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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종>의 <경종(장희빈 아들 / 숙종의 아들)> 독살설에 대해서 *
최근 수정 시각: 2025-09-24 19:17:34
출처 : https://namu.wiki/w/%EA%B2%BD%EC%A2%85(%EC%A1%B0%EC%84%A0)/%EB%8F%85%EC%82%B4%EC%84%A4
경종(조선)/독살설
조선 의 20대 왕 경종 이 1724년 이복동생이자 당시 세제 신분이었던 연잉군( 영조 )에게 독살당했다는 설.
namu.wiki
1. 개요
조선의 20대 왕 경종이 1724년 이복동생이자 당시 세제 신분이었던 연잉군(영조)에게 독살당했다는 설. 이 사안은 진위 여부와는 별개로 영조 치세 내내 그를 괴롭혔던 아킬레스 건으로 작용했다.[1] 효종에게 민회빈 강씨 문제가 있었다면 영조에게는 이 경종 독살설이 있었다.
당시 경종은 몸이 매우 안 좋았고 비만과 섭식장애를 달고 산 환자였다. 그러므로 엄밀히 따지면 멀쩡한 사람을 독살시킨 것은 아니고, 환자에게 고의로 의료사고를 일으켰다 혹은 그러려고 시도했다는 음모론이다. 학계에서는 영조가 개입을 했든 안 했든 경종이 오래 살지는 못했으리라 추측한다.
아예 외국에 의해 식민지화된 이후 벌어져 민족적 감정에서든, 전통적인 왕조 국가의 기록 체계를 포함한 체제 붕괴에서든 정황 증거를 얻는 고종 독살설을 제외하면 거의 유일하게 진지하게 당대부터 정국을 뒤흔드는 화두가 된 조선왕 독살설이기도 하다.
2. 배경
경종 독살설이 등장한 배경은 경종이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은 데에서 비롯된다. 원래 몸이 허약하던 경종은 재위 4년(1724) 8월 2일부터 건강이 급격히 위독해지기 시작했다.
경종이라고 하면 마르고 병든 이미지가 있지만, 경종 문서에서 볼 수 있듯이 실제로는 비만한 몸이었다. 실록에도 경종은 살이 쪘고 소화기관이 좋지 못했다고 하며, 때문에 병환에 시달리던 당시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했고 열병에 시달렸으며 혼수 증세도 간간히 보인데다 아픈 당일에는 오한까지 찾아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경종은 서서히 앓다 8월 2일 즈음 소화 불량이 들었고 결국 병석에 누웠다. 양상으로 추정하건대 간경변에 신부전, 전신 부종과 간성 뇌증에 혼수 증상도 겹쳤을 것이다.
병상에 누운 경종은 이튿날 3일에도 오한 증세를 보였고 설사까지 겪었다. 정확한 병명은 불명이나 오한과 설사가 반복되는 것은 식중독 이나 장염 증상인데, 임금인 만큼 식중독일 확률은 낮으며[2], 바이러스성 장염으로 추측된다.
확실한 것은 간단한 병세가 아니었으며 이후 경종의 증세는 악화되었다.
2주 정도 지난 8월 20일, 경종은 게장과 생감을 저녁으로 먹었는데, 이 게장과 생감은 전통적으로 한의학에서 매우 나쁘게 보는 음식 조합이다.[3] 결국 식사 직후 복통과 설사가 악화되자 의관들은 경종이 한의학적으로 꺼리는 게장과 감을 먹은 사실을 알고 경악하여 즉시 곽향정기산과 두시탕, 인삼차를 지속적으로 처방했으나 효과가 없었고, 24일 오전 경종은 의식불명 상태가 되었다.
24일 의관 이공윤은 "삼다(蔘茶: 인삼차)를 쓰면 안 된다. 계지마황탕(桂枝麻黃湯) 2첩만 진어할 것 같으면 설사는 금방 멎게 할 수 있다."며 경종에게 계지마황탕을 처방했지만 저녁에 상태가 더 심각해지고 말았다. 이에 당시 세제(世弟)였던 연잉군(영조)과 도제조 우의정 이광좌를 비롯한 신하들이 급히 경종을 찾아갔는데 연잉군은 "인삼(人蔘)과 부자(附子)를 급히 쓰도록 하라." 라며 지시했다. 난데없는 지시에 이공윤은 처음엔 반대했지만[4] 연잉군이 강력히 주장해 결국 이에 인삼차를 2번 복용시켰고, 경종의 안시(眼視)가 다소 안정되고 콧등이 다시 온기를 찾았다. 그렇게 다들 안도했으나 잠시 후 경종의 병세가 다시 악화되었다. 이때 연잉군과 이광좌는 종묘에 경종의 쾌유를 비는 기도를 올리려 했는데, 기도가 시작하기도 전에 경종이 승하하였다.
경종이 병환으로 줄곧 고생했으나 병세를 악화시켜 사망에 이르게 한 것은 게장과 생감으로 올려진 8월 20일 식사였다. 이 식단을 둘러싸고 논란이 지속먹으로 발생했고, 영조 치세 내내 고변이나 난이 발생하면 반대 세력은 영조가 형을 죽이려 이 식단을 올렸다며 영조를 '패륜 임금'으로 일컫는 경우가 많았다.
