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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강좌(27)】 ‘다 하나님의 뜻대로 “예 아버지의 뜻대로 됐습니다" 信天함석헌
요한복음 271)
나 천사 같은 거 안 믿습니다. 그런 거 있다고 믿지 않습니다. 뭐 그런 게 거리낌이 되는 법이 돼서 너는 기독교가 아니다 그러면 뭐 가도 좋습니다. 그러나 상관없습니다. 허나 옛날 그때에는 천사를 믿었습니다. 그 믿은 거 잘못은 믿은 그렇습니다. 지금은 무슨 천사라고 하던 그렇게 믿던 그게 없다는 거 사실이 없다는 거 아니라.
지금은 그런 말로 발표를 아니 합니다. 새로운 거 하고 싶어집니다. 그러니까 그 토론을 오늘 하자는 거 아닙니다만 그 점도 이런데 있다고 해서 거기 거리끼어서 조금도 걱정 마세요. 그런 것은 기독교의 신앙의 근본 되는데 하등관계가 없습니다. 히브리서 보면 아주 잘, 히브리서에는 뭐라 그랬는가 하니 하나님이 바람으로 자기의 사자를 삼고 우레로 자기에 무슨 심부름꾼을 삼고 그런 말이 있어요.
그럼 소위 천사라는 건 옛날에 있던 우리가 바람 속에서 보는 것 우레 속에서 보는 그런 그 놀라운 힘 그런 것을 인격화해서 불렀던 것일 겁니다. 지금 우리가 들으면 아 우스운 일지만 한참 저 초대 중세 오기 전에는 바늘 끝에 물방울 속에 천사가 몇이 올라설 수가 있나하는 그 토론 때문에 야단을 하고 토론, 지금은 우리에게는 그건 넌센스입니다. 소용이 없는 소립니다. 그래 천개가 서면 어떻고 만개가 서면 어떠냐 그렇지만 옛날 사람들은 그런 것 때문에 시간을 보내고 토론을 하고 그거 왠고 하니 그 사람들에겐 그때 실지로 그렇게 문제가 되게끔 돼있어요. 그냥 그런 얘기 오늘 다 할 것 없습니다만 가령 그런 걸 인정을 한다고 그래도 천사라는 것하고 예수님이라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거하고 달라요.
그런데 천사라는 건 본래 그렇게 인간이 아니에요. 그렇기 때문에 히브리서의 말이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그럴 땐 천사보다 높다. 천사라는 건 확실히 사람모양으로 죽는 것도 아니고 앓는 것도 아니고 그런 것 아무것도 없어요. 인간의 이런 제약을 모두 벗어나는 좋은 덴데, 하지만 그것보다도 그 아들이라고 하는 자리가 높다. 어찌해 그러냐 천사라 하는 덴 이제 다른 쉬운 말로 하면 도덕적인 무슨 그런 책임이 아무것도 오는 게 없어요.
인간이라고 할 땐 아무래도 인간 존재의 가장 기본적인 건 이게 도덕적인 존재라 하는 것, 그건 선이 뭐고 악이 뭐냐 그건 내용은 그건 별개 또 딴 문제가 됩니다만 어찌하나 사람인 다음엔 선, 악 이렇게 둘을 놓고 될 수록은 선을 하고 악을 하지 않아야겠는데 이렇게 내 마음속에 신학으로 토론하고 철학에서 말하면 완전한 자유가 있냐 없냐 토론이 되겠지만 그까짓 토론은 별개 문제로 하고 우리 맘에 실지로 나는 내속에 선을 하려면 하고 악을 하려면 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 이렇게 내가 실감하는 것이 사람입니다.
그래서 어느 순간에도 ‘예’ 하려면 ‘예’ 할 수도 ‘아니’하면 ‘아니’ 할 수도 있다. 자주할 수 있는 게 내속에 있다고 생각하고 하는 모든 일을 이렇게 내 살림을 내가 택해서 간다고 하는 데가 사람이 다른 동물과 다른 점입니다. 그런데 만일 예수님이 나서부터 그런 마음을 활동을 시키는 것이 없이 본래부터 아주 예수님 된 유혹될 만한 것 배워진 일도 없고 마음속에 무슨 시험되는 생각이 났던 일도 없이 본래부터 흠도 점도 없이 완전한 걸로 났다고 하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어. 그런 점이 히브리서에서 강조해서 우리와 마찬가지로 연약한 인간이기 때문에 우리를 대표할 수 있다고 하는 걸 강조를 하고 어디 철두철미하게 사람이라고 그래야 예수님이 가신 길은 우리도 가지 않으면 안 되는 거고 우리도 갈려면 갈수 있다. 거기가 신앙입니다. 만일 예수님은 본래 특별한 이니까 그렇고 우리는 뭐 인간이니까 할 수 없지.
