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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에게 저 점퍼가 각인된 건 최근 간첩단 사건이 화제가 되면서부터입니다. 국정원 직원들이 민노총 거점 등 이곳저곳 압수수색을 할 때 저 점퍼를 입고 들이닥치니 자연스럽게 자주 노출된 거죠. 어쨌든 정답은 여기저기 사진에 찍힌 저 ‘점퍼맨’들이 모두 국정원 관계자란 겁니다.
자, 여기서 생기는 다른 궁금증. 대체 국정원 직원들이 왜 대놓고 ‘국가정보원’ 글씨가 선명하게 찍힌 옷을 입고 다닐까요. 알다시피 국정원은 음지에서 일하는 곳이죠. 보안이 생명입니다.
국정원 원훈(院訓)마저 ‘우리는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 입니다. 앞서 문재인 정부 땐 ‘국가와 국민을 위한 한없는 충성과 헌신’으로 바꿨지만 새 정부가 들어섰고 1년 만에 예전 원훈으로 원상복구 됐습니다.
윤석열 정부 출범 후 국가정보원 원훈(院訓)이 ‘우리는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로 바뀌었다(위 사진). 아래 사진은 2021년 문재인 정부가 교체한 원훈석. 아래 사진 원훈석은 국가보안법을 위반한 신영복 글씨체로 쓰여 정보기관의 정체성을 훼손한다는 내외부 지적을 근거로 1961년 국정원 창설 당시 제작된 위 사진 원훈석으로 다시 교체됐다. 국가정보원 제공
국정원 직원들은 명함에도 ‘회사명(국정원 직원들은 스스로 회사원이라 부릅니다)’을 적지 않습니다. 신분을 위장하죠. 제가 아는 누군가는 국정원 ‘입사’ 후 지인들에게까지 알만한 A 대기업에 다닌다면서 신분을 숨겼습니다. 정부 부처들은 웬만한 직급까진 조직도를 모두 공개하지만 국정원은 원장과 1~3차장, 기조실장 정도만 이름을 밝힙니다. 차관급까지만 공개하는 거죠. 그만큼 보안이 철저합니다.
● FBI는 입고, CIA는 안 입고
이런 국정원인데 왜 대놓고 ‘국가정보원’이라 찍힌 점퍼를 입었을까요. 학교 이름을 큼직하게 박은 듯한, 대학생들이 입을 법한 ‘과잠’같은 점퍼를.
먼저 국정원 측에 문의했습니다. 공식적인 답변은 이랬습니다. “법 집행 현장에서 수사관과 일반인 사이 구분이 쉽지 않다. 수사관 얼굴이 언론에 생생하게 노출되는 보안성 취약 문제가 있지만 간첩·반국가사범을 체포·압수수색하는 현장에서 신속하고 엄격한 법 집행을 하고, 대국민 신뢰도 제고를 위해 유니폼을 착용 중이다. 선진 외국 수사기관인 미연방수사국(FBI)과 영국 국가범죄수사국(NCA) 사례를 준용해 유니폼을 제작·착용하고 있다.”
국정원이 언급한 FBI 요원들의 경우 실제 ‘FBI’라 적힌 옷을 입고 나타나기도 합니다. 어느 스릴러 영화 한 장면에서 본 것 같기도 하네요.
반면 FBI와 함께 양대 정보기관으로 꼽히는 미 중앙정보국(CIA)은 어떨까요. CIA라 적힌 옷을 입고 등장한 영화의 주인공을 본 적이 있나요. 그렇지 않을 겁니다. 신분을 숨기죠.
FBI, CIA 모두 정보를 다루는 조직인 건 마찬가진데 왜 다를까요. 국정원 관계자는 이 질문에 “FBI는 미국 내 수사에 초점을 맞춘 조직인 반면, CIA는 주로 해외 정보에 초점을 맞춘다”라고 했습니다. 수사 대상이나 범위, 영역이 다르기에 FBI가 찍힌 옷을 입은 요원은 있지만 CIA라 찍힌 옷을 입은 요원은 우리가 볼 수 없단 겁니다.
그럼 국정원은 FBI에 해당할까요, CIA에 해당할까요. 정답은 둘 다입니다. 영역이 나눠진 미국, 영국과 달리 국정원은 국내외 정보 업무를 사실상 모두 전담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FBI나 영국 NCA처럼 국정원도 ‘국가정보원’이라 쓴 옷을 입는다는 게 국정원 관계자의 설명입니다.
