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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와 심환지
◈ 정조의 술수와 다혈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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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적대관계로 알려졌으나 실제로는 빈번한 서찰 교환을 통해 정국을 함께 주도한 것으로 밝혀진 정조와 심환지의 초상. 정조의 어진은 남아있지 않다. 사진은 지난해 방영된 SBS TV 드라마 <바람의 화원>에서 신윤복(문근영 분)이 정조(배수빈 분)를 그린 초상화(사진 왼쪽)다. 심환지의 영정(오른쪽)은 19세기초 작품으로 보물 1480호이며 후손인 청송 심씨 가문에서 소장해오다 경기도 박물관에 기증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SBS 제공>
◆ 어찰첩 통해 본 정조의 리더십
정조의 비밀편지가 9일 무더기로 발굴, 공개되면서 정조시대의 정치상황을 훨씬 풍성하게 조명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이번에 발굴된 정조의 편지들은 그가 죽은 뒤 만들어진 문집 <홍재전서(弘齋全書)>에도 전혀 소개되지 않았던 것들이다.
◇ 정조의 막후정치와 당파관리= 학문을 좋아하는 선비 타입의 군주로 널리 알려진 정조대의 사료는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 정조편에 남아 있다. 여기에 새롭게 발굴된 정조의 편지는 수신된 날짜가 꼼꼼히 기록돼 있어 기존 사료의 이면에 존재했던 사건의 내막과 숨겨진 의도를 밝혀주는 길잡이 노릇을 한다. 특히 정조가 편지를 통해 신하들의 행위와 발언을 치밀하게 지시하는 등 공작정치를 펼쳤음이 백일하에 드러나면서 ‘공식’ 사료의 재해석 문제가 대두할 것으로 전망된다.
그간 정조는 심환지가 속한 노론 벽파(僻派)와는 적대적인 관계를, 남인 시파(時派)와는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는 것이 통설이었다. 이는 정조 말년의 시대 상황에 대한 일반적인 고찰과 맞아떨어진다. 그러나 이번 발굴로 벽파에 대한 정조의 입장이 적대적이기만 했던 것은 아니며 각 당파를 관리하면서 일종의 ‘등거리 정치’를 펼쳤음을 짐작할 수 있게 됐다.
정조는 1800년 5월30일 보낸 편지에서 “경들처럼 이렇게 두려워하고 모호해서야 장차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는가”라며 벽파의 분발을 촉구하고 시파의 폐해를 지적하기도 했다.
정조가 인사문제에 있어 벽파와 시파, 남인과 소론의 안배를 강조한 탕평책을 계승했던 것처럼 각 당파 사이에서 자신의 정치적 위상을 자리매김하기 위해 노력했고, 이를 위한 도구로 비밀 편지가 긴요하게 사용됐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김문식 단국대 사학과 교수는 “정조가 심환지에게 편지를 보낸 것은 노론 벽파를 정치권에 끌어들여 뚜렷한 정치세력으로 정립시키려는 의지가 있었기 때문”이라며 “시파계 인물에게도 편지가 갔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 정조는 다혈질 인물= 정조는 심환지가 비밀편지의 내용을 누설했다고 수 차례 질타하는가 하면, 상당히 과격할 정도로 인 물평을 늘어놓는 등 격정적인 면모를 보였다.
예컨대 최측근으로 알려진 서용보(徐龍輔·1757~1824)에 대해 “호로자식”(胡種子)이라고 칭했다.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 학자였던 김매순(金邁淳)에 대해선 “입에서 젖비린내 나고 미처 사람 꼴을 갖추지 못한 놈” “경박하고 어지러워 동서도 분간 못하는 놈”이라고 혹평했다.
