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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호와 혜민스님, 차인표가 출연한 TV프로그램을 재미있게 봤습니다.
박찬호의 멘트들을 들으니, 지난 11월 30일 은퇴 기자회견때 녹음해둔 녹취록이 생각나 다시 들어봤습니다.
그날 기자회견장에서 박찬호와 얘기를 나눠봤을 때,
저는 은퇴 자체에 대한 감정보다 [인간 박찬호]의 열정이나 노력에 대한 울림이 있었습니다.
이미 동영상으로 은퇴회견 전부를 보신 분도 있겠고
여러 인터뷰를 통해 그날의 발언을 접하신 분들이 많겠지만
그래도, 은퇴 기자회견 당일 박찬호가 했던 모든 얘기를 한번 남겨놓고 싶어 이 게시판에 다시 올립니다.
읽기 편하게 일부 문장만 다듬었을 뿐, 그날 현장에서 기록한 대화의 전부를 담았습니다.
[기사]는 편집과 재구성을 거치게 마련인데
아래 글은 기사가 아니라 그냥 녹취록에 가깝다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박찬호 기자회견문 낭독]
기자분들이 많이 와주신 것을 보니 그동안 내게 관심이 많았음을 실감한다.
긴 시간 동안 많은 고민을 했고 또 많은 일들이 있었다. 결심을 하기까지 어려웠고 시간이 많이 필요했다
아쉬움도 있고 그리울 것 같다. 많은분들게 감사한다.
어제 하루에 굉장히 많은 메시지를 받았다. 후배들이 보낸 메시지가 마음을 무겁게 하고 미안하더라.
생각지 못한 친구들한테도 왔는데 놀랐다. 그만큼 관심과 사랑을 많이 받았음을 느꼈다.
귀국 후 단장 및 사장과 만났다.
한화 이글스에서 나에 대한 애정을 얼마나 많이 표현해줬고 손을 내밀어 줬는지 다시 한번 느꼈다 감사했다.
그 뒤로 어려운 결정을 했다.
앞에 걸어 둔 유니폼을 보니까 기억이 생생하다.
프로와 대학의 갈림길, 미국과 한국 사이에서 미국에 진출할 때,
다저스에서 몇 년 동안 좋은 성적 내고 또 다른 팀으로 이적할 때,
양키스에서 방출돼 ‘아 은퇴인가’ 싶을 때 피츠버그에서 손을 벌려 기회를 주던 때,
오래전부터 그렇게 소망했던 한국진출이 눈앞에 있을 때, 그리고 1년전 이날 여기 있을때까지.
한국무대 첫 경기에 등판해서 팬들과 마운드에 올랐을 때 모습을 떠올려 본다.
많이 성숙했던 기간들.이었다. 그 때가 다저스 첫 등판보다 새롭고 의미 깊었다.
사연들도 많고 행복했고 고맙고 슬펐다. 여러 기억을 떠올리게 된다.
그때마다 한결 같았던 부모님과, 힘들 때 결혼해서 옆에서 이끌어준 아내 그리고 아이들에게 고맙다.
아울러 힘들 때 외면하지 않았던 진정한 팬들 덕분에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있다.
생각해보면 운이 좋은 녀석이 아닌가 싶다.
시골에서 멋도 모르고 야구를 시작했는데 그 야구가 너무 재밌었다.
옆에 있는 친구나 선배보다 잘해보겠다고 노력해서 대회 나가 상도 받고 프로야구 선수의 꿈을 꿨다.
서울에 있는 대학에 가는 명예도 얻고, ML이라는 명예도 얻었다.
어려움 속에서도 길게 몸 담을 수 있었던 건 같이 해준 분들 덕분이다.
한국 야구 역사상 나만큼 운이 좋았던 사람이 또 있을까 싶다. 그런 분들께 감사한 마음을 전한다.
플래시가 터지니까 개콘의 그 콩트가 생각난다.
나도 '못생기지 않았습니다' 라고 한번 할까?(웃음)
밤새 어떤 단어로 표현할까 고민을 많이 했다. 많은 사람 앞에 서니 말문이 막힌다.