3. 논쟁
당시 경종의 상태가 매우 좋지 못했다는 점은 학자들이 대부분 동의한다. 경종이 병석에 눕기 시작한 날이 7월 중순이었고, 오한 증세가 나타난 것이 8월 2일이었으며, 논란의 핵심인 게장과 생감이 올라간 날이 8월 20일이었다. 실록에서는 한달이 넘는 시간 동안 복통과 설사, 오한에 계속 시달렸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승정원일기에는 식사 거부 증상도 확인된다.
과식이나 식중독에 의한 설사는 하루나 이틀 정도 장을 비워내면 증상이 사라진다. 하지만 경종의 증세는 일반적인 경우가 아니었고 오랜 기간 설사 증세에 시달려 심각한 탈수 증세도 의심되어 건강이 좋지 못했다. 그렇기에 경종은 오래 살지 못했을 것이며 실록만 보더라도 병환으로 죽은 것이라고 생각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었다. 왜 경종이 한 달 가까이 앓았는가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이 있는데 장티푸스[5][6],여름에 약한 경종[7]이 더위에 탈이 난 것[8][9] 등이 대표적이다.
지금은 당시 영조가 게와 감을 경종에게 먹였는지, 무슨 의도로 먹였는지 알 도리가 없다. 그리고 게와 감을 같이 먹은 일이 경종을 죽게 했다는 것 또한 명확하지 않으며, 현대 의학의 관점에서도 게와 감을 같이 먹는 것이 몸에 나쁜지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하지만 영조는 이후 사도세자를 미치게 했고 결국 뒤주에 가둬 죽였으며, 때문에 자신의 아들도 죽였는데 자신의 형이라고 못 죽였을까? 라는 주장이 후대에 와서 더욱 설득력을 띠게 되었다.
3.1. 독살 부정론
확실히 짚을 점은 경종이 게장과 단감을 같이 먹은 것은 실록에 나타나 있으나, 당시 영조가 직접 게장과 단감을 경종에게 바쳤음이 명시된 사료는 없다는 것이다.[10][11][12] 물론 영조가 왕이 된 후 작성되었기 때문에 누락되었을 뿐 실제로 바쳤을 가능성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13] 하지만 영조가 이를 바쳤다는 사실이 공식적인 기록으로 명시되었는지 아닌지는 매우 중요한 문제다. 또한 영조가 경종을 독살했다는 주장은 영조가 숙종의 친자가 아니라는 허황된 주장[14]과 함께 이인좌의 난에서 영조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구호로 사용되었다는 점도 유의할 필요가 있다.
신임사화를 일으켜 정권을 잡았다가 경종이 죽은 후 을사환국으로 정권을 잃은 소론과 숙종대 갑술환국으로 몰락한 남인[15]이 정미환국 이전부터 준비한 반란이 이인좌의 난이다. 그들은 공개적으로 경종의 위패를 만들어 곡을 하고 경종의 염에 참여한 왕실 인척인 심의현[16]이 독살을 증언했다고 주장하면서[17] 전국적으로 참여자를 모으고 반란의 정당성을 천명했다. 이런 상황에서 세간에서 그런 의혹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이 영조가 '게장'과 '단감'을 올렸다는 확실한 근거일까? 당장 그런 소문이 돌았던 것엔 왕이 위독해졌을 경우 설치되는 시약청이 경종의 경우 설치되지 않았다는 사실 또한 기여했다.[18] 또한 영조는 선례가 없다는 점 그리고 탕평책 실시를 위하여[19] 경종의 건강상태를 상세히 알리는 걸 거부하고 이러한 의혹이 사그라지길 기대했는데 이것이 독살설을 더 설득력 있게 만들었다.
또한 당대에 떠돌던 소문은 현대에 제기된 독살설과는 사뭇 다르다. 후대에 실록을 확인할 수 있게 되면서 당대와 다른 맥락의 독살설이 제기된 것으로 보인다. 부삼차는 실제로 왕실에서 자주 사용하는 처방이었고[20] 또한 당대에 세간에 주로 돌았던 소문은 '영조가 올렸다고 알려진 게장과 당시 처방이 상극을 이루어 급사했다'[21]는 것이었다. 이것이 을해옥사 시점에서는 인원왕후까지 가담했다는 주장으로 확대되었다.사관의 평과 수랏간에서 게장을 올렸음을 주장하는 영조의 발언에서 언급되는 동조(東朝)는 '대비가 거주하는 궁전' 즉 인원왕후를 의미한다.[22][23] <천의소감>에서는 신치운의 발언[24]과 무신란의 역적이 같다고 서술되어 있으며, 이천해 역시 무신란의 역적의 사주를 받아 그와 같은 흉언을 내뱉었다고 서술하고 있다. 즉 당대에 주로 문제가 되었던 것은 '게장'이다. 사관의 평에서도 '게장'에 대해서만 논한 것을 확인할 수 있으며, 영조 또한 신치운의 발언을 언급하며 '게장'은 수랏간이 올렸음을 해명하였다.