비밀편지의 특성상 구어체와 속담, 비속어도 자주 등장한다. “이 떡을 먹고 말을 참아라”라고 한다거나 “개에 물린 꿩 신세” “꽁무니를 빼다” “말할 건더기” 등의 표현이 이에 해당한다. 한문 편지 중간에 난데없이 ‘뒤죽박죽’이라는 한글 표현이 등장하기도 한다. 안대회 성균관대 한문학과 교수는 “의미를 분명히 전달하기 위해 ‘뒤죽박죽’을 썼을 수도 있고, 격정적으로 글을 써 내려가다가 마땅한 한문 표현을 생각하지 못해 이렇게 표현했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 독살설은 기각될 듯= <정조실록>은 신하들을 접견하던 정조의 병세가 위중해지자 심환지가 다급하게 정조의 입에 인삼차, 청심원 등의 약을 넣었지만 삼키지 못했고 며칠 뒤 사망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에 더해 심환지가 정조와 대립했던 노론 벽파의 우두머리였다는 사실 때문에 그가 정조를 독살했다는 주장이 심심찮게 제기돼 왔다.
하지만 이번에 공개된 편지들에 따르면 심환지는 정조의 정적이기보다는 그의 심복에 가까웠던 것으로 보인다. 정조는 심환지의 아들이 과거에서 300등 안에만 들면 합격시키려 했으나 그렇지 못했다며 안타깝다고 말할 정도로 친근감을 보였다.
특히 정조는 말년의 편지에서 자신의 병세를 여러 차례 소상하게 언급했다. 현대에서도 그렇지만 왕조시대에 왕의 병세는 극비에 속한다. 그를 믿지 않고서는 나올 수 없는 행동이다. 그는 죽기 두 달 전인 1800년 4월17일자 편지에서 “나는 갑자기 눈곱이 불어나고 머리가 부어오르며 목과 폐가 메마르네. 눈곱이 짓무르지 않을 때 연달아 차가운 약을 먹으면 짓무를 기미가 일단 사라진다 … 그 고통을 어찌 형언하겠는가?”라고 호소한다. 사망 13일 전이자 심환지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의 주제도 심각한 병세에 관한 것이었다. 안대회 교수는 “편지로 볼 때 정조의 사인은 병에 의한 자연사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말했다.
◇ 비밀편지가 빛을 보기까지= 연구팀은 1년여 전 개인이 정조의 어찰첩을 소장하고 있다는 정보를 접하고 그를 찾아가 설득한 끝에 진본을 확인했다. 김문식 교수는 “이 자료는 기본적으로 심환지 집안에서 나왔지만 현재의 소장자는 심환지 집안과 전혀 관계가 없다”면서 “책자 형태로 표구가 된 것은 해방 이후 시기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연구팀은 1796년 8월20일부터 1800년 6월15일까지 작성된 편지 299통을 일일이 사진으로 찍었으며, 10여명의 전문가가 탈초(脫草·정자체로 풀어쓰기)와 번역작업에 투입됐다. 연구팀은 조만간 각 편지의 사진과 번역문 등을 묶어 책자로 발간할 예정이다.
<김재중기자 herme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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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조 ‘비밀편지’ 공개 “독살설 배후 심환지와 친밀”
◆ 심환지 [沈煥之, 1730~1802]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조선 정조 때 벽파(僻派)의 거두였고 순조 즉위와 함께 영의정을 역임한 만포(晩圃) 심환지(沈煥之.1730-1802) 영정(影幀). 19세기 초 작품으로 견본채색(絹本彩色). 149 x 89㎝. 보물 1480호. 만포가 후손인 청송심씨(靑松沈氏) 가문 소장이었으나 경기도박물관에 기증됐다.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휘원(輝元), 호는 만포(晩圃)이다. 아버지는 심진(沈鎭)이며, 어머니는 부사를 지낸 김이복(金履福)의 딸이다. 1771년(영조 47)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후, 정언 · 교리 · 부수찬 등 언관직을 두루 거치면서 유배생활을 겪기도 하였다. 1779년(정조 3)에는 문신들에게 시험을 보인 자리에서 수석을 차지하였고, 이해 일본에서 온 사신을 접대하는 접위관의 임무를 수행하기도 하였다.
