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자놈 길들이기/박남철
내 詩에 대하여 의아해하는 구시대의 독자놈들에게 –차렷, 열중쉬엇, 차렷,
이 좆만한 놈들이……
차렷, 열중쉬엇, 차렷, 열중쉬엇, 정신차렷, 차렷, ○○, 차렷, 헤쳐모엿!
이 좆만한 놈들이……
헤쳐모엿.
(야 이 좆만한 놈들아, 느네들 정말 그 따위로들밖에 정신 못 차리겠어, 엉?)
차렷, 열중쉬엇, 차렷, 열중쉬엇, 차렷……
<정효구의 시 읽기 44> 독자놈 길들이기/박남철
박남철 시인은 우리 시단의 기인입니다. 그는 숱한 화제를 시단에 뿌리고 다닙니다. 저보고 20세기 우리 시단에서 기인을 꼽아보라면, 저는 연작시 <오감도>를 발표하다 독자들로부터 저게 무슨 미친 수작이냐고 항의를 받아 그만 도중 하차할 수밖에 없었던 1930년대의 시인 이상, 명함에 ‘대한민국 김관식’이라고 주소와 이름을 적어 갖고 다녔다는 1950년대의 시인 김관식, 아내에게 하루 1500원씩 용돈을 받아 그것으로 막걸리 값과 담배 값을 충당하고 가끔씩 남긴 돈을 모아 아내의 생일에 선물을 하였다는 천진무구한 시인 천상병, 고은태라는 본인 이름의 뒷부분이 부담스러워 그만 꼬리를 잘라버리고 고은이라는 두 글자만 남겼다는 시인 고은, 그리고 진이정 시인의 장례식에 갔다 늦게 돌아온 바람에 시험장에 가던 전철에서 잠이 들어 그만 박사과정 입학을 못했다는 박남철을 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기이한 행동은 제스처일 수도 있습니다. 어차피 인간들이란 제스처로 자신을 치장하고, 그런 제스처의 힘으로 살아가는 부분도 있으니까. 이것을 나무랄 수만은 없겠지요. 그러나 잘 살펴보면 기이한 행동이 제스처가 아니라 그의 진지한 삶 그 자체의 한 부분일 때도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본인이 보기에는 전혀 기이한 행동이라고 생각되지 않지요. 저는 제가 방금 들어본 우리 시단의 기인 같은 시인들에게 그들의 행동은 결코 제스처가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박남철 시인은 삶과 행동 양면에서 기인다운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저는 여기서 ‘기인다운’이라는 표현을 ‘실험적인’이라는 표현으로 바꾸겠습니다. 이렇게 표현을 바꾸고 보면, 박남철 시인을 묘사하는 말이 좀더 문학적인 테두리 안으로 들어올 것이라 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저는 박남철 시인의 삶이 얼마나 실험적인가 하는 점은 일ㅇ링리 제가 다 보고나 직접 들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여기서 말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의 시가 실험적인가하는 점에 대해서는 아주 객관적인 자료를 통하여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박남철 시인의 첫 시집은 1984년에 발간된 『지상의 인간』입니다. 지금으로부터 16년 전, 박남철의 시집 『지상의 인간』 속에 나타난 실험성은 독자들에게 큰 충격을 주기에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우리 사회는 매우 경직된 사회였습니다. 학생들은 일제히 똑같은 교복을 입고, 전화기는 다이얼 식의 검은 전화기 일색이었으며, 대학은 점수대로 선택된 소수에게만 열려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사람들이 의식이 단정하나 경직돼 있었습니다. 비유한다면 기계주의적 사유가 성행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시 역시 문화적, 사회적 현상의 일종으로 그 형식이나 내용이 유연성을 갖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의 머릿속에 암암리에 시적인 것의 규범이 들어 있었습니다.
