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천관이라는 여인에 얽힌
신라 제일의 각간 김유신이
젊어서 가까이한 천관이라는 여인에 얽힌 전설,
김유신이 젊었을 때 한동안 친구들과 함께
술 파는 계집의 집에 드나든 일이 있었다.
유신의 어머니는 이것을 알고 매우 걱정하여 하루는
곁에 불러 앉히고 엄하게 훈계를 하였다.
그때 유신은 비로소 미몽에서 깨닫고 다시는
그러한 일이 없을 것이라고 맹세하였다.
그런 지 며칠이 지난 어느날, 유신은 놀이를 갔다가 술에
취하여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타고 오던 말이 멈추어서 고함을 지르므로 벌써 집에 도착하였는가 하고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그 집은 자기의 집이 아니라 전날에 드나들었던
천관의 집이었다.
이것은 말이 전날에 다니던 집이라 길이 익은 까닭에
길가에 있는 천관의 집으로 잘못 들어갔던 것이다.
유신은 노하여 말에서 내려 허리에 찼던
칼을 빼러 말의 목을 내리쳐 죽이고 말안장도
그 마당에 내버린 채 한마디 말도 없이
그 집 문을 나와 집으로 돌아갔다.
이 광경을 본 천관은 뜻밖에 이와같은 변을 만난지라
놀라 까무러쳤다가 얼마 후에야 정신을
차린 뒤 말없이 탄식하다가
유신을 원망하는 노래를 지었다고 하는데 그 노래는 지금 전하지 않는다.
이와같은 유신과 천관 사이에 얽힌 사랑의 이야기는
민간설화로서 전하는 것이고,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실려 있는 김유신에 관한 기록에는
천관녀가 등장하지 않는다.
다만 <삼국사기> 권 41 열전 제1 김유신 상에 의하면
"유신이 화랑도에 몸을 담고 있으면서
장차 삼국을 병합할 웅지(雄志)를 품고 있었는데
건복 29년(612)에 이웃 나라의 침략이 날로 극심하매 공이 더욱 비장한
마음을 품고 혼자서 보검을 들고 인박산 깊은
골짜기 속으로 들어가서 향을 피우며 하늘에 고하고 기원하기를
마치 중악에서 맹세하듯 빌었더니
천관신이 빛을 내리어 보검에 영길를 주었다.
"고 하는데 이 부분에서 천관이라는 명칭이 나타난다.
이때 천관신은 도가의 삼관신 즉 천관· 지관· 수관 가운데 하나를
말함인데 두 명칭 사이의 관련성은 알 수 없다.
천관이 죽자 유신이 그 영혼을 위로하기 위하여
그 집 자리에 절을 지어 천관사라 하였다 하며,
또한 자기가 탔던 그 말의 목을 내리쳐 죽인 자리를 참마항이라
불렀는데 뒷 날 사람들이 이르기를
기유신의 삼국통일의 큰 업은 그 참마항에서 움텄다고도 전하여진다.
(출처 : 한국사전연구사간. 국어국문학자료사전)
천관
생몰년 미상.
신라 진평왕 때의 기녀(妓女). 천관녀(天官女)라고도 한다.
소년시절의 김유신(金庾信)과 서로 좋아하였다.
그러나 이를 안 김유신의 어머니가
“나는 이미 늙어서 밤낮으로 오직 네가 성장하여 가문을
빛내기만 바라고 있는데 너는
기생집에나 드나들고 있느냐.” 하고 울면서 책망하자,
김유신은 크게 뉘우쳐 다시는 기방에 출입하지 않겠다고
어머니에게 서약하였다.
하루는 김유신이 술에 취하여 돌아오는데 말이
옛길을 따라 천관의 집으로 갔다.
천관은 한편 원망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반가이 맞이하였다.
그러나 천관을 보고 놀라 술이 깬 김유신은
타고 온 말을 베고 안장도 버린 채 돌아가 버렸다.
이를 본 천관이 원망하는 노래 한곡을 지어 세상에 전하였다고 한다.
뒤에 김유신이 그녀의 옛 집터에 절을 짓고
그의 이름을 따서 천관사(天官寺)라고 하였다.
이 절은 오릉(五陵의 동쪽에 있었다..
뒤에 원성왕이 복두(邏頭)를 벗고
소립(素笠)을 쓴 채 십이현금(十二絃琴)을 들고 천관사의 샘
속으로 들어가는 꿈을 꾸고 왕위에 올랐다는
것으로 미루어, 천관사는 신라 하대에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三國遺事, 新增東國輿地勝覽, 慶州市誌(慶州市史編纂委員會
[출처] 전설=천관이라는 여인에 얽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