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말씀 (2026. 9.6) 말씀/ 시편 15: 1-5 그리스도인의 품격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유할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거할 자 누구오니이까”
본문 시편 15편을 읽어보면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서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즉 성전 문지기인 제사장이 성전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과 들어갈 수 없는 사람(신명기 23)을 엄격히 가려내는 일을 했다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거룩한 예배자의 자격 조건을 엄격히 따져서 들여보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예배자의 자격 조건을 따진다면 어떤 기준을 둘까요? 물론 시간 철저 엄수 또는 주일 봉사에 대해서도 이야기할 수 있지만 저는 우선 자발성을 갖고 의무가 아닌 사모하는 마음으로 예배에 나와야 한다고 봅니다. 그다음 진정성입니다. 과거는 엄청 형식과 절차가 까다로웠지만 지금은 사랑과 생명이란 내용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오늘은 참 예배자로서 어떤 품격을 갖추어야 하는지 세 가지 특성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 생각하는 그리스도인 1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사는 자 누구오니이까?”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러 나온 사람이 스스로 하나님께 질문했다는 것입니다. “과연 내가 그동안 성전에 들어가 예배를 잘 드렸는지? 형식적이지는 않는지. 과연 나는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자격 있는지? 과연 하나님께서 내가 드리는 예배를 기뻐 받으시는지?” 이 말은 다시 말하면 단지 오늘 하루 예배 잘 드렸다는 안도감보다 먼저 참 자신이 예배자인지 생각하고 문제의식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10년 20년 30년 예배를 뜨리며 살아왔는데 내가 과연 예배를 잘 드리고 있는가? 예배드리기 전 생각 해본 적이 있습니까? 시편 저자는 생각을 해보았다는 것입니다. 평상시 하나님 앞에 내가 합당한 삶을 살고 있었는지 의심도 하고 고민도 하면서 살고 있다면 이런 사람은 분명 예배를 잘 드릴 뿐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 인정받는 사람일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예배자로서 품격을 생각 해본다면 먼저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시길 기도합니다. 생각은 철학자들만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생각을 해야 질문을 하게 되고, 질문을 하는 사람이 바른 신앙의 답을 얻고, 바른 예배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고있는 사회를 바라볼 때 우려가 되는 점은 사람들이 생각 없이 산다는 것입니다. 생각 없이 습관적으로 교회를 왔다 갔다 한다는 것입니다. 생각이나 이성적인 판단을 하면서 살기보다는 습관과 감정에 따라 살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요즘 대세가 AI인데 AI 시대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무엇이든지 AI에게 물어보면 신속하게 답이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깊이 생각을 안 해도 됩니다. 그 세계를 보면 즉각적이고 충동적입니다. 생각 없이 보고 듣다 보면 빠져들어가고 거짓에 미혹됩니다. 전에는 기독교인은 진실의 대명사였습니다. “교회 다닙니다”하면 믿었습니다. 교회 다닌다고 하면 진실하고 어쩐지 착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독립 선언문을 작성한 33인 중에 기독교인이 16명, 천주교가 15명이었습니다. 지금은 극단 극우의 대명사가 되고 있고, 거짓을 밥 먹듯이 하며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습니다. 인간을 학명으로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라고 하는데 이는 “생각하는 인간”이라는 뜻입니다. 인간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 바로 생각할 줄 안다는데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만일 우리가 생각 없이 산다면 인간다운 인간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파스칼은 [팡세]에서 저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다 나는 발도 없고 팔도 없고 머리도 없는 인간은 생각할 수 있지만 생각하지 않은 인간은 생각할 수 없다” 그리고 “나는 오직 신음하면서 추구하는 자만을 인정할 수 있다” .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나아가 고뇌하며 사는 인간이야말로 인간다운 인간이라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믿으라는 말이 많이 나옵니다. 너무 깊이 생각하지 말고 단순하게 믿어야 한다고 우리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렇데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먼저 생각이 바른 사람이 되어야 바른 믿음을 가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을 보면 무려 300여 곳에서 “생각하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한 곳을 찾는다면 시 94:8입니다. “백성 중의 어리석은 자들아 너희는 생각하라 무지한 자들아 너희가 언제나 지혜로울까?” 그렇습니다. 어리석음과 무지는 생각 없는 데서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생각 없이 시류에 떠밀려 살아서는 안 됩니다. 느낌대로 감정대로 움직여서도 안 됩니다. 행동하기 전에 말씀에 근거해서 깊이 생각하고 기도하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생각하는 예배자가 되어야 합니다. “과연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실까?” 묻고 또 물으면서 답을 찾는 것입니다. 다윗이 그랬습니다? “올라가리이까? 우리가 싸우면 하나님이 우리 손에 적을 붙여주시겠습니까?” 그는 무조건 믿음으로 나아가지 않았습니다. 생각하고 기도하며 물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물음에 답해주시고 그는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 그때마다 섬세한 작전을 짜고 백전 백승을 했습니다. 그런데 사울은 달랐습니다. 그는 생각 없이 급하다고 제사장 외에 드릴 수 없는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것은 불순종이었고, 그는 버림받았습니다.