이후 옥당 · 교리 · 시강원겸문학 · 필선 등의 실무 언관직을 두루 거쳐 1787년(정조 11) 호서(湖西)의 암행어사로 임명되어 지방을 순찰하였다.이후 대사간 · 대사헌을 지냈고, 1792년 형조참판을 지낼 때 평택 안핵어사 김희채(金熙采)의 탄핵을 받아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복귀하여 이조참판에 올랐다. 이후 홍문관과 예문관의 양관 제학, 규장각제학 · 이조판서 · 병조판서 등을 거쳐 1795년 우의정 · 좌의정을 지냈고, 1800년(순조 즉위)에는 영의정에 올랐다.
철저한 노론계 인물로서 신임의리(辛壬義理)를 고수하였고,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이 정당했다고 주장하는 벽파의 영수를 지냈다. 그리하여 정조가 죽은 후 장용영(壯勇營)을 혁파하였고, 나이 어린 순조의 원상(院相)이 되어 정권을 장악하고 신유사옥을 일으켰던 인물이다.
그가 죽은 해인 1802년(순조 2) 문충(文忠)이라는 시호가 내려졌으나 1806년에는 관작이 추탈되었다.
◆ 영.정조의 탕평책
2009년 2월에 정조가 심환지에게 보낸 비밀편지가 공개되면서 정조는 현안 발생시, 심환지에게 비밀편지를 보내 미리 의논하고, 정책을 추진한 것으로 밝혀졌다.
영조와 정조가 주창하고 실행했던 탕평책...
정치적 조화와 당쟁의 폐단을 종식시키고자 행했던 이 정책에 대해선 너무나 잘아실거다.
그러나 탕평책을 실질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 필요했던 정치적 방법이 과연 무엇이었을까..
영조 재위 전, 영조의 배다른 형이었던 경종은 장희빈의 소생으로 태어나자마자 소론이라는 당적을 달고 태어난 왕이었다.
그런 경종을 몰아내기 위해 노론은 온갖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았고, 병약했던 경종이 젊은 나이로 갑자기 승하하자 영조, 즉 세제였던 연잉군이 경종을 독살했다는 주장까지 나오게된다.(당시, 경종의 정비였던 심씨의 오빠인 심유현이 "주상께선 승하하시기전 검은피를 쏟으셨다"라는 말로 독살설을 제기한다)
바로 그때 역사속에 유명한 사건중 하나인 "이인좌의 난"이 일어난다. (이인좌는 소론출신 무장이었다)
당시 소론은 경종이 병석에 있을때 영조가 진상한 게장을 먹고나서 병이 악화되어 죽었다고 보고 영조가 경종을독살했다고 판단했으며 영조의 어머니가 숙종의 후궁이 되기전에 결혼했었던 전력(숙빈 최씨는 후궁이 되기전 궁의 잡일을보는 무수리였다. 숙종은 이런 최씨를 임신시키고 나서 후궁으로 삼았는데 당시 숙빈 최씨는 남편이 갓죽은 청산과부였다.)을 들어 숙종의 아들이 아니라는 주장을 펼치며 난을 일으킨다...그러나 난은 평정되었으나 그 여파는 컸다.
소론이란 소론은(어사로 유명한 박문수를 제외하고, 박문수는 이인좌의 난을 진압하는 군을 지휘했다.) 모조리 주살되거나 귀양을 가게 되고 노론만이 정치를 농락하는 사태가 벌어진다. 정치의 타락은 피할수 없었으며 영조가 말하고 실행하려던 탕평책은 오히려 노론의 정치공세에 면죄부만을 주게된 것이다.
요직에 남인이나 소론을 기용하려하거나 정치적 소신을 펼치려고 할 때마다 노론은 "이인좌의 난때의 억울함을밝혀줄 자가 우리 노론말고 누구이겠습니까"(영조가 경종을 독살했다는 주장, 영조가 숙종의 친자가 아니다라는 주장. 영조는 평생동안 이 두가지 루머에 트라우마를 갖고 있었던 걸로 보인다. 어필절목과 영종기사를 보면 상당 부분 그런 흔적이 보인다.)라는 말로 영조를 압박한다. 이것이 바로 신임의리 라고 말하는 노론의 정치공격인 것이다.
