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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유래는 오래 되었다.
황제(黃帝)는 일찌기 염제(炎帝)와 싸웠고
전욱(顓頊)은 일찌기 공공(共工)과 싸웠다.
황제는 탁록(涿鹿)의 들에서 전쟁을 했고
요임금은 단수(丹水)의 포구에서 싸웠으며
순임금은 이민족인 유묘(有苗)를 정벌했고
계(啓)는 유호(有扈)부족을 공격했다.
전쟁은 포학함을 금지하고
반란을 토벌하는 것이다.
염제가 화재를 일으켰기 때문에
황제가 그를 생포했고
공공이 수해를 일으켰기 때문에
전욱이 그를 죽였던 것이다
- 회남자의 병략훈(兵略訓) -
회남자에서
고대 중국에서 있었던 전쟁들에 관하여
이설이 있기는 하지만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주는 것 같아 옮겨보았습니다.
아쉽게도 제가 읽고 있는 회남자는
원문이 전혀 없고
한글로 풀어쓴 내용만 나와 있습니다.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일단은 그대로 받아 씁니다.
모두 여섯번의 전쟁이 나오는데
임의로 여섯 번의 전쟁을
두 가지로 나눈다면
염제와 황제의 전쟁,
전욱과 공공의 전쟁,
황제와 치우의 전쟁이 한 가지이고
둘은 요임금과 순임금, 계(啓)와
관련된 전쟁입니다.
앞의 전쟁들은 황제가
천상과 천하의 패권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전쟁이고, 뒤에 나오는 전쟁들은
그 후에 왕권계승과 관련된 전쟁들입니다.
*
회남자는 한 무제 때
회남왕이었던 유안(劉安)이
여러 논객들로 하여금 저술하게 한 책으로
무제에게 바쳐진 것이라 합니다.
여러사람의 저술인 까닭에
다양한 내용을 포함하며 잡가로 분류된다는군요.
읽어보면 도가(道家) 냄새가 물씬 납니다.
염제와 황제의 전쟁,
판천지전(阪泉之戰, Battle of Banquan)
소전(少典)은
유교씨(有蟜氏)의 딸을 맞아
황제와 염제를 낳았다.
소전취유교녀(少典娶有蟜氏女),
생황제염제(生黃帝炎帝)
- 좌구명의 국어(國語) -
염제와 황제는 형제간이랍니다.
처음부터 형제였는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그 부분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는가 봅니다.
아무튼 염제와 황제는
천하를 반으로 나누어 다스렸답니다.
그런데 황제는 어진 정치를 펼쳤으나
염제가 따르지 않아
판천의 들(阪泉之野)에서 전쟁을 하였고
염제가 패했다고 합니다.
염제가 바로
신농씨이자 강씨(姜氏) 부족의 수장으로
호를 열산씨(烈山氏)라 했다.
그는 소전(少典)과
그의 아내 교씨(蟜氏) 사이에서 태어나
처음에는 강수(姜水) 유역에 살다가
동쪽으로 세력을 확장하여
마침내 중원에 이르렀다.
일찍이 판천(版泉)의 들에서
황제와 싸웠으나 패했다.
언젠가 하늘에서 곡식비가 내렸는데
염제가 그 곡식들을 땅에 심으니
오곡이 풍성하고 온갖 열매가 열렸다.
그것을 먹은 사람은 늙어도 죽지 않았다.
그래서 염제를 신령한 농군이라는 뜻으로
신농(神農)이라고 한다
- 산해경 북차삼경 -
헌원 시대에 이르러 신농씨의 후세가 약해졌다.
제후들은 서로 침략하고 공격하면서
백관(百官)들을 잔혹하게 학대했으나
신농씨는 능히 정벌할 수 없었다.
이때 헌원이 방패와 창을 쓰는 법을 익혀서
조공하지 않는 자들을 정벌하자
제후들은 모두 와서 복종했다.
그러나 치우(蚩尤)만은 포악하기 그지없어
정벌할 수 없었다.
염제가 제후들을 쳐서 없애려 하자
제후들은 모두 헌원에게로 귀의했다.
...
이에 헌원은 판천의 들에서 염제와 싸웠는데
세 번 싸운 뒤에야 뜻을 이루었다.
- 사기 오제본기(五帝本記) 황제편 -
*
사기에서는 헌원이 염제와 결전을
벌인 것은 신농씨가 약해졌기 때문이라는군요.
때문에 헌원이 방패와 창을 쓰는 법을 익혀서
제후들을 정복했고
염제가 제후들을 쳐서 없애려 하자
제후들이 헌원에게 귀의했으며
헌원은 덕을 닦고 군대를 정돈해
염제에게 도전장을 낸 것으로 읽혀집니다.
*
앞의 회남자에서 인용한 글에
염제가 화재를 일으켰기 때문에
황제가 그를 생포했다, 라는
구절 때문일까요.
일설에 염제는 화공법을 썼는데
그 자신이 태양신이기도 했거나와
불의 신 축융이 그의 수하였기 때문에
화공이 더 유력했다는 것이지요.
*
그러나 황제는
웅비비휴추호(熊羆貔貅貙虎),
다시 말해서
곰, 말곰, 비, 휴, 이리, 호랑이들을
가르쳐 전쟁이 임했다고 합니다.
비(貔)와 휴(貅)는
범의 일종인 것 같습니다.
비휴(貔貅)는 곰같기도 하고 범같기도 한
전설상의 맹수를 뜻한다고 합니다.
이상한 동물들이 허다한
산해경에도 나오지 않는군요.
정말 그랬다면
대단한 위세였을 것 같습니다.
일설에는 그런 토템을 지닌 여러 부족들을
뜻한다고 풀이하기도 한답니다.
*
황제가 뇌우(雷雨)의 신이라서
화공법을 염려하지 않았다는 설도 있는데
그것은 확인해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수신(水神)인 공공(共工)은
화신(火神) 축융의 아들이고
황제의 손자인 전욱과 대적하였으며
풍백(風伯)과 우사(雨師)는
치우(蚩尤)편에 가담하여
황제에 대항한 신들입니다.
산해경 남산경에는
신농씨 때 비를 다스리는 우사(雨師)는
적송자(赤松子)였다고 합니다.
적송자는 신농씨의 딸이 그를 따라
신선이 되었다지요.
산해경 대황동경에 의하면
응룡이 비를 내리게 하는 능력이 있었다는군요.
황제와 치우간의 전쟁에서
한 몫을 담당했다고 합니다.
결국 황제가 화공에 대응할 수 있는 것은
응룡 뿐이 아니었던가 싶습니다.

