 질렀습니다. 함성과 갑자기 빛나는 횃불들을 바라보면서 적군들은 놀라 부르짖으며 도망하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두려움과 의심에 떨고 있는 단 한 사람 기드온을 부르셔서 우상을 파괴하도록 그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셨고, 그가 믿음으로 다시 일어나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할 때, 이스라엘을 다시 일으켜 주셨습니다.
그런데 승리한 기드온에게 마지막 시험이 찾아 왔습니다. “장군께서 우리를 다스리시고, 대를 이어 아들과 손자가 우리를 다스리게 하여 주십시오.”라는 간청입니다. 백성을 다스리는 왕이 되어달라는 요청이었습니다. 우상을 파괴하는 것을 시작으로 마침내 싸움에서 승리한 지도자에게 민족의 ‘우상’이 되어 달라고 요구한 것이지요. 그러나 기드온은 그들에게 단호하게 거절하며 말했습니다. 사사기 8장 22절입니다. “나는 여러분을 다스리지 않을 것입니다. 나의 아들도 여러분을 다스리지 않을 것입니다. 오직 주께서 여러분을 다스리실 것입니다.” 바로 이 고백은 모든 우상 숭배를 무너뜨리는 믿음의 기초가 이자, 잘못된 길로 가는 역사를 돌이키는 믿음의 기준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이 무수히 반복하는 역사의 악순환이 반복될 때마다 다시 돌아가야 하는 기초이자, 옳은 길과 잘못된 길을 구분하도록 해주는 기준과도 같은 고백이 된 것입니다.
이제 기드온의 이야기를 통해 나를, 그리고 우리를 돌아보면 어떨까요? 우리도 때로 기드온처럼 두려운 마음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우리의 수가 적은 것이 아닌지, 나의 가정이, 우리의 교회가, 우리 민족이 적은 것이 아닌지 기드온처럼 두려워하기도 합니다. 게다가 세상엔 우리가 따르고 의지할만한 것처럼 보이는 ‘우상의 유혹’으로 가득하지요. 그러나 주님께서는 하나님께 묻고 또 묻는 기드온에게 때에 따라 응답하여 주시고, 그에게 때에 따라 믿음과 용기를 더해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도 기드온을 통해 우리의 믿음이 어떠해야하는지 알려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기드온에게 무엇보다 두려움과 불안에 사로잡혀 살도록 하는 우상들을 먼저 파괴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곤 적은 수로 불안해하는 기드온에게 오히려 그것이 많다고 하셨지요. 그러자 기드온은 순종하는 마음으로 두려워하는 이들을 돌려보내고는, 항아리를 깨뜨리며 어둠을 밝히는 빛과 주님을 외치는 함성을 무기로 삼았습니다. 기드온은 주님께서 함께하심으로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기드온은 승리 후에도 다만 “하나님께서 다스려주시기”를 바랐습니다. 하나님의 다스림! 오직 그것이 기드온이 바라는 소원이고, 전부였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기드온의 이야기는 우상을 파괴하는 지혜와 용기가, 다시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기초가 오직 하나님께서 다스려주시기를 바라는 믿음의 고백에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기드온의 진정한 용기와 믿음이 우리에게도 가득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Ⅲ
오늘 우리는 복음서의 말씀으로 마태복음에서 예수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소금이라고, 세상의 빛이라고 부르신 말씀을 함께 읽었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과도 같고, 빛과 같다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향해 “너희는 세상이 소금이라고, 세상의 빛이라고” 부르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소금이 중요한 것은 그 짠맛 때문이라고 말씀하셨지요. 빛이 소중한 것도 어둠을 밝혀주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너무도 당연한 말씀이지요. 그런데 이 말씀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마땅히 녹아져서 짠맛을 내고, 밝은 빛을 비추어야 하는 곳을 우리의 가정이나 교회가 아니라 바로 ‘세상’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적은 수라고 할지라도 우리가 세상을 살맛 나는 곳으로 느끼게 할 수 있고, 세상의 어둠을 밝힐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어서 예수께서는 이 말씀을 설명하시면서 너희가 세상에 빛을 비추어서, 바로 착한 행실을 하여서 ‘그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하십니다. 우리의 착한 행실 때문에, 세상이 하나님을 알도록 하라는 말씀이지요. 적은 양의 소금이 음식 전체를 맛깔나게 하는 것처럼, 산 위의 작은 마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빛이 자연스레 세상에 드러나는 것처럼 너희가 착한 행실을 하면, 너희가 그렇게 너희의 역할을 잘 감당하면 너희의 맛과 빛이 세상에 자연스럽게 드러날 것이라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당신의 형상’으로 지으셨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이란 하나님의 다스림을 나타내는 형상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사랑을 드러내는 살아있는 형상이지요.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지어진대로 우상을 따르는 노예가 아니라, 우상을 타파하고 하나님의 다스림을 드러내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당당하게 살아가기를 바라십니다. 또한 예수께서는 우리를 세상에 녹아져서 살아가는 맛을 내는 ‘세상의 소금’으로 부르셨습니다. 또한 우리를 어두운 세상 속에서 한 줄기 빛을 내는 산 위의 마을처럼 우리의 가정과 교회가 그렇게 빛나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너희의 착한 행실 때문에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언제나 어디서나 하나님을 드러내며,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서의 사명을 믿음 안에서 감당하며 살아갈 때, 참된 빛이시며 생명이신 주님의 은총이 우리를 비추어 주시고, 우리를 언제나 생명과 평화의 길로 인도하여 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