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일보 > 문화 > ART(공연·전시) / 편집 2013-07-31 21:43:40 / 2013-08-01 13면 기사
♛큐레이터가 들려주는 미국 대표작가 이야기♛
◀ 강유진 대전시립미술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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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에 가려진 추상주의 작가
⑤ 리 크래스너(1908-1984)
미국 2세대 추상표현주의 화가. 잭슨 폴록의 아내. 한스 호프만에게서 그림을 배웠던 제자. 뉴욕 화파의 몇 안 되는 여성 멤버 중 한 사람. 이 수식어들의 주인공인 리 크래스너는 1908년 미국 뉴욕의 브루클린에서 러시아 유태인 부모에게서 태어났다. 일찍이 화가의 꿈을 키웠던 그는 1926년 뉴욕 쿠퍼유니온 여자미술대학에 입학해 미술 공부를 시작했으며, 1929년 뉴욕 내셔널 디자인 아카데미에서 학업을 이어 나갔다. 그는 기존의 정형화된 그림에서 탈피하기 위해 호프만에게서 그림을 배웠고 추상표현주의 그룹 형성에도 가담하였으며 이들과 활발히 작품 활동을 했다.
1941년 파카소, 브라크, 마티스 등과 '프랑스·미국 회화'展에 참여하게 된 그는 이 전시회의 팸플릿에서 잭슨 폴록이라는 낯선 이름을 발견하게 된다. 그에 대한 궁금증으로 크래스너는 폴록의 작업실을 방문했고, 그곳에서 폴록의 재능을 알아보았다. 그는 폴록이 미술계를 뒤흔들 엄청난 천재성을 갖고 있음을 확신했다. 두 사람은 사랑에 빠졌으며 크래스너는 1945년, 폴록과 결혼했다. 롱아일랜드의 이스트햄튼 근처에 위치한 스프링스로 이주하기로 한 그들의 결심(사실 폴록의 지독한 술버릇에서 기인한 결심)은 그 둘에게 양식적 실험을 할 수 있는 이상적인 장소를 제공해주었다.
그곳에서 폴록은 그의 유명한 전면구성, all - over 기법을 개발했으며, 크래스너는 '작은 이미지들(1946-1949)' 연작에 열중하느라 바빴다. 이 연작은 불연속적인 부정의 제스처들이 하나의 단일한 면 또는 실체로서, 화면 위에서 응집되는 이미지를 보여준다. 크래스너는 이 당시 자신의 재능을 폴록에게 내주고 후원했다. 당차고 야심찬 화가였던 크래스너는 결혼 후 점점 폴록의 그늘에 가려지게 되었다. 알프레드 스티글리츠와 조지아 오키프, 로댕과 카미유 클로델, 디에고 리베라와 프리다 칼로 등 미술사에 등장하는 작가들과 같이 결혼 생활은 그렇게까지 행복하지 않았다. 남편 쪽이 거장일수록 여성 작가들이 치러야 할 대가는 혹독했고, 누구누구의 아내 혹은 연인이 아니라 작가로서 인정받기 위해 여성작가들은 몇 배의 노력을 해야 했다. 크래스너 역시 남편을 뒷바라지 하면서도 꾸준히 자신의 작업을 지속했다.
크래스너는 옛 작품을 찢어 새 캔버스 위에 구성하는 콜라주 작업을 해나갔다. 종종 폴록의 오래된 캔버스에서 떼어낸 부분을 자신의 그림 속에 결합시키기도 하였다. 1956년 폴록이 자동차 사고로 사망한 후 그는 그림에 전념했다. 폴록의 뛰어난 재능을 인정해 영향을 받기도 했고, 정교하면서도 분석적인 자신의 특성을 살리고 마티스의 강렬함과 몬드리안의 간결함을 담은 독특한 화법으로 자신만의 작품세계를 구축했지만, 생애의 마지막 순간까지 폴록의 아내라는 멍에를 벗어버리지 못했다. 리 크래스너의 작품은 항상 그녀의 남편인 잭슨 폴록과 연관되어 조명되었다. 그의 작품에 대하여 논할 수 있게 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요구되었으며, 사망 1년 전인 1983년에 이르러서야 대규모의 회고전을 가질 수 있었다. 크래스너는 폴록의 아내이자 추상표현주의를 함께 이끈 동료로, 그 자신이 미술가로서의 정체성을 끊임없이 자문하며 끝까지 붓을 놓지 않았다. 크래스너는 자신의 그림은 자서전적이어서 누구나 마음만 먹는다면 그 뜻을 읽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는 말을 두고 1984년 뉴욕에서 생을 마감했다. <강유진 대전시립미술관 학예연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