*
판천의 전투가 얼마나 격렬했던지
병사들이 흘린 피로 인해
낭아봉(狼牙捧)이 둥둥 떠다녔다고도 합니다.
낭(狼)은 이리를, 아(牙)는 어금니를 뜻하니
이리의 어금니처럼 날카로운 것들을
긴 봉(捧)에 끄트머리에
삐죽삐죽하게 심은 무기가 낭아봉이랍니다.
전쟁터의 참상을 이야기할 때는
대개 과장이 있지만
판천의 전투 역시 전쟁인 까닭에
죽고 죽이는 살상이 없었다면 거짓이겠지요.
아마도 처절한 전쟁이었을 것입니다.
고대 뿐만 아니라 지금 시대에도
전쟁은 살상과 파괴를 초래하기에
그 무엇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는 행위입니다.
하여간
신화 속의 판천의 전투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매우 적습니다.
탁록의 전투에 가리워져 그런 것일까요,
아니면 일부러 그런 것일까요?
세월이 그렇게 만든 것일까요?
*
각설하고 왜 염제와 황제간에
전쟁이 벌어지게 되었을까요?
헌원 시대에 신농씨는 쇠하였고 제후들이 서로 다투어 싸웠으므로 백성들은 폭정과 학대에 시달렸으나 신농씨는 이를 능히 다스리지 못하였다.
헌원지시(軒轅之時) 신농씨세쇠(神農氏世衰) 제후상침벌(諸侯相侵伐) 폭학백성(暴虐百姓) 이신농씨불능정(而神農氏弗能征)
...
염제가 욕심을 내어 제후들을 범하여 업신여기니 제후들이 헌원에게 모두 돌아섰다. 염제욕침능제후(炎帝欲侵陵諸侯) 제후함귀헌원(諸侯咸歸軒轅)
- 사마천의 사기(史記) - * 황제는 유웅씨(有熊氏)의 출중한 인물이다. 황제가 곰, 말곰, 비, 휴, 추, 호랑이들을 가르쳐 염제와 판천(阪泉)의 들에서 싸웠다.
교(敎), 웅비비휴추호(熊羆貔貅貙虎), 이여염제전우판천지야 (以與炎帝戰于阪泉之野)
- 사마천의 사기(史記) 오제본기(五帝本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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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史記)에서는
염제가 제후들을 다스리지 못해서
백성들은 백성들대로 학정에 시달리고
제후들은 제후들대로
염제를 떠나 황제를 따르게 되었다는
말도 안되는 이유를 들고 있습니다.
회남자에 나오는 말대로 하자면
전쟁은 포학함을 금지하고
반란을 토벌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역시 회남자의 병략훈(兵略訓)에
장차 망해가는 나라를 보존하고
끊어진 대를 이어 주어
천하의 혼란을 평정하고
모든 백성의 해로움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다.
...
그로 인해 인류는 중도에 멸망하지 않게
되었던 것이다, 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전쟁을 밭에서 김 매는 것으로
이야기 하기도 합니다.
밭에서 잡초를 뽑듯 적은 것을 제거하여
큰 이익을 도모한다는 것이지요.
위의 구절을 모두가 인정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당대 논객들이 가졌던
통념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
거기에 비추어 염제의 행적에
포악함이란 찾아볼 수 없습니다.
또한 염제가 황제보다 앞섰으니
염제가 황제에게 반란을 일으켰다는 것은
어불성설일 것입니다.
오히려 황제가
염제에게 도전한 것이라 봐야겠지요.
때문에 제위를 찬탈했다고 하는 설이
있는 것이지요.
정위(精衛)의 아버지 염제가
바로 강씨(姜氏) 부족의 수장으로
호를 열산씨(烈山氏)라 했다.
그는 소전(少典)과
그의 아내 교씨(嬌氏) 사이에서 태어나
처음에는 강수(姜水) 유역에 살다가
나중에 동쪽으로 세력을 확장하여
마침내 중원에 이르렀다.
일찍이 판천(阪泉)의 들에서
황제와 싸웠으나 패했다.
- 산해경 북차3경 -
오히려
황제가 염제의 제위를 찬탈했다는 설도
보이는데 확인된 바는 아직 없습니다.
염제가 세력을 확장하여
중원에 이르렀고
중원에서 맞닥뜨린 또 다른 세력이
황제였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황하 유역에
염제 신농이 이끄는 부족들이
먼저 세력을 이루고 있었고
뒤늦게 황제가 이끄는 부족들이
세력을 형성하며
염제 신농의 부족들과
각축을 벌이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을 해봅니다.
*
희씨 성의 황제족 부락과
강씨 성의 염제족 부락은 모두 지금 중국의 서부지역인
섬서성(陝西省, Shaanxi) 지역안에 있었다.

- 섬서성(陝西省, Shaanxi Sheng) -
황제족은 희수(姬水) 연안에,
염제족은 강수(姜水)를 끼고 살았다.
두 강은 가까이 있어 서로 통혼하는 사이였다.

희수(姬水)는 지금의 분하(汾河, Fen)라고 하며
강수(姜水)는 지금의 위하(渭河, Wei)라고 합니다.
황하를 사이에 두고 그리 멀지 않았다고 하는군요.
그러나 인구가 늘어나면서
부락들이 이주를 하게 되었다.
황제족은 동쪽으로 이동했는데
지금의 섬서성 북부를 지나
황하를 넘어서 산서성 남부에 머물렀다.

- 황제족의 무대 산서성(山西省, Shanxi Sheng) -
염제는 중국 서북방
강수(姜水) 부근에 살았으며 점점
위수(謂水)와 황하 동쪽으로 옮겨와서
지금의 산동지역에 정착하였다.