우리가 매일 아침 말씀 앞에 큐티를 하고, 독서모임을 하면서 책을 읽는 이유는 생각이 녹슬지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바른 생각 훈련이 되면 삶도 바르게 교정되고, 생각이 깊어지면 삶도 당연 깊어지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에 베뢰아 성도들이 그랬습니다. 그들이 인정받았던 신앙의 특징이 무엇이었습니까?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했다는 것입니다. 아멘만 하지 않고 듣고 배운 것이 과연 그러한가 깊이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결과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들도 많이 믿는 역사가 일어났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행 17:11). 이런 베뢰아 사람들은 신사적이라는 칭찬을 들었습니다. 그들이 바로 품격있는 그리스도인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 지체들 집사님들을 생각하면 감사하고 자랑스럽게 여깁니다. 어디를 가도 큐티로 시작하고, 책과 함께 생각합니다. 식사를 하고 카페에 가도 대화를 해도 말씀과 인문고전 듣고 배운 것에 대한 생각의 나눔을 갖습니다. 카페 주인이 대화를 옆에서 듣다가 요즘 세상에 이런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이 어디 있느냐고 감동을 받아 서비스까지 했다고 하지 않습니까? 몇일 전 정미 집사님 생일에도 몇 분이 식사를 함께하고 늦은 시간까지 이야기를 나누었다는 말을 들고 감동이 되었습니다. 대게 2차는 노래방에 가든지 카페에 가도 잡담을 하는데 우리 형제들은 9시 늦도록 까지 말씀 대화를 나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과 깨달음을 나누며 질문하고 대화하면 성장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모습이 바로 참 예배자의 품격있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이라고 믿습니다. 생각은 묘합니다. 생각을 안 하면 되는대로 살지만 깊이 생각하면 삶이 달라집니다. 우리는 그냥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삶속에 생각하는 예배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이 나에게 어떤 의미가 되는가? 또 행동하기 전에 행동의 결과를 생각해 보는 예배자가 되는 것입니다.
둘째로 뜻을 정하는 그리스도인 본문 2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실천하며 그의 마음에 진실을 말하며” 성전에 들어와 예배할 수 있는 사람의 자격을 포괄적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에 보면 세 단어가 나옵니다. 정직, 공의, 마음에 진실. 품격있는 그리스도인의 내면의 모습입니다. 정직, 공의, 진실 이는 마음에 뜻을 정하지 않으면 실행하기 어렵습니다. 정직하려면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아아 합니다. 공의를 행하고 진실하는 것도 불의한 시대와 타협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어떤 불이익도 감수하는 각오를 해야 합니다. 구약성경에 다니엘서를 많은 사람들이 애독하는 이유는 다니엘의 믿음을 본받고 싶어서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다니엘과 친구들이 좋은 믿음의 예를 남길 수 있었을까요? 다니엘 1:8을 보면 바로 여기에 “뜻을 정하여”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다니엘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지만 어떤 경우에도 믿음을 잃지 않겠다고 처음부터 마음을 굳혔습니다. 그가 포로 생활하면서 믿음을 지키기 가장 어려웠던 점이 식생활이었습니다. 우상의 신전에 바쳐졌던 음식을 먹어야 했습니다. 다니엘이 볼 때 이것은 곧 우상 숭배에 참여하는 것과 같고, 이에 타협하면 하나님 앞에 진실하게 살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신앙 양심을 지키기 위해서 왕이 내린 음식을 거부하기로 했습니다. 포로가 왕명을 거역한다는 것은 죽기를 각오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는 먼저 뜻을 정하고, 자신들을 관리하는 환관장에에 은혜를 구하였습니다. 10일간 채소만 먹도록 허락해주고, 후에 결과 왕의 음식을 먹는 다른 소년들과 비교해서 결정해달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열흘을 시험해 본 결과 다니엘과 친구들의 얼굴이 아름답고 살이 더욱 윤택하여 왕의 음식을 먹는 다른 소년들보다 좋아 보이면 그렇게 해주고, 아니면 환관장의 뜻에 따르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다니엘과 친구들은 왕의 음식을 먹지 않고 깨끗한 채식을 하며 신앙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왜 신앙생활을 잘 하면서 우리는 뜻을 정해야 합니까? 