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와 도덕 그리고 신앙
판관 2,11-19; 마태 19,16-22 / 성 비오 10세 교황 기념일; 2023.8.21.; 이기우 신부
이스라엘 백성은 사십 년 광야 생활 끝에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여호수아와 함께 그토록 철썩같이 하느님께 충성을 바치겠다는 맹세를 해 놓고서도 세월이 흐르자 바알과 아스타롯 등 이방민족들의 신들을 섬기고 말았습니다. 그러한 우상숭배로 타락한 벌은 약탈자들에게 비참한 지배를 당하며 억압받는 굴종의 삶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모세와 여호수아의 뒤를 잇는 지도자로서 판관들을 세워주셨지만, 그 판관들은 우상숭배에 빠진 백성이 처한 위험을 막을 수만 있었을 뿐 백성으로 하여금 신앙을 되찾게 하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이 판관들은 평시에는 재판관 노릇을 하며 백성들의 송사를 처리해 주어 분쟁을 해결해 주고, 전시에는 지휘관 노릇을 통해 외적으로부터 방어를 했을 뿐, 신앙을 지도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습니다.
그 결과의 최대한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을 찾아온 젊은이였습니다. 그는 십계명을 철저히 지켜왔음은 물론 이웃에게 자선을 베푸는 일에도 너그러웠던 부자 청년이었습니다. 그는 영원한 생명이라는 진리를 추구해 왔을 정도로 종교적인 사람이었고, 어려서부터 십계명을 철저하게 지켜왔을 정도로 도덕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예수님을 만난 후 슬퍼하며 떠나갔습니다. 왜냐하면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고 나서 나를 따라라.”(마태 19,21) 하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는데 재산이 많았던 그는 그 말씀에 따라서 재산을 나눌 생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으로써 예수님께서는 이웃 사랑이란 우리가 가진 여유로운 재산 중의 일부로 자선을 베풀고, 그러한 행위를 통해 우리도 불쌍하고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었다는 도덕적 자족감을 채우는 행동이 아니라 자신에게 필요하고 소중한 것도 더 필요한 이에게 기꺼이 나누어줄 수 있는 희생임을 일깨워 주셨습니다. 외면적인 종교생활이나 자기중심적인 윤리 실천 정도로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 신앙에 이르기에는 턱없이 모자란다는 뜻입니다. 이는 판관 시대 조상들이 겉으로는 하느님께 대해 충실한 신앙을 다짐해 왔으면서도 실제로는 우상들을 숭배하는 길에 빠져들었던 것처럼, 그도 역시 계명을 철저하게 지켜왔다고 하지만 사실은 재물을 섬기는 길에 빠져있음을 스스로 입증한 셈이라 하겠습니다.
박해시대 우리 신앙 선조들이 지녔던 성모 신심은 치명 순간에 성모 마리아의 이름을 부르거나 평소에 묵주 기도를 바치며 하루빨리 박해가 끝나게 해 달라고 비는 것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박해로 말미암아 모은 재산을 다 빼앗겨야 했고, 정든 고향을 떠나야 했으며, 사회적 지위를 박탈당하고 천민처럼 무시당하고 죄인으로 내몰리는 처지를 감수할 뿐만 아니라, 교우촌을 이루어서 자유로이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게 된 처지를 감사할 줄 아는 사회적 의식을 수반하였습니다. 즉, 교우촌에서의 궁핍한 살림 속에서도 가난한 교우는 물론 주변의 외인이나 걸인이라도 먹을 것을 나눌 줄 알았고, 아는 교우가 치명하면 그들의 자녀들을 데려다가 대부 대모가 되어 대신 길러주기도 하는 사회적 행동을 실천하였습니다. 성모 신심은 이처럼 하느님을 모르던 당시 조선 사회와는 대조적인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원동력이었으며, 자기중심적으로 이루어지기 쉬운 사랑을 말 그대로의 신앙으로 승화시켜주는 힘이었습니다.
오늘 교회가 기리는 성인은 19세기에 교회의 질서와 신자들의 신앙생활을 그리스도 안에서 재정립하고자 교회법을 현대화시키고 성무일도서도 개정하는 노력을 했으며, 교회를 위협하는 모든 오류들에 맞섰던 비오 10세 교황입니다. 그리스도께로 돌아간다 함은 교회와 신앙의 정체성을 회복하려는 노력입니다. 한국의 가톨릭 신앙인들은 비오 10세의 신앙과 노력을 본받아, 우리의 뿌리인 박해시대 신앙 선조들의 신앙생활을 기억하고 본받아야 합니다. 이는 서구화에 치우쳤던 지난 백 년 간의 노력에다가 초창길 백 년의 초창기 토착화 노력을 회복하려는 노력입니다. 즉, 사실상 외래 종교의 도입으로 고구려 시대 이해로 하느님 신앙이 지하로 숨어들어가서 무속신앙으로 전락하게 만들었다가 18세기에 천주교가 들어옴으로써 비로소 하느님을 올바르게 믿는 신앙의 역사가 박해시대 교우촌에서 회복되게 되었던 그 놀라운 역사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정체성을 회복하는 일은 동시에 민족 전통의 정체성을 회복하는 일과 같은 일입니다.
신앙 토착화의 노력을 촉구하는 외국인 현자들이 있습니다. 우리 민족의 뿌리는 힘을 추구했던 역사가 아니라 뜻을 실현하고자 노력했던 역사임을 일깨워준 위인들입니다. 문명 연구의 대가로 평가받는 영국의 아놀드 토인비는 ‘홍익인간(弘益人間)’과 ‘재세이화(在世理化)’, 즉 “널리 인간 세상을 이롭게 하기 위하여 진리에 따라서 세상을 다스리라.”는 뜻을 민족사 초창기부터 세웠던 한민족이 언젠가 인류를 정신적으로 이끌어가리라고 내다보았습니다. 더 있습니다. 루마니아 출신 정교회 사제이자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작가 게오르규 또한 조만간 평화를 사랑한 한민족이 일어나서 ‘동방의 빛’으로 떠오르리라고 축복해 주었습니다.
서양 문명의 명암을 다 들여다 본 혜안을 가진 이 두 역사적 위인이 말하는 바 한민족이 추구해 온 ‘뜻’이란 복음적이고 윤리적인 가치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교우 여러분, 신앙의 정통성을 회복하는 일과 민족의 정통성을 회복하는 일은 힘이 아니라 가치를 추구하는 한 가지 일입니다. 겉치레 종교보다, 자기만족적인 도덕보다 하느님을 섬기는 신앙 진리를 추구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