- 염제족의 무대 산동성(山東省, Shandong Sheng) -
결국 황하를 사이에 두고 각기 동쪽으로
세력을 확장해 나아갔다는 설이 성립하는군요.
- 중국역사 박물관 1 -
*
염제와 황제가
서로 싸운 곳이 판천(阪泉)이며
전쟁을 판천지전(阪泉之戰)이라 한답니다.
판천(阪泉)은
산서성(山西省, Shanxi)에 있는
운천(運城, Yuncheng)이란 곳이라고도 하고
하북성(河北省)에 있는
탁록(涿鹿, Zhuolu)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판천과 탁록이 동일한 곳 혹은
인접해 있다는 이야기가 성립합니다.
회남자에서는 염제가 생포되었다고 하지만
대개의 경우 생포된 것은 아니었다고 하며
패전 후에 염제는 남방으로 물러나
남방의 상제로서 남게 되었다고 합니다.
*
북경 인근에 탁록이란 곳이 있는데
북경에서 버스로 두세 시간 거리랍니다.
나중에 쓰겠지만 그곳에
중화삼조당(中華三祖堂)이 세워졌고
그곳에 염제, 황제, 치우를 모셨다는군요.
삼조(三祖)이라면
복희, 염제, 황제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고
치우는 삼황의 반열에 올라간 기록이
전혀 없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
신과 신의 전쟁에서는
정(正)과 사(邪)가 갈리며
인간은 무고한 희생물로 정의의 신이
구해주는 나약한 무리일 뿐이다.
제가 읽고 있는
산해경의 주석에 나온 글인데
염제와 황제간의 전쟁은
신과 신의 전쟁이라 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정(正)과 사(邪)라는 말이
생각을 갈래 짖게 만듭니다.
역사란 결국 이긴 자가 쓰는
뒷 이야기일 수도 있다는 것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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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共工)과 전욱(顓頊)의 전쟁
다시 서북쪽으로 삼백칠십리를 가면
부주산(不周山)이 나온다.
이 산의 서북쪽 부분은 크게 뚫려 있다.
예전에 전욱(顓頊)과 공공(共工)이
제위를 놓고 다투다가
공공이 노기를 못참아 머리로 산을 들이받아
무너져버렸기 때문이다.
그때 하늘 기둥이 무너지고
땅덩이를 이어주던 끈이 끊어지면서
해와 달과 별의 위치가 바뀌었다고 한다.
*
산해경 서차3경에 나오는
공공과 전욱의 전쟁 기록입니다.
공공의 부주산을 향한 박치기는
승패와 관계없이 큰 변화를 가져옵니다.
부주산이 무너져 내린 것 뿐만 아니라
하늘과 땅을 변화시켰다고 합니다.
*
회남자에는
판천지전과 탁록지전의 행간에
공공과 전욱의 전쟁을 언급합니다.
의도적이었는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나름 시대순으로 기록한 것처럼 보입니다.
판천지전 -> 공공과 전욱의 전쟁 -> 탁록지전
이런 순서입니다.
다른 기록과 견주어 보면
앞뒤가 안맞는 점도 있어 보입니다.
*
염제의 아내는
적수씨(赤水氏)의 딸인 청요(聽訞)였다.
염제와 청요가 결합하여 염거(炎居)를 낳았다.
염거의 후대가 절병(節幷)이고
절병이 희기(戱器)를, 희기가 축융을 낳았다.
축융은 강수(江水) 일대로 귀양가서
나중에 공공을 낳았다.
공공의 후대는 술기(術器)인데
술기는 머리통이 평평하고 머리 위는
흙으로 덮여 있었다.
그는 언제나 강수 일대에서 거주하였다.
공공에게는 또 후토라는 아들이 있었다.
- 산해경 해내경 -
북적국 근처에
망산(芒山), 계산(桂山), 요산(榣山)이 있다.
산위에 신인이 사는데 태자장금이라 한다.
전욱이 노동(老童)을 낳았고, 노동은 축융을 낳았으며
축융이 태자장금을 낳았다.
- 산해경 대황서경 -
남방에 축융이라는 신이 있는데
짐승 몸에 사람얼굴을 하고
용 두 마리를 타고 다닌다.
축융은 황제의 아들이다.
- 산해경 해외남경 -
산해경에 축융(祝融)은
염제의 후손으로 나오기도 하고
전욱의 손자로 나오기도 하며
황제의 아들이라 나오기도 합니다.
축융이 서로 다른 사람들이거나
어느 쪽이 맞지 않거나
혹은 모두 옳을 수도 있습니다.
오히려 산해경의 저자들은
서로 모순된 내용들마저 남겨두었다는 점에서
더 유익하다 하겠습니다.
산해경이 상당히 오랜 기간에 걸쳐
많은 익명의 사람들에 의해
쓰여진 것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랍니다.

일단 여기서는 축융이 화신(火神)이며
남방 적제 염제(炎帝)의 신하로서
나중에 바뀔지도 모르나
염제의 후손이라는 설을 취하기로 하겠습니다.
신화는 논리적이지 않을 때가 많거든요.
*
공공은 염제의 후손이자 축융의 아들이고
전욱은 황제의 손자입니다.
나중에 전욱은 황제로부터 제위를 물려받습니다.
제위로 놓고 다투었다 함은
전욱이 이미 제위에 올랐거나
오르게 되는 시점이라는 것을 시사합니다.
치우/황제의 전쟁 시점보다
공공/전욱의 전쟁이 시점이
더 늦은 시기일 수 있다는 것이지요.
일단 여기서는 회남자에 나온 구절대로
판천지전 -> 공공과 전욱의 전쟁 -> 탁록지전,
이런 순서로 정리하려고 합니다.
공공과 전욱의 전쟁은
판천지전과 탁록지전의 사이에
일어났던 일이며, 앞뒤의 두 전쟁과
맥락을 같이 한답니다.
*
일찌기 전욱은
중(重)을 남정(南正)의 관리로 임명하여
신에게 제사 지내는 일을 담당하게 했고
려(黎)를 북정(北正)의 관리로 임명하여
백성을 다스리게 했다.
- 산해경 서차삼경(西次三經) -
전욱이 노동을 낳았고,
노동이 두 아들을 낳았는데
그중 하나가 중(重)이고 하나는 려(黎)였다.
전욱은 중에게 하늘을 받치고 있으라 명했고,
려에게는 땅을 누르고 있으라 명했다.
그 후로 땅과 하늘이 갈라져 왕래가 끊겼다.
- 산해경 대황서경(大荒西經) -
신과 사람이 서로 침해하지 못하게 하니,
이를 절지천통(絶地天通)이라고 불렀다.
또 별이나 별자리의 위치
모두 북유(北維)에 있게 했는데,
이는 그가 세운 것이다.
그가 공공(共工)이라는 자와
제위를 놓고 다투었는데,
공공의 힘이 넘쳐 불주산(不周山)에 서 있던
천주(天柱)를 부러뜨렸다고 한다.

