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손자와
허준 선생을 만나러 가는 길은 참으로 뿌듯한 일
이다.
컴퓨터 시대에 방구석에 앉아 게임이나 즐기려
고 밖에 나가기를 극도로 싫어하는 아이들이 많
은 세상에 뭔 조화로, 할아버지와 취미가 같아
역사탐방이라니 그 자체가 대견스러울 뿐이다.
⌜동의보감東醫寶鑑」의 집필은 허준 선생이 총
책임자가 되고 여러 사람들이 참여하게 되었는
데, 정유재란(丁酉再亂: 조선시대, 임진왜란의 화
의가 깨지고, 1597년 왜군이 다시 쳐들어 온 사
건)이 일어나면서 의서 편찬에 참여했던 의원들
이 여러 곳으로 흩어졌기 때문에 중단되었다.
그 후,
선조는 500권의 의서를 내주면서 허준 단독으로
‘동의보감’을 편찬하게 하여 완성이 늦어질 수 밖
에 없었다.
‘동의보감’의 완성을 누구보다 기다렸던 선조가
지병으로 승하하자 다른 대신들이 선조 승하의
책임을 물어 허준을 귀양 보냈다.
정조에게 촉망을 받던 정약용이 임금이 승하하자
강진으로 유배당한 것처럼.
이때,
허준은 큰 시련을 겪었지만 그 대신 의서의 집필
에 더욱 많은 시간을 할애 할 수 있었고, 마침내
그 노력이 결실을 맺어 조선 의학의 전통을 빛낼
‘보배로운 본보기’ 라는 ‘동의보감’ 25권이 완성
되었다.
정약용이 유배 간 강진 다산초당에서 목민심서
등 500권 이상을 집필한 것처럼, 어쩜 똑같을까.
난세의 영웅은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역량이 특
출한가 보다.
‘허준 박물관’ 근처에 양천 허씨(陽川 許氏)의 시
조인 허선문(許宣文)이 출생한 곳이라는 설화가
전하는 ‘허가바위(서울시 기념물 제11호)’가 있다.
'허가바위"
이 바위에 동굴이 뚫려 있어 ‘공암孔巖 바위’
라고도 불리는데 어른 10명 이상이 들어갈 수
있는 규모다.
허가바위는 둥굴이 뚫려 있어 '공암바위'라고도 한다.
이곳이 그 유명한 허준 선생의 ‘동의보감’ 집필
처다.
고려가 건국될 무렵 이곳에는 허선문이라는
이가 살았다고 하는데 나이가 90이 지났는데도
고려 태조 왕건을 섬겼다.
왕건이 견훤을 정벌할 때 그가 군사들을 격려
한 공이 커 공암의 촌주(村主)로 임명되었다.
그 후,
그의 자손들이 공암 허씨(孔巖許氏)가 되었는데
신라시대에는 이곳을 공암이라 불렀고, 고려시
대에는 양천이라 불렀으므로 공암 허씨는 양천
허씨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조선시대,
이곳에서 〈동의보감〉을 저술한 허준, 〈홍길동전〉
을 지은 허균, 여류 천재시인 허난설헌 등이 모두
양천 허씨다.
바둑 팬이라면 기억하실 거다.
얼마 전에 끝난 강릉 허난설헌 생가에서 열린
‘난설헌배 여자 바둑대회’.
가문의 영광은 어느 시대나 존재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