감사한 분들 한분씩 떠올리며 말하고 싶다.
기회를 준 한화이글스 구단, 나를 배려해 기회를 함께 만들어 준 타구단 사장 및 관계자분들,
한 시즌 동안 나와 시간을 함께 해준 선수들 모두 고맙다.
1등한 팀보다 꼴등한 팀이 참 어려운데 함께 하면서 나한테 의지해준 후배들이 참 고맙다.
꿋꿋하게 어려운 팀을 이끌어갔던 한대화 감독도 멋있어 보였다.
함께 기댈 수 있는 등을 만들어준 정민철 코치도 생각 난다.
한국에서 생활하는 것이 목표였고 결국 그 꿈을 이뤘다.
한국 야구를 위해서 한국 선수들과 교류하기 위해서 한국 팬들에게 보상한다는 목적에서 나는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한다
어려운 결정할 수 있게 해준 한화이글스 구단에 가장 감사하다.
내년이 더 어려울 수 있는데 이런 결정을 내려서 죄송하다.
비록 공은 던지지 않지만 다른 일로 한국야구와 한화이글스 선수들에게 도움이 되겠다.
[기자간담회 Q&A]
Q_마운드에서 가장 기뻤던 순간은 언제인가
너무 많다. 미국에서 마이너로 내려갔다 복귀 후 처음 등판이 생각 난다. 그 힘든 마이너리그 이겨내고 올라가서 채워나갈 때의 보람, 그리고 1승째보다 훨씬 기뻤던 124승째, 그 기쁨의 의미는 절망을 딛고 일어서서 일군 것이라 더 컸다. 그보다 더 의미 있는 것은 한국에서 한국 선수들과 뛰면서 값진 1승들을 더한 것이다. 많은 축하를 받았는데 그동안의 아쉬운 마음이 그 축하로 다 위로가 됐다.
Q_은퇴를 결심한 배경이 궁금하다
나는 1년이라도, 아니 한달이라도 한국에서 운동하고 싶었다. 건강함을 지킨 덕에 그 꿈을 이룰 수 있었다. 애초 목표가 1년이었다. 물론 아쉬움은 많았다 구단과 동료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었는데 그 시간을 너무 내가 적응하는데만 쓴 것 같아서 미안했다.
팀은 성과를 위해 구성되어 있는데 내가 팀에 도움이 되지 않은 것 같다. 시즌 후 단장님과 선수들이 ‘형님 내년에도 합시다’라고 권했다. 한용덕 감독대행도 ‘앞으로 충분히 몇 년 더 되니까 팬들을 생각해라’고 말씀하셨다. 그런 것들 때문에 바로 결심 못하고 고민했다.
하지만 계획도 1년이었고 그 1년속에 세운 목표들은 채웠다고 본다. 한국야구에 어떤 것이 필요한지 경험했다. 그 계획이 분명했기에 미련 없이 떠날 수 있었다.
Q_앞으로 어떤 계획이 있나
야구 기술에 대해 배우고 경험하고 실험하고… 그런 것들은 어차피 해가 갈수록 좋아질거다. 나는 그보다 야구 행정 경영이나 운영쪽에 관심이 많다. 매니징 커뮤니티라던지, 야구를 통해 할수 있는 것들, 이를테면 미국과 한국과의 야구 교류, 이런 일들을 원한다. 유소년의 꿈을 지원하는 프로그램도 좋을 것 같다.
Q_한국에서 뛰는 동안 선수들과는 어땠나
처음에는 어린 선수들이 어려워하고 말도 못 붙였는데, 나중에 소통이 잘 되고 부담 없이 관계가 이뤄진 게 좋았다. 제일 기억나는 건 룸메이트 안승민이다. 늘 웃음을 줬다. 자기 딴에는 나랑 달았단 얘기를 굉장히 기분나빠하는데(웃음) 은퇴 소식 듣고 제일 아쉬워했다. 고참들도 내게 관심 갖고 의지해준 것이 고맙다.