- 전욱(顓頊) -
아무튼 전욱은
하늘을 들어올리고 땅을 내리눌러
절지천통을 행합니다.
자유롭게 하늘과 땅 사이를 왕래할 수 없게
분리해 버린 것이지요.
그리고 아무나 하늘에 제사 지내는 일을
금하고, 오로지 허락 받은 자만이
하늘에 제사를 지낼 수 있게 합니다.
제정일치(祭政一致)라고 할까요.
권력자가 하늘에 제사 지내는 일을
독점해버렸다고 할까요.
하늘의 아들로서 천하를 지배하는
유일의 권력자를 말하는 천자(天子)라는 말이
이에서 파생하지 않았을까 싶군요.
그 반대일 수도 있겠군요.
천자의 유래를 신화의 일부분으로 만들어
그 권위를 더욱 공고히 하고 싶었는지도
모르는 일이지요.
*
위의 이야기들을 조합해보면 공공은 단순히
제위를 탐하여 전욱과 전쟁을 한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독점적으로 천하를 좌지우지하는 전욱에게
대항한 전쟁이 아니었을까 싶군요.
위안커(袁珂)는
공공이 군사를 일으킨 것은
황제에게 패한 염제를 위해서였다고 합니다.
치우와 형천의 뒤를 이어 염제 대신
복수를 하려는 것이었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치우와 황제의 탁록지전 이후에
공공과 전욱의 전쟁이 있었다고
여기는 것 같습니다.
*
위안커(袁珂)의
중국신화사(中國神話史)에 의하면
노예제 사회가 생기면서 계급분화와
착취가 나타났는데 하늘과 땅의 통로가
단절되었다는 신화가 이런 사실을
반영한다고 쓰고 있습니다.
신화에 우주를 통치하는 지고무상한
상제가 생겨난 것은
노예제 사회의 반영이란 것이며
서방민족 신화 속에 상제는
황제, 전욱이고
동방민족 신화에서는 제준이랍니다.
*
옛날에 공공이
전욱과 제의 지위를 두고 싸우다가
화가 나서 부주산을 들이받으니
하늘 기둥이 무너지고 땅의 매듭이 끊어졌다.
석자공공여전욱쟁위제
(昔者共工與顓頊爭爲帝)
노이촉부주지산(怒而觸不周之山)
천주절지유절(天柱折地維絶)
하늘은 서북쪽으로 기울어
해와 달과 별들이 서북쪽으로 옮겨졌고
땅은 동남쪽으로 기울어 물과 먼지가
동남쪽으로 흘러가게 되었다.
천경서북(天傾西北)
고일월성신이언(故日月星辰移焉)
지부만동남(地不滿東南)
고수료진애귀언(故水潦塵埃歸焉)
- 회남자 천문훈(天文訓) -
*

- 공공(共工)의 부주산(不周山) 박치기 -
공공의 부주산 박치기로
동남쪽 땅이 꺼져내려 깊은 골짜기가 생겼는데
모든 강물이 다 그쪽을 향해
흘러가게 되었다는군요.
전욱이 별이나 별자리의 위치를
모두 북유(北維)에 있게 하였는데
이로 인해 해와 달, 별들이 모두 북쪽하늘에
있게 되었다는군요.
북쪽 세상은 늘 눈이 부셔 어찌할 수 없었고
남쪽 사람들은 늘 어둠에 빠져 있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공공의 박치기로 인해
북쪽에 묶어 놓았던 해와 달, 별들이
오늘날 우리가 보는 천체의 형태로
운행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신화라기 보다는 민간의 전설인 것 같습니다.
공공과 전욱의 전쟁은
어느 일방의 승리로 끝난 것이 아닌가 봅니다.
사람들은 공공을 기려
대황 북쪽 들판과 북방 해외에
공공대(共工臺)라는 것을 세웠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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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우(蚩尤, Chiyou)와 황제의 전쟁,
탁록지전(涿鹿之戰, Battle of Zhuolu)
헌원이 방패와 창 쓰는 법을 익혀
조공하지 않는 자들을 정벌하자
제후들은 모두 와서 복종했다.
그러나 치우만은 포악하기 그지없어
정벌할 수 없었다.
...
치우가 다시 난을 일으키고는
황제의 명령을 듣지 않았다.
이에 황제는 제후들을 불러 모은 후
치우와 탁록(涿鹿) 들판에서 싸워
마침내 치우를 사로잡아 죽였다.
그러자 제후들은 모두 헌원을 받들어
천자로 삼고 신농씨를 대신하니
이가 바로 황제이다.
*
사기에 나오는 탁록지전에 대한 기록입니다.
매우 간략합니다.
헌원은 정벌을 하였고 이에 치우는
헌원에 정벌에 반기를 든 것 뿐입니다.