그러니까 우리는 버러지만도 못한 인생이니까 어떻게 해주십시오. 그런 게 신앙처럼 아는 그런 따위 신앙은 이젠 신앙이 될 수 없다 그 말입니다. 목사님들이 뭐라거나 기성종교가 뭐라거나 난 이점에서 나는, 너도 못했지 그렇습니다. 나도 실행을 못해서 지옥을 갈는지 몰라요. 지옥을 가면서라도 내가 가면서라도 기면 기다고 아니면 아니다라고 그래야지. 내가 지옥 안가기 위해서 그런 것도 그게 되겠어요. 믿음이란 거는 결코 마술이 아니라고 하는 거.
옛날 종교가 유치하던 시대에는 초자연적인 무슨 힘으로 내 힘으로는 못하는 거를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해도 좋고 어쩌나 무슨 능력에 따라서 하면 좋다. 그런 것이 인간이 도덕적으로 착각하는 점이 그리 높지 못하던 시대에 나온 소립니다. 내가 나이 어릴 때에는 내발로 걸어가는 것과 걸어갈 생각을 하질 못하고 말이야 누가 쳐들어다가도 저 높이 올려놓으면 좋은 것 같이 생각할 때가 있지만, 차차 해서 나도 인간적으로 자라게 되면 어 내발로 올라가야 올라간 거지. 남이 쳐들어준 거 무슨 내가 올라갔다고 할 수 없지 않아.
어린 때에는 시험시간에 모를 거 나오면 협잡을 해서라도 어떻게 시험 점수를 많이 얻자고 생각을 해요. 그래도 무리가 아니에요. 허지만 나이 30 지나고 40이 되고. 학사, 박사가 됐다고 하면서도 협잡을 해서 목사가 됐다고 하면서도 위조한 졸업증을 가지고 박사라는 이름을 그렇게 그 따위가 천당을 갈 리가 어디 어디, 그게 신앙이 그게 될 리가 도덕의 정도가 그렇게 된 다음엔 어떻게 될 수가 있어요. 그래 이게 어디서 왔냐 그러면 당초 신앙이라고 하는 게 뭔질 잘 모르고 모르던지 능력에 따라서 나는 힘을 조금 나는 죄 덩어리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지만 하나님이 불쌍히 여겨서 나를 이렇게 개방을 한다. 그게 좋게 들리던 때에 그것이 좋을 것이 조금도 없습니다. 천년이 가더라도 죄 덩이리만 됐던 내가 이것이 죄인 줄을 알고 잘못인 줄을 알고 뉘우치고 힘을 써서 잘못을 어떻게 안하도록 되가지고 내가 걸어갈 수 있게 되는 데가 하늘나라지 들것에다가 메다가 놓은 데가 하늘나라가 될 리가 없지 않아요. 어디 그렇겠습니까?
그런데 과거에 우리가 우리 마음이 체 높이 깨지 못했던 때에 그런 점에 생각을 잘못해 결과만을 보려고 그랬지. 결과에 관한 가는 그 과정이 내 힘으로 한거냐 남의 힘으로 하는 거냐 도리어 인간의 의문이 여기에 있다. 그게 아까 말하면 인간의 근본원리는 윤리적인데 있다. 도덕적인데 있다. 그러고 그 점은 예수님도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도 시험 당했다고 그러지 않아요. 시험을 당해서 이겨서 이겼으니까 하나님의 아들이고 그 다음에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세례 받은 거 보고 그래 “너는 내 사랑 아들이라” 그랬지 덮어놓고 날 때부터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너는 시험받을 필요 없다 안 받아도 된다’ 그럴 수 없어요. 그렇게 됐을 리가 없어. 이런 점은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그다음에 잘 생각할 점이야. 이게 이제 우리가 현대에 있어 전도하는데 젊은 사람에게 전도하는데 생각할 점입니다.
