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해는 군(郡)이었다.
하도 자주 바뀐 행정구역 개편으로 인해 지금은 경북 울진군 평해읍이지만
오랜 세월 강원도땅이었으며 울진과 대등한 군이었다.
평해향교가 있는 이유다(아래 그림)
평해에서 5리 옛 평해대로의 달효역(達孝驛)은 월송1리 달효마을이다.(아래 그림 1, 2)
일명 '달로'마을은 월송(月松)의 풀이와 변음의 결과란다.
추수가 완료된 탓도 있지만 여느 시골마을과 다름 없이 사람 대면하기가 쉬운 일이 아니다.
낮은 담장(그나마 다행) 너머로 기웃거려 보지만 툇마루 아래 신발이 드물다.
아이 울음소리가 그친지 오래인 마을들이 평화로운 듯 한 겉보기와 달리 삭막하다.
절차탁마(切磋琢磨)!
평해공업고등학교 교문 안에 떡 버리고 서서 등교학생들을 경각시키고(Attention) 있다.
如切如磋 如琢如磨(여절여차 여탁여마-논어)
갈고 닦아 빛을 내라.
이 학교가 표방하는 교육지표인가 보다.
우리나라 황씨의 본산(本山)이 이곳 평해 월송리다.
중국 후한 광무제때(AD28년) 구대림(丘大林)과 함께 교지국(交趾國)에 사신으로 가던중 동해에서
풍랑으로 평해 월송포에 표착하여 정착한 유신 황락(儒臣黃洛)이 도시조(都始祖)다.(유허비 빔문)
황락의 세 아들이 평해(平海), 장수(長水), 창원(昌原) 등의 시조가 되었다.
본관은 비록 각각이나 황씨는 동근동조(同根同祖)라는 것.
월송정 입구 송림에 자리잡은 黃氏祭壇園과 평해황씨 대종회, 도시조 유허비(아래 그림 1, 2)
北川橋碑!
백성의 불편을 해결해 주려는 관(官)의 배려가 아니고 민(民)이 스스로 건립한 후
그 내력을 적은 비(碑)다.
민을 위한 관이 아니고 민 위에 군림하는 관에 대한 민의 역사적 고발장에 다름 아니다.
백암 김제(白岩金濟), 물제 손순효(勿齊孫舜孝) 양현(兩賢)과 백계 김희(佰溪金喜)를
봉향(奉享)하는 서원이다
白岩은 불사이군(不事二君)의 려말(麗末)충신으로 두문동칠십이현(賢)중 한 분이다.
勿齊는 세조 ~ 성종때의 문신으로 성리학의 대가였으며 화죽(畵竹)에 능했다고.
佰溪는 임진왜란때 의병장으로 상주 단밀(지금은 의성)에서 순절.
이조 19대 숙종(肅宗)은 망양정에 올라보고 관동제일루(關東第一樓)라는
친필 현액을 내렸다.
시도 지었으며 22대 정조(正祖)도 그랬다(御製詩)
원재 정추(圓齋鄭樞), 매월당 김시습(梅月堂金時習)도 다녀가며 한 수씩 남겼다.
송강 정철(松江鄭澈)은 관동별곡(關東別曲)에 장시를 남겼다.
거쳐가지 않은 내로라 하는 시인 묵객이 몇이나 되겠는가.
그런데, 망양정이 두 번이나 이사했지만 동해안에 망양정 아닌 곳이 몇이나 되겠는가.
아무데나 정자 하나 세우면 곧 망양정이다.
정면에 보이는 망양정후게소도 최고의 망양정 자리다.
두번째 망양정터에 유허비와 시비(詩碑)가 서있다.
흔히 영덕대게라 말한다.
그리고 대게의 '대'를 大, 즉 큰게라는 뜻으로 알고 있는 듯.
그러나 대게의 본고장은 울진이란다.
대게의 원조어항으로 울진군 후포면 후포항을 꼽는다.
지리적 문제로 운송 여건이 불리했던 시절에 서울을 비롯해 대구, 부산, 포항, 안동 동
대, 중도시로 공급하기 위해 교통이 편리한 영덕을 중간 집하지로 해서 반출했다는 것.
그래서 오리진(원산지) 대신 중간 집하지인 영덕의 이름이 붙어 영덕게로 인식됐을 뿐
울진대게라는 것이다.
평해읍 거일2리가 울진대게의 원조마을이란다.
마을 지형이 '게알'같다 해서 붙여진 게알이 기알 - 거일로 변음되었다고.
울진군 당국은 대게의 본적지뿐 아니라 현주소도 바로잡기 위하여 심혈을 기울이는지
곳곳에 대게 홍보시설을 설치하고 있다(아래 그림).
대게는 큰게라는 뜻이 아니고 다리의 모양이 대나무처럼 곧고 단단하게 뻗어 있어서
대(竹)게라 했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