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심으로 산다.’고 했던가. 불고기, 생선회를 실컷 먹고도 밥을 추가하는 한국인을 보고 외국 사람들은 신기해한다. 우리
는 술 배, 밥 배가 따로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아무리 좋은 음식을 내 놓아도 홍어가 없으면 제대로 대접 했다는 얘기를
못 듣는 게 남도 문화이고 제사상에 문어가 없다면 무심한 후손이라는 안동 지방의 제사 문화를 떠올리면 이해가 되려
나.
상주가 일등으로 생산하는 농산물은 여러 가지다. 곶감, 포도, 육계, 오이, 한우 사육 두수 (경주에 이어 2위다) 등이고 덧
붙여 미질 좋은 쌀도 추가할 수 있다. 인구 1백 5십만의 강원도가 생산하는 쌀이 1십6만3천여 톤인데 비해 인구 십여만
의 상주가 생산하는 쌀은 7만여 톤이다. 상주 인구 1인당 쌀 생산량이 강원도 인구의 무려 6배나 된다. 놀랍지 아니한가?
쌀 생산량도 놀랍지만 미질 또한 감탄할 지경이다. 먹어 본 사람들은 무조건 ‘맛있다.’고 한다. 다른 쌀은 모르겠고 적어도
상주 사벌에서 생산되는 쌀에 한해서는 틀림없다. 사벌에서 생산되는 쌀로 도정하는 것은 백재정미소의 ‘상주 이밥’, ‘삼
백’쌀이 있고 아자개 영농조합법인의 ‘아자개 쌀’이 있다.
백재정미소의 김정원 사장이 정미소를 운영한 지는 어언 45년이 된다. 부지런하셨던 선친 김태연께서 교편을 잡는 한편
일꾼을 데리고 만평 논에 농사를 지으면서 쌀을 찧기 위해 정미소를 세웠다. 상주 예비 재벌의 꿈을 꾸던 선친이 2년
조금 넘게 정미소를 운영하다 심장마비로 유명을 달리하였다. 김정원 사장이 고3 졸업을 몇 달 앞두고 있을 때인 1970년
이었다. 8남매 중 장남이었던 김 사장의 막내 동생이 두 살 때였으니 온 가족의 운명이 풍전등화였다.
당시 사벌 논의 화폐가치는 높아 논과 정미소를 팔면 상주 시내에 집을 사고도 엄청난 돈이 남았지만 장남 김정원 사장은
가족회의를 거쳐 선친의 가업을 잇기로 했다. 지금은 때로 후회도 하지만 어쩌랴 옛날 논밭을 현금으로 바꾼 사람들 중
알거지가 된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닌 것을 알고는 다행으로도 생각한다.
선친이 남겨 놓은 것은 30평 규모의 정미소 건물과 피댓줄로 동력을 전달하는 발동기 1대, 정미기 4대와 쌀을 올리는 목
제 승강기였다. 젊어 패기가 넘쳤지만 경험 적은 청년 가장의 어깨에 가족들의 생계가 달려 있어 김 사장은 죽을 동 살 동
일에 매달렸다.
세상일에 만만한 것이 있던가? 선친이 정미소 일을 할 때는 모든 것이 쉽게 돌아가는 듯이 보였는데 김정원 사장이 정미
소 일을 하니 모든 일이 어려웠다. 발동기가 탈이 나면 일꾼들이 고쳤지만 사장이 일을 모르면 일꾼들이 우습게 여기기
때문에 수리법을 열심히 배웠다. 배우고 또 배우고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일을 배웠다. 농부들에게 농사일을 배우고 일
꾼들에게 공장일도 배우고 어머니로부터는 사람 대하는 법을 배웠다. 배움의 연속이었다.
사벌 농민들은 사벌 토양에 대한 믿음이 종교심에 가까워 사벌 논의 벼가 대한민국에서 가장 맛있다고 할 정도다. 김 사
장 역시 사벌 논에서 난 벼가 세상에서 최고로 좋다고 자랑한다. 다른 지역에서 나는 쌀은 뽀얗게 보기는 좋지만 퍼석한
맛이 있는 반면 사벌의 사질 토양에서 자라는 쌀은 약간 누렇지만 씹는 맛이랄까 식감이 뛰어나고 고소한 맛이 난다고
한다.
김 사장은 한때 돈 욕심에 전국의 쌀을 취급했는데 상주 사벌 쌀 맛이 최고인 것을 알고부터는 재물 욕심을 버리고 고객
에게 상주 사벌 쌀만을 팔았다. 그 결과 고객 불만은 잦아들고 처음 직거래를 시작한 고객 몇 사람의 입소문이 이제는 전
국에 4천 여 가구의 직거래 고객을 만들었다. 한번 맛보면 단골이 되는 비결은 뛰어난 맛에 있지 않겠는가.