이런 우리 시단에, 형식과 내용 양 특면에서 엄청난 실험을 시도한 박남철의 시집 『지상의 인간』이 나왔습니다. 당시의 독자들은 이미 황지우나 이성복 같은 시인에게서, 특히 황지우 시인에게서 실험적인 작품을 만났습니다만, 박남철은 실험성은 황지우의 그것을 넘어섰습니다. 박남철은 위태롭게 보일 정도로 실험의 앞자리를 개척해 나아갔습니다.
해체니, 파괴니, 실험이니 하는 말들이 당시의 우리 시단에서 관심거리가 되었습니다. 이때 박남철 시인은 당연히 그 선두에 섰습니다. 지금은 워낙 그와 같은 논의가 오래 시간 이루어진 후라, 웬만한 실험성을 보인다 해서 놀라지도 않고, 시를 쓰는 사람뿐만 아니라 읽는 사람조차 아주 유연한 태도를 갖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분명 우리 시단이 발전했다는 증거입니다.
박남철 시인의 실험은 아주 오랫동안 지속되었습니다. 등단 이후 지금까지 그는 계속하여 실험적인 태도를 견지해왔습니다. 지금까지 그가 출간한 시집 전부에서 그는 새로운 실험을 이어갔습니다. 이와 같은 그의 시집으로는 첫 시집 『지상의 인간』(1984) 이외에 『반사회적 고찰』(1988), 『용의 모습으로』(1990), 『러시아 패설』(1991), 『자본에 살으리랏다』(1998) 등이 있습니다. 그는 이 시집들을 통하여 그동안 우리 시단에서 만나볼 수 없었던, 참으로 다채로운 형태의 시들을 창출해냈습니다. 그것을 여기서 말로 다 설명하기가 곤란하군요.
한 가지 아주 흥미로운 예를 든다면, 그는 『용의 모습으로』라는 시집을 ‘비평시집’이라고 이름 붙인 후, 이 시집 속에 수록된 작품들을 새로운 방식으로 구성했습니다. 그가 구성한 새로운 방식이란, 본인이 읽은 감동적이 타 시인의 작품 한 편을 옮겨놓고, 그것에 대한 평론가들의 평론을 중 역시 인상 깊은 부분을 아래에 옮겨놓고, 다음으로 그의 소견 한두 마디를 짧게 붙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흥미로운 것은, 이렇게 구성된 시가 서로 어울려 감동을 자아낸다는 것입니다. 저는 박남철의 이런 실험정신을 높이 평가합니다.
박남철 시인은 자신의 이런 실험 행위를 제대로 수용하지 못하는 독자들에게 답답한 느낌을 가졌나 봅니다. 원래 앞자리에서 실험정신을 불태워가는 사람들이란, 어느 시대이건 외롭게 마련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말 그대로 보통 사람들이기 때문에 지극히 상식적인 것을 좋아할 뿐, 아니라 실험정신 속에 깃들인 깊은 의미를 애써 이해하려고 들지 않습니다. 이상이 1930년대에 <오감도>를 이태준이 문화부장으로 있던 《조선중앙일보》에 연재하다가 도중하차당한 것도 다 이런 독자들의 보수성 때문이지요. 그렇다고 해서 독자들을 무시할 수도 없습니다. 모든 시작詩作 행위는 누군가의 대화를 나누고 싶다는 강렬한 소망 때문에 생겨난 것이니까요.
박남철 시인은 자신의 실험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독자들을 향하여 그다운 실험정신을 동원하여 한 편의 시를 썼습니다. 그 시가 바로 <독자놈 길들이기>입니다. 이 시는 그의 첫 시집 『지상의 인간』 속에 들어 있습니다.
내 詩에 대하여 의아해하는 구시대의 독자놈들에게 –차렷, 열중쉬엇, 차렷,
이 좆만한 놈들이……
차렷, 열중쉬엇, 차렷, 열중쉬엇, 정신차렷, 차렷, ○○, 차렷, 헤쳐모엿!
이 좆만한 놈들이……
헤쳐모엿.
(야 이좆만한 놈들아, 느네들 정말 그 따위로들밖에 정신 못 차리겠어, 엉?)