FBI 수사관들의 수사 모습. AP 뉴시스
● 그 점퍼, 언제부터 입었나
나름 합당한 근거인 듯하죠? 그런데 이런 국정원의 점퍼 착용을 또 불편하게 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요즘 인터넷 게시판이나 정치 유튜브 등을 보면 국정원을 겨냥해 온갖 조롱 섞인 추론이 난무합니다. 어떤 이들은 “없는 간첩을 있는 것처럼 만들려고 국정원이 점퍼를 새로 만들었다”고 주장합니다. 국정원이 일을 열심히 한다고 홍보하려고 굳이 입었다는 거죠. 또 경찰에 대공 수사권을 넘겨야 하는 상황에서 조직의 존재 이유를 증명하기 위해 무리수를 뒀다는 주장도 나옵니다. 심지어 국정원이 미국 영화를 너무 많이 봐서 저러고 다닌다는 이들도 있습니다.
이런 비판의 시작점은 대체로 “국정원이 이번에 저 점퍼를 처음 입었다”는 가설에 근거합니다. 국정원이 모종의 이유로 급하게 옷을 만들어 있었다는 ‘음모론’까지 제기하면서.
여기서 또 궁금증. 국정원이 진짜 이번에 처음 저 점퍼를 급조해 입은 건 맞을까요.
나름 취재에 열을 올렸지만 음모론의 실체를 밝혀줄 객관적 문서 등은 확보하지 못했습니다. 다만 신뢰할 만한 복수의 정부 소식통을 통해 저 점퍼를 처음 입은 건 윤석열 정부가 아닌, 문재인 정부 때부터란 사실은 확인했습니다. 한 소식통은 “언제 처음 저 옷을 제작한 건 확실치 않다”면서도 “문재인 정부 때부터 저 점퍼를 입은 건 맞다”고 했습니다. 다른 소식통은 “문재인 정부 때 국정원 개혁을 한다면서 발칵 뒤집어 놓지 않았느냐”고 했습니다. 전 정부가 국정원의 국내 정보 수집 업무를 전면 폐지하는 등 과정에서 ‘투명한 국정원’을 내세우며 개혁 드라이브를 걸었고, 이때 아예 국정원 이름이 적힌 옷까지 입게 된 것이란 얘기죠.
국가정보원 수사관들이 1월 제주 제주시 봉개동 세월호 제주기억관 평화쉼터 대표의 차량을 압수수색하는 모습. 한라일보 제공
정황을 종합하면 문재인 정부 때도 저 점퍼를 입은 건 맞는 것 같습니다. 다만 그때 점퍼를 처음 입었다 해도 요즘 훨씬 노출이 많이 되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국정원이 결국 모종의 의도를 갖고 노출 빈도를 요즘 급격히 늘린 것 아니냐는 의혹 역시 설득력이 완전히 없진 않다는 얘기죠.
국정원 점퍼를 입는 기준이 명확하게 정해져 있긴 할까요. 일단 국정원 측은 “무조건 점퍼를 착용해야 하는 건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수사 대상, 성격 등을 종합적으로 판단해 입을지 판단한다는 거죠. 바꿔 말하면 점퍼 착용을 판단하는 과정에 딱 정해진 기준은 없다는 의미입니다.
아무튼 국정원은 이런저런 말들을 뒤로 하고 저 점퍼 교체 여부를 검토 중이라고 합니다. 일단 한글로 쓴 기조는 유지할 걸로 보입니다. ‘국가정보원’ 대신 ‘국정원’으로 글자수를 줄이거나, 글씨체를 바꿀 가능성은 있다고 하네요.
전 국정원 고위 관계자는 점퍼 착용에 대해 물었더니 대뜸 이런 말을 툭 던졌습니다. “문재인 정부 때 간첩 수사 자체를 제대로 하긴 했느냐”고. 아무래도 문재인 정부가 대북 관계에 공을 들이다 보니 간첩 수사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을 테고, 저 점퍼를 입을 일 자체가 없었을 거란 냉소입니다. 이 관계자는 또 이렇게 말했습니다.
“적어도 대공 수사만큼은 국정원이 정치에 휘둘리지 않아야 한다. 앞만 보는 경주마처럼 일관되게, 또 우직하게 해나가야 한다.”
신진우 기자 niceshin@donga.com
출처 ‘음지에서 일하는’ 국정원 직원은 왜 ‘그 점퍼’를 입었을까 [외안 B컷]|동아일보 (donga.com)
신진우 기자동아일보 정치부niceshi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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