시즌 때 나와 대화가 별로 없었는데, 지난 11월 마무리 훈련 후 나한테 연락하고 메시지 보내서 조언 구한 시간이 있었다. 내가 시즌 초부터 “궁금한 것 있으면 언제든 얘기해라. 어려워하지 마라. 그래야 팀이 강해진다” 말했었는데 늦게나마 그게 됐다.
심적인 부담이 많았을 주장 한상훈 선수가 저한테 조언 많이 구했는데 그것도 기억난다. 호흡을 맞춘 신경현 포수도 기억에 남고, 아래 위층 살면서 출퇴근 같이 한 김태균은 어려운 속에서 자기 역할 훌륭히 해내 대견하다. 며칠 전에 긴 문자메시지가 왔다. 내가 왜 남아야 되는지, 자기 마음이 지금 어떤지 솔직하게 얘기하고 ‘팔이 빠질 때까지 팀을 위해 던져달라’고 당부했다.
Q_'아 이제 여기까지구나‘ 생각했던 이유가 있나
부상이다. 지난 5년 동안 매년 부상을 한번씩 겪었다. 부상 딛고 완쾌돼 월드시리즈에 나갔는데 일본에서 또 부상 당하고 2군 경험을 하지 않았나. 그런 과정을 거쳐 많은 경험을 했고, 특히 일본을 거쳐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이 내게는 좋은 경험과 공부가 됐다. 아울러, 그런 상황에서도 마지막 경기 선발로 믿어준 송진우 코치에게 감사하다.
Q_운영이라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 건가
나는 미국 프로야구에 오래 몸담았다. 미국 상업야구를 오래 경험했다. 팬들과 다양한 것을 하는 그들의 문화에 익숙하다. 한국도 상업야구로 발전해야 된다. 앞으로는 한국 구단도 그렇게 될 거라고 장담한다. 그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것이다. 그 부분에서 세계적인 공부를 위해 미국 쪽으로 갈 것 같다. 하지만 ‘미국야구 박찬호’ 하면 다저스가 생각나듯, 한국프로야구에서 박찬호를 말하면 앞으로도 늘 ‘한화’가 떠오를 것이다.
Q_후배들에게 조언해줄 것이 있나
한국 선수들은 정 많고 노력을 많이 하고 투지도 세다. 특히 국가대표팀의 투지와 자세는 미국에서도 유명하다. 하지만 너무 이겨야 된다는 목적 때문에 마음적으로 여유가 부족하다. 길게 보고 지금 할 수 있는 것들에만 집중하는 자세가 필요한데, 매 순간 한경기 결과에 너무 많이 집착한다. 이기고 지고 잘하고 못하는 것은 앞으로 오랫동안 수많은 실수를 통해서 배워가게 마련이다. 그 목표를 길게 보고 당당하게 실패와 실수를 견뎌낼 마음의 여유를 찾아야 된다.
아울러, 야구선수로서의 노력도 물론 중요하지만 야구를 통해 다른 사람에게 어떤 영향력을 줄 수 있는 선수가 될지 고민해라. 야구에 대한 분명한 철학이 있는 선수. 그것이 자기 야구를 강하게 하고 사회를 바르게 만들 것이다.
Q_한국에서 지도자 할 생각은 없나
지도자의 역할은 내가 하고 싶은 여러 가지 꿈과 목표 안에 있다. 좋은 지도자, 정확한 지도자가 되기 위한 공부도 할거다.
Q_우승 반지가 없이 은퇴하게 됐다. 그 부분이 아쉬울 것 같다
내셔널리그 우승은 해봤다. 그래서 오늘 그 반지를 끼고 왔다 물론 월드시리즈 우승반지는 없지만, 와이프가 오늘 아침에 챙겨줬다. 일이 있어서 이 자리에 같이 참석은 못하지만 대신 반지를 꼭 끼고 가라고 했다. 내셔널리그 우승, 그리고 국가대표 금메달이 있으니까 그래도 값진 열매와 추억은 가지고 있는 것 같다.
