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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야상 재정립(35-37)
사람들이 어떤 일에 중요하게 생각하면, 그 일에 자신의 시간을 냅니다. 그 일에 돈도 투자합니다. 이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사랑하고 자신의 마음이 가 있는 곳에 많은 시간과 돈을 투자해도 아깝지 않는 것입니다. 신약 성경에 구약 성경을 인용하신 것은 그만큼귀한 가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35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실새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냐 36다윗이 성령에 감동되어 친히 말하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니라 37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 많은 사람들이 즐겁게 듣더라(35-37)
본문의 말씀은 마태복음에서는 평행 단락이 질문과 대답의 대화 형식으로 제시됩니다. 그러나 마가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혼자서 독백으로 등장합니다. 예수님의 질문은 자신의 메시아적 정체성에 대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가르치고 계시면서, 그들에게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냐?’라고 묻습니다. 질문의 의도는 예수님께서 ‘다윗의 자손’이라는 정체성 자체를 부정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다윗의 자손’으로서 메시아의 정체성이 서기관의 전유물도 아니었습니다.
실제로 구약성경에 근거해서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보내실 메시아가 다윗 계열의 사람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사무엘하 7:11-16; 에스겔 34:23-24). 사실 마가복음에 묘사된 예수님의 모습은 전통적 유대인들이 기대했던 메시아의 모습과는 달랐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곳에서 당대 팽배한 메시아사상을 좀 더 풍성하게 하고자 질문하셨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약성경에 근거하여 당시 유대인들 사이에 팽배한 ‘다윗 왕가의 아들’로서의 메시아 기대가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지만, 자신의 정체성을 충분히 드러내지 못한다는 사실을 말하려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시편 110:1을 인용하십니다.
1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시편 110:1)
만일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라면 성령의 감동을 받은 다윗이 메시아를 ‘내 주’라고 부른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를 질문하십니다. 다윗이 자신의 자손에게 ‘주’라고 호칭하였기에 메시아를 다윗의 자손이라는 호칭만으로는 충분히 담아낼 수 없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논증 방식은 유대 랍비들이 즐겨 사용한 자기모순을 통한 논증 방식입니다. 메시아가 ‘다윗의 주’가 되신다는 결론은 예수님의 역할에 대한 초기 기독교의 이해에서 핵심 중 하나입니다. 기독교는 시편 110:1을 그리스도 완결적(Christotelic) 독법을 통해서 읽어냄으로써 이러한 결론을 도출해냈을 것입니다. 이러한 결론은 이 시편의 저자가 다윗이며 그 내용은 메시아에 관한 것이라는 예수님의 분명한 관점(그리스도 완결적 관점)에 기초합니다.
시편 110:1에서 두 번째 등장하는 ‘내 주’(아도나이)라는 용어는 그의 지위가 화자인 다윗보다 탁월하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함축하고 있습니다. 뒤따르는 시편의 문맥인 110:5에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계신 내 주는 열왕을 쳐서 파하시는 분으로 묘사됩니다. 또한 다윗이 ‘성령에 감동되어’ 이 말을 했다고 하는 것을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다윗의 이러한 이해가 단순히 인간적인 것이 아님을 분명하게 드러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당대 사람들에게 부각되지 않은 메시아의 측면을 부각하신 후에 그가 단순히 다윗의 자손일 수 없음을 질문 형식으로 말씀하십니다: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물론 이 수사학적 질문은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임을 부정하려는 데 핵심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더욱 풍성한 메시아상을 제시하려는 것입니다. 만일 이곳에서 마가가 예수께서 자신이 다윗의 혈통임을 부인하셨다고 생각했다면, 우리는 한 가지 문제에 직면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초대교회는 예수님께서 다윗의 후손임을 계속해서 강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로마서 1:3 이러한 취지의 초기 기독교의 고백).
