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균주의와 규범적 사고 ]
1.
1940년대 말, 제트엔진을 장착한 전투기들이 알 수 없는 이유로 수시로 추락하고 있었습니다. 어떤 날은 하루에 17대의 전투기가 추락하기도 했습니다. 사고의 유형은 예상치 못한 급강하, 비정상적인 착륙, 기체 폭발 등으로 다양했습니다. 원인을 파악하지 못한 미국 공군은 그 원인을 ‘조종사 과실’이라고 발표했습니다.
전투기의 기계장치와 전자장치에는 아무런 결함이 없는데도 반복되는 사고의 원인을 파악하지 못하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습니다. 문제의 전투기에 탑승해야 하는 조종사들 역시 당혹스러웠지만 자신들의 비행 능력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기계적 과실도 인간의 과실도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이 문제였을까요?
수차례의 조사에서 원인 규명에 실패한 미 공군은 조종석의 설계에 관해 들여다보기 시작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의 전투기 조종석은 1926년에 남성 조종사 수백 명의 신체 치수를 기준으로 설계되었고 30년 가까이 규격과 모양, 가속페달과 기어의 배치 거리 등에 전혀 변화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계속되는 사고가 조종사들의 체격 변화 때문이 아닌가 의심하기 시작한 미 공군은 조종사들의 신체 치수를 새롭게 측정하기 위한 대규모 조사를 시행했습니다.
140개 항목에 걸쳐 조종사들의 치수를 측정한 뒤 개선된 평균 치수를 바탕으로 전투기 조종석을 설계하면 비행기 추락 사고가 획기적으로 줄어들 것이라고 모두가 믿었습니다. 하지만 단 한 명, 하버드대학교에서 체질인류학을 전공한 길버트 S. 대니얼스(Gilbert S. Daniels) 중위만은 여기에 대해 의구심을 품고 있었습니다.
대니얼스 중위는 조종사 4,063명의 축적된 자료를 토대로 조종석 설계와 가장 연관성이 높다고 판단되는 10개 항목의 신체 치수에 대해 평균값을 냈습니다. 이 평균값은 바탕으로 평균값과의 편차가 30퍼센트 이내인 사람을 ‘평균적 조종사’로 설정하고 여기에 부합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되는지를 조종사 개개인별로 일일이 대조해 가며 조사했습니다.
놀랍게도 10개 항목 전체에서 평균 범위 내에 들어가는 조종사가 4,064명 가운데 한 명도 없었습니다. 어떤 조종사는 팔 길이가 평균치보다 길지만 다리 길이는 평균치보다 짧았고 어떤 이는 가슴둘레가 평균치보다 컸지만 엉덩이 둘레는 좁은 식으로 모두가 평균의 범위를 벗어났습니다. 결국 평균적인 조종사 같은 것은 애초에 없었던 것입니다.
미 공군은 대니얼스 중위의 조사 결과를 받아들여 조종사들의 임무 수행 환경을 개개인에 맞추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그 결과 탄생한 것이 '개인에 따라 조정 가능한 조종석'이었습니다. 현재 모든 자동차의 표준으로 자리잡고 있는 바로 그 기술이 미국 공군으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그 이후 전투기 조종사들의 비행술은 비약적으로 발전했고 미 공군은 세계 최강이 되었습니다.
2.
세계적으로 가장 발병률이 높고 치명적인 암 중의 하나가 결장암입니다. 의사들은 결장암이 ‘표준 경로’를 따라 발병한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다양한 범주의 결장암 환자들에 대한 조사 결과를 합산해 평균을 내어보니 그러하더라는 것입니다.
결장암에 대한 ‘표준 경로’ 개념은 의사들 사이에서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었고 결장암 환자들은 이에 따라 치료를 받아 왔습니다.
결장암 치료 과정에서 많은 자료가 축적되고 과학자들의 연구가 활발해지면서 결장암 환자 가운데 ‘표준 경로’에 해당하는 환자는 7퍼센트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결장암의 양상은 사람에 따라 매우 다양한 것으로 나타났고 각 양상별로 독자적인 전개 경로를 따르고 있음이 드러났습니다.
환자 개개인의 다양한 발병 경로에 대한 인식 전환을 계기로 결장암 치료의 비약적 돌파구가 열렸고 결장암의 특정 패턴을 표적으로 삼은 효과적인 치료제 개발이 가능해졌습니다.
3.
우리는 일평생 '평균'이라는 기준에 의해 평가당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학교에 다닐 때는 평균 성적을 기준으로 등수와 등급이 매겨지고, 직장에서도 평균적인 업무 실적에 따라 우수하거나 그저 그런 인간으로 평가받게 됩니다. 심지어 은행에서도 평균에서의 이탈 여부에 따라 평가되는 신용등급에 의해 대출 가능 여부가 결정됩니다.
하지만 미 공군 조종사의 사례에서 살펴봤듯이 평균적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평균적인 신체 치수 따위가 없듯이 평균적인 재능, 평균적인 지능, 평균적인 성격 같은 것은 없습니다. 이러한 일상화된 개념들 모두는 잘못된 과학적 상상이 빚어낸 허상입니다.
평균주의에 기반한 규범적 사고에서 벗어나는 순간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나’라는 존재가 보일 것이고 우리는 평균의 횡포로부터 자유로워질 수가 있을 것입니다.
(사)지역산업입지연구원 원장 홍진기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