옛날같이 그런 사람이 지금 사람이라 어느 면으로 더 타락이되 더 악할지 몰라요. 그렇지만 그래도 시대가 이렇게 됐기 때문에 인간이 인간으로서 깬 점은 옛날보다 훨씬 높이 깼어.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자주하는 거다. 스스로 자기가 나는 나다. 자유하는 것이 인간이라 하는 이 생각이 꽉 들어있기 때문에 못하긴 자기도 못하면서도 마음에 연약해서 빠질 땐 빠지면서도 자유가 귀한 줄은 알아요. 그러기 때문에 어떻게든지 자기의 자유를 살려주면서 말을 해야 알아듣지. 자유를 무시하게 되면 들으려고 하지를 않아. 그건 그러니까 덮어놓고 내가 하지를 않고 대신해 주었다. 그러는데 고맙게 생각을 하지 않고 도리어 그거는 나를 모욕하는 거다 우리가 왜 그럴 수가 있냐. 거저 얻어먹고 싶지 않다 그 말입니다.
그래서 옛날 유치하던 시대에 구원이라 그럴 땐 우리에 윤리적인 노력과는 하등에 관계가 없이 그저 하나님이 이렇게 거저 줘. 이럭해도 그건 거저 준다 하는 데는 하나님의 사랑 편으로 우리가 느끼려니까 그래 그러는 말 거저 한다고 하는 말은 도덕적인 노력을 아무것도 하는 걸 하질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하긴 했더라도 내가 노력을 하긴 했더라도 그 값으로 따져서 준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원체 사랑이기 때문에 그 사랑이 그렇다고 그걸 말하는 거지, 이 흥정조건으로 하지 않았단 말이지, 노력은 우리의 윤리적으로 노력의 하는 것이 없이 짐승처럼 거저 가만히 있어서도 저절로 됐다. 그런 의미는 아닙니다. 이런 점은 말하기 대단히 곤란 합니다만 그래도 그런 점은 분명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우리와 마찬가지로 예수님도 잘못하셨다면 잘못하실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었다. 그런 가운데서 참 눈물과 히브리서의 말을 빈다면 눈물과 탄식으로 쉬지 않고 기도해서 자기가 아들 되는 자리에 올라가셨다. 그럭하기 때문에 우리의 연약한 점을 잘 알거야. 어떤 때에는 어떡하면 되는지 어떤 때는 어찌해 어려운지 잘 아실 거다. 그러니까 과연 우리의 지도자가 될 수가 있다. 우리의 대표가 될 수가 있다.
그러니까 우리가 그를 믿고 그의 친근감을 느끼고 그러지 원체 저이는 우리와는 뭐 동뜨게 잘난 분이니까. 그건 옛날에 유치하던 시대에 존경할 때에는 멀리 멀리서 얼굴을 바라보지 못해야 존경하는 것같이 알았지만, 지금은 존경할수록 가까이서 얼굴을 대하고 만나보고 얼굴과 얼굴을 마주보는 게 존경이지 멀리서 얼굴을 거들떠보지 못하는 그건 옛날 노예시대에 거들떠보지 못하는 버릇이 우리에게 있어서 하는 말입니다. 옛날시대에 인간 사회에 노예제도가 봉건제도로 되서 계급이 심해서 아랫사람은 위에 대해선 감히 우러러 못보고 머리를 숙일수록 아주 도덕이 되던 때의 말이 지금은 사회생활이 달라졌기 때문에 그게 도덕이 아닙니다.
얼굴보지 않는 것이 도덕이 아니라 아주 정면으로 가까이서 될 수록은 보고 손이라도 가서 잡고 악수를 하는 것이 친근한 표시지 말이야 아주 달라졌으니까 지금 우리가 종교계에 정신 살림에 걸로 표시하는데도 그 시간이 달라질 수밖에 없어요. 그러나 내놓고 말하면야 어떤 때는 그럽니다만 아마 이 다음엔 우리 저 하나님의 종이라는 그런 얘기 안하게, 인간 사회에 종이 있을 때에 거길 들어서 우린 당신의 종입니다 그랬지. 인간 사회에서 종이 없어졌는데 지금으로부터 2천년 3천년 지나간다. 그러면 종이 뭐인지 젊은 사람들이 모르게 된다. 그런 때엔 그 말 안 쓸 겁니다. 그렇게 되리라고 난 믿습니다. 안 쓰게 되는 거 좋지 그거 나쁠 거 있어요. 얼마나 하면 예수께서도 너희들이 날 이때까지 선생님이라고 주님이라 그랬지만 내가 이제 널 친구라 그런다.