본문이 강조하는 것은 다윗의 자손이라는 호칭이 잘못된 것은 아니라고 해도 예수님의 메시아적 사명의 본질에 대한 호칭으로는 적합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는 단순히 다윗의 후계자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지상의 왕권과 비할 수 없는 높은 권위를 가진 다윗의 주(Lord)이시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러한 마가의 이해는 마가복음의 시작인 1:1에 명확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복음의 시간은 예수께서 그리스도 즉 메시아이심을 아는 것이고,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또한 다른 한편으로 예수님의 왕권은 다른 사람들을 패배시키고 정복하고 다스리는 것을 통해서 구현되는 것이 아니라, 섬기고 그 섬김의 궁극적인 실천으로 자신을 내어줌으로써 구현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다윗의 자손이라는 호칭으로는 메시아에 대한 이러한 이해를 담아낼 수 없다고 느끼신 것입니다. 종교지도자들과는 달리 무리는 예수님의 이러한 말씀을 즐겁게 듣고 있었습니다.
서기관들의 위선과 그들에 대한 심판(38-40)
종교지도자들은 많이 알고 있었지만 아는 대로 살지는 않았습니다. 메시아이신 예수님께서는 이미 보여주신 삶과는 반대로 낮은 자리, 섬김의 자리가 아니라 대접받는 높은 자리, 외식하는 기도, 과부의 가산을 삼키는 악행의 자리에 머물렀습니다. 그들의 삶은 그들의 그릇된 앎의 실상을 보여주며, 가르치는 자의 이중성에 임하는 심판은 더 혹독할 것입니다.
38예수께서 가르치실 때에 이르시되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과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39회당의 높은 자리와 잔치의 윗자리를 원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 40그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자니 그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 하시니라(38-40)
성도들에게는 멘토가 필요합니다. 그 멘토가 어떤 태도냐에 따라서 그를 따르는 사람들의 태도가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일반 유대인들을 교육하고 있는 서기관들에 대해서 비판적 가르침을 이어가십니다.
서기관들은 긴 예복을 입고 자신들의 권위를 세우는 일을 즐겼습니다. ‘긴 예복’이란 표현은 흡사 제사장들의 독특한 의복을 연상시킵니다. 이러한 예복을 입는 행위의 이면에는 자신들을 일반 사람들과 구분하려는 의도가 읽힙니다. 또한 그들은 시장에서 인사 받는 것을 즐깁니다. 실제로 유대인들은 서기관들을 만날 때 ‘랍비’라고 불렀고, 그것은 지극한 존경의 의미를 담고 있는 호칭이었습니다. 그들의 의복과 그들에 대한 호칭을 통해서 그들의 교만한 태도와 잘못된 경건을 꼬집고 계십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회당의 높은 자리와 잔치의 윗자리를 좋아한다고 말씀하십니다. 회당의 높은 자리란 율법 궤 앞자리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것은 성경을 해석하는 자들이 앉았던 자리입니다. 또한 유대인들은 연장자나 존경받는 인물들을 잔치의 상석에 앉혔는데, 서기관들은 이러한 자리에 자주 앉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문제는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 있는 것 자체가 아닙니다.
그들의 진정한 문제는 그들이 추구하고 있는 것과 그들에게 주어진 사명 사이의 괴리에서 발견됩니다. 그들에게는 백성들을 잘 지도해야 할 사명이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과부들의 가산을 삼키고 길게 기도함으로써 위선적인 행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행위에 대해서 더욱 넘치는 심판이 기다리고 있음을 분명하게 밝히십니다.
과부의 헌금(41-44)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겉모양만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내면까지도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가시길 기대하십니다. 교회 안에서 우리가 섬기는 직분에 만족하고 교회에 출석하는 것에 만족하면, 남들에게 보이는 겉모습에만 안주할 것이 아니라 주님이 눈여겨보시는 내면을 살피고 행위에 동기를 헤아려 봐야 합니다. 사람들의 인정이 아니라 진정으로 판단하시는 주님께 마음의 중심을 참으로 인정받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대표적으로 바로 헌금하는 여인이었습니다.