즉, 영조가 인재를 고르게 등용하여 남인, 소론, 노론에 관계없이 요직에 기용하는 방법을 택했으나....
노론의 지지로 왕이된 영조는 남인, 소론을 일부 제한적인 직책과 인원으로 등용할 수밖에 없었고, 형식적이나마 탕평책이 실행되고 있었음으로 노론의 정치적 전행을 견제할 어떠한 명분도 없었다는 겁니다.
이렇게 되자 정조는 형식뿐인 탕평책이 아닌, 현대적인 삼권분립 형태의 탕평책을 시행하게 된다.
즉, 국가 행정수반인 영의정에 남인을 앉히면 외교와 일반공무를 결정하는 좌의정에 소론이나 시파, 그리고 병권과 법령을 관할하고 실제적인 책임자였던 병조판서 자리에 노론을 기용하는....
쉽게 말해 행정, 법령, 군권을 철저히 분리하여 서로 견제하는 방식을 취했던 것이다.
수원의 화성축성과 원행이 이루어지기 전인 1790년, 정조대왕의 탕평책에 따랑 영의정 김종수(노론의 영수)와 함께 번암 채제공 선생께서는 좌의정에 올라있었다. 헌데, 난데없이 모친상을 핑계로 김종수가 낙향함으로써 영의정없는 좌의정으로 채제공 선생 혼자 정무를 보는 남인 독상정부가 들어서게 된다. 이에 노론벽파가 채제공선생을 끌어내리기 위해 물품도고현상(매점매석을 통해 물가를 올림)을 일으키자 전격적으로 신해통공을 발표해 노론의 정치자금의 근원이자 고의적인 품귀현상을 일으켰던 시전상인들에게 철퇴를 가한다.
이렇게 노론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자, 낙향했던 김종수 대감이 돌아오면서 상황은 급변하게 된다.
1793년 이후, 수원화성의 축성에 매달렸던 채제공 선생이 노론의 재집권을 두려워하여 무리하게 독상정부(좌의정, 우의정이 없는 영의정)를 이끌어오자 노론은 정계재편의 필요성을 주장하며 국정의 변화를 꾀하게 된다.
헌데 이상한것은 영의정에 채제공을 그대로 유임시키는 것을 인정하면서 좌의정이나 우의정이 아닌 병조판서에 심환지를 천거한 것이다. 더욱이 김종수 대감은 이 일이 있은후 스스로 정계에서 완전히 물러나 버리는 것이다.
노련하며 영민했던 김종수 대감이 행한 너무나 이상한 결정들....
그의 대한 의문점과 이면에 감춰진 사실을 하나하나 짚어 볼 필요성이 있을것 같다.
1. 왜 영의정 채제공을 그대로 유임하게 내버려뒀을까?
번암 채제공 선생은 오랫동안 독상정부를 이끌며 훌륭히 그 업무를 수행해 냈다. 허나, 탕평책의 명분상 오랜시간 영의정을 지냈기에 좌의정이나 우의정 등으로 물러나 골고루 업무를 보게 했을 수도 있었다. 정조대왕 스스로도 "채제공이 오래 영의정을 본다"라고 말할 정도 였으니까... 왜 노론은 영의정에 그대로 채제공 선생이 있길 바랬을까?
그 이유는 이 답변의 마지막으로 잠시 밀어두고...
2.왜 하필 병조판서인가?
1795년에 사암 정약용선생은 병조참의에 제수 된다. 즉, 이번에 우리 노론이 병조판서를 할테이니 다음에는 남인이 맡으라는 식으로 "탕평책에 따라 영의정을 양보하였으니 이번에 군권은 노론이 맡겠다. 대신 다음 번 군권은 남인의 정약용에게 주겠다"는 일종의 암묵적인 정치적 계약인 것이다. 물론, 약속대로 사암 정약용 선생이 후에 병조참의로 기용되긴 했으나 노론은 왜 병조의 최고 어른인 좌의정이 아닌 병조판서를 원했을까...
