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유경집(이명: 류초시)(출생미상) 선생은 뛰어난 의술을 펼친 조선인 한의사이고 구한말 러시아와 폴란드에서 성공한 사업가이다.
안중근 의거를 도운 숨겨진 조력자인 독립운동가 유동하 선생의 아버지.
안중근 의거를 도운 독립운동가 김성백의 사돈. 이 모든 사람은 동일인물이다.
일제강점기 러시아에서 능숙한 사업수완을 발휘한 유경집은 한의사가 되었고, 러시아에서 자신의 능력을 발휘해 한방 병원을 설립하여 부호가 되었다.
그는 평소 약재를 하얼빈에서 자주 가져왔고, 러시아에 거주하는 한인(고려인)들과 돈독한 관계를 맺어왔다.
워낙 사람을 좋아하고, 사업수완이 좋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1900 초반, 유경집은 러시아 장교들과 돈독한 인맥을 형성했고 특히 블라디보스토크(연해주) 지역의 고려인 부호들과도 가까웠다.
이 중 특히 독립운동가 최재형(최 페치카)와 가까웠는데, 최재형이 신문사 대동공보사, 의병조직 동의회를 조직할 때 비밀리에 힘을 보탠 것으로 보인다.
최재형은 안중근을 동의회 조직에 가입시킨 뒤 함께 의병 활동 및 이등박문(이토히로부미) 암살의거를 지원한 연해주지역 독립운동의 대부라 불리는 인물이다.
사료는 이렇게 전한다. 어느날 갑자기 안중근이 유경집을 찾아와 이등박문 암살의거에 대해 논의하고, 도움을 요청했다.
그리고 심문조서에서는 평소 가까운 유경집을 찾아갔다고 나온다.
상식적으로, 이토록 큰 거사를 보통 사이가 아니고서야 발설한다는 것은 불가한 일이다.
따라서, 상당히 오랜 시간 전부터 흡사 의형제와 같은 동지로서의 정을 나눈 인물이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이토 히로부미가 암살된 후 유경집 집안은 피난길에 올랐다. 계속해서 이사를 다니며 도망 다녀야 했다.
그리고 얼마 안 되어, 러시아에서 레닌에 의해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났다.
유경집의 인생은 다시 한번 뒤바뀐다.
한의학 병원을 개업하여 부를 축적했던 그는 ‘부르주아‘, 즉 인민의 적이라는 무서운 딱지가 붙어 프롤레타리아(노동자)에게 잡히면 죽임을 당하는 상황이 되어 버린 것이다.
당시 폴란드계 러시아인 아내를 데리고 유경집은 폴란드 국경을 건넌다.
자신이 일궈놓은 모든 부와 건물, 부동산을 러시아에 다 버려두고 폴란드로 떠난 것이다.
그리고 이곳에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 유경집은 다시 한번 사업수완을 발휘해 큰 저택을 짓고 폴란드에서 가장 이름이 알려진 한방병원을 이룩해 다시금 부호가 되었다.
이때 그는 이름을 여러 가지로 바꿔가며, 전혀 새로운 인물로 살았고, 당시 폴란드, 독일 등 극소수의 한인유학생에게 정착금, 장학금, 생활비 등을 지급하며 그들이 공부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가 국위 선양 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이것이 잊혀진 한 애국자의, 서로 다른 이름을 가진 애국자의 퍼즐을 맞춰서 연결한 내용이다.
어딘가에는 사업가로만, 어딘가에는 한의사로만, 어딘가에는 민족운동가의 조각으로 나와 있던 한 인물. 서로 다른 직업에서 다 다른 이름을 사용했던 한 인물.
안중근 의거와 관련된 민족운동 행적.
안중근이 거사를 모의하고 이동하는 과정 중 기차철도환승시간에 역 가까이에서 한약방을 하고 있던 ‘원래부터 잘 알던 유경집’ 집에 들러 그의 장남(유동하)을 통역으로 부탁했다는 것이 안중근과 유동하의 일관된 진술이다.