Q_가장 고마웠던 타자, 그리고 두려웠던 타자는 누군가
고마웠던 내셔널리그 타자가 누구냐는 질문은, 아마 경기마다 홈런 치거나 득점 해준 타자가 누구냐고 말씀하신 것 같다. 모든 경기마다 너무 많아서 특정 선수의 이름을 고르기는 어렵다. 나는 전년도 우승팀의 노련한 선수들과도 뛰어봤고, 꼴찌팀에 가서 다양한 꿈을 가진 젊은 선수들과 생활해본 것도 기억에 남는다. 어린 선수들이 내게 의지하고, 그 와중에 124승 선발로 등판한 게 기억에 남는다. 까다로운 타자라면 배리본즈 같은, 홈런형 타자인데 선구안 좋은 선수들이다. 한국에는 이승엽 같은 선수다.
Q_미국에서 가장 힘들었던 때는 언제인가
2009년에 은퇴 결심을 했었다. 그때 시즌 중간에 성적이 좋지 않았다. 점수를 많이 내주고 강판당한 날이 있는데, 다음 경기가 LA다저스와의 경기였다. 아침일찍 피터 오말리씨에게 연락했다. 그를 만나서 은퇴라는 말을 처음 꺼내고 내 진로에 대한 고민을 털어놨다. 안 좋은 경기에 대한 아쉬움도 비쳤다. 그때 오말리씨가 “지금 아무리 힘들어도 가족에게 큰 일이 닥쳐 받는 고통보다 마음 아프거나 걱정되지는 않을거다. 너의 커리어에 그 정도 부진으로 걱정하지 마라. 재미있게, 그냥 오늘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던져라. 그리고 아이들이 앞으로 어떻게 커 나갈까, 그런 고민을 해라. 그게 훨씬 더 도움이 될 거다”라고 말해줬다. 그날, 나는 3이닝을 잘 막고 그 후 월드시리즈까지 나갔다.
Q_‘라디오스타’식으로 물어보자. 박찬호에게 야구란 뭔가
야구란 내게 학교 같다. 학업으로서, 책으로서 배우지 못한 삶을 거기서 배웠고 야구를 통해 만난 사람들이 내 삶을 의미있게 해줬다. 야구장에 나가면 ‘오늘은 뭘 배울까’ ‘오늘 목적은 뭔가’ 그런 생각을 매일 하게된다. 성적이나 잘하는 것에 대한 목표와 부담감보다 그런 생각을 많이 했다.
사람들은 내가 성공신화를 써온 줄 알지만, 야구팬들은 다 아실 거다. 굴곡이 굉장히 많았다. 텍사스에서의 부진, 팀 이적, 2군행, 부상, 월드시리즈 진출, 일본과 한국행까지… 그 와중에 배우고 얻은 게 참 많다. 시련을 겪다보니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야구를 대할 수 있었다. 운동을 사랑할 수 있었고, 더불어 성과 이루는 팀워크를 배울 수 있었다. 마지막에는 늘 어떤 자세로 어떻게 떠날까. 내가 떠날 때 남길 메시지는 뭐가 될까 고민했다. 삶을 사랑하게 있게 해준 과목이 바로 야구였다.
Q_은퇴식을 치를 것인가
내 마음속에는 지난 시즌 한경기 한경기가 마지막 등판이자 은퇴식이었다. 특히 마지막 경기는 내 커리어를 끝내기 전에 단 한 타자, 혹은 한 이닝이라도 잘 던져서 막고 싶었다. 그런데 선발로서 6이닝을 던졌다. 감동적이었다. 하지만 한화에서 원하는 시간이 있을 것이다. 언제 어떤 형식일지 모르지만 그런 기회가 있을 것 같다.
Q_그러면 지금 당장의 계획은 뭔가
일단 미국에 가는 걸로 정했다. 올 겨울 연말은 일단 미국에서 보내면서 앞으로의 일들을 상의하고 아이들 학교 문제등을 알아볼 거다.