우선 게장과 감은 당시에도 나쁜 음식 궁합으로 취급받았으나, 인체에 해롭다는 속설은 과학적으로 근거가 없다. 수렴작용을 하는 감의 탄닌 성분이 게의 식중독균을 번성하게 한다는 게 흔히 제시되는 이유인데, 탄닌이 풍부한 다른 식품은 이런 궁합이 없을뿐더러, 오히려 상한 게의 세균 번식을 감의 탄닌 성분이 억제해준다는 설도 있다. 따라서 경종의 사인이 게장과 감일 확률은 낮다. 또한 인삼을 처방하는 것에 대해 연잉군과 어의들의 의견이 서로 갈리긴 했지만, 문제는 어의가 실력이 별로 없었다는 것이다. 툭하면 약의 효능이 좋다고 여러 약을 바꾸어 처방했고 자신의 의술만을 최고라고 주장해 실록에서도 "그렇게 의술이 뛰어난데 왜 임금께서 여전히 골골대고 약의 효험이 없느냐?"고 기록하며 비아냥댈 정도였다.
다만 영조 역시 어느 정도 문제가 있었다. 전문가도 아니면서 어의가 내린 처방을 무시하고 멋대로 상극인 처방을 강행한 점이다.[25] 심지어 "내가 의술은 몰라도 인삼과 부자가 기운을 되살아나게 하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라는 말도 덧붙였다.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경종은 사망하였다. 그렇지만 이는 끽해봐야 영조의 '실책'이지 독살설을 제기하기는 조금 무리가 있다.
또한 이 부분이 과연 영조의 실책인지도 생각해봐야 하는데, 의원 이공윤이 반대한 인삼차는 영조가 언급하기 이전에도 경종이 처음 증상이 나타났던 7월 무렵부터 이미 지속적으로 처방되었으나 이공윤이 반대해 처방을 잠시 멈추고 계지마황탕을 올렸다. 그러나 처방된 마황은 교감신경을 항진시키는 에페드린이 주 성분으로 한의학에서 계지와 함께 쓰면 땀을 크게 낸다고 알려졌다. 탈수가 심해서 허덕이는 사람에게 발한제를 먹임은 상식적으로 옳지 않다. 또한 한의학에서도 이미 상한론에서 설사를 하는데 마황을 써서 생기는 부작용과 마황을 지나치게 써서 탈수 증상이 왔을 때의 부작용을 수없이 경고했다.
실제로 기록에는 경종이 이전에는 의식이 있었으나 이공윤의 주장대로 인삼차를 끊고 계지마황탕을 올린 직후 혼수상태에 빠졌다. 이런 상황에서 영조가 위와 같은 발언을 하고 인삼과 부자를 올린 후에 경종은 잠시 의식을 회복했으나 곧 승하하고 말았다. 그리고 인삼과 부자가 과연 틀린 처방인지도 생각해야 하는데, 인삼과 부자는 한의학적으로 상극이 아니며 인삼과 부자만으로 이루어진 처방도 영조가 임의로 만든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던 것이었다.
인삼과 부자로 달이는 삼부탕은 13세기 진자명이 편찬한 <婦人大全良方>에 처음 언급된 처방으로, 동의보감에도 수록되었다.[26] 지나친 탈수 등으로 인하여 신체의 기능이 떨어져 땀이 지나치게 나오거나 설사를 지나치게 할 때 쓰는 처방으로 기를 돋우고 진액을 생성하는 인삼과 (한의학에서 양기라고 부르는) 신체 기능을 크게 항진시키는 부자가 쓰였다. 지나친 탈수로 인해 혼수상태에 빠진 경종에게는 효과적인 처방이었지 독은 결코 아니었다. 한의학자들은 대체로 영조의 처방이 옳았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공윤의 배경 또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의술이 신비하다는 소문을 듣고 숙종대에 귀양살이를 하던 와중에 초빙된 사람이었다. 또한 경종이 죽은 그 해에도 진찰시에 여러 번 불참하거나 지각해 벼슬을 삭탈당할 뻔하고, 성품이 매우 불량하고 과하게 강한 약을 많이 썼다는 기록 또한 존재한다. 이러한 사람이 경종의 죽음 직전에 상식에서 크게 벗어난 처방을 한 뒤 상태가 더 위중해지자 영조가 나서서 그를 막은 것일 수도 있다.
그리고 '게장'과 '단감'으로 경종을 죽였다는 주장은 논리적으로 생각해보면 의아한 점이 있다. '게장'과 '단감'을 올려 경종을 해쳤다면 이에 대해 몇 가지 조건이 성립할 필요가 있는데, 1달 가까이 앓으며 며칠 전까지도 제대로 된 식사를 거부한[27] 경종이 자발적으로 '게장'과 '단감'을 문제가 될 수준의 양으로 먹어야 성립한다.