신앙의 앞길에 너무 많은 시험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뜻을 정하지 않으면 어려운 상황이 부딪힐 때 우리는 신앙을 지켜나가기가 어렵습니다. 남자들은 군대를 가봐서 알지만 군입대 하면 제일 문제가 주일에 교회가는 것입니다. 대게는 작업을 합니다. 그런데 살벌한 분위기와 고참들의 눈치를 보면서 쫄병이 교회 가겠다고 손을 들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때 두려워서 머뭇거리는 사람은 교회를 계속 못 가고, 빳다를 맞더라도 교회에 가겠다고 뜻을 정한 사람은 매 몇 대 맞고 군생활 내내 신앙생활을 하게 됩니다. 뜻을 정한다는 것은 작심삼일과 차이가 있습니다. 뜻을 정해도 공을 들려야 합니다. 우리는 믿음이라면 앞뒤 안 가리고 행동하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그럴 경우는 일을 그르치기가 쉽습니다. 뜻을 이루려면 지혜가 필요하고, 공들이는 노력과 수고가 따른다는 것입니다. 다니엘이 뜻을 정하고 성공한 비결이 무엇일까요? 뜻을 정하고 그 뜻을 이루기 위해서 플랜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인문 고전에서 배운 액션플랜과 백업 플랜입니다. 기도만 하지 않고 구체적으로 우선 10일동안 채소를 먹는 액션 플랜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만일 뜻대로 안 되면 백업플랜으로 환관장의 뜻을 따르겠다는 조건을 제시했습니다. 믿음이 없어서가 아니라 자신들을 책임진 환관장을 안심시키기 위해서입니다. 이 두가지의 플랜을 제시하자 환관장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었습니다. 다니엘의 액션플랜, 백업플랜은 합리적이었고 환관장을 설득시킬 수 있었습니다. 무리 없이 뜻을 이룰 수 있었고, 그들은 바벨론 왕궁에서도 끝까지 품격을 잃지 않는 믿음을 지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일상의 삶에서 좋은 생각을 하고 뜻을 정할 때는 구체적인 성공을 위한 액션플랜이 필요합니다. 더 나아가서는 만일의 경우를 대비하여 백업 플랜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뜻을 이루기 위해 공을 들일 때 수준 높은 신앙의 단계로 올라갈 수 있습니다.
셋째는 실천하는 그리스도인 다니엘과 친구들이 뜻을 정하여 우상숭배한 음식을 거절하고 야채 중심의 식사를 하며 신앙을 지킬 수 있게 되었지만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그들이 바벨론에서 오랫동안 왕을 섬기면서 인정받고 계속적으로 믿음의 길을 가기 위해서는 그 다음 삶 속에 지속적인 실천이 필요했습니다. 그들은 더 열심히 연구하며 왕을 보좌했고 하나님의 지혜를 얻어서 왕의 인정을 받았습니다. 왕이 그들에게 모든 일을 묻는 중에 그 지혜와 총명이 온 나라 박수와 술객보다 십 배나 나은 줄을 알았습니다. 그들을 요직에 임명하여 전국을 다스리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승리의 삶을 계속 이어갔습니다. 다시 오늘은 본문 말씀을 보겠습니다. 3-5절을 보면 성전에 들어갈 자격 있는 예배자의 실천적 삶이 어떠해야 하는가 말씀하고 있습니다. 먼저 3절에 예배자의 이웃과의 관계를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의 인정하시는 예배자는 이웃을 비난하거나 조소의 대상으로 삼아서는 안 되고, 이웃의 불행을 즐거워 해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다음 4절을 보면 두 집단에 대한 태도에 관한 말씀이 기록되어있습니다. 여호와를 경멸하는 자들과 함께 악인의 꾀를 쫓지 말고 의인의 회중에 들어야 하고, 그리고 마음에 서원한 것은 자신에게 불리할지라도 이행해야 한다고 합니다(4). 5절은 금전 관계에 대한 말씀입니다. 물질 문제 돈 거래에서 절대 고리대금을 하지 말고, 뇌물도 받지 말라고 합니다. 돈거래가 깨끗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예배처소에 들어올 수 있는 자격 있는 예배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 예배를 잘 드리는 것으로 우리는 훌륭한 예배자가 될 수 없습니다. 평상시 하나님께 인정받는 바른 삶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가족들도 인정하고 주위의 이웃이나 동료들도 인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실천적인 삶에 대해서 창세기 4장은 하나님이 아벨과 그 예물을 받으섰다고 하였고, 로마서는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고 하였습니다(롬 12:1) 그렇다면 이런 기준으로 볼 때 오늘날 우리 자신과 또 한국의 기독교를 바라본다면 과연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있는 예배자들이 얼마나 될까요? 일주일 한 번씩 형식적으로 드리고 봉사하고, 청소하고 식사 당번 잘 하고 주차정리 잘 하면 예배자의 자격이 될까요? 