Q_스스로에게 어떤 평가를 내려주고 싶다
‘수고했다’ ‘잘했다’ 말해주고 싶다. 뭔가를 이뤄서가 아니라 잘 견뎌내서다. 나는 매일 아침에 거울 보면서 스스로에게 대화 거는 시간을 가진다. 뭔가를 다짐할 때도 있고, 스스로를 혼낼 때도 있고, 용서할 때도 있다. 최근에는 용서의 시간이 많았다. 하지만 전체를 보면 끈임 없는 도전으로 기억된다. 내 도전이나 목표는 늘 보이지 않았던 것으로부터 시작했다. 그러나 복이 많아서 그 꿈이 대부분 실현될 수 있었다.
Q_마지막 질문이다. 앞에 유니폼이 13벌 있다. 딱 한 벌만 입고 기념촬영을 해야 된다면 무엇을 고르겠나.
정말 어려운 질문이다. 원래 몇 개만 골랐는데 그러자니 다른 유니폼에게 미안해서 전부 다 골랐다.
한양대학교 시절에 나는 외로움을 많이 탔다. 서울 와서 혼자 캠퍼스 어두운 곳에서 개인 훈련 하던 기억이 난다. 미국에 처음 가게 됐을 때 두려웠는데, 한양대 감독님이 내가 떠나기 전에 손잡고 우신 기억이 난다.
다저스 라소다 감독도 생각나고,
방콕아시안게임 국가대표는, 베이징올림픽 금메달을 지켜본 감동 이상의 무언가가 있었다. 미국에 가서 고생하면서 애국심이많이 생겼기 때문인 것 같다
텍사스는 눈물을 많이 흘리게 한 곳이다. 내게 ‘값진’ 별명을 줬다 먹튀라는 별명. 처음에는 참 분하고 내 속마음을 이해 못해주는 것 같아 속상했다. 난 최선을 다했지만 단지 부족했을 뿐인데, 사람들은 왜 몰라줄까 싶었다. 하지만 그 아픔 덕분에 강해질 수 있었음. 내게 경제적으로 큰 도움을 준 유니폼이기도 하다(웃음).
샌디에고는 앞으로 많은 인연을 갖게 될 것 같다.
WBC는 내가 한국인이라는 진한 감동을 느꼈던 기억이 난다. 한국 최고의 선수들, 이승엽과 이종범, 구대성 선배… 그런 사람들을 다 만나면서 우리 프로팀의 세련된 한국 야구를 선진 야구에 제대로 알렸으니까.
필라델피아 유니폼에는 당시 소속팀 선수들의 사인을 다 받았다. 나 스스로에게 가장 영예로웠던 기억이다.
뉴욕 양키스의 훌륭한 사람들도 기억나고
피츠버그의 124승도 잊을 수 없다.
그리고, 내가 오늘도 오렌지색 넥타이를 맸다. 사람들이 그러더라, ‘너는 오렌지색이 잘 어울린다’고. 한국에서의 마지막 큰 기회를 준, 소중하고 값진 경험을 하게 한 한화이글스.를 잊을 수 없다.
결국 이 13벌의 유니폼이 내 인생의 가장 값진 컬렉션이 됐다. 이 컬렉션이 후배 꿈나무들에게 메시지가 되면 좋겠다.
이게 마지막이라는 생각을 하니까 쓰리고 울컥하다. 어제가 7년 전 결혼기념일이었다. 그리고 바로 이 시간(오전 11시)이 하와이에서 결혼식을 올리던 시간이다. 여러 모로 내게는 참 의미있는 날이다. 많은 분들이 내게 아쉬움의 인사 대신 축하한다는 말을 해줬으면 좋겠다. 끝난다는 말보다 새로운 것을 시작한다는 마음을 가지고 또 다른 꿈을 설계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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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뭔가 꿈을 꾸는 사람..그걸 위해 열심히 사는 사람에게선 항상 배울게 있군요~ 박찬호도 제 멘토가 될듯. 글 감사합니다
말 한마디마다 감동이 담겨있네요. 감사합니다.
그래도 국가대표 금메달이 있으니까..... 가장 울컥하네요
에휴 형님 미안하네요 2~3년은 던지겠지하고 생각하다 직관을 못했네요 힝 그래도 당신때문에 즐거웠던 나날이 많았습니다 감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