더군다나 영조의 정치적 입장에서도 경종이 죽어봤자 아무런 이득이 없다는 주장도 존재한다.자기가 의지할 기반세력이 탄탄하면 모를까, 소론이 득세하는 와중에 자신을 끝까지 보호해준 경종을 스스로 죽이면서까지 왕이 될 이유는 없다. 게다가 사방이 적인 와중에도 어의의 처방을 뒤집으면서까지 인삼차를 처방한 것은 영조가 경종의 죽음를 바라지 않았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무엇보다 경종은 이미 가망이 없을 정도로 건강이 악화되어 내버려두면 곧 죽을 사람을 굳이 이목이 쏠린 상황에서 독살할 정도로 영조가 어리석지는 않았다.[28] 영조가 처방한 약을 먹고서도 임금이 절명했다면 영조에 의한 독살설이라는 낭설을 피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실제로 영조는 이 음모론 탓에 평생 스트레스를 받았다. 굳이 독살을 하려 했다면 병세의 차도를 보고 회복될 기미가 보일 때 드러나지 않게 함이 합리적이다.
더군다나 자신을 옹호해줄 세력이 미미하다면 자칫 이를 빌미로 반정이 일어날 지도 모르는데, 이런 위험을 무릅쓰고 굳이 인삼차를 권한 것은 그만큼 경종이 살아나길 원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한 마디로, 영조 입장에서는 독살이라는 위험한 도박을 저지르면서까지 적들이 가득한 조정에서 왕 노릇을 할 바에야 경종이 조금이라도 살아있는 동안 자신의 기반을 제대로 만들고[29] 자연스럽게 왕위를 계승하는 것이 훨씬 안전하고 영조 개인의 입장에서도 더욱 편했을 것이다.
여기에 계유정난과 비교해 "어차피 왕이 되면 끝나는 건데 영조가 도박을 할 수도 있지 않느냐?"라고 반박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세조와 영조는 처한 상황이 180도 달랐다. 세조는 단종이라는 제대로 정통성을 갖춘 왕이 있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이었고, 건달들을 불러모아서 정적들을 제거하는 쿠데타를 벌여 결국 왕위를 찬탈했다. 반면 영조는 효종의 정통성을 건드리고 싶지 않았던 경종에 의해 후계자로 세워진 상황이라 영조 입장에서 경종은 정적이 아닌 보호자였다.[30]
3.2. 독살 긍정론
3.2.1. 감과 게장
조선 시대 숙종 대왕의 아들 <경종 - 장희빈의 아들임>을 <영종(연인군>이 <경종>에게 <게장>과 <꿀(감)>을 동시에 먹여서 <독살>했다는 역사적 사료가 존재합니다.
감과 게장의 조합이 독이라는 가설이 현대 의학적으로 사실이 아니라도, 당대에는 '사실'이라고 인식되었던 이상 두 음식을 “굳이” 올린 연잉군의 행위의 의도는 의심스럽게 여겨진다. [31]
당시 조선에서 '환자에게 좋은 음식'과 '나쁜 음식'을 구분했다는 점도 연잉군(영조)의 혐의를 가중시키는 요소다. 과거에도 환자에게는 소화시키기 쉬운 음식을 먹였다.[32] 그러나 연잉군은 한 달 가까이 질병에 시달린 형에게 상하기 쉽고 소화시키기 어려운 게장을 먹였다는 것이다.
기사의 사례를 볼 때 경종이 승하한 직접적인 원인은 <감의 탄닌산>과 <게의 단백질>이 위석을 형성시켜 장의 괴사를 발생시킨 것으로 추측하나 확실하지 않다.
* <게장>과 <꿀(감)>의 상극(相剋)에 대해서 *
현대 과학에서 <게장>과 <꿀(감)>의 상극(相剋)에 대해서 연구한 결과, <게장>과 <꿀(감)>을 동시에 소량을 먹을 경웨는 문제가 없으나, 어느 정도의 양이 그 선을 넘게 되면, <게장>은 <주로 몸에 좋은 박테리아가 발생>하게 되고, <꿀(감)>은 그러한 <박테리아가 늘어날 수 있는 촉매 작용>을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일정한 양을 넘어서게 되면 <꿀(감)>은 <게장의 몸에 좋은 박테리아>를 기하급수적으로 증식시키게 되어, 결국은 <게장>과 <꿀(감)>을 어느 정도의 양을 넘어서서 동시에 먹는 경우 <꿀(감)에 의한 박테리아가 기하급수적으로 증식되는 촉매 작용>으로 인해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고 합니다.
세게적인 유명 과학 저널에 발표된 확실한 내용이자 자료입니다.
따라서, 추석 연휴 기간 동안, <게장>과 <꿀(감)>을 동시에 소량을 먹을 경웨는 문제가 없으나, 어느 정도의 양이 그 선을 넘게 되면, 사망에 이르게 되므로, 갑별히 조심하셔야 합니다.
3.2.2. 연잉군(영조)의 동기
영조가 그런 일을 벌일만한 동기는 차고 넘쳤다. 경종 사망 직전의 영조는 정치적으로 정말 위태로운 상황에 있었다. 영조는 주변의 잘못에 더해 본인도 처신을 잘 못했기 때문에[33] 역적 모의 명단에 자기 이름이 등장했으며 경종이 사망할 당시에는 정말로 막다른 길에 내몰린 상태였다. 당시 임금이 후사가 일절 없던 경종이었기에 망정이지 다른 왕이었으면 이미 충분히 제거되고도 남을 위기의 상황이었다.
