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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8년, 봄
휴식을 위해 정자 희우정(喜雨亭)을 방문한
임금 세종과 집현전 학자들.
자리에 동행한 동궁(東宮)은
신하들에게 한 접시의 (진귀한 과일)을
하사(下賜)한다.
과일이 모두 없어지자 모습을 드러낸
문종의 짧은 詩
향나무는 코에만 향긋하고
기름진 고기는 입에만 맛있네
동정귤(洞庭橘)을 가장 사랑하니
코에도 향긋하고 입에도 달기 때문이지
(문종의 귤시ㆍ열성어재수록)
중국 남부 운남지역이 원산지로 알려졌으며
삼국시대 초기에 국내 유입 추정
"탐라에서 매년 진상하는 귤의 수량을 일백 포로 늘리도록 고쳐 정한다"
(고려사 1052년 3월)
'감귤은 종묘에 제사를 지내고....
빈객(賓客)을 접대하므로 그 쓰임이 매우
중요하다.'
(세조실록ㆍ세조1년 12원25일)
⬆️동의보감에도 약효가 자세히~~
제주에서만 생산되고 그 쓸모가 귀해 왕족ㆍ관리들만 먹을 수 있었던 감귤.
때문에 감귤의 재배는 조정에서
엄격히 관리했다. (탐라순력도ㆍ감귤봉전)
제주 목사 이수동이 1526년
귤의 도난을 막고 재배를 권장하기 위하여
다섯 방호소에 과원을 설치하고
군사로 하여금 지키게 했다. (탐라지)
"제주의 감귤나무는 매년 심고 접붙이며....
해마다 그 수를 조사하여 보고하도록 한다."
(경국대전)
그리고
매년 감귤이 진상되는 시기에는
성균관 사학(四學) 유생을 대상으로 열린 특별한 과거시험이 시행됐다......
❗ 황감제((黃柑製)
일반 과거와 달리 단 1명만을 선발하여
단 1차례로 관직이 주어지는 특급 이벤트로
참여 유생들에게 귤을 나누어주며
귀한 과일의 진상을 축하하는 행사였다.
그러나~~
조정에서 귀하게 여길수록 더욱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는 제주 주민들.
공물로 바쳐야 할 감귤의 수량은
국가에서 운영하는 과원만으로 충당하기 어려웠고
때문에 관리들은 일반민가의 귤나무에까지
횡포를 부리기 시작했다.
해마다 7.8월이면 목사는 민가를 순찰하며 귤의 열매를 하나씩 표시하여
장부에 적어 두었다가
귤이 익을때면 장부의 수대로 바치게 하고,
그 수량을 채우지 못하면 백성들에게
배상하도록 했다.
"백성들은 나무 심기를 즐겨하지 읺았고
심지어는 나무를 뽑아버리기까지 했다."
(실록 세조1년 12월 25일)
그러자
나무를 없앴다며 다시 형벌을 가한다.
계속되는 횡포에서 벗어나기 위해
농민들은 나무에 끓는 물을 부어 죽이는 방법까지 고안하게 된다.
조정에는 기쁨 이요
백성에게는 독약과도 같았던
감귤 진상 제도는...
1894년 (고종 31년) 갑오개혁으로
공물(供物)제도가 폐지되면서 사라지고
1960년 초기부터 재배지가 확장,
1970년대에 들어와
지금의 대량소비 시대로 접어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