이 시기 유경집은 아들 유동하를 하얼빈에 보내 약재를 구하도록 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유동하와 안중근 등이 김성백의 집에 3일간 머물렀다는 것, 안중근이 쓴 러시아어 편지를 유동하가 써주었다는 것 역시 공통된 진술이다.
이 사건으로 안중근은 사형, 유동하는 1년 6개월간 뤼순 감옥에 수감되었다.
안중근의사 심문기록에 나온 내용과 유동하 열사의 심문기록에 나온 내용 일치하다.
1911년 7월에 씌여진 유경집으로부터의 편지 4개가 있다.
대체로 안중근의 식솔(안중근 동생 ‘정근네 댁’)을 이강에게 안전하게 보냈고 그들이 잘 정착했다는 것, 그리고 인용문과 같이 자신의 아들 동하가 뤼순 감옥에서 1911년 8월 6일 출옥한다는 것을 안창호에게 전하고, 안창호가 미국에 가거든 정형(정재관)을 통해 회신해달라는 내용이다.
하얼빈한인사회는 1911년 8월 22일 안중근 의거로 수감되었던 조도선과 유동하의 석방을 축하하는 환영회를 열었고, 8월 29일에는 강제병합일 망국 1주년 기념식을 개최 한인의 애국의식을 고취했다.
한의사 유경집이 독립운동가와 긴밀한 관계를 갖고 후방에서 지원하고 협력하는 관계였음을 보여주는 내용이다.
1911년 9월 7일 미주국민회의 자료집 18권 508쪽에서 발견 - 하얼빈 지방총회 보고, 제21호이다.
유경집의 첫째 딸(장녀)를 시집보낸 사돈이 독립운동가 김성백이었다.
김성백은 안중근 사건 발생지 하얼빈에서 추방당해 이르쿠츠크로 갔기 때문에, 유경집은 사돈과 함께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김성백은 안중근이 거사를 모의하는 과정 중, 안중근에게 3일간 자신의 집을 제공해줬고, 당시 일본과의 외교 문제에서 벗어나 있지 않았던 러시아 제국에 의해 동항 철도에서 맡고 있던 지위, 돈, 명예, 재러 한인 원호로서 누린 여러 가지 혜택을 모두 빼앗기고, 하얼빈에서 추방되었다.
1909년~1910년대 전반기 유경집과 아들 유동하, 사돈 김성백은 안중근 의거를 돕거나 막후에 있었다는 이유로, 아들(유동하)은 감옥에 가고, 본인(유경집)은 도망가고, 사돈(김성백/맏딸 부부)은 추방당했고, 다른 가족도 뿔뿔이 흩어졌다고 할 수 있다.
상식적으로 당시 18세의 유동하의 안중근 의거 참가는 기실, 유동하의 결정 이전에 유경집의 결정이었다고 보아야 한다.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 암살을 계획하고 이동 중에 포그라니치나야에 내린 것도, 역 근방에서 가까운 유경집의 집을 찾은 것도, 의거 전 2∼3일을 김성백의 집에서 유숙하며 의거 준비를 한 것도, 그 김성백의 집으로 안내한 유동하와 유경집의 사돈(사위 집안)인 김성백의 집인 때문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 모든 결정을 18세의 어린 유동하 단독으로 했다거나, 혹은 러시아 동아시아지역에 금방 도착해서 길 안내와 통역을 부탁해야 했던 안중근 단독으로 수행했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이것은 국민회의 원동위원부의 독립운동 네트워크의 협력으로 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러시아 지역 해외 독립운동 네트워크 속에서 유경집이 존재했다는 것도 충분히 추론 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최소한 18세의 어린 유동하보다 아버지 유경집의 인맥, 허락 또는 지시가 더 우선적이고 결정적이었다고 보는 것이 상식적이다.
