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말에는 동명 4인의 민형식이 있다.
한자는 다르지만 한글로 같은 이름이다. 옛 적에는 어떻게 발음을 하였는지 모르며
한자를 알지 못하면 같은 이름으로 알 수 있다.
그중에 閔馨植은 누군인지 알아내지 못하였다.
벼슬을 지낸이력이 있지만 생몰년대나 다른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나중에 이름을 개명하였는지 알 수 없어 동명4인으로 표현 하였다.
민형식(閔衡植)--
1875년(고종 12)-- 1947년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공윤(公允), 호는 우하(又荷). 민씨척족정권의 대표적 인물인 민영준(閔泳駿: 뒤에 閔泳徽로 개명)의 양자로 입적하였으며 독립운동에 관여 하였다.
민형식(閔亨植)
1864년(고종 1)--?
본관은 여흥(驪興). 자(字)는 원명(元明). 1888년(고종25)에 시강원겸필선(侍講院兼弼善)이 되고, 1892년에 성균관대사성이 되었다. 같은 해 홍문관부제학, 이조참의, 시강원겸보덕을 차례로 역임하였으며, 1893년 1월에는 이조참판에 임명되었다.
1888년에 민우식에 민형식으로 개명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민형식(閔炯植)
1859년(철종 10) ~ 1931년
본관은 여흥(驪興). 명성황후의 척족이자 조선 말기 문신으로 여러 관직을 거치면서 권세를 부렸다으며
민형식의 일제강점기 활동은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제7·19호에 해당하는 친일반민족행위로 규정되어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Ⅳ-5: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이유서(pp.284~301)에 관련 행적이 상세하게 채록되었다.
민형식 이라는 이름이 조선말에 보이는 각자의 삶이 다르다 이름은 같지만 삶은달리 하였다
누구는 나라의 독립을 위해 힘썼고 누구는 일본의 앞잡이가 되어 나라를 망하게 하였다,
누구의 삶이 옳은지는 기록이 말해주고 있으며 누군 평생 그리고 죽어서도 알본 앞잡이로
남아있는 삶을 살았다.
사람의 일생이 한 순간의 결정으로 무너지는 것이기에 신중한 삶과 적선지가를 살아야 겠다는 생각을 하여 본다.
옥산 이희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