왜 그런고 하니 종이라는 건 그 주인의 하는 뜻은 모르지만 아들은 알고 친구도 아는 거 아니냐? 그런 의미로 요한복음에 여기 있는 말입니다만 이런 점이 우리가 시대가 달라져서 그속에 존경하는 마음씨라든지 믿는 마음씨는 다를 리가 없건만 그것을 발표하는 말은 자연히 달라질 수밖에 없다하는 그래 여기서도 오늘 그런 점을 생각을 할 때에 이게 좋다 그 말입니다. 만일 전번에 우리 보았던 그 말씀만 있고 이 말씀이 없었다, 그런다면 도리어 우리가 더 어려웠을는지 몰라.
그런데 여기 아주 예수님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뭐 나만 못생겨 그런 것이 아니라 예수님도 그러셨군. 그래서 그러니까 우리가 그에게 가서 물을 표니까 폐병에 관해서 어떻게 낫느냐 그러면 폐병 앓아본 사람한테 가서 물어볼 거 아니에요. 앓지도 않은 사람한테 가서 폐병 어떡하면 낫습니까? 그건 물어도 소용이 없어요 하지만 폐병을 자기가 앓아보고 나은 사람같으면 아마 잘 말해 줄거에요. 저 사람은 폐병 들리면 무엇이 제일 어렵더라 약은 무엇이 좋더라 어떤 땐 어떤 게 좋더라 하는 말 잘 알거다. 그러니까 폐병쟁이의 친구는 역시 폐병 앓아본 사람일거에요.
그런데 죽음에 직면을 하고 마음에 초조해 설레서 옳지 내가 무슨 말을 해야겠나? 이런 말을 했던 분이니깐 내가 참 마음이 어려울 때에 가면 아마 말씀을 해주실 수 있을 거다 그러지 당초 언제 번민해 본 일도 없고 죽음에 직면해서 겁을 내본 일도 없고 말야. 본래 아주 훌륭해서 말이야 바로 당초 그 칼을 들어본 일이 없는 그런 마음이란다면 우리의 사정을 알 리가 없어. 우리의 주님이 될 수가 없을 거예요.
그런데 다행히 사실이 그러니까 그렇지만 여기 이런 말이 있는걸 어느 면보면 이렇게 마지막에 수양이 되면 어떠한 어려움이 와도 까딱이, 물론 그래야지 그런 지경에 가야지 하지만 그것도 일면이지만 또 다른 면엔 그보다도 더 어려운건 사실이 마지막 순간까지 어려움이 닥쳐와. 그런 가운데서 어떻게 이기나 내 마음에 턱 어떻게 됐어. 태연하게 아주 견딜 수가 있다면 그새 더 좋은 일 어디 있어요. 그러나 인간인 다음엔 그렇게 안 된다. 얼마나 하면 미리미리 알고 이럭하신 예수님께서도 마지막쯤 이제 순간이 오면 내 마음이 초조하니 내가 무슨 말을 하겠느냐 그러고 참 부끄러울 어떻게 보면 부끄럽다 하리만큼까지 이런 모양을 보이셨다.
그러는 그래 “아버지시여 이 시간에서 나를 건져주시옵소서.” 딱 직면을 했는데 비킬 수가 없는데 그래도 마음에 무슨 소원이 있는고 하니 어떻게 면할 수가 있었으면 보통말로 목숨이 아까워 죽기가 아까워서 그러는 거는 아닐 겁니다. 그거는 뭐 그거는 처음부터 지내갔습니다. 하지만 그보다는 훨씬 더 문제가 깊은 것이 있어. 그런 이런 얘기할 때에 이런 얘기할 땐 우리가 미리 하나 알건 아닙니다. 예수님에 대한 저번에도 내가 그런 말씀했습니다.