치우는 염제 신농의 후예라고 합니다.
비교적 후대에 와서 언급되는데
남송(南宋) 때 나필(羅泌)이 지은
노사(路史)에 의하면 치우(蚩尤, Chiyou)는
구려(九黎)의 수장으로
염제(炎帝)의 후손이며
이름은 강(姜)이라 한다고 합니다.
전설상 신농과 치우의 외모상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우두인신(牛頭人身)이라는 것입니다.
소의 머리에 사람의 몸이라는 것이지요.
물론 우두인신이라 해서
미노타우로스와 일가친척은 아닐 겁니다.
*
옛날에 황제가 귀신들을 서태산에
모이게 한 일이 있었다.
그 때에 황제는 상아로 만든 수레를 탔는데
여섯 마리의 교룡이 끌었다.
목신 필방이 수레바퀴 옆에서 수행했고
치우가 앞에 자리를 잡았으며
풍백이 갈 길을 쓸고
우사가 길에 물을 뿌렸다.
치우거전(蚩尤居前) 풍백진소(風伯進掃)
우사려도(雨師沵道)
호랑이가 선두에 서고
귀신들이 뒤를 따랐다.
동사가 땅을 기고 봉황이 하늘을 덮는
그런 성대한 귀신들의 모임에서
청각(淸角)이 만들어졌다.
- 한비자 십과(十過) -
청각(淸角)이란 악곡(樂曲)을 뜻한답니다.
황제의 서태산 모임을 위해 악곡을 만들었다는
그런 내용인 것 같습니다.
그 때에 치우도 한 몫을 했다는
구절이 나옵니다.
염제가 황제에게 패하여
남방으로 물러난 뒤에
염제는 황제의 그늘아래 들어갔었나 봅니다.
황제의 권위를 인정해주고
자신은 남방으로 물러났던 것이지요.
당시에
치우는 염제를 받들고 있으면서
황제의 거동을 살피고 있었나 봅니다.
황제의 서태산 행보를 위해
앞장을 섰던 것을 보면
그런 황제 밑에서
칼을 갈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
갈로산(葛老山)을 발굴하여
물이 흘러나왔고 광석이 따라 나왔다.
치우가 그것으로 칼, 갑옷, 창을 만들었고
그 해에 아홉 제후를 겸병하였다.
옹호산(雍狐山)을 발굴하니 광석이 나왔다.
치우가 그것으로 옹호극(雍狐戟)과
예과(芮戈)를 만들었다.
그 해에 열두 제후를 겸병하였다.
- 관자(管子) -
창(槍)은 적을 찌르기 위한 무기입니다.
모(矛)는 찌르거나 벨 수도 있고
과(戈)는 끝이 꺾여 적을 당기거나
말을 쓰러뜨리는데 쓰는 무기이며
적들의 방패를 걷어내는 데도 사용합니다.
극(戟)은 갈래진 창을 말하는데
과와 모를 합쳐 놓은 형태랍니다.
*
황제의 태산 행차를 보고 온 치우는
돌아와 염제에게 상황 보고를 했답니다.
황제가 기세등등 하지만
사실은 허장성세에 불과합니다.
지금 갈로산과 옹호산에서 광석이 발굴되어
여러가지 무기들을 만들고 있는데
이로써 병사들을 무장시킨다면
아군의 병력도 만만치 않을 것입니다.
차제에 황제를 공격하면
예전의 패배를 설욕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염제는 다시금
백성들을 전장으로 내몰고 싶지 않았다는군요.
치우의 채근에 묵묵부답이었답니다.
*
일주서(逸周書)에 의하면
치우가 제를 쫓아내고 탁록의 언덕에서
싸우니 구주가 남아나질 않았다.
적제가 크게 두려워하여 황제에게 말하니
치우를 잡아 중기에서 죽였다고 나온답니다.
치우내축제(蚩尤乃逐帝)
쟁우탁록지하/아(爭于涿鹿之河/阿)
구주무유(九州無遺) 적제대섭(赤帝大懾)
내설우황제(乃說于黃帝)
집치우살지우중기(執蚩尤殺之于中冀)
적제 즉 염제가 치우를 두려워하여
황제에게 도움을 청했다는 것인데
치우가 염제의 후손이라면
그럴 수도 없거니와
염제 또한 치우를 두려워하여 황제에게
도움을 청할 인물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염제 역시 황제와의 일전을 벌인 적이
있기 때문이지요.
*
염황지손(炎黃之孫) 즉
염제와 황제의 부족연맹이
치우가 이끌었던 구려 부족연맹을
격퇴한 것으로 보는 시각도 있군요.
그렇다면 염제와 황제의 판천지전은
자중지란으로 보아야 하겠지요
*
결국 치우는 결단을 내립니다.
독자적인 행동을 취하기로 한 것입니다.
할아버지 염제는 인자하지만
전쟁을 하기에는 이제 너무
늙고 지쳐버렸다는 것을 안 것이지요.
치우는 먼저 형제들을 소집합니다.
그들은 이미 전의를 다지며 싸울 태세를
갖추고 있었기에 곧 바로 모여들었다고 합니다.
치우가 구려(九黎)의 수장이라면
당연히 구려(九黎)가 참전했겠지요.
구려는 구(九)는 아홉이란 뜻도 있지만
많다는 뜻도 된다고 합니다.
다수의 려(黎)족들이
치우의 세력이었다는 것이지요.
*
구려(九黎)에 대해서는
설이 분분한가 봅니다.
려(黎)는 동이(東夷)라고도 하며
동이는 동쪽의 오랑캐들이란 뜻이랍니다.
동쪽의 이민족들을 싸잡아 지칭하는 것이라는군요.
자신들을 화하(華夏, Huaxia, Hua-hsia)라
칭하며 동서남북의 이민족들을
동이(東夷, Dongyi), 남만(南蠻, Nanman),
서융(西戎 , Xirong), 북적(北狄, Beidi)라
불렀다고 합니다.
이(夷), 만(蠻), 융(戎), 적(狄)
모두 오랑캐란 뜻입니다.

*
더하여 치우는 남방의
묘족(苗族)을 소집했다는군요.
묘족은 황하 중하류에서 거주하였는데
회수(淮水)로 이주한 부족들이랍니다.
탁록지전에서 패한 후에 묘족들은
뿔뿔이 흩어졌는데, 지금도
치우를 자신들의 조상으로 섬긴다고 합니다.
묘족들은 황제의 후손이었으나
당시에는 푸대접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에 묘족들도 치우에 거병에 가담하였고
남방의 수풀과 물가에 사는
이매(魑魅), 망량(魍魎) 같은
도깨비들도 치우의 편에 가담했다고 합니다.
치우는 스스로 염제(炎帝)라 칭하고
병사들을 이끌고 출정을 합니다.
그리하여 탁록(涿鹿)에 이르게 됩니다.
탁록(涿鹿)은 지금의 하북성(河北省)
탁록현(涿鹿縣)이라는데
염제와 황제의 싸움터였던 판천(版泉)과는
불과 몇 리 떨어지지 않은 지역으로
거의 같은 지역이라 해도 무방하답니다.