차렷, 열중쉬엇, 차렷, 열중쉬엇, 차렷……
이게 박남철 시인의 시 <독자놈 길들이기>의 전문입니다. 황당하다고 생각하셨을지 모르겠습니다. 충격을 받았을지 모르겠습니다. 기분 나쁘다며 고개를 돌렸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할 수 없습니다. 박남철은 독자들이 시인과 함께 성장하지 않는 한, 우리 시의 진정한 발전은 이루어질 수 없다고 생각하며 이 시를 썼을 테니까요.
흥분됐던 마음을 가라앉히고 시인의 입장을 이해해주려는 마음으로 <독자놈 길들이기>라는 시를 감상해봅시다. 그러면 의외로 커다란 소득을 얻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박남철 시인의 시 <독자놈 길들이기>에서 먼저 주목할 것은 그의 자신만만한, 그리고 당당한 태도입니다. 우리 시대가 상업적인 소비사회로 변해가면서 시인들이 독자의 비위나 맞추려고 비굴한 자세를 취하는 일이 점점 많아졌습니다. 독자들의 말초신경이나 자극해서 소위 베스트셀러의 반열에 들어보려고 하는 사람들이 늘어났습니다. 물론 시인은 독자를 존중해야 마땅합니다. 그것은 독자에 대한 예의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독자에 대한 아부나 아첨 혹은 독자와의 야합이어서는 곤란합니다. 시인은 분명한 자신의 목소리와 입장을 견지하며 독자들과 진심으로 대화해야 합니다. 이렇게 볼 때, 박남철 시인이 독자에게 보여준 자신만만하고 당당한 태도는 호감을 주기에 충분합니다. 그는 자신이 “구시대의 독자”라고 지칭한 사람들을 교정시키고 싶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시의 바다로 나아가고 싶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시의 바다로 나아가고 싶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시의 바다로 나아가고 싶은 것입니다. 박남철 시인의 이런 자신만만하고 당당한 태도는 독자들을 “독자놈들”이라고 표현했다 해도 그것이 욕설이나 하대가 아니라 친근감의 표시라는 느낌을 줍니다.
다음으로 박남철 시인의 시 <독자놈들 길들이기>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그가 독자들을 길들이는 방식입니다 여러분들도 시를 읽으면서 느끼셨겠지만, 박남철 시인은 아주 독특한 방식으로 독자들을 길들입니다. 그가 사용한 독특한 방식이란, 군대식 훈련 방법을 말합니다. 그는 욕설까지 섞어가며 개성보다 획일성을 중시하는 군대식 훈련법을 원용했습니다. 지난 1970년대와 1980년대를 거쳐온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그 시대는 민간인들에게도 군대식 정신이 요구되던 때였습니다. 대통령도 사관학교 출신이었고, 그들이 정권을 얻는 방법도 무사적이었으며, 그들이 국민을 다스리는 방법도 명령하달식이었습니다. 그 시대의 지배층은 ‘열린 국민’을 ‘닫힌 국민’으로 만들고자 했습니다. 이런 가운데서 민주주의와 민주정신을 소망하는 사람들은 불만을 터뜨렸고, 그들은 민주사회가 하루 빨리 다가오기를 기원하며 다양한 방식으로 저항했습니다. 