이렇게 내 마음을 미루어서 투입을 하는 게 그게 위험하다. 그렇게 하긴 해야 하지만 그렇게 하긴 위험성이 있다는 말이 많이 했습니다. 제가 근데 그런 줄 알고 그래도 할 말이지만 하여간 이런 때에 어떤 마음성에 그러셨을까 될수록 알아보려고 그 노력을 해야 좋은데, 그런 중에서 하나 제가 지금까지 아는한으로 하는 말입니다. 하나 말씀을 한다면 그 의식이 우리와 많이 다른, 물론 사람의 약점이 다 있기는 있지만 그러면서도 그 다른 점이 아주 동뜨게 다른 점이 하나 있어.
그게 뭐냐 그러면 우리는 아주 썩 잘났다고 그러는 사람도 소위 말할 때 내 소위 자아 나는 나다 하는 그 의식을 면칠 못해요. 그런데 예수님이 물론 건 노력해서 저절로 됐다는 것 보다는 많이 기도하시고 해서 되신 것이지만 다른 거는 그 의식이 전체를 대표하는 의식이지. 개인으로서의 의식이 아마 아니었을 거라 하는 거. 나는 그 점을 생각을 하고 싶습니다. 우리 모양으로 ‘나는 나고 너는 너지’ 하는 그런 따위의 그 의식이 아니라 곧 외양으로 보면 한 개인으로서의 예수지만 한 개인으로서의 의식인데도 그게 그 전체를 전체의 의식을 대표하는 그런, 그런 점 그런 게 어떤 거라는 걸 감히 말하기 어렵습니다만 그런 게 아니겠나. 그런 거는 그 아래의 차차 내려오는 말을 보면 그 인자라는 칭호가 나오는 걸 보면 여기만하고 다른데도 있습니다만 그 점을 짐작할 수 있지 않나 그렇게 생각을 해. 그래 그걸 염두에 두고 생각을 이 시간에 나를 건져 주시옵소서.
그러니까 이거는 이 시간에 나를 건져 주시옵소서 하는 것이 개인이라고 하는 예수라 하는 30 청년이 목숨이 아까워서 죽을까봐 겁이 나서 하나님 어떻게든지 나를 살려주시오 공산당에게 잡혀가는데 손을 싹싹 빌면서 어떻게 살려줍시사 뭐 이런 따위는 아니라고 하는 그런 따위는 아닙니다. 그보다는 굉장히 깊은 거, 그 나라하는 것이 그런 따위 이 목숨이 아까운 그런 게 아니라 이게 인간 전체라 하는 인간 전체라, 그 마음속으로 하는 인간의 소리로 개인의 누구의 소리라는 것보다는 이것이 곧 인간의 소리다. 아니 이 시간에 나를 건져 주옵소서 그것이 정말 그 인간의 목소리 아니겠나. 확실히 인간이라는 건 인간 존재는 그게 있어요. 이 시간에 이 시간을 어떻게 면했으면 이 시간 없이 나라는 거 없는데 이 시간을 면했으면, 요거는 물론 예수님 개인으로 예수님 그때일로 한다면 이제 당장 앞에 죽음이 직면이 오시는걸 보시고 그런 겁니다.
그런 건데 우리는 그걸 못 보는 것이 그걸 못보고 소위 평상시의 마음이라는 평상시의 마음이 좋기도 합니다. 인간으로서는 이 사람으로서는 마음이 이렇게 정상적인 마음을 가져야하지. 정상적인 마음을 못 가진 사람과 말을 해선 안돼요. 마음이 잔뜩 너무 지나치게 흥분이 된다든지 혹은 뚝 떨어져서 이렇게 아주 그 자멸감에 빠져있다든지 무슨 사람과 말을 하면 안 돼. 사람이 사람노릇 하려면 일은 어떤 일을 당했든지 간에 정상적인 보통 평상의 의식을 가질 필요가 있어요. 그러나 그것은 보통 이 세상에서 하는 말이지. 저기 우리가 이 영의 세계라고 참 생명의 세계를 우리가 목표로 한다, 그런다면 그 의식만 가지곤 안 돼. 평상시 그 의식만 가지곤 거기를 못 들어간다 하는 이제 그래 저 이젠 나보다 수십 년 지나갔습니다만 나는 또 발트 신학은 뭐 연구를 해보지도 않았으니깐 감히 발트 신학에 이렇고 저렇고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만 돌아가는 문구만을 듣고 나도 하는 소리, 발트가 말한 게 위기하는 말하지 않았어요.