- 하북성(河北省, hebei Sheng) 탁록(涿鹿) -
북경에서 서북쪽으로
장자커우시(張家口市, Zhangjiakou)를 향하면
그 중간지점인 탁록현(涿鹿縣)까지는
버스로 두 시간 정도의 거리라는데
근래에 중화삼조당(中華三祖堂)이 세워졌고
그곳에 염제, 황제, 치우를 모셨다고 합니다.
치우를 제(帝)의 반열에 올려놓은 것입니다.
*
푸른 옷을 입은 사람이 있는데
황제의 딸인 발(魃)이라고 한다.
유인의청의(有人衣靑衣)
명왈황제녀발(名曰黃帝女魃)
치우가 무기를 만들어 황제를 치자
황제가 응룡으로 하여금
기주의 들판에서 그를 공격하게 하였다.
치우작병벌황제(蚩尤作兵伐黃帝)
황제내령응룡공지기주지야
(黃帝乃令應龍攻之冀州之野)
응룡은 물을 모아두고
치우가 풍백과 우사에게 청하여
거침없는 폭풍우를 쏟아지게 하였다.
응룡축수(應龍畜水)
치우청풍백우사(蚩尤請風伯雨師)
종대풍우(縱大風雨)
그러자 황제는 천녀인 발을 보내어
비가 그치게 하였고
마침내 치우를 죽였다.
황제내하천녀왈발(黃帝乃下天女曰魃)
우지(雨止) 수살치우(遂殺蚩尤)
- 산해경 대황북경 -
그러나 발(魃)은 전쟁이 끝난 후 다시 천궁으로
올라갈 수 없게 되었으며
그녀가 있는 곳은 가뭄 기운때문에
비를 뿌리려 해도 비가 내리지 않았다.
발은 한발(旱魃)은 가리키는 것으로
가뭄의 신을 말한다고 합니다.
*
황제가 치우를 토벌할 때의 일이다.
치우는 구리처럼 단단한 머리로
돌을 부술 수도 있고
공중으로 날아오를 수 있으며
험한 산길을 달릴 수도 있었다.
황제가 기(夔)의 가죽으로 북을 만들어
아홉 번 북을 두드려 치우를 제지했더니
치우 역시 날거나 달리지 못하고
결국 죽음을 당했다
- 산해경 대황동경 -
*
황제가 섭정할 때
치우의 형제 팔십일명이 있었는데
모두 짐승의 몸에 사람의 말을 하였다.
황제섭정시(黃帝攝政時),
유치우형제팔십일인(有蚩尤兄弟八十一人)
병수신인어(竝獸身人語)
구리로 된 머리에 철로 된 이마를 가졌으며
모래나 돌을 먹고 갖가지 무기를 만들어
천하를 위협하고
잔악무도하게 사람을 죽이며
인자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동두철액(銅頭鐵額) 식사석자(食沙石子)
조립병장도(造立兵杖刀) 극대노(戟大弩)
위진천하(威振天下) 주살무도(誅殺無道)
불인부자(不仁不慈)
온 백성이 황제가 천자의 일을
행하기를 원하였는데
황제가 인의로서는 치우를 막을 수가 없어
결국 대적하지 못하였다.
만민욕령황제행천자사
(萬民欲令黃帝行天子事)
황제이인의(黃帝以仁義)
불능금지치우(不能禁止蚩尤) 수부적(遂不適)
그래서 하늘을 보며 탄식하니
하늘이 현녀를 파견하여 땅에 내려와
황제에게 병신신부(兵信神符)를 주어
치우를 제압하여 굴복시키고
팔방의 나라들을 제압했다.
내앙천이탄(乃仰天而嘆) 천견현녀(天遣玄女)
하수황제병신신부(下授黃帝兵信神符)
제복치우(制伏蚩尤) 이제팔방(以制八方)
치우가 죽은 후에도
소란이 일어 평안하지 않았다.
그러자 황제는
치우의 형상을 그려 천하를 위협했다.
천하사람들은
모두 치우가 죽지 않았다고 말했고
팔방의 모든 나라가 복종하였다.
치우몰후(蚩尤沒後)
복요란불녕(復擾亂不寧)
황제수화치우형상(黃帝遂畵蚩尤形象)
이위천하(以威天下)
천하함위치우불사(天下咸謂蚩尤不死)
팔방만방개위진복(八方萬邦皆爲殄伏)
- 용어하도(龍魚河圖) -
위서(緯書)에 있는 하도낙서(河圖洛書)는
칠경(七經)의 위서와 함께 전한(前漢) 말에서
후한(後漢)에 걸쳐 만들어진 것으로
그 중에 용어하도(龍魚河圖)가 있다.
*
탁록지전(涿鹿之戰)에 관하여
채록이 가능한 자료들을 모아보았습니다.
이제 탁록의 들판에
전투장면을 그려봐야 하겠지요.
신화적 상상력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하북성은 구주산천도(九州山川圖)에서
황하 북쪽에 위치하는 기주(冀州)에 해당합니다.
황제족 부락과 염제족 부락은
섬서성(陝西省, Shaanxi) 지역에 있었는데
점차 동진하여 산서성(山西省, Shanxi Sheng)으로
이주했으며, 염제는
산동성(山東省, Shandong Sheng)까지
진출하였다고 합니다.
전장(戰場)은
일반적으로 본거지를 멀리하므로
국경에 인접한 지역에서 벌어지는 게
상례인데 탁록(涿鹿)의 위치는 석연치 않습니다.
예상보다 훨씬 북쪽으로 올라가
전장이 형성되었다는 느낌이 듭니다.
아니면 황제의 근거지가
탁록 인근 지역일 수도 있습니다.
*
치우의 병사들과 황제의 병사들이
탁록의 들판에서 대치하고 있을 때
갑자기 온 하늘과 들판에 안개가 끼었는데
오로지 황제의 군진에만 가득하였다.
그러더니 아득한 안개 속에서
구리 머리에 쇠 이마를 한 치우족들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며
황제의 병사들을 베어넘겼다.
황제의 병사들은 죽음의 짙은 안개를
헤쳐 나가려고 안간 힘을 썼다.
황제도 어찌 할 도리가 없었다.
그때에 풍후(風后)라는 신하가 나서서
지남차(指南車)를 뚝딱 만들어 내었다.
지남차의 맨 앞에는
쇠로 만든 작은 선인(仙人)이 세워져 있었는데
마차가 어느 방향으로 향해 있든지
선인의 손은 항상 남쪽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황제의 병사들은 지남차를 의지하여
한쪽 방향으로만 이동하였고
결국 죽음의 안개 속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
치우의 군진에는 온갖 도깨비들이 있었다.
그들은 모두 세 종류의 요괴들이었는데
하나는 이매(魑魅)라 하여
사람의 얼굴에 짐승의 몸을 가지고 있으며
다리가 모두 네 개였다.
다른 하나는 신괴(神怪)로
역시 사람의 얼굴에 짐승 몸을 하였으나
손발이 각각 하나씩 뿐이었다.
마지막 종류는 망량(魍魎)인데
세살박이 어린애처럼 생겼고
몸은 검으며 귀는 길다랗고 눈은 붉었다.
그들은 소리를 배워 사람들을 홀렸는데
황제의 군진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황제는 소나 양의 뿔로 나팔을 만들어
용의 울음소리를 내게 하였다.
도깨비들이 가장 싫어하는 소리가
용의 울음소리라는 것을 알아냈던 것이다.
*
황제는 불리한 전세를 역전시키기 위해
응룡을 불렀다. 응룡(應龍)은
물을 모으고 비를 뿌릴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응룡이 전장에 도착하여
치우의 병사들을 향하여 공격을 하려는 찰나
치우는 이미 대비한 바대로
풍백(風伯)과 우사(雨師)를 나서게 하였다.
풍백과 우사는
맹렬한 비바람을 몰아치게 하여
응룡으로 하여금 수를 쓸 수 없게 만들었다.
응룡 뿐만 아니라 황제의 군사들도
