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에서 논쟁이 좀 되었고, 지금도 논쟁이 되고 있는 '메즈도우소비차(МЕЖДОУСОБИЦА, 국제전). 아무르강 하류 비극의 발자취 (По следам нижнеамурской трагедии). 저자 : 스말야크 (В. Г. Смоляк, 1937-2008)'의 책을
'파르티잔 대장 트리피츤'이라는 이름으로 대충 번역을 마치면서....
Смоляк В. Г. Междоусобица. По следам нижнеамурской трагедии. [о Я. Тряпицыне и Н. Лебедевой-Кияшко] - Хабаровск: Хабаровский краевой музей им. Н. И. Гродекова, 2009. - 128 с., ил.
'1920년대 독립군 3대 승리' 의 신화로 널리 알려졌던 '니항사건'
니항 사건, 니콜라예프스크 사건, 廟街事件, Николаевский инцидент, 니콜라옙스크 사건
1991년 소비에트 체제의 붕괴 이후, 1920년 니콜라예프스크 사건(니항사건, 니콜라옙스크 사건)에 대한 많은 자료가 러시아에서 공개되고 있습니다.
근래 한국에서는 이오키 료조(五百木良三), 하라 테루유키(原暉之), 존 J. 스테판(John j stephan), A.Y.구트만(ГУТМАН А. Я. 혹은 Anatoly Yakovlevich Gutman), 이르쿠츠크파 독립운동가들의 「재로고려혁명군대연혁(在魯高麗革命軍隊沿革)」문건들이 마치 사실인 것처럼 비밀리에 인용되기도 했습니다.
대표적인 거짓말들은
(1) 사할린 부대 380명~ 430명을 조직한 것은 박병길이다. -> 전혀 사실이 아닙니다.
박병길은 파르티잔에 의해 1920. 2. 29. 일 니항이 해방된 후 이지택, 김낙현 등과 함께 파르티잔에 가담하였습니다.
(2) 박병길(В. Пак, 전직 니항 鮮人 民會회장 추정)은 박일리야에 의해 살해되었다 -> 박병길은 니항에서 일본인들과 일하고 친일단체를 조직했지만, 니항의 저명인사이며 독립운동가였던 박일리야 비호를 받아 처형을 모면했는데,
1920. 7월경 반란에 가담해
일본군의 방조로 안드레예브(Иван Тихонович Андреев), 리아도르스키(Александр Николаевич Леодорский) 등의 친일파와 함께 트리피츤을 직접 체포하였고, 아무르주의 자유시로 도망쳤다가 나중에 박일리야가 없는 틈을 탄 니항출신 독립군에 의해 처형되었습니다.
자유시에서는 독립군에 가담했다는 소리가 있습니다.
(다만 안드레예브와 리아도르스키가 반란을 일으킨 이유가 처음부터 일제 밀정이라는 설도 있고, 일본군과 맞서던 방어선을 지키지 못해 처형대상자가 되자 살기 위해 쿠데타를 일으켰고, 아무르주 자유시 일대로 갔다가 나중에는 어쩔 수 없이 일제에게 넘어갔다는 소리도 있습니다.)
(3) 니항에서 유명한 애국지사는 류소심이다. -> 류소심외에도 일본에 적대적인 애국지사들이 사할린주에 많았으며, 러시아 볼셰비키측 기록과 심지어 일본기록에서 조차 1920년 무렵 한인 교사 '박일리야'가 선동해 독립군 부대가 결성되었음을 대부분 인정하고 있습니다.
(4) 니항 주민 절반에 해당하는 최소 4천여명에서 ~ 1만여명 이상이 살해되었다.
(이오키 료조(五百木良三), 하라 테루유키(原暉之), 존 J. 스테판(John j stephan), A.Y.구트만(ГУТМАН А. Я. 혹은 Anatoly Yakovlevich Gutman), 이르쿠츠크파 독립운동가들의 「재로고려혁명군대연혁(在魯高麗革命軍隊沿革)」문건 등에 이러한 내용이나 유사한 이야기가 나오며, 최근 남한의 독립기념관 공식도서가 A.Y.구트만의 소설책을 사실이라고 인용하는 바람에 그런 내용이 인터넷 등에 떠돌지만)
-> 상식적으로 인구의 10% 정도만 사망해도, 주민 대부분의 기억속에 사망과 피난의 고통이 기록될 텐데, 인구의 절반 이상 거의 대부분이 살해되었다면, 오늘날 니항(니콜라예프스크)에 이러한 증거가 안남을 수 없으며, 니항 주민들의 기억에는 일본군에 의한 학살이 남아 있습니다.
1905년 사할린섬 학살 때 일본군이 살해한 민간인만 최소 수천여명 이상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니항 민간인 학살설은
대부분이 친일파나 일제 앞잡이들의 주장에서나 줄기차게 나오는 개똥 같은 소리일 뿐입니다.
니항사건에서 사망한 민간인은 백파나 일본 지지자였다고 쳐도 약 100명 미만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일본군과 일본거류민은 1920. 3. 12. 반자이 야습을 감행했다가 실패하자 대부분 집단 자살하였고, 포로가 된 130여명을 트리피츤 부대가 1920년 연해주 4월 참변에 대한 보복과 알렉산드라프스크 항구 공격에 대한 보복, 일본군의 니항 재공격에 따른 포로의 필요성 상실로 인해, 후퇴시 처형한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일본거류민들까지 합세한 반자이 야습에 참여하지도 않았고, 포로가 되지도 않은 일본인 소수는 일본에 생환해서도 냉대를 심하게 받았다고 합니다.