41예수께서 헌금함을 대하여 앉으사 무리가 어떻게 헌금함에 돈 넣는가를 보실새 여러 부자는 많이 넣는데 42한 가난한 과부는 와서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는지라 43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헌금함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44그들은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41-44)
서기관들이 과부의 가산을 삼키고 있다고 언급하시고, 그들에 대한 심판을 언급하신 이후에 헌금함에 헌금하고 있는 과부가 등장하고 있다는 것은, 마가복음의 구조 속에서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주목 받기 원했던 서기관들이나 많은 헌금을 낸 부자가 아니라, 한 가난한 과부를 주목하십니다. 이 과부는 아주 작은 돈을 하나님께 헌금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녀의 헌신을 높게 칭찬하십니다. 과부는 헌금함에 두 렙돈을 넣었습니다. 원문을 직역하면, ‘렙돈을 던졌다’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당시 헌금 궤는 쇠로 된 나팔 모양의 입구에 동전을 던져 넣는 식이었기 때문에, 이 같은 표현이 등장했을 것입니다. 이 같은 헌금 궤의 구조 때문에 헌금을 많이 넣는 것과 적게 넣는 것은 소리를 통해서 쉽게 판별이 가능했습니다.
렙돈은 당시 통용되던 헬라 화폐 가운데 가장 작은 동전이었습니다. 결과적으로 과부가 헌금함에 넣은 돈은 당시 화폐 가치로 생각해볼 때 지극히 미미한 액수임에 틀림없으나, 이 액수는 그녀에게는 자신의 생활비 전부를 의미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녀의 헌금이 모든 이들의 헌금보다 더 많다고 평가하십니다.
그 이유는 다른 이들은 풍족한 가운데 넣었지만, 그녀는 자신의 빈궁함 속에서도 자신의 생활비 전부를 넣었기 때문입니다. 엘리야 시대 사렙다 과부의 스토리(열왕기상 17:8-16)와 달리 본문에는 그녀의 미래에 대한 아무런 보장도 등장하지 않지만, 예수님께서는 이 과부의 행위를 긍정적으로 평가하십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과부는 하나님 나라의 제자도를 위한 긍정적인 모델로 기능하고 있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녀의 헌금은 가난한 가운데 드려진 하나님을 향한 그녀의 사랑과 헌신의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위와 명예 등 외형적인 것에 연연하고 있는 서기관과 아무런 명예도 없지만, 자신의 재산을 아낌없이 드리는 과부의 진실한 모습은 제자도와 관련해서 시사 하는 바가 큽니다. 또한 본문은 모범적인 과부의 헌금에 관한 내용뿐만 아니라 과부에게 힘에 지나는 헌금을 강요하고 있는 서기관에 대한 고발의 의미도 동시에 갖습니다. 왜냐하면 문맥이 이러한 해석의 가능성을 시사해주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서기관들이 과부의 가산을 삼키는 자라고 이미 지적했었다.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사람 앞에 많은 헌금에 대한 과시가 아닙니다. 생활의 전부를 원하십니다. 눈에 보이는 액수가 아니라 드리는 사람의 마음입니다. 부자 청년은 가진 것이 너무 많아서 하나님 나라를 버렸습니다. 서기관들은 만족할 줄 몰라서 과부의 재산까지 삼켰습니다. 하지만 이 과부는 자신의 모든 것을 드림으로 하나님을 사랑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 신앙생활에 서기관과 같은 교만스런 행동은 없습니까? 그러한 교만한 행동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지도자들의 실수는 따르는 모든 사람들에게 많은 영향력을 끼칩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목회자들이 겸손한 행동으로 목회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의 중직자들은 연약한 성도들 앞에서 신중한 언행심사를 보여야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