겉보기만으로 평가할 수는 없지만 말씀 기준으로 볼 때 인정 받을 수 있는 그리스도인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한국의 예배 상항을 지켜본 어느 영국 청년이 한국교회 예배를 참석하고 두 번 놀랬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첫째는 성전 안에서 뜨거운 열기에 놀랬고, 두 번째는 그 많던 기독교인들에 교회 밖에 나와보니 하나도 안 보이더라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뜨겁지만 삶속에서는 실천이 없는 한국기독교인의 모습을 빗댄 이야기입니다. 머리로 아는 것은 아직 아는 것이 아닙니다. 삶 속에 녹아져서 실천이 되어야 비로소 아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웃 사랑을 아무리 많이 알고 배었어도 솔선수범 배려하고 베풀고 섬기는 사랑이 없다면 관념적 지식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기 위해서 예배 후 돌아서자마자 무관심 거짓,배려 없는 말을 주의하고, 예배 후의 삶이 더욱 산 예배가 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피에르 신부는 이 세상을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로 나누지 않았습니다. 타인의 고통 앞에서 고개를 돌리는 사람과 타인을 고통으로부터 구원하기 위해서 싸운 자,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하길 거부하는 자들 사이의 구분이 있을 뿐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간디는 실천적 삶을 산 사람입니다. 어느 날 한 어머니가 아들을 데리고 간디를 찾아왔습니다. “선생님, 제 아이가 사탕을 너무 많이 먹어 이빨이 다 썩었어요. 사탕을 먹지 말라고 아무리 타일러도 말을 안 듣습니다. 제 아들은 선생님 말씀이라면 무엇이든지 잘 들어요. 그러니 선생님께서 말씀 좀 해주세요” 그런데 뜻밖에도 간디는 “한 달 후에 데리고 오십시오. 그때 말해주지요”라고 말했습니다. 아이 어머니는 놀랍고도 이상했으나 한달을 기다렸다가 다시 간디에게 갔습니다. “한 달만 더 있다가 오십시오” “또 한 달이나 기다려야 하나요?” “글쎄 한 달만 더 있다가 오십시오” 아이 어머니는 정말 이해할 수 없었으나 참고 있다가 한 달 후에 또 갔다. “애야, 지금부터는 사탕을 먹지 말아라” “예! 절대로 사탕을 안 먹을래요” 소년의 어머니가 간디에게 물었습니다. “선생님, 말씀 한마디 하시는데 왜 두 달씩이나 걸려야 했나요?”“실은 나도 사탕을 너무 좋아해서 사탕을 먹고 있었어요. 그런 내가 어떻게 아이에게 사탕을 먹지 말라고 할 수가 있나요. 내가 사탕을 끊는데 두 달이 걸렸답니다” 간디가 존경을 받았던 것은 많은 지식보다도 이처럼 실천하는 삶의 모법 때문 이었습니다. 기독교인들이 그만큼 실천할까요?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으로부터 비난을 받는다면 그것은 지식이나 교리 문제가 아니라 실천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사실은 기독교가 실천의 종교입니다. 성경을 보면 위대한 신앙인들은 한결같이 실천의 사람들입니다. 구약의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준행했다고 하였습니다. 12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묵묵히 방주를 지으며 기다렸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순종하여 나이 75살에 고향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났습니다. 모세도 순종해서 바로 앞에 섰습니다. 신약을 보면 베드로와 제자들도 주님의 말씀을 듣고 즉시 그물과 배와 부친을 버리고 따랐습니다. 이렇게 참 그리스도인의 삶을 산 사람들을 보면 모두가 실천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어떠하셨습니까? 하나님의 아들이시면서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죄인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죄인들을 섬기시며 일거수일투족 말씀대로 사셨습니다. 마침내는 성경대로 죽으시고 성경대로 부활하셔서 주와 그리스도가 되셨습니다., 기독교는 말이 아닌 실천의 종교입니다. 실천적 삶은 하나님뿐 아니라 세상으로부터 인정받는 그리스도인의 품격입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참 예배자로서 그리스도인의 품격 세가지를 배웠습니다. 잘 기억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생각하는 그리스도인, 둘째, 뜻을 정하는 그리스도인, 셋째 실천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우리는 당장에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을 바꾸고 실천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생각부터 달리하고 작은 것부터 한 가지씩 실천해 간다면 능히 하나님께 인정받고 세상을 선도하는 품격있는 그리스도인이 되리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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