인간이란 위기적인 존재라 그러는 1차 세계대전 이후에 인류 전체로서의 그 쓰라린 경험을 한 거를 반성을 해보면서 나온 말. 그럼 그 위기 신학이라고 하는 거 한동안 아주 사방을 풍미해서 그것이 새로운 경지를 열어준 것처럼 그랬던 것을 나오기는 발트의 생각에서 나왔지만은 그게 발트 한사람의 생각이 아니고 그 시대의 인간이 경험했던 거를 잘 이렇게 능히 꼬집어내서, 그랬기 때문에 그런 거 아니에요. 위대한 예술가라는 건 사람이 다 느끼긴 느끼면서도 자긴 느낀 줄 알지도 못하고 있는 것을 누구 속에나 다 있어요. 있는 것을 참예술가는 고걸 잘 꼬집어 내서 요렇게 작품으로 만들어 그럴 때에 모든 사람이 “아 참 좋다” 좋은 것은 제 속에 벌써 느꼈기 때문에 좋다고 제 속에 없는 거라면 느낄 수가 없을 거예요.
그러니까 시는 시인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속에 있는 겁니다. 시인이 뭐냐 그러면 모든 사람의 속에 있는 시를 능히 불러낼 줄 아는 게 고게 시인이에요. 다른 사람은 시를 가지고 있긴 있으면서도 남의 속에 있는 시를 능히 불러내질 못해 고 재주가 고게 뭐 그럼 예수님은 누구냐 사람의 속에 다 하나님의 아들이 있는데 하나님의 아들이 있는 것을 우리는 있으면서도 스스로 불러낼 줄 몰라. 예수님이 능히 그 불러내는 데가 그 예수님이 예수님 된 점.
그런데 그것은 보통의식 가지고 안 된다 그 말이야. 거길 가면 자연히 이제야 말도 내가 발트의 말 인용할라고 했는데 위기라 그랬지만 어느 시간만이 위기가 아니라 시간이란 모두 다 위기라 그 말입니다. 고 말씀이 알아들으시겠는지 못 알아들으실라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우리는 평상에 이 소위 의식이라는 거 이 평상의 의식이라는 건 이건 아주 표면적인거야요. 아주 첨 보통 이 껍데기에서 돌아가는 그러니까 이건 이 세상에서 소위 똑똑한 사람으로 밑지는 것이 없이 빵에 어느 편에 버터가 발리워 있는지 고걸 분명히 알고 지내가는 고런 따위의 살림을 하는 데는 이제야 그 보통의 의식이 있으면 살아가지만 인간이라는 게 여길 살긴 살면서 이것만 살자는 게 아니에요.
이것보다는 인간이 인간 이상 되자는 게 목적입니다. 저도 모르게 인간이 인간 이상 되자는 생각이 자꾸 있었는데 그게 우리가 안타까워하는 겁니다. 인간 이상 되는 델 올라가자면 뭔고 하니 평상시의 의식만 가지곤 안 되고 시간은 시간이 뭐냐 하는 직면을 해서 시간을 능히 바라봐야겠는데 여기 이 시점에서 이 시간에서 요샛말로 이 시점에서 그럴 거예요. 이 시점에서 나를 건져 주시옵소서 근데 이 시점이란 요 생명이란 시점에 지금이라 하는 요 시점에만 있는 건데 그걸 놓고 생명을 알 수가 없는 건데 그 시점을 이렇게 이렇게 응시를 해 들여다본다면 뭔고 하니 무섭다 그 말이야. 거기 무서운 것이 있어. 그러기 때문에 사실은 현재처럼 무서운 거 없어요. 그러기 때문에 무지라고 하는 말도 도망하고 싶은 생각이 있어요.
예수님이 그때에 인간대표로 개인으로 서거든 인간대표로 무심하게 나온 소리 이 시간에서 나를 건져 주시옵소서. 그건 지금 죽게 돼 죽음이 눈앞에 온 것을 보고 그래서 여기서 나를 건져 주시옵소서 그런거지 죽음을 어느 시간에 어느 시간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말입니다. 어제도 여기서부터 살려면 사람이 사는 자리에 갈라면 죽음이 시간마다 시간마다 모든 시간이 죽음의 시간이라 하는 그걸 모른 건 생명에 들어갈 수가 없어요. 시간을 바로 보지를 못해 그러지. 바로 보기만 하면 시간이 현재라는 시간마다 그 속에 죽음이 들어 있어요.