그 이유가 노론, 특히 심환지가 군,병권에 관계된 인물들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실질적인 병권의 실행자로써 반정을 꾀하지 않았을까라는 추리를 하게 된다. 정조에 의해 목숨이 날아간 구선복을 비롯하여 훈련도감 등 기존 세력이 상당한 피해의식을 갖고 있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충분히 일리있는 얘기가 된다.
3.왜 심환지인가...
심환지는 노론의 영수였었던 김종수, 윤시동 등과는 동년배, 즉 비슷한 또래로 같이 동문수학했던 사이였습니다.
예를 들면 노론벽파중에서도 긴밀한 관계에 있던 김종수, 윤시동과 더불어 정조의 비였던 효의왕후 김씨의 아비인 김시묵과 함께 일종의 비밀결사였던 "청명당"을 조직하기도 했었다.
왜 김종수는 심환지를 노론의 영수로 인정하고 물러났을까.....
더욱이 심환지보다 뛰어난 인재들도 있었는데...라는 의구심이 생기게 됩니다.
그것은 아마도 정조가 특별히 고려하지 못했던 유일한 인물이었기 때문이 아닐까라는 생각이다.
실제 심환지는 31살의 늦깍이로 출사하여, 변변한 요직은 거치지도 못한채 오랫동안 유배생활을 했었다.
게다가 현재 남아있는 그의 필서들을 보면 선대 노론의 명재상이던 유척기나 이천보와는 비교할 수도 없고, 동시대의 김종수나 윤시동과 비교하면 너무나 유치하고 졸렬하게 쓰여져 있다. 문장의 수준 낮음은 노론의 후기지수였던 서용보다도 못했다.
이런 그가 과연 정조에게 견제를 해야할 만큼 대단한 인물로 비췄졌을까?
이런 인물이 병조참판에 앉았다고 정조대왕께서는 과연 불안해 하셨을까?
심환지가 정치적으로 두각을 나타낸 것은 좌의정에 제수되고 나서부터다. 오랜 세월 정치의 풍파 속에서 갈고 닦여진 예리한 감각과 탁월한 노련함, 거기에 무서울 정도의 과감함이 노론의 존장, 노론벽파의 수장으로 오르면서 "주자의 혼령과 사대부의 국가를 지킨다"는 철저한 대의명분과 합쳐지면서 무서운 파괴력을 나타 낸 것이라고 본다.
실제 그의 서필이나 행적, 언행을 살펴보면 자신이 조선을 지켜야 한다는 그의 사명감이 곳 곳에 드러나 있다.
대대로 세도를 누렸던 노론의 영수라고는 보기 힘들 정도로 청렴한 삶을 유지 하였는데, 좌의정에 오르고 나서도 오막살이를 할정도로 사림의 본분이라는 것에 맹목적인 열성을 보였다. 청류라고 자처할 정도로 말이다...
왜 정조는 위험을 무릅쓰며 병조판서에 노론을 임명한 것인지 결론적으로 얘기하면 정조대왕은 탕평책의 현실적 정책으로 삼권을 남인, 시파, 노론으로 나누었으며 각 요직은 각 당이 돌아가며 맡게 되었음으로 영의정직을 양보한 노론의 요구로 병조판서를 심환지가 제수받게 했다는 것이다.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이 모두 노론이었던 적도 있었고 앞서 말한바와 같이 채제공 선생 혼자서 운영되던 남인독상정부 시절도 있었다. 다만, 정조 대왕은 최대한 이러한 정책을 실행하려 노력하였고 병권의 최고 책임자였던 좌의정에 심환지가 앉자 이를 견제하기 위해 사암 정약용을 병조참의로 기용하는 방식을 취하기도 했다.
◆ 좌의정이나 우의정에 노론이나 심환지가 앉았다면 어떤 변화가 일어 났을까?