군인과 군인정신은 나라를 수호하는 데만 쓰이기를 바랐습니다. 여러분들은 제가 말한 민주사회의 정신을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너무 질문이 넓고 또 추상적인가요? 그래도 민주사회의 정신 중 가장 본질적인 것이 무엇인가를 잘 따져보면, 답이 나올 것이라 생각합니다. 성미 급한 제가 먼저 이에 대한 답을 말하자면, 민주사회의 본질이 되는 정신이란 자유와 다양성 그리고 대화의 정신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지난 시절, 우리 사회에서 이 정신은 제대로 꽃피우지 못했습니다. 박남철이 독자들을 길들이겠다고 말하면서 사용한 군대식 훈련법은 일차적으로 이런 시대상을 꼬집은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는 군대식 훈련법을 사용하여 군대식 사회상을 비판한 것입니다. 하지만 박남철의 관심은 여기에 그친 것이 아닙니다. 그는 시대를 비판하면서 동시에, 시라고 하면 <진달래꽃>이나 <님의 침묵> 같은 시만 떠올리는 독자, 시에는 온통 사랑시나 고운 서정시만 있는 줄 아는 독자, 시라고 하는 것은 적당히 행 구분이나 하면 되는 줄 아는 독자, 시를 쓰거나 읽는 일이 바쁜 세상의 여가 활동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독자. 시에서 소년소녀 적의 낭만과 이상과 꿈 그리고 감상만을 기대하는 독자. 시 감상의 안목이 저 1920년대적 감성에서 그쳐버린 독자, 이런 독자들을 겨냥한 것입니다. 그가 말하는 바 “구시대의 독자”에 해당되는 이런 수준의 독자들을 그는 어떻게 해서든지 개안시키려고 합니다. 그들을 ‘닫힌 독자’에서 ‘열린 독자’로 만들려고 합니다. 이런 점에서 당시의 지배층과 박남철 시인은 다 같이 군대식 훈련법을 사용했지만, 서로 추구하는 바는 정반대였습니다. 전자는 훈련을 통하여 다소곳하고 순진한 시민을 만들어내기를 원했지만, 후자는 자기 표현적이고 개방적인 독자를 만들어내기를 원했습니다.
셋째로 박남철 시인의 시 <독자놈 길들이기>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기존의 보수적인 시 문법을 파괴하고 박남철다운 형식 실험을 감행하였다는 점입니다. 아마도 박남철 시인의 이 시를 읽는 독자 중에는, ‘이것도 시가 될 수 있느냐’며 불만을 터뜨린 사람도 있을 겁니다. 극단적으로 말한다면 시의 개념 정의를 한다는 건 불가능합니다. 1917년 4월 10일, 뉴욕 그랜드 센트럴 갤러리에서 열린 앙데팡당전에서 프랑스 미술가 뒤샹이 남자 변소에서 양변기를 떼어다놓고 ‘샘물’이란 제목을 붙여 미술품이라고 우겼던 것처럼, 어떤 형식의 시도 가능하니까요 실제로 시가 무엇이냐는 질문 앞에서 우리는 시인이 시라고 주장하면 그게 시라는 대답밖에 내놓을 수가 없습니다. 이 세상에 인간이 만든 문화 양식 중 고정된 양식은 하나도 없으니까요 이렇게 볼 때, 박남철 시인의 시 <독자놈 길들이기>는 나무랄 데 없는 시입니다. 다만 그는 기존의 전통적인 시작 문법을 와해시키려고 했을 뿐입니다. 기존의 것을 와해시키지 않고 어떻게 새로운 세계가 창조되겠습니까? 창조만이 능사는 아니나, 변덕스럽고 호기심 많은 인간들은 새로운 세계를 계속하여 창조해 나아갑니다.