비록 경종은 폭언에 가까운 말[34]을 내뱉을 정도로 연잉군과 사이가 나빠지긴 했지만, 죽을 때까지 경종은 연잉군을 보호해주었으며 영조는 가까스로 위기를 면하여 무사히 즉위까지 하는데 성공했다. 실제로 신임사화 이후 연잉군의 정치적 입지가 크게 악화되었고 다른 상황이었으면 진작 역모죄로 사약을 받고도 남을 위치임을 간파한 소론 측에서는 노론 씨말리기에 더불어 연잉군 왕세제 추탈에도 앞장섰다. 경종은 그걸 잘 알았음에도 세제를 끝까지 보호했고, 너무 경종이 소극적이라는 주장까지 일삼자 경종은 분노하기도 했다. 이에 소론은 경종의 '세제 보호 의지'를 확인한 뒤론 노론 공격 수위를 낮추었으며 경종은 어쨌든 현재 왕실에서 가장 정통성을 갖춘 후계자인 이복동생 연잉군을 지켰다.
그러나 당시 연잉군에게는 결정적인 약점이 있었다. 바로 경종의 적장자가 아닌, 이복동생에 불과했다는 점이었다. 정치적 입지가 추락하고 집권 당파가 "세제를 폐위시켜야 한다."라고 여론을 형성하는 와중에 연잉군이 위기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경종 한 사람의 보호 의지 덕분이었다. 달리 말하면 경종이 보호 의지를 포기하는 순간 연잉군은 바로 폐세제가 되어도 안 이상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연잉군 본인 역시 이 사실을 매우 잘 알았을 것이다.
다시 말해 경종이 만에 하나라도 자식을 갖게 된다면 모든게 뒤바뀌는 상황이었다. 현대에 불분명한 낭설로 떠도는 경종의 성기능 장애 문제는 말그대로 검증되지 않은 '설'에 불과했고 당대 연잉군이 이를 정설로 받아들였을리도 없었다. 1724년 당시 경종의 나이는 만으로 35세였으며, 나이만 보면 언제 자식을 가져도 이상하지 않을 젊은 나이였다. 따라서 걸핏하면 터지는 역모 연루와 경종의 젊은 나이는 연잉군이 불안감을 느끼기엔 충분했다는 뜻이다.
사망 당시 경종의 나이였던 35세는 2020년대 대한민국 기준 '남성 평균 결혼 연령'에 해당하는, 아이를 가지기에는 전혀 모자람이 없는 나이였다. 물론 경종은 오랜 시간동안 자식이 없긴 했지만 사실 그건 경종 본인의 문제라기 보다는 경종의 첫 왕비인 단의왕후의 문제도 매우 컸다. 단의왕후는 뇌졸중 증세를 보이거나 말을 횡설수설하는 등 정상인이 아니었으며 실제로 경종보다도 일찍 요절했다. 경종은 단의왕후와 22년이나 결혼생활을 보냈는데, 단의왕후가 계속 아팠기 때문에 둘 사이의 자녀는 1명도 없었다. 따라서 당시 사람들에겐 경종이 자식이 없는 이유를, 경종이 성 불구라서 라기보다는 왕후가 몸이 안좋아서로 생각하는게 합리적인 추론이었다.
조선시대에는 평균 초혼, 출산 연령이 15세 전후였기에 1724년 당시 경종은 20년이나 더 나이를 먹긴 했지만, 당대 관점으로도 아이를 가지기엔 나이가 많다고 여길 시기는 전혀 아니었다. 설령 이보다 더 나이가 많았어도 왕실에서는 후사를 본 경우가 많았다. 또한 여성의 나이가 중요한 것이지 상대적으로 남성의 나이는 덜 중요했기에, 실제로 젊은 여자를 왕비, 후궁으로 들이는 것도 가능했고 사례도 비일비재했다. 당장 경종도 후사가 없다는 이유로 어린 선의왕후를 새로 들였다. 결론은 연잉군이 '형 경종이 여지껏 자식이 없었으니 앞으로도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기에는 충분치 않았다는 뜻이다. 새 왕비가 들어온게 1718년이었고 경종은 즉위 후 노론에 쭉 눌려 있다가 1721~1722년에 걸쳐 신임옥사를 일으켜 차근차근 자신을 '업신여기는' 세력을 제거해나가고 왕권을 다지고 있었다. 이제 선의왕후로부터 아들만 나온다면 다음 제거 대상은 연잉군임을 알아차리기는 매우 쉬웠다.
만약 영조가 하다못해 경종의 적장자였다면, 자식이 아무리 더 생겨도 장남이라는 입지는 변하지 않으므로 문제될 것은 전혀 없었다. 물론 애초에 그랬다면 역모에 휩쓸리는 일도 없었겠지만 어쨌든 '부적격자' 판정을 받는다 해도 '세자(世子)'를 교체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당시 연잉군(영조)은 조선 역사상 전례가 없던 '세제(世弟)'였고 굉장히 불안정한 입지의 후계자였다.[35]
또한 경종의 아랫 항렬 중의 후계자가 아니었으므로 연잉군(영조) 본인과 비슷한 항렬의 다른 후계자도 충분히 고려 대상이었다. 만일 경종이 생각을 바꿔서 말년의 선조처럼 후계 문제를 두고 폐세제까진 아니어도 밀풍군이든[36], 양자든 뭐라도 끼고 후계구도에 대해 다른 말을 했다면 광해군이 당한 것처럼 영조도 큰 타격을 받을 수 있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경종 본인이 바로 이런 이유로 노론으로부터 온갖 수모를 다 당했으며[37], 훗날 영조 본인도 정상적인 후계 구도를 틀어버리고 친아들에서 친손자로 후계자를 교체해버렸다.