정조대왕의 탕평책 실행법대로 계산한다면, 영의정 채제공, 좌의정 심환지, 우의정 이시수를 기용한뒤...
채제공의 상소나 어떤계기를 통하여 이들 삼정승을 모두 물러나게 한뒤 영의정 정약용, 좌의정 이가환, 우의정으로 윤급이나 김조순을 임용하는 신 정권을 세울수 있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노론이 병조판서라는 상대적으로 낮은 지위에 심환지를 앉히며 순서상으로 정약용의 등용에 제동을 걸게 되자 정조 대왕께서는 은연중에 채제공선생께서 스스로 물러남으로써 정약용에게 기회를 주기를 바랬으나 채제공 선생이 좌의정에 시파를 추천하자 홍재전서에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번암(채재공 선생)이 오랬동안 영의정으로써 격무에 시달리다보니 판단력이 흐려진듯 하다"
즉, 사암 정약용 선생께서 활약할 수있는 기회가 올수도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남인세력과 정조대왕의 잘못이 아니라 정세를 제대로 파악한 노론의 능력이 뛰어났다고 밖에는 말할수 없을것 같다.....
붕당의 내용을 대략적으로 살펴보자.
노론
주자학의 신봉자들로 우암 송시열을 기조로 삼는다. 심지어 공자보다 주자를 더욱 높게 평가하며 공자의 말씀이라 전해
지는 삼경보다도 주자가 집대성 하고 삼경보다 훨씬 후대에 교과서로 채택된 사서를 우선시 했을정도였다.
흔히 사서삼경으로 묶어서 말하나 엄연히 사서와 삼경은 그성격이 다른 책이다.
삼경은 시경, 서경, 주역으로 이루어진 고대 부터 존재했던 일종의 문학작품적 성격이 짙으며 오래전 존재했던 요,순시대의 성왕정치에 관한 옹호와 공자의 예학의 근간을 이룬다.
사서는 논어, 중용, 맹자, 대학으로 이루어져있으며 어디까지나 현실적 정치에 치중한 모습을 보이며 붕당의 필요성에 대한 바탕을 이루고 있다. "붕당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며 군자는 마땅히 군자의 당을 만들어 군자의 당에 들어야한다. 비록 왕일지라도 군자가 있는 당이면 스스로 그 당에 들어야한다."를 바탕으로 "사대부와 군왕에 차이는 없다"라는 관점을 갖고 있다.
아이러니 하게도 선조시절 당파 싸움에 중립적인 위치를 고수하며 주자설을 비판했던 율곡 이이의 사상이 노론의 정치관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는데 "이와 기는 다르면서도 하나다"라는 이기일원론을 "군신간에 차이는 없다"라고 해석함으로써 왕권보다 사대부의 신권이 더 우월하다는 입장을 취하게 되는 것이다.
이론적인 성리학보다 현실정치 개혁에 초점을 두었던 노론은 처음에는 왕권의 폭정과 특정인물이나 무리에 의한 독재를 견제한다는 취지를 갖고 있었으나 점차 퇴색하여 기득권을 위한 당이 되어버렸다. 또한 주자의 신봉자들이기에 중화사상에 심취하여 극심한 "사대주의 사상"을 갖고 있었으며 청의 여진족 정권이 세워지자 "명,송대의 훌륭한 중화문화는 조선에만 남았다"하여 스스로 "소중화"를 자처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들의 특징은 예술에서도 드러나는데, 정선의 "진경 산수화"를 으뜸으로치며 "조선이야 말로 주자의 정신을 제대로 계승한 마지막 땅"이라는 신념을 보이는 것이다.
거듭 강조하지만 너무나 현실적인 노론인들이 왕권에 그토록 시비를 걸면서도 결국 조선후기 소론, 남인을 몰아내고 정권을 장악할수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 바로 "산림을 우대하고 국혼을 놓치지 말라"는 이들의 전략 덕이다.
