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편지 33신]책선물 ‘한 보따리’에 한껏 부푼 남자
‘군대 27개월’을 국방부 직속기관에서 꼬박 함께한 황병장아.
엊그제 자네가 보내준 정초 선물보따리 속에
그야말로 양서良書라 할 네 권이 소담하게 담겨 있어 깜짝 놀랐다.
세상에나, 만상에나 내가 제일 좋아하는 책선물에 입이 함빡 벌어졌다.
솔직히 두 권(김영사 발간 『옛 시정詩情을 더듬어』상,하권)은
내가 자네에게 얼마 전 추천을 한 것이었으나,
두 권(창비 발간 『노화의 종말』『엄마의 마지막 말들』은 예상치 못한 책이었네.
어쩌면 이런 기특한 생각을 했을까?
고마워서 옆에만 있다면, 술도 안기고 볼에 뽀뽀라도 해주고 싶었다.
『옛 시정詩情을 더듬어』상,하권을 말하자.
너와 이름이 같은 손종섭(1918∼2017)이라는 한학자는 엄청나게 뛰어난 한시 번역가이셨다. 백수白壽를 누리신 그분이 펴낸 『이두시신편』 『내 가슴에 매화 한 그루 심어놓고』 『손 끝에 남은 향기』 등 책마다 역저力著 아닌 것이 없고, 우리말에도 엄청난 내공이 있던 분이었다(『우리말의 고저장단』) . 번역에는 직역直譯과 의역意譯이 있겠지만, 한시는 특히 시인의 창작 고뇌를 알지 않으면 번역을 할 수 없는 게 태반이다. 손선생님은 시정의 맥락을 하나도 놓치지 않았기에 맛깔스런 우리말로 어려운 한시들을 우리 앞에 내놓은 것이다. 2년 전 우연히 접한 『손 끝에 남은 향기』이라는 책을 유럽여행 28일 동안 정독하며, 손선생님의 내공에 놀라 경이로운 기분에 사로잡혔다. 『옛 시정詩情을 더듬어』는 1992년 선을 보였으나 절판된 것을 김영사에서 2011년 다시 펴낸 것으로, 오랫동안 갖고 싶었던 상권 698쪽, 하권 730쪽(각 25000원)의 거창한 한시 해설집이다. 대단한 공부거리가 생겨 즐거운 고민이다. 마냥 행복하다. 행복이란 얼마나 소박한 것인가? 이런 양서 몇 권에 세상이 온통 내 것같으니 말이다. 소확행(작지만 확실한 행복)이 이런 게 아닐까 싶다.
『노화의 종말』은 부제 ‘하버드 의대 수명혁명 프로젝트’처럼 노화와 장수분야의 세계 최고 권위자인 데이비드 싱클레어 박사의 ‘25년 장수 연구’를 집대성한 화제의 책이다. 뇌과학자 정재승 교수의 추천사가 눈에 확 들어온다. “이 책을 접한 당신은 행운아다. 노화를 되돌리고 건강하게 장수할 과학적 비법을 얻게 될테니 말이다”듣느니 처음이지만, 마음을 가다듬고 차분히 읽어봐야겠다(624쪽, 22000원, 2020년 1쇄 발간). 친구 덕분에 건강하게 장수할 수 있을 터이니, 나야말로 복 받은 게 틀림없다.
『엄마의 마지막 말들』은 서울대 국문과 박희병 교수가 2018년부터 1년 동안 자신의 모든 일을 접은 채, 오로지 어머니의 간병과 최후를 지켜보기 위해 전념했던 날들의 기록이다. 은퇴를 앞둔 64세의 지식인 아들이 서울시내 호스피스병원 10여곳을 옮겨다닐 수 밖에 없는 말기암과 알츠하이머성 인지저하증에 고생하는 엄마로부터 들은 140여 마디의 말들에 대한 상황과 느낌을 적은 짧은 글들이 나의 심금을 울림며 쉽게 감정이입이 된다. 2년 전 돌아가신 나의 어머니의 보름간의 어록語錄을 기록했던 터라 더욱 실감이 났다https://cafe.daum.net/jrsix/h8dk/300. 박교수는 분명 이 시대 보기 드문 효자임이 틀림없다. 흐흐. 내 취향에 딱 맞는 책을 잘도 골라주었구나. 고맙다. 친구야.