(5) 고려인 독립군들이 민간인들을 고문하고, 시신을 무채 썰듯하고, 머리를 자르고, 도끼로 능지처참, 부관참시? 강간 강도질 등을 했다 -> A.Y.구트만(ГУТМАН А. Я. 혹은 Anatoly Yakovlevich Gutman)의 소설책 '니항에서의 죽음'이라는 곳에 줄기차게 ..... 쭉... 쭉...나오는 내용이지만,
근래 독립기념관 공식도서에서나 사실이라고 인용하지만, 일본에서조차 '뻥'이라고 인용하는 사람을 찾아보기 힘듭니다.
지금은 예전 냉전 시대가 아닙니다.
러시아계 파르티잔들이 후퇴시 러시아정교회 성직자의 처형을 주저하자, 고려인 부대가 동원되어 성직자 1명~2명을 처형한 것은 사실로 보입니다.
(6) 안드레예브(Иван Тихонович Андреев)는 진정한 공산 혁명가이다. -> 이지택, 박병길, 김낙현, 최호림 등의 동료라고도 나오는 '안드레예브'는 소련시대 일제편으로 도주한 사실이 비밀로 감춰져서 그런 이야기가 김낙현 등등의 회고록에 나오지만, 러시아에서 논란이 많은 인물입니다.
일단 한국에서 볼 때 독립군편이 아닌 일제의 주구인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7) 어린이,노인, 병자 등의 학살설 -> 사실이 아니지만, 당시 러시아의 식량난 등으로 피난 기간중 노약자, 어린이 등이 많이 사망한 것은 사실입니다.
이것은 시베리아에도
일본군의 공격과 러시아 적백내전으로 피난민들이 넘쳐나고 있어서, 니항만의 문제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야코프 트리피츤은 과대망상이 있었는가 ?
트리피츤은 과대망상증이 있다 -> 이것은 사실일 수도 있습니다.
당시 미국의 윌슨(Thomas Woodrow Wilson) 대통령, 볼셰비키의 레닌(В. И. Ленин) , 중국의 손문(孫文) 등등도 공개적으로 한국독립 지원을 약속한 적이 없는데.....
일개 유격대 대장이 한국 독립운동 지원과 국내 진군 지원을 약속하다니...
믿기 힘들지만 사실이라고 합니다.
야코프 트리피츤(Тряпицын Яков Иванович)을 다루는 영화는 나올 것인가?
아나키스트였던 다른 사람들의 일대기가 영화화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야코프 트리피츤(Тряпицын Яков Иванович, 1897년경 출생 ~ 1920. 7. 9. 사망)도 영화까지 만들어질 가능성도 있습니다.
이미, 그를 주인공으로 하는 다수의 문학작품이 출판되었습니다.
박병길(Василий Пак)에 대한 기록들
한국에서 독립유공자로 서훈된 박병길(바실리 박, 와실리 박, 한국명 : 박병길, Василий Пак, 전직 니항 朝鮮人 民會 회장, 혹은 주무(主務), 혹은 서기 추정)은
특이하게도 다른 독립군들이 일본군들에게 ‘조선비적(선비), 공산비적(공비), 토비, 강도, 마왕, 도적, 악마, 강간범’ 등으로 불려질 때도,
니항 일본인회 회장이었던 시마다모토타로, 島田元太郎, Симада(Мототаро) Петр Николаевич, 일본인. 사할린주와 평안도 등지에서 광산업 매춘업 등 종사. 1870년경 일본 나가사키현 출생 ~ 1945년경 조선 평양에서 사망)의 회고록,
A.Y.구트만(ГУТМАН А. Я. 혹은 Anatoly Yakovlevich Gutman)의 저작물,
하라 테루유키(原暉之)의 저작물,
안드레예브 관련 기록, 독립유공자 김낙현‧이지택의 기록에도 우호적인 선량한 사람 혹은 ‘안드레예브’의 동료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박병길은 또 이르쿠츠크파의 문건인 『재로고려혁명군대연혁(在魯高麗革命軍隊沿革)』 9쪽에 따르면 니항 민회의 주무(主務)였다고 합니다.
대체로 일본 영사관 협력단체인 친일단체의 간부 혹은 회장을 한 것은 맞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https://youtu.be/yPGfM-Pd1nI
사할린의용대 독립군의 활약상
오늘날의 께르비 마을 입구
(Керби, 오늘날의 도시 이름은 '실로 이미니 빨리느 아시펜카', 'Село имени Полины Осипенко', 니항에서 서남쪽으로 직선거리 약 300킬로미터. 자유시에서 동북쪽으로 직선거리 588킬로미터 정도)
께르비 주변 암군강
께르비의 추모비
께르비의 추모비
께르비의 추모비
암군강 께르비 일대 '야코프 트리피츤'의 시체가 매장되어 있는 곳으로 추정되는 곳을 확인한 바, 공산주의 시대에 시체가 옮겨져 현재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다.
첫댓글 연재 하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논쟁거리와 거짓말들이 있군요
예.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소련이라는 나라에서 일어난 일이라서.....
과거....관련된 나라미다 왜곡이 많은 사건입니다
오늘날 러시아의 공식적인 기록과 '니항사건' 관련 공식기록들에서
1920년 니항사건 당시 한국의용군(일명 사할린부대 독립군)이 처형한
인원은 '1명~2명' 정도 밖에 안됩니다.
그러나 실제 전투에서는 더 많은 일본군을 사살한 것으로 보여집니다.
각종 백과사전과 위키피디아 등에
특정 독립운동가를 모욕하기 위한 허위 자료와 수백배~ 수천배 과장한 허위 자료가 상당합니다.
위키피디아, 나무위키 등에는 일본과 친일파의 주장들만 기재된 경우가 허다합니다.
또 일본의 주구 노릇을 하던 사람에 대한 잘못된 평가와 서훈도 있었던 모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