사방으로 흩어져 버리고 말았다.
*
황제는 고심 끝에
자신의 딸이자 가뭄의 여신인 발(魃)을 불렀다.
그녀가 전쟁터에 나타나자
미친 듯이 휘몰아치던 풍폭우가
순식간에 힘을 잃고 말았다.
응룡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치우의 형제들과 묘족들을 일부 살해하였다.
가뭄의 여신 발(魃)은 너무 힘을 쏟은 까닭에
이후에 천상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계곤산(系昆山) 공공지대(共工之臺)에
살게 되었다고 한다.
*
전쟁이 길어지자 치우의 군대도
황제의 군대도 사기를 잃고 소강상태로
접어들기 시작하였다.
황제는 군대의 사기를 높여 적을 제압할
방법을 모색하였다.
그리고 한 가지 방법을 찾아내었다.
동해에 유파산(流波山)이 있는데
한 신수(神獸)가 사는데
모습이 소와 비슷하고 몸은 청회색이며
머리에 뿔이 없고 다리는 하나 뿐이라 하였다.
이 짐승이 물을 드나들면
바람이 불고 비가 쏟아지고
몸에서 광채가 눈부시게 뿜어져 나오니
그 빛이 햇빛과 달빛 같았으며
때때로 우레처럼 소리를 내는데
이름을 기(夔)라고 한다.
황제가 이 짐승을 잡아서 가죽으로
북을 만들고 뼈를 북채로 만들었더니
그 소리가 오백리 밖에서도 들렸다.
뇌택의 뇌신(雷神)을 잡아 그 뼈로 북채를
만들었다고도 한다.
그 북을 전차에 싣고 북을 울리니
황제의 병사들은 사기가 충천하였고
치우의 병사들은 혼비백산하여
몸이 뻣뻣하게 굳어버린 까닭에
황제의 군대는 대승을 거둘 수가 있었다.
*
치우의 군대는 상당한 손실을 입게 되었다.
군사들의 숫자가 절반도 안되었다.
이대로 항복할 수는 없었다.
치우는 북방의 거인족 과보(夸父)에게
도움을 청하였다.
과보족 사람들은 북방 대황(大荒)에 있는
성도재천(成都載天)이란 산에 살았는데
모두가 엄청난 거인들이었다.
과보족은 염제의 후손인
후토(后土)의 자손이었기에
염제의 패배를 설욕하기 위해 나섰다는
치우를 돕지 않을 까닭이 없었다.
치우가 과보족을 원군으로 맞은 뒤에
전세는 팽팽하다 못해 오히려
치우의 군대가 승기를 잡은 듯 하였다.
*
과보족의 참전으로 황제는 고민스러웠고
하늘을 보며 탄식하는 수 밖에 없었다.
그러던 중
하늘에서 현녀(玄女)가 땅에 내려왔다.
현녀는 황제에게 병법을 가르쳐 주었으며
병신신부(兵信神符)라는 부적을 주었다고 한다.
더하여 곤오산(昆吾山)의 구리로 만든
명검을 주었다고도 한다.
이는 군사들의 사기를 올리기 위한
황제의 술수였을 것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아무튼 마지막 결전이 벌어졌고
사기가 충천한 황제의 병사들과 응룡(應龍)에게
구려(九黎)와 묘족(苗族), 과보족(夸父族),
치우의 형제들이 쓰러져 갔다.
이 전쟁이 끝난 후
응룡(應龍)은 사악한 기운 때문에
하늘로 승천할 수가 없어
남방의 어느 산으로 내려가 살게 되었는데
이후로 남방에는 비가 많이 내리게 되었다고 한다.
응룡이 치우를 죽인 다음
또 과보를 죽이고 남방으로 가서 살았기
때문에 남방에 특히 비가 많이 온다고 한다.
- 산해경 대황북경 -
결국 치우는 생포되었고
손과 발에 수갑과 족쇄가 채워진 채로
탁록의 들판에서
곤오산의 구리로 만든 명검에 목이 잘렸다.
치우가 죽은 후에
피 묻은 수갑과 족쇄를 대황(大荒)에 버렸는데
그것들이 자라 단풍숲이 되었다고 한다.
혹자는 치우가
기주(冀州)의 중부까지 달아나다
황제로부터 죽임을 당하였다고도 한다.
산서성(山西省) 해현(解縣)에
해지(解池)라는 연못이 있는데
소금기가 있는 붉은 빛을 띠고 있다고 한다.
치우가 머리를 잘려 흘린 피가
거기 흘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치우의 머리와 몸뚱이는
수장현(壽張縣)과 거야현(鋸野縣)에
각각 매장되었는데
그가 되살아 날까 두려워해서라고 한다.
그곳 지방의 사람들은 해마다 시월이면
치우에게 제사를 올린다.
살아남은 묘족(苗族)들은
자신들이 살던 회수(淮水)를 떠나
더 먼 남방으로 이주하였고,
구이저우성(貴州省)을 중심으로
후난(湖南), 쓰촨(四川), 광시(廣西), 윈난(雲南) 등에
흩어져 살게 되었다고 합니다.
천하를 위협하고 잔악무도하게 사람을 죽이며
인자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라고 하며
치우를 평가한 내용은 옳지 않은 것 같습니다.
황제 역시 치우와 다름이 없으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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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춤추는 형천(刑天) -
형천(刑天)과 황제가 신(神)의 자리를 놓고
죽고 죽이는 싸움이 일어났다.
결국 황제가 형천의 머리를 베고
그를 상양산(常羊山) 자락에 묻었다.
형천은 목 잘린 장군이 되었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젖꼭지를 눈으로 삼고 배꼽을 입을 삼아
손에는 방패와 큰 도끼를 들고
연신 춤을 추며
다시 황제와 자웅을 겨루려 했다.
- 산해경 해외서경 -
형천은 염제 신농의 후예였다.
형천도 치우처럼 염제에게
병사를 일으켜 볼 것을 권했지만
염제는 그의 권고들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러다 치우가 거사를 도모하여
황제와 결전을 벌이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형천이 참전하려 하자 염제가 막았다.
치우가 패하여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염제를 떠나 황제를 향해 떠났다.
황제의 수하들은 그의 적수가 되지 못하였다.
결국 황제도 보검을 들고 나와
형천과 목숨을 건 싸움을 시작하였다.
칼과 도끼 부딪치는 소리가
오랫동안 계속되었으나 승부는 나지 않았고
황제와 형천은 어느새
상양산 부근에 이르게 되었다.
어느 순간 황제의 보검이 형천의 목을 잘랐다.
형천은 더듬거리며 잘린 머리를 찾았다.
이를 본 황제는 상양산을 보검으로 가르고
그의 머리를 갈라진 틈에 밀어넣었다.
그리고 상양산은 다시 닫혀버렸다.
머리를 잃은 형천은 옷을 벗었고
자신의 젖꼭지를 눈으로 삼고
자신의 배꼽을 입으로 삼았다.
그리고 방패와 도끼를 든 채 춤을 추었다.
염제와 황제간의 전쟁이 불러온 여파였다.
*
산해경에 또 다른 머리 없는 인물이 나옵니다.