산림이란 현재의 재야인사들로 공적교육기관이 없던 시절 여론을 조성하고 장래 관직에 오를 인재들을 가르치던 세력이다. 사원 같은 곳이 바로 그 예이다. 국혼은 말 그대로 세자빈이나 왕비가 되는 것이다. 숙종조부터 노론은 대부분의 중전을 배출함으로써 왕권에 안전장치를 걸어두는 치밀함을 보인다. 조선 역사상 가장 큰 붕당이었다.
위에서 말했듯이 사도세자의 등장으로 벽파와 시파로 나눠지는데 벽파는 사도세자를 무조건 죽여야 한다는 강경파 들이었고, 시파는 사도세자에게 감화되어 동정적이었던 온건파이다. 그 외엔 당이 갈리거나 다른 노선을 걷지도 않고 모두 뜻이 같았다..
오로지 사도세자에 대한 견해만 달랐던 것이다.
노론내에서도 예외적이 경우가 생겨나는데,
홍국영은 혜경궁 홍씨와 같은 집안 사람이므로 당연히 태어나면서부터 노론이것만 화완옹주의 양아들이자 노론의 후기지수로 손 꼽히던 정후겸을 비롯하여 자신의 아재비뻘인 홍인한, 정순왕후의 오빠이자 노론벽파의 실세였던 김구주를 축출하는 등, 정조의 왕권강화의 1등 공신이 된다.
박지원, 박제가 로 대표되는 북학파는 노론 세도가 출신임에도 정쟁에 회의적이며 정조의 개혁에 최대한 협조하며 외국의 선진문물은 배워야한다고 주장한다.
북학의 거두였던 박제가의 제자이자 불세출의 기인이던 추사 김정희 이다. 정쟁에 휩쓸려 귀양을 갈 정도로 정치와 무관한 삶을 살지는 않았지만 당대의 기인이였던 추사에겐 당쟁이란 아무런 의미가 없었던 걸로 보인다. 윤상도의 옥사에서도 자신의 소신을 위해 목숨을 내놓으려 했다. 골수 주자학파였던 노론이라면 까무러칠만한 일도 서슴없이 했는데 바로 구족계를 받고 스님이 된것이었다. 위에서 말한 노론의 산수화에 대한 견해에도 "말짱 개소리"란 태도를 취했다. 재밌는 것은 그가 7세때 "명필이 될것이다"라는 말을 듣게 되는데 그말을 한것은 다름아닌 당시 영의정이자 남인의 지도자였던 채재공이었다.
소론
원래는 노론과 함께 서인이라는 당이었으나, 노론의 기조가 된 송시열과 그 제자였던 윤증이 불화를 일으켜 남구만, 박세채 등이 윤증과 함께 따로 일으킨 붕당이다. 엄밀히 말하면 노론과 정치적 노선은 비슷하나 그 방법론이 다르다 하겠다. 당시 송시열은 정치적 변화에 따라 적대관계였던 당과 손을 잡고 반대당을 완전히 몰살해버리는 너무나 현실적인 정치수단을 썼으며 가혹할 만큼 노론에 반대하는 세력을 처단해 버렸다. 그러자 소론은 송시열의 방법이 너무나 비열하며 "붕당의 의미를 정치적 보복으로 퇴색시킨다"고 강력히 비판한다. 더욱이 당시 정쟁에서 밀려난 남인세력을 몰살시켜야한다는 노론에 주장에 "자신의 생각과 다르다 해서 죽여야만 하는 것이 정치인가"라며 귀양 정도의 처분을 주장하며 끝없는 대립을 펼치게 되는 것이다.
또한 정치개혁을 주장하던 송시열이 남인을 몰아내기위해 부패의 상징이자 척결대상이던 훈구세력(인조반정을 통해 세도를 잡았던 훈신과 외척세력인 척신)과 손을 잡는 이중적인 태도를 취하자 "사림의 정신을 잊었다"며 노론자체를 부정하게 된다. 이념적으로 노론에 가까웠던 소론이 정치적으로 남인에 가까워지게 되는 배경이 되는 것이다.(예를들면 소론이었던 박문수가 암행어사 시절 노론 중진들의 부패에 분노한 것 처럼 소론은 현실의 개혁을 추구하면서도 원리원칙을 상당히 중요시 여겼다)
위에서 말했다시피 이인좌의 난 이후 거의 몰살당하게 된다.