너와 군대 인연을 모처럼 풀어놓고 싶다. 너는 전형적인 경상도 남자였다. 경상도 사람을 군대에서 처음 접하고 희로애락을 같이 하면서, 너로부터 정치꾼들 아니 정상배政商輩들이 하는 짓거리처럼 전라도-경상도 차별이나 차이를 한번도 느껴본 적이 없이, 우리는 그냥 절친한 친구가 되었었지. 그래서 사실 나는 지금도 ‘경상도’에 대한 편견이 없는 것은 네 덕분이라고 할 것이다. 중키(170cm)에 야무진 말이나 행동이 마음에 무척 들었다. 역시 대학 정치외교학과 출신답더라. 제대하고도 은행에서 노조위원장을 오래 맡고, 끝내 부행장이라는 최고 임원도 되더구만, 지금도 현역으로 금융권의 대표를 맡고 있으니 그 역량이 어디 갈 것인가. 참 대단하다. 존경스럽다. 흐흐.
33169를 잇달아 글자처럼 쓰면 너의 별명 ‘짱구’가 된다 하여, 내내 ‘33169’라고 불렀던 생각도 난다. 대전 출신 한 친구는 이름이 ‘양근모’였는데, 서울대를 장학생으로 다닌 천재적인 공학도였었지. 기억나지? 그 이름을 듣는 순간 순식간에 내가 지은 별명이 ‘좆털’이었다. 그 이유를 너도 기억하겠지? 양근陽根에 털 모毛자를 합친, 사람 좋은 그 친구는 아무리 그렇게 불러도 실실 웃고 말았지. 부대장 따까리(연락병 겸 비서)를 하는데도 어찌나 행동이 굼뜨던지, 오직하면 ‘네가 부대장 해라’라고 했을까? 흐흐. 언제나 솔찬히 재밌는 것은 군대 이야기이다. 부대 마당에 잔디를 깔겠다고 인근 미군부대 골프장의 잔디를 몰래 뜯어오던 기억도 난다. 참, 무대뽀 공군중령 부대장의 만행이었지. 셰퍼드를 몰고 달려오며 호루라기를 불던 SP(공군헌병)들의 모습도 떠오른다. 아아, 내 인생 여자와의 첫키스가 미국여인이었다. 부대장은 태극기를 꽂으라고 부추기고 말이야. 불행히도 그 여자는 유부녀였다. 이름을 어찌 잊겠냐? 애니타 러니언Anita Runiom. 숯고개(송탄) 어느 클럽에서 전역 전날, 미군애들이 해준 송별파티, 기억나지? 그때가 좋았던가? 흐흐.
황병장, 정말 한시 해설서 등 책선물 고맙다. 너도 같은 책을 샀겠지?
한시 한 편이라도 찬찬히 원문과 의역(살아있다!) 그리고 해설도 함께 읽다보면 어느새 우리는 시인이 되어 있을 것이다. 너는 책 읽는 것보다 ‘이빨 까는’ 것을 더 즐기겠지만 말이다. 아무도 할 수 없는, 한시 번역의 새로운 지평을 여신 분이 너와 동명이인이어서 추천했던 게, 이리 좋은 선물로 안겨주었구나. 내일모레는 민족의 명절 설이다. 외아들이므로, 꼭 내려가 혼자 계신 어머니께 세배드리면 좋겠구나. 5인가족 모임은 넘지 않을 것이므로. 줄인다. 황병장, 잘 지내라.
2월 8일
오랜 친구 우천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