1911년 이강, 안창호와의 편지 교환 맥락을 통해, 사형당한 안중근의 가족들의 사후 지원에 유경집이 개입 관여되어 있다는 사실도 추론할 수 있다.
유경집 본인과 가족이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암살로 대표된 민족운동에 관여했고, 안중근 가족을 보살폈으며, 그로 인해 핍박과 이산을 거듭했다.
모험과 성공 이야기 이면에는 민족주의적 저항과 수난의 서사가 가로 놓여 있다고 할 수 있다
1920년대 유럽 유학생 및 해외 조선인 네트워크 속에서 식민지 조선과 관계이다.
유럽을 여행한 조선인 지식인 유학생이 타국에서 부자로 성공한 재류동포의 초청을 받아 잘 대접 받았다는 이야기이다.
사진은 오른쪽부터 유경집, 김준연, 유경집 부인, 미상이며 허헌, 박승철, 김준연, 장덕수, 이관용 등이다.
근현대사에 매우 영향을 미친 인물, 이들을 보살피거나 지원하거나 챙기는 일을 했다.
바르샤바(와로솨와)정거장에 마중 나와 자기 집으로 데려가 극진히 대접한 이 ‘재류동포폴란드 의사 모씨’, 이름도 성도 없는 그는 누구일까? 바로 유경집 한의사였다.
아내를 데리고 유경집은 폴란드 국경을 건넌다.
자신이 일궈놓은 모든 부와 건물, 부동산을 러시아에 다 버려두고 폴란드로 떠난 것이다.
그리고 이곳에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 유경집은 다시 한번 사업수완을 발휘해
큰 저택을 짓고 폴란드에서 가장 이름이 알려진 한방병원을 이룩해 다시금 부호가 되었다.
이때 그는 이름을 여러 가지로 바꿔가며, 전혀 새로운 인물로 살았고, 당시 폴란드, 독일 등 극소수의 한인 유학생들에게 정착금, 장학금, 생활비 등을 지급하며 그들이 공부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가 국위 선양 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이것이 잊혀진 한 애국자의, 서로 다른 이름을 가진 애국자의 퍼즐을 맞춰서 연결한 내용이다.
다음은 안중근 의거와 관련된 민족운동 행적이다.
안중근이 거사를 모의하고 이동하는 과정 중 기차 철도환승시간에 역 가까이에서 한약방을 하고 있던 ‘원래부터 잘 알던 유경집’의 집에 들러 그의 장남(유동하)을 통역으로 부탁했다는 것이 안중근과 유동하의 일관된 진술이다.
이 시기 유경집은 아들 유동하를 하얼빈에 보내
약재를 구하도록 했음도 확인할 수 있다.
유동하와 안중근 등이 김성백의 집에 3일간 머물렀다는 것, 안중근이 쓴 러시아어 편지를 유동하가 써주었다는 것 역시 공통된 진술이다.
알려져 있다시피 이 사건으로 안중근은 사형, 유동하는 1년 6개월간 뤼순 감옥에 수감되었다.
안중근의사 심문기록에 나온 내용과 유동하 열사의 심문기록에 나온 내용 일치하는 1911년 7월에 씌여진 유경집으로부터의 편지 4개가 있다.
대체로 안중근의 식솔(안중근 동생 ‘정근네 댁’)들을 이강에게 안전하게 보냈고 그들이 잘 정착했다는 것, 그리고 인용문과 같이 자신의 아들 동하가 뤼순 감옥에서 1911년 8월 6일 출옥한다는 것을 안창호에게 전하고, 안창호가 미국에 가거든 정형(정재관)을 통해 회신해달라는 내용이다.
하얼빈 한인 사회는 1911년 8월 22일 안중근 의거로 수감되었던 90조도선과 유동하의 석방을 축하하는 환영회를 열었고, 8월 29일에는 강제병합일 망국1주년 기념식을 개최 한인의 애국의식을 고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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