넷째로 박남철 시인의 시 <독자놈 길들이기>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진정 좋은 독자가 된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에 대하여 진지한 고민을 하게 만든다는 점입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독자들은 아주 조용했습니다. 그들은 시인을 교사와 같은 존재로, 자신들을 학생과 같은 존재로 마음속에 설정하였습니다. 시인들의 시는 교과서에 실리기도 하였습니다. 교과서가 가진 권위를 생각한다면, 시인이란 보통 사람 이상의 존재였습니다. 시인들에게 붙은 권위는, 만약 권위를 즐기고자 하는 시인이 있다면, 꽤 즐거운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시대는 달라졌습니다. 포스트모더니즘시대니, 해체주의시대니, 탈근대의 시대니 하는 말들을 들으셨을 것입니다. 이런 말들이 의미하는 것의 핵심은 시인과 독자로 상정되는 인간과 인간 사이가 이제는 수직적 서열 관계가 아니라 수평적 대화 관계를 형성하게 되었고, 그 가운데서 안과 바깥 혹은 위와 아래로 구분되는 가치 차별적 이분법은 와해되었다는 것입니다. 누구도 중심일 수 없는 시대, 다시 말하자면 대화적 수평사회가 온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독자중심비평이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독자는 수동적인 수혜자나 일방적인 소비자가 아니라, 시인에게 말을 들려주는 능동적 참여자이자 재구성적 생산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관점에서 ‘쓰는 것은 곧 읽는 것이다’ 혹은 ‘읽는 것은 곧 쓰는 것이다’라는 명제가 등장했습니다. 독자들이 시를 읽는다는 것은 곧 그 나름의 감상문을 창조하는 행위라고, 이 명제는 가리킵니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시인의 자세도 바뀌어야 하지만 독자의 자세나 능력도 달라져야 합니다. 박남철 시인은 그의 시를 읽는 독자가 이런 좋은 독자가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와 진정 대화를 나눌 수 있고, 상호간의 일에 서로 생산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독자를 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이 땅의 최근 시에 독자들이 좀더 많은 관심을 가졌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많은 독자들이 다른 분야에서는 그렇지 않은 것 같은데, 시 분야에서만은 시에 대한 기대나 안목이 1920년대 정도에서 멈춰버린 듯한 느낌을 받을 때가 많습니다. 조금 양보한다 해도 윤동주가 활동하던 1940년대 정도에서 멈춰버린 듯한 느낌입니다. 해방 후, 우리 사회는 문화적으로,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어마어마한 변화를 겪었습니다. 부잣집에나 어쩌다 있던 전화기를 전 국민이 손에 들고 다니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신라의 달밤>을 라디오로 청취하던 시대에서 ‘서태지와 아이들’의 랩송을 초대형 컬러 텔레비전으로 감상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유랑극단의 신파극을 장거리에서 관람하던 시대에서 집집마다 비디오 장치를 해놓고 안방에 앉아 영화감상을 하는 시대로 변했습니다. 쪽을 찌던 아낙네들의 칠흑 같은 머리가 온통 색색으로 염색하며 개성을 뽐내는 새로운 시대로 들어왔습니다. 그 사이 우리 시도 이들만큼의 변화와 발전을 계속해왔습니다. 시라고 하는 것 역시 사회적 문화 현상의 한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기 때문에, 사회의 변화에 따라 어마어마한 변천을 이루어온 것이죠. 그러므로 좋은 독자가 되기를 원하는 분들은, ‘서태지와 아이들’의 노래를 좋아하려고 노력하는 것처럼, 달라진 우리 시대의 시를 읽고 그것을 좋아하려고 애써야 할 것입니다. 아마도 박남철 시인이 <독자놈 길들이기>와 같은 시를 쓴 것은, 가수는 ‘H.O.T’식의 노래를 부르는데, 청중은 모두 <신라의 달밤>과 같은 정서에 고착된 경우처럼, 독자들과 크나큰 거리감을 느꼈고 그것을 메우고 싶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박남철 시인이 또다시 독자놈들 길들이겠다고 나서지 않게하려면, 빨리 좋은 독자의 자격을 갖추어야 할 것입니다. 좋은 독자가 된다면 그만큼 시 감상의 폭이 넓어지고 그 깊이도 더해지겠지요. 시란 인간의 승화된 욕망을 표현하는 양식이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좋은 독자가 되어 다양한 형태의 시와 친해진다면, 여러분들의 영혼은 한결 고양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고양된 영혼을 생각한다는 것은 참으로 가슴 설레는 일입니다.
―정효구, 『시 읽는 기쁨』, 작가정신, 2007.
첫댓글 어느 땐 참 뭐한 시어, 그러나 지금은 나도 재미나게 아니 시원하게 느껴지네요.
시 감상은 독자의 자유 상상에 맡기라고 하지만 자기 시의 독자를 길들이겠다고
열중 시엇, 차렷! 이건 군대식 웃음 먼저 나오는 유쾌해지는 시네요. 그래서 나도 또한 하하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