머리가 없는 사람이 손에
창과 방패를 들고 산위에 서 있다.
그 이름을 하경(夏耕)이라 한다.
옛날 성탕(成湯)이 장산(章山)에서
하(夏)나라 걸(桀)왕을 토벌할 때
하의 걸왕이 대패하였다.
그래서 하경이 이마로 치고 들어가자
성탕이 하경을 베어버렸다.
그는 머리가 잘린 뒤에도 넘어지지 않고
도망하였으며 무산(巫山)에 내려와서도
여전히 그곳에 서 있다.
- 산해경 대황서경 -
우임금이 천하를 순수(巡狩)할 적에
머리가 없이 창과 방패를 들고 있는
하경(夏耕)을 보게 되었다고 합니다.
하경은 형천의 부하가 되어 있었다는군요.
*
치우와 황제간의 탁록지전에서
과보(夸父)와 과보족(夸父族)이 참전하여
다수가 전사한 것으로 나옵니다.
그 과보족입니다.

과보국(夸父國)은
섭이국(聶耳國) 동쪽에 있다.
과보국 백성은 키가 크고 체격이 좋으며
오른손에 푸른 뱀, 왼손에 누런 뱀을
한 마리씩 들고 있다.
과보(夸父)가 죽은 후 그가 들고다니던
지팡이가 복숭아나무 숲으로 변했는데
나무는 단지 두 그루뿐이다.

과보는 태양을 쫓다가
거의 잡을 무렵 목이 말라서
황하와 위수(渭水)를 들이켰고
그래도 모자라 북방의 대택(大澤)을
마시려 했으나 미처 닿기 전에
갈증으로 죽었다.
- 산해경 해외북경 -
대황 가운데에
성도재천산(成都載天山)이 있다.
이 산에 신인(神人)이 있는데
귀에 두 마리 누런 뱀을 걸고
손에도 두 마리 누런 뱀을 잡고 있다.
이름을 과보라한다.
후토(后土)가 신(信)을 낳았는데
신의 후대가 과보다.
태양을 잡으려 하였으나 갈증으로
숨을 거두었다는 전설이 있으며
응룡(應龍)이 치우를 죽인 다음
과보를 죽였다는 전설이 있다.
- 산해경 대황북경 -
*
동해에 유파산(流波山)에
한 신수(神獸)가 사는데
모습이 소와 비슷하고 몸은 청회색이며
머리에 뿔이 없고 다리는 하나 뿐이라 하였다.

황제에 의해 껍질이 벗겨지고 북(鼓)이된 기(夔)
이 짐승이 물을 드나들면
바람이 불고 비가 쏟아지고
몸에서 광채가 눈부시게 뿜어져 나오니
그 빛이 햇빛과 달빛 같았으며
때때로 우레처럼 소리를 내는데
이름을 기(夔)라고 한다.
- 산해경 대황동경 -
기(夔)의 가죽으로 북을 만들고
뼈를 내어 북채를 삼아 두드리니
사방 오백리 밖까지 울렸다는군요.
황제가 전쟁의 승리를 위해 희생한 짐승이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