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은 비통하게 묻습니다. " 네 동생 아벨이 어디 있느냐?"」
네 아우가 어디 있느냐?
삼국지를 보면 조조가 죽자 변씨 소생 네 아들 중
문무에 능하고 가후의 지지를 받은 맏아들 조비가 위왕 자리를 계승합니다.
자고이래로 수많은 왕이 왕권을 강화하고 권력 분산을 막기 위하여 친인척을 막론하고 권력자를
숙청한 사례가 빈번하듯이
조비도 마찬가지 껄끄러운 형제를 죽일 명분을 찾게 됩니다.
그 중에서 제일 두려운 상대가 태자로 거론된 바 있는 덕망있는 조식
조식을 잡아 죽이려고 동생을 부른 형이 어려운 문제를 내기를
일곱 걸음을 끝나기 전에 형제를 주제로 시를 짓지 않으면 목이 떨어지리라고 엄포를 놓습니다.
조식은 천부적인 시인이었고 죽기 살기로 일곱 걸음 만에 시를 짓습니다.
이 시를 칠보시라 하며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煮豆燃豆萁(자두연두기) 콩을 볶으려 콩깍지로 불을 지폈네
豆在釜中泣(두재부중읍) 콩은 가마솥 안에서 뜨거워 우네
本是同根生(본시동근생) 본래 한 뿌리에서 나온 몸이건만
相煎何太急(상전하태급) 왜 이다지도 급하게 볶아대는고
이 시에서 콩은 조식 자신이며 콩깍지는 위왕인 조비를 가르키고 있습니다.
순간 이 시에 마음이 움직여서 인지 조비는 눈물을 흘리며 마치 영화의 한 장면 처럼 조식을 부둥켜 안고
형제의 정을 나누고 그 대신 주변 측근들을 모두 처형합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 위왕은 시문에 능하고 잘난 조식을 절대 중용하는 일은 없었고
이에 울분이 커진 친동생 조식은 울화통에 병사하고 맙니다.
다른 형제들도 마찬가지 조창은 독살, 막내 조웅은 무서워서 자살하게 되지요.
이렇게 아우들에게 철저하게 비정했던 위왕 조비도 제위에 오른지 7년
권좌에 대한 불안과 걱정 근심이 커져 고작 마흔살에 병들어 죽고 맙니다.
"욕심이 죄를 낳고 죄가 사망을 나으니라"
권력을 탐한 나머지 같은 핏줄인 형제들을 못살게 굴고
영원히 권력을 유지하려 했던 자신도 오래지 않아 죽고 만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성서는 서두에 형제를 죽인 사건을 매우 심각하게 다룹니다.
낙원에서 벗어난 아담과 하와는 아들 둘을 낳았고 그들은 카인과 아벨
둘 다 제물을 드렸는데 동생 것은 반기고 자신의 것은 반기지 않자
카인은 뒤틀리고 몹시 성질이 났습니다. 이로 인하여 하느님께로부터 혼 난 카인은
그 분노와 질투가 힘없는 동생에게 향합니다.
카인은 아우를 들로가자고 꾀어 데리고 나가서 달려들어 아우 아벨을 쳐죽입니다.
아벨은 아무 잘못도 없이 동생이라는 이유로 맞아 죽은 겁니다.
「하느님은 비통하게 묻습니다. " 네 동생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러나 카인의 대답은 " 제가 동생을 지키는 사람입니까?" 오히려 똥뀐 놈이 씅낸다고 하느님께 대듭니다.
"너는 저주를 받은 몸이니 이땅에서 물러나야 한다. 너는 세상을 떠돌아다니는 신세가 될 것이다."
결국 그 아버지도 추방 당하더니 아들마저 추방당하고 맙니다.
성서는 우리의 피에 살인자의 피의 흔적이 스며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조상이 다름 아닌 한 핏줄, 같은 부모님을 모시고 같은 말을 쓰고
같이 일하고 먹었던 형제를 때려죽인 고약한 존재였다고 전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성서에 흐르는 커다란 말씀의 산맥은
"너의 하느님을 마음을 다하여, 성품을 다하여, 혼을 다하여 사랑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는 사랑의 말씀으로 대별되고 있습니다.
형제도 때려 죽이는 사람들의 영혼에 사랑이야말로 서로를 인정함과 동시에 함께 존재하는 것이고
새 영적 차원에 이르는 길이고 사람됨의 의미라고 선언하고 있는 겁니다.
사랑이 없다면 짐승이지 사람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인간에게 하는 어떠한 행위도 곧 그것은 사랑이신
하느님께 하는 것이라는 의미일 겁니다.
누구나 사랑이 없는 사람은 마음은 황폐해서 그 밭에는 어떤 씨앗을 뿌려도
자라기 어려우며 반면에 사랑이 가득한 사람의 토양에는
씨앗이 50배 100배 결실을 거두게 된다는 말씀으로도 해석됩니다.
결국 형이 동생을 죽인 조상들의 사건은 인류 운명의 가늠자가 되었으며,
성서는 계속해서 형제의 이야기를 통해 인간이 물질이 아닌 신성한 질의 존재라는 것을 언명하고 있습니다.