요약하자면 당시 연잉군은 경종의 보호로 세제 자리는 지키고 있었지만 이는 반대로 말하면, 마음만 먹으면 바로 연잉군을 제거할 수 있다는 뜻이다. 애초에 세제 책봉부터가 연잉군(영조)을 지지하던 노론의 반강압적 압박에 경종이 사실상 굴복한 것이었고, 더군다나 노론 세력은 경종을 대놓고 무시하였고 임금 취급도 안하며 나이가 30대인 임금에게 '동생'을 후계자로 지정하라는건 경종이 조금만 명분이 있었으면 불충(不忠)으로 싸그리 숙청시켜도 이상하지 않을 말도 안되는 스캔들이었다. 노론은 그런 말도 안되는 행위를 요구했고, 또한 그게 실제로 이루어질 정도로 당시 조선의 정세는 파국으로 치달았다.
물론 경종은 자신은 그러지 않을 것이란걸 세제에게 보여주듯이 소론의 거센 압박에도 오히려 연잉군을 지켰다. 그러나 연잉군은 자신의 불안정한 후계자 지위와 함께, 아직 30대에 불과한 경종에게 아들이라도 생긴다면 자신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 심한 압박에 시달렸을 것이다. 만약 행여나 그런 일이 생긴다면 설령 경종 본인은 연잉군을 안타깝게 여긴다 할지라도 아들을 위해 연잉군은 제거되었을 것이다. 아무리 이복동생이 소중하다 한들 친아들보다 소중히 여기는 아버지는 없기 때문.
결론적으로 당시 영조의 상황은 그저 몸 사리며 폭풍이 지나가길 기다리기보단 어떤 상황이 되든지 간에 위태로운 것은 마찬가지이기에 이판사판으로 저지를 동기는 꽤나 충분한 셈이다. 게다가 경종을 살해하면서 영조에게 갈 이득이 없다는 주장은 사실 최소한 영조가 즉위하지 못할 때에나 먹힐 주장이지, 영조가 즉위를 성공한 마당에 먹힐 주장은 아니다.
경종이 병석에 오래 누워 있을수록 이에 위협을 느낀 준소가 세제를 폐하는 쿠테타가 일어날 가능성이 높았다는 점도 이를 뒷받침한다. 당시 병권을 쥔 훈련대장 윤취상, 총융사 김중기, 어영대장 이삼은 모두 준소의 영수 김일경의 사람이었다.[38] 세제가 왕위에 오르면 이들이 죽는다는 건 명약관화였다. 더구나 경종 임종시 김일경은 공교롭게도 왕세제 보호론을 주창한 이광덕의 논박을 받아 부신을 바치고 성 밖에서 대죄하고 있었다.
게장과 생감의 진어는 경종의 승하를 재촉하였고 결국 준소에게 반격의 기회를 주지 않는데 성공한다.
4. 경종 사후
경종의 죽음에 이어 즉위한 영조는 그다지 어렵지 않게 노론과 더불어 조정을 장악하였다. 전세가 하루 아침에 역전된 것이다. 즉위하고 얼마 안 가 영조는 그 정적인 소론, 특히 준론을 향한 대대적인 공세에 착수하였다. 물론 이인좌의 난을 비롯한 불미스러운 사건들도 더러 있었지만 이괄의 난때의 인조처럼 파천을 한다든가 하는 일도 없이 모두 무난히 극복하였고, 나주 괘서 사건이라든가 과거 시험장에서 모욕을 당한 일 같은 건 영조의 기분을 망치는 데에는 충분할지언정 영조의 조정까지 망치는 것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영조는 조선 왕조 500년 중 무려 10분의 1인 52년을 집권한 왕이다. 정통성 문제로 어느 정도 시달린 건 사실이지만, 강한 왕권으로 장기간 통치한 영조인 만큼 '심각한 후폭풍을 각오하고' 했다고 하기에는 큰 문제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당시 소론이 비록 김일경으로 대표되는 준소와 이광좌로 대표되는 완소로 분열되었다고 하지만 진정한 완소는 당시 세제시강원 조현명과 조문명 형제, 송인명, 박문수 등 극소수였다. 준소나 완소이나 경종이 죽으면 같이 몰락하고 노론이 득세할 거란 사실은 삼척동자도 아는 일이었다.
더욱이 영조는 경종이 승하 당일까지 시약청을 설치하지 않은 점도 후에 큰 논란이 되었다.