남인과 소론의 몰락이 비슷해서 헷갈릴 수도 있으나 엄연히 남인과 소론은 그 이념자체가 다르다.
소론은 이념적으로 노론과 비슷하고, 남인의 성왕정치와는 완전히 반대되는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남인
붕당초기부터 세력이 약했던 남인은 허목과 유성룡을 빼놓고 얘기할 수 없다.
허목은 우암 송시열과 그 유명한 예송논쟁을 야기시키며 남인의 세력신장에 지대한 공헌을 하며 영남남인의 기조가 되었고,
유성룡 역시 재야에 있던 남인들에게 정계의 문을 열어주는 결정적 기회를 만들며 각당이 평화롭게 공존해야 한다는 기호남인의 기조가 된 인물이다.
남인의 이념은 정통적인 성리학으로 흔히 덕치로 표현되는 "어질고 덕이있는 군주에게 충성을 다하여 나라를 안정케 한다"라는 공자의 사상을 충실히 따르는 것이다. 요순시대로 대표되는 태평성대를 이상시 하며 퇴계 이황의 사상을 따르는데 바로 이기이원론이다. "이와 기는 다르나 서로 의존해야한다"라는 퇴계학파 사상을 바탕으로 "군신간에 의리"를 중요시 하는 모습을 보인다. 또한 이황의 "강력한 왕권을 통해 훌륭한 인재를 적재적소에 배치해야 한다"라는 정치이념을 펼친다.
후에 이황의 이 사상은 일본 "메이지유신"의 정치적 기반의 중심이 될 정도로 뛰어난 왕권중심주의 사상이다.
주로 보수적이고 이론가가 많은 남인세력은 인재는 많았으나 그 학자적인 기질때문인지 노론의 교활한 정치력에 무수히 죽임을 당한다. 원래 많지 않던 숫자의 남인은 정조 사후 급격히 몰락한다. 일례로 정조사 후 뛰어난 능력을 지니고 있던 정약용은 다시는 중앙정계로 돌아오지 못하며 형제 모두가 사사당하게 되는 것이다. 전통적으로 남인이었던 파평윤씨 가문은 살육이라고 할 정도의 피해를 입게 되는데, 이가환, 이익운, 권철신, 이승훈 등 남인이란 남인은 모조리 죽거나 귀양을 가게 된다.
이들 역시 노론처럼 정치적 이념이 그림에서 드러나는데 관념산수화라고 할수 있는 전통적인 화풍을 따른다.
즉, 실물이 아닌 상상속의 모습을 그림에 담아내는 것인데, 오래전 성군이 다스렸던 요순시대를 그리워하는 그들의 이념적 사상이 잘 드러나는 것이라 하겠다. 남인이 당시 최고로 쳤던 인물은 강세황과 그 이름도 유명한 강세황의 제자 김홍도이다.
왕에 대한 충성을 최고의 덕목으로 삼던 남인의 사상은 정조 사후 그 명맥만 가까스로 유지하다 훗날 시일야 방성대곡의 장지연 선생에게까지 전해지게 된다.
남인의 학자적 기풍이 심해져 성리학적 이론에만 치우치게 되자 민생과 실용주의적 사상을 주장하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바로 성호 이익을 시작으로 그 제자였던 권철신, 기호 남인의 지도자였던 사암 정약용 등 실사구시를 주장하는 성호학파라 불리는 이들이다. 흔히 실학파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잘못된 표현이다. 실학파라 불리는 이들 중 누구도 실학이란 표현을 쓰거나 말한 사람은 없다. 현대에 이르러 일본학자들이 붙인 표현을 편의상 사용하는 것이 그대로 굳은 것이다. 성호학파의 사상은 연암 박지원을 필두로 하는 북학파의 이용후생 정신과 맞닿아 있다.
[출처] 정조와 심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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