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평식 金平植 (1880 ~ 1938)】 "1919년 대한독립단 총무부장, 1922년 의군부 정무총감
1880년 1월 15일 평안북도 의주군(義州郡) 월화면(月華面)에서 출생하였다. 한학을 공부하였다.
1917년에 남만주로 망명해 대동향약(大東鄕約)을 조직하였다. 1919년 만세운동이 전개되자, 의병들은 독립운동단체의 통합 필요성을 느끼고, 4월 15일 보약사·농무계·향약계·포수단 등 의병계열 인사 560여 명이 모여 류허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 서구(西溝) 대화사(大花斜)에서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을 조직하였다. 주요 임원은 도총재 박장호(朴長浩)를 비롯하여, 백삼규(白三圭)·박치익(朴治翼)·전덕원(全德元)·조맹선(趙孟善)·김기한(金起漢)·박양섭(朴陽燮)·조병준(趙秉準)·이웅해(李雄海) 등으로, 이 때 총무부장에 선임되었다. 평안도 출신이 대부분인 이들은 의병활동에 참여하였다가 만주로 망명한 인물들이었다.
1919년 말 연호 사용 문제로 인해 대한독립단 세력이 양분되어 단기(檀紀)·융희(隆熙)의 사용을 주장하는 기원독립단(紀元獨立團)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연호인 민국(民國)의 사용을 주장하는 민국독립단(民國獨立團)으로 분립되었다.
박장호·백삼규·이웅해·전덕원·조맹선 등과 복벽적 성향의 기원독립단에 가입하여, 총무부장직을 맡았다. 1920년 부하들을 데리고 국내로 들어와 평북 의주·용천(龍川)·철산(鐵山) 등지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한편 대조선청년결사대(大朝鮮靑年決死隊)를 조직한 김동식(金東植)과 종형제 관계로 보합단(普合團)에도 결성 초기부터 관여하였다. 1920년 3월 김동식과 함께 대원 모집 방법과 군자금 모집 방법, 무기 구입 등에 관해 논의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군자금 송금은 자신이 해 주기로 약속하였다. 김동식은 그로부터 군자금 모집에 사용할 경고문과 대조선청년결사대 명의의 군자금액 영수증 용지 수백 매를 받아 국내로 들어와 함께 논의한대로 김중량(金仲亮)을 조직의 단장으로 추대하고 대조선청년결사대를 보합단으로 개명한 뒤 조직을 확대·개편하였다.
보합단은 의주·선천(宣川)·용천·철산 등 평북 도내를 주요 활동지역으로 삼고 군자금 모집, 친일 주구배와 밀정 처단, 일제 식민통치기관 파괴 등의 무장 항일투쟁을 전개하였으며, 그중 군자금 모집에 가장 주력하였다. 1920년 5월말 3천원의 군자금을 임시정부에 송달하는 등 보합단원들이 국내에서 모집하여 김동식이 중국으로 가져온 군자금을 임시정부에 전달하였다.
1920년 10월 의주군 동암산(東巖山)에서 선천군으로 이전한 보합단 본거지가 발각되어, 일제 경찰과의 교전 끝에 보합대원 백운기(白雲起)·박세정(朴世正)이 붙잡히고, 한우종(韓禹種)·이동원(李東元)·김응초(金應焦) 등 3인이 사망하였다. 단장 김중량도 부상을 입게 됨에 따라, 김동식과 의논하여 자신이 있는 만주 콴덴현(寬甸縣)으로 보합단의 본거지를 옮겼다. 그리고는 보합단을 자신이 활동하고 있는 대한독립단에 합류시켜 보합단 단장 김중량은 대한독립단 관서총관(寬西總管)에 임명되었다.
1920년 ‘경신참변’으로 한인 사회가 붕괴되고, 더불어 1921년 자유시참변의 발생으로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희생되면서 다시 독립운동단체의 통합이 시급한 사안으로 대두되었다. 그리하여 1922년 1월 대한독립단·한족회(韓族會)·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가 연합해 통군부(統軍府)가 결성되었고, 이어서 8월 23일 개최된 남만한족통일회(南滿韓族統一會)를 통해 남만주 지역 독립운동단체의 통일기구인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가 출범하였다.
하지만 대한통의부 내부의 갈등으로 복벽주의 계열인 전덕원·채상덕 등은 통의부를 탈퇴하여 의군부(義軍府)를 조직하였다. 의군부는 채상덕을 총장으로 추대하고 군무총감에 전덕원, 재무총감 이병기, 사령장에 오석영을 선임하였으며, 정무총감에 선임되었다. 1933년 랴오닝성(遼寧省) 슈옌현(岫岩縣)의 한 농촌에서 병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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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가 기록한 대조선독립보합단 검거 관련 문서(1920. 11. 3) [판형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