5. 결과
독살설이 사실인지 거짓인지와는 무관하게 영조는 경종을 독살했다는 의혹 때문에 매우 고생했다. 실록에 직접적으로 나와 있지는 않지만, 게장을 올린게 영조라는 사실은 온 나라에 다 퍼져있던 사실이며, 어의 이공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영조가 인삼과 부자를 처방하게하고 그걸 먹고 얼마 뒤 경종이 사망했다는 사실도 의혹의 원인으로 작용했다.[39] 게다가 신임사화 때 주모자들이 경종을 독살할 계획을 꾸미고 있었다는 점과, 그 주모자들이 당시 왕세제였던 영조와 가까운 사람들이라는 정황 때문에 소론을 중심으로 왕위를 노리던 영조가 측근들의 시도마저 실패하자 끝내 경종이 아픈 틈을 타서 직접 나서 독살했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당대의 시각으로도 그다지 떳떳한 행위가 아니었다는건 실록과 영조의 태도를 보면 알 수 있다. 위의 인삼과 부자 처방과 달리 누가 게장과 감을 진상했는지는 실록에 누락되어있다. 정말로 영조 본인이 봤을 때 문제가 없는 행위였다면 사관들도 '연잉군이 게장과 감을 진상했다'고 마음 편히 기록해두었을 것이다. 영조 치세에 역모 사건과 반역을 일으킨 사람들이 했던 독살설 관련 발언들을 전부 직접 실록에 적지 못하고 미묘하게 돌려적어서 현재까지 내려오도록 만든 것도 마찬가지다.
그 시작은 김일경이었다. 영조 즉위년(1724) 12월 8일, 영조가 즉위하고 얼마 뒤에 소론이던 김일경과 목호룡을 국문했는데 이때 김일경은 이상한 행보를 보였다. 김일경은 자신을 경종의 충신이라고 자처하고 영조에게는 자신을 지칭할 때 의신(矣身)이라는 존대말 대신 나를 뜻하는 오(吾)라는 반말을 쓰는 등, 흡사 육신전에서 세조를 부정하던 사육신과 비슷하게 행동했다. 승정원일기의 기록은 더 노골적이다. 호해와 이세민이 형제를 살해하고 비정상적으로 왕위를 승계했던 사건들을 들어가며 영조를 비판했고, 여기에 내옥척련(內屋戚聯)이라는 궁인과 영조가 내통했다는 단어를 써가며 경종이 독살되었단 생각을 노골적으로 떠들었다. 그래도 여기까지는 김일경이 영조를 지지하던 노론을 숙청한 인물이었고, 국문으로 고문받던 상황이니 어느 정도 설명이 되지만 문제는 그 다음이다.
김일경을 숙청한 뒤 한 달이 겨우 지난 이듬해 1월 16일, 영조가 의릉(경종의 릉)에 알릉(참배)하러 가는 행찻길에서 군사(軍士) 이천해(李天海)가 경종 독살을 운운하며 고함을 지르는 사건이 벌어졌다.[40] 다음날 이천해를 국문한 내용을 종합해보면 이천해는 16일에 "국가가 무상(無狀)하다(질서가 없다)."를 시작으로 "환국(換局)을 어찌 하겠는가?"라고 따졌는데, 한 달 전 소론 강경파 숙청을 언급한 것 같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천해는 영조가 경종을 독살한 죄인이라고 언급하면서 자신을 독살범 영조를 고발하는 고발자라고 자칭했다. 영조는 이천해가 독살을 암시하여 "(영조가) 대궐 안을 왕래했다."라고 한 발언에 극도로 분노해서 "음참하여 차마 들을 수 없는 말이어서 입에 담을 수가 없으니, 좌우의 사관(史官)은 쓰지 말아야 한다."라며 사관들을 압박했다. 결국 이천해가 영조에게 경종을 독살했다고 한 발언은 이날 기사에는 쓰이지 못했다. 다만 사관들이 나중에 신치운의 발언을 기록하며 이때 일을 은근슬쩍 인용함으로써 후세에 알려졌다. # 다만 이때 이천해는 독살에 대한 발언만하였고 게장 등 구체적인 이야기는 하지 않은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조사 결과 이유익의 입을 통해 이천해의 흉언을 퍼트린 주범이 경종의 첫번째 왕후 단의왕후의 동생 심유현이라는 얘기가 나와 심유현이 조사를 받았다. 심유현은 경종이 승하할 때 입시하여 그의 죽음을 확인하는데 참여하였고, 경종이 목욕할 때도 입시하였는데, 멀쩡하던 임금이 갑자기 사망해 의구심을 가졌고 이 얘기를 퍼트렸다. 그후 이유익, 심유현은 이인좌의 난에 동참했고 이유익은 국문을 받으면서 심유현의 증언이 민심을 선동하여 역모에까지 이르렀다고 한 바 있다. 이천해의 국문 당시 심유현은 외척이여서 별다른 처벌도 받지 않고 관직도 제수받았지만, 훗날 이인좌와 결탁해 난을 일으켰다가 실패해 끝내 주살되었다. 그나마 집안이 좋아 심유현만 처리되는 선에서 끝냈지만 이것도 당시 심유현의 모친, 즉 경종비 단의왕후 심씨의 어머니가 생존해 있었기에 대역죄인임에도 관례대로 노적, 즉 처자를 노비로 삼는 형벌을 시행하지 못한 것이다.