도정은 고르는 것이 일이다. 돌을 고르고 이물질을 거르고 불완전한 형상의 쌀을 가려내고 이상한 색깔의 쌀을 선별하고
먼지를 골라 날리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다. 여기에 필요한 장비 가격이 수 억원이다. 납기 엄수와 미질 확보를 위해
돈이 모이는 족족 시설과 장비에 투자하였는데 작년 한 해만 해도 1억 5천 만원을 들여 좋은 장비를 구입했다. 지금의 도
정시설을 지으려면 약 10억 원이 넘게 든다고 하니 개인으로서는 상당한 투자 금액이다.
시설이 좋아야 싸라기가 없는 쌀이 생산되고 완벽한 쌀 형상을 갖춘 쌀이라야 맛이 좋기 때문에 끊임없이 투자를 해야 한
다. 오감을 동원한 몸의 생산 능력은 가외로 치고.
김 사장은 끊임없이 연구하는 경영자여서 1986~7년 경 상주에서 맨 처음으로 마대 포장을 20킬로그램 소포장으로 바꿨
다. 품질에 대한 집념, 잠시도 쉬지 않는 부지런함과 과감한 투자 그리고 새것을 도입하는 경영마인드로 지금껏 백재정미
소의 명성을 날리며 살아남았다. 옛날에는 마을마다 정미소가 하나씩 있었는데 지금은 단위 농협에서 운영하는 것을 제
하면 상주 전체를 따져도 정미소 숫자는 손에 꼽을 정도다. 정미 생산 능력이 늘어나고 운송 수단이 발달해서였다.
쌀은 이문은 적지만 거래 단위가 커 20kg 짜리 800개를 한 차에 실으면 4천만 원이다. 예로부터 미곡상들은 신용으로 거
래했다. 온라인 거래가 없던 옛날에는 낯선 이라도 아무개의 소개라는 전화 한 통화에 한 트럭을 실어 보내다가 대금 결
제가 몇 번 밀리고 부도나면 수 억원이 날아가는 것은 예사였다. 아마 옛 대상들은 사람을 알아보는 지인지감 능력이 탁
월했던가 보다. 아니면 한순간에 정미소가 날아간다. 사실 김 사장도 이런 아픔을 몇 번 겪었는데 이제는 세월이 달라져
그런 일이 없다며 쓰라린 상처를 달랜다.
요즘 정미소는 이문도 박한데다 투자비용이 많이 들어 이중고를 겪고 있다. 옛날에는 삯방아로 쌀을 찧어주고 수수료를
받았지만 개인정미기가 나오고 부터는 삯방아 찧는 시절은 가고 나락을 구입해 판매하는 게 상관습이 됐다. 물론 삯방아
수수료 받는 것 보다야 이문이 낫겠지만 은행 이자와 쌀 보관비용을 따지면 그게 그것이란다. 쌀 구매 관행 도입 이전에
는 정미소가 마을 은행이었는데 사연인즉 돈이 필요한 사람들은 나락과 바꿔가거나 돈을 빌렸다 가을 수확 철에 나락으
로 갚아서였다.
1977년에 시집 온 아내 김숙희에게 부잣집으로 시집와 부러움을 많이 받았겠다고 하니 그이 역시 세천의 양조장 집 딸로
자라면서 보리밥 한 번 안 먹었다니 당시 재력가인 정미소와 양조장 자녀들의 혼사는 입방아에 올랐을 법 하다. 곡식과
관련된 방아 타령이 여기서도 나오니 김 사장은 천생 나락과 떨어질 수 없는 사인가 보다.
백재정미소에서 생산하는 품목은 쌀, 찹쌀, 현미, 현미찹쌀, 7분도 등인데 매일 100가마 년간 3만 가마 정도를 취급한다.
한때 전성기에 비하면 삼분지 일의 수준이지만 백재정미소에서 생산되는 쌀에 대한 고객충성도는 아주 높다. 한 번 맛보
면 잊을 수 없다고 해야 하나?
아들 김승민은 멀쩡히 다니던 직장에서 불려와 아버지의 당부대로 정미소 일을 한다. 몸이 재빠르고 성실해 정미소 일꾼
으로 제격이다. 아마 그도 세월이 지나면 상일꾼이 되고 경영자가 될 것이다. 정미소 일을 하는 아들을 보는 아버지의 눈
길이 날카로워졌다가 부드러워지기도 하고 신뢰의 눈빛으로 바뀌기도 한다.
아들은 기계 소리만 듣고도 상태를 판단하는 부친의 능력을 아무리 열심히 해도 따라갈 수 없다고 하지만 부친은 47년
동안 정미소 일을 본 장인임을 감안해야 한다. 새싹이 하루 아침에 거목이 될 수 없는 법. 그도 언젠가는 그의 아들로부터
찬탄을 받는 아버지가 될 것이다. 물론 백재정미소 경영인으로서 많이 배워야 하겠지만 말이다.
백재정미소
상주시 사벌면 엄암1길 14
전화 : 054-532-8177, 011-550-7733
백미 20킬로그램 50,000원 (택배비 포함)
첫댓글 쌀을 살때가 되어서 오늘 주문 넣었습니다. ㅎㅎ
밥맛이 무척 기대됩니다. ^^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맛짱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