요셉은 형제들에 의해 죽음의 벌판으로 팔려나갔으나 그 동생이 자신을 버린 형제들을 사랑으로 수용합니다.
예수님은 패가망신해서 돌아 온 아들을 맞이하는 아버지의 사랑과
동생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형의 태도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대를 이어 지금도 마찬가지 재산상속, 증여, 가정 대소사 등 오히려 타인 보다
형제간의 크고 작은 다툼과 분쟁이 끊이지 않습니다.
사회적으로도 정치적 계산 하에 전라도와 경상도가 나뉘어 서로 앙금을 가지고 분쟁을 일삼고 있으며,
과거 북이스라엘과 남유다가 갈라져 적대적이었던 것처럼
우리나라도 남과 북이 갈라져 미워하고 총부리를 겨누고 있는 비참한 현실입니다.
생각해 보면 구백여 차례 외침을 받은 우리나라 거슬러 올라가면 자그마치 삼십오년 간이나 핍박을 가한 일본
임진왜란, 정유재란, 정묘호란, 병자호란, 병인양요, 신미양요 등
우리나라를 침탈하고 공격한 수 많은 나라들이 있음에도
그들과는 오히려 형제보다 가까이 지낼려고 하고 정작 같은 민족에 대해서는
공격의 수위를 높여가는 형국이니 뭐라 말할 수 없는 비극입니다.
"내가 삼팔선을 베고 누워 죽을 지언정 이 나라 남북 분단은 안된다."
백범 김구 선생의 피맺힌 절규를 잊을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은 비극은 인간이 하느님께로부터 멀어지고 성스러운 존재성을
거부하면서 벌어진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인간은 따먹지 말라는 열매를 따 먹은 다음 하느님으로부터 자신을 숨긴 최초의 존재였습니다.
여전히 지금도 하느님 앞에 서기를 주저하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네가 어디 있는냐?" 고 물으시지만 사람은 더 깊이 자신을 감춥니다.
그분을 멀리하고 이런 숨김이 급기야 그분을 떠나시게 했습니다.
오늘날 마치 늙고 병드신 육의 부모님 모시기를 거부하는 것처럼
숨과 입김을 불어 넣어주신 영의 아버지로부터 멀어진 겁니다.
그분은 마치 추방당한 사람 처럼 사람 곁에 머물 공간이 없게 된 것입니다.
성서는 육과 영의 아버지를 떠난 사람들의 비참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돌이켜보건데 아담의 타락은 참된 존재의 상실이었으며
그의 아들과 후손은 더럽혀진 본성을 물려받았고 범죄를 상속 받았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사람들
하느님의 형상으로서 인간 존재는 성스러움을 회복하도록 요구받고 있습니다.
일상생활 속에서 벌어진 일화 하나를 소개합니다.
주거환경 변화에 따른 아파트 층간 소음에 관한 사례입니다.
어찌보면 한 건물에 더불어 살면서 일어날 수 있는 사사로운 일이지만
감당하지 못할 심각한 분쟁이 일어나곤 합니다.
저도 예전에 아랫층에 노부부가 살고 계셨는데 아이들이 시끄럽다고
자주 올라오시더군요. 나름대로 무척 주의를 주고 조심 했는데 불만이
이만 저만이 아니셨습니다.
한번은 제가 조심스럽게 이런 말씀을 드렸습니다.
어머니, 제가 볼 때 바깥에 차량 소음이나 다른 소음이 더 큽니다.
자꾸 위층만 신경쓰시니까 정작 큰소리는 안들리고 미세한 소리만
들리는 게 아닌지요? 위층에 남이 산다고 생각치 마시고 아들이 산다고
한 번 생각해 보세요. 그러면 위에서 아이들의 뛰노는 소리가 손주들이
건강하게 노는 소리로 기쁘게 들리실 겁니다.
어이가 없어서인지 아니면 진짜 그렇게 생각해서인지 그 후론 단 한번도
올라오신 적이 없으셨습니다. 저도 틈만 나면 우리 아버지 어머니가 사신다고
여기고 홍시며, 표고버섯이며 가져다 드리고 마음을 나눴습니다.
정말 마음을 바꾸니 모두가 한 가족이고 형제가 되고
층간 소음은 소음이 아니라 사랑과 행복의 표징에 다름 아니었습니다.
영님 말에 따르면 물님이 중국 상해 부흥집회 가셨다고 합니다.
물님은 우리 교회보다 다른 교회와 모임을 부흥시키는데 도사이시지요
영님이 대신 예배를 안내하셨고, 인간이 어린아이처럼 빛의 존재
빛의 통로가 되어야 한다고 주옥같은 사랑의 말씀을 건네 주셨습니다.
모두가 한 가족이 되어 산에 오릅니다.
달래, 부추, 취나물, 산쑥, 바디나물을 뜯으며 복사꽃 피고 지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말씀을 청강합니다.
" 너 자신을 하느님의 형상으로 대하라."
" 너희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라(레위기 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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