다음 독살설 관련 사건으로는 영조 4년(1728)에 일어난 이인좌의 난이 있다. 일단 영조실록 안에는 이인좌가 경종의 독살설을 주장했다는 직접적인 기록은 없지만 우선 해당 반란의 주범 중 박필현, 이유익, 이인좌는 경종 독살설을 적극적으로 주
장했던 인물이고,[41] 더불어 반란 당시 한양에 뿌려전 반란군의 격문에도 납일초주(臘日椒酒)[42], 사왕·숙대(叔帶)[43]를 운운했으며 이런 선전문을 담당했던 이익관을 심문할 때 위에서 독살설을 운운한 이천해를 언급한 일로 보아 이인좌의 난 때도 경종 독살설이 주요 원인이었고 반란군도 이 독살설을 적극적으로 유포한 것을 추정할 수 있다.
여담으로 '이인좌의 난' 당시 반란군의 격문 내용은 영조에게도 보고가 올라갔는데, 영조는 죄다 불태우라고 명했다. 하지만 사관은 이런건 죄다 기록해서 역적의 죄를 만천하에 드러내야 한다고 하며, 불태우라고 명한 기사에 주석으로 '납일초주 사왕숙대'라는 핵심 내용을 핀포인트로 적어놨다.
영조 31년(1755)에 터진 나주 괘서 사건에서도 경종 독살설이 기록되었다. 심지어 주범인 신치운은 영조 앞에서 대놓고 게장을 언급하며 그를 경종의 암살범이라고 타격하고 있다.[44] 이 시기에 소론 준론과 남인들에겐 그냥 경종의 게장 독살설이 정설이었다는 방증. 영조 밑에서 승지를 지내기도 한 신치운은 저 극언 때문에 선대의 이괄, 후대의 김옥균에 맞먹는 대역죄인으로 일가가 모조리 극형을 받았다.
6. 기타
영조 생전부터 상당한 진위 여부로 논란이 많은 사건으로 현대, 특히 2020년도 이후 한국 인터넷에서는 사실 여부와 별개로 영조의 편집증적 정신장애가 의심되는 괴팍한 인간성과 임오화변 같은 사건이 재발견되면서 영조의 인간성을 비판하는 밈이 되었다. 주로 해당 밈을 인용할 때는 박시백 만화가의 조선왕조실록의 위의 장면이 올라오곤 하는데 주모자들의 능글맞은 조롱과 열불터지는 영조의 반응, 그리고 2024년이 마침 갑진년이었다는 점 때문에 특히 밈 요소로 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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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장과 감 함께 먹으면 죽는다?”…300년 속설의 진실
최강주 기자2025. 10. 5. 14:02 동아일보
가을철 간장게장과 감의 조합은 역사 속 속설로 전해지지만, 현대 의학에서는 직접 위험을 입증하지 못한다. 신선도와 개인 건강 상태를 고려해 섭취하는 것이 중요하다. (사진=게티이미지)
예로부터 가을 제철 별미인 간장게장과 감을 함께 먹으면 몸에 좋지 않다는 속설이 전해져 왔다. 300년간 이어진 이 궁합 속설에 대해 전문가들은 “신선도와 개인 건강 상태가 더 중요한 요인”이라고 일축했다.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에는 경종 임금이 병상에서 게장과 감을 섭취한 뒤 복통과 설사를 겪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전통 의학서 『본초강목』도 “게와 감을 함께 먹으면 복통과 설사를 유발한다”고 언급한다.
하지만 현대 의학적 근거는 부족하며, 두 음식이 직접적으로 치명적 결과를 가져온다는 증거는 확인되지 않는다.
● 간장게장, 가을철 주의해야 하는 이유는?
사진=게티이미지
간장게장은 신선도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수산물 특성상 보관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 장염 비브리오 등 식중독균이 급격히 증식한다. 식품의약품안전처에 따르면 상온 20℃에서 게장에 존재하는 세균은 2시간 만에 2배, 6시간 뒤에는 10배까지 늘어난다. 따라서 즉시 냉장·냉동 보관하지 않으면 복통과 설사 같은 식중독 증상이 쉽게 발생할 수 있다.
● 감, 타닌과 식이섬유가 위장에 부담
사진=게티이미지
가을을 대표하는 과일 감에는 타닌 성분이 들어 있다. 타닌은 단백질과 결합해 변비나 위장 장애를 유발할 수 있다. 특히 위장이 민감하거나 소화 기능이 약한 사람에게는 부담이 될 수 있다. 감은 식이섬유가 풍부해 적정량 섭취 시 장 건강에 이롭지만, 과다 섭취하면 오히려 복통이나 소화 불량을 초래한다.
● 함께 먹어도 괜찮을까? 전문가 답변은
전문가들은 “간장게장과 감을 함께 먹는다고 해서 치명적인 위험이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라면서도 “두 음식 모두 소화기관에 부담을 줄 수 있으므로 면역력이 약한 사람이나 노약자는 주의가 필요하다”고 조언한다.
특히 간장게장은 반드시 냉장·냉동 보관하고, 감은 과식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 냉장(10℃) 보관 가능 시간: 약 16시간
▲ 상온(15~25℃): 2시간 이내 섭취
▲ 미온(30~40℃): 50분 이내 섭취
결국 제철 음식의 참맛을 안전하게 즐기려면 ‘궁합’보다 보관·섭취 습관이 핵심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최강주 기자 gamja822@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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