그러기 때문에 그걸 보고 무섭지 않을 사람이 없어요. 인간인 다음엔 무서워하는 게 당연한 거지 인간이 아니라면 인간적인 마음이 없다면 생명이라는 것이 우리에게 와서는 의식적으로 나오고 자각이 되는데 그런 것이 없다면 아마 그럴 거예요.
가령 짐승도 어느 정도 있긴 있습니다만 짐승 같으면 사형선고를 너를 놓고 사형선고 너 이제 이놈아 이제부터 너를 사형에 처한다. 그래도 꼼짝 안할는지 몰라요. 모르니깐 태연하고 아 저놈 어떻데 태연하게 사형선고를 내려도 꼼짝도 안한다 그러는지 모르고 사람인 다음에는 사형선고 내린다면 놀라운 게 인간이고 마음에 여기 두려운 생각이 나는 게 인간인데 시합을 썩 잘해서 하면 이기는데 갑니다만 그것은 많이 많이 취향해서 가는 거지 자연인을 맘대로 있는 인간이 그럴 수가 없다 그 말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내 살림을 요렇게 똑바로 봐. 살림을 이 건초를 이만큼 속아서 보는 것이 아니라 얼굴과 얼굴을 대하는 만큼 직면을 하면 고것이 이 현시점이라는 생명이 요 현재에 우리 저 이태 전에 그리스에서 뭐 세계대회 뭐 한다는 표어가 노타임 디스 프리젠트(no time this present)라고 하는 이 시간밖에 시간 없다. 현재밖에 시간 없다. 좋은 표호에요. 그런 것 있었습니다만 타임이라 시간이란 말은 꼭 디스 프리젠트(this present)지 지금이라는 시간만이 시간이지 이걸 내놓고 그 다음에 시간이라는 건 그 시간 죽은 시체에요. 그렇지 않아요 그런데 시간이라는 걸 직면을 하면 무섭다 그 말이야. 무섭지 않을 수가 없어. 그래 그러니까 역사적으로 예수라는 이가 그때에 내 이제 조금 있으면 저 사람들이 아마 나를 잡아갈 걸 그걸 내다보고 있었어요. 내다보시니까 물론 그랬을 건 사신 말씀이지만 그것만이 아니라 그런 예수님의 십자가란 십자가는 왜 있게 됐냐? 다른 말로 인간의 모든 시간이 십자가의 순간이야.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의 만일 인간의 모든 생명의 모든 순간이 십자가가 아니라면 예수님의 십자가 졌을 필요도 없고 지지도 않고도 됐을 것이에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하는 예수가 이 세상에 와서 이 민족을 배반했다. 민족을 배반했다하는 이름하에 사실도 아니지만 말야. 그런 죄목 하에 십자가에 무참한 사형을 당하게 되는 것은 십자가라는 건 자꾸 묻습니다. 죽음이지만 그렇게 일이 그런 일이 있게 된 것은 어떻게 어떻게 되다가 일이 잘못돼서 된 것이 아닌, 어떤 일이 잘못돼서 됐다고 한다면 그건 믿음의 태도가 아닌 신앙이라는 건 뭐냐 그러면 어떤 일도 있을 필요가 있어서 됐다.
모든 일에서 어느 필연성을 보아내는 데가 신앙이야. 그렇지 않으면 ‘난 괜히 그렇게 됐지’ 나 우연히 거기 갔다가 그렇게 되지 않았어. 우연히 거기 갔다가 그렇게 됐다하는 것만 가지곤 그런 우리 맘에 불평이 있고 낙심이 있고 그럴 수밖에 없어요. 근데 죽으면서까지도 이것이 우연히 아니고 이것이 이일이 까닭이 하나님이 이렇게 하신 거다 하는 마음 이런 까닭이 있다 그 말이야 그러기 때문에 그걸 깨달아서 우리 마음에 비로써 이제 내 안심이 온다고 할까 나의 무슨 의미가 생겨. 그러기 때문에 모든 무슨 어떤 장소나 어떤 시간이나 어떤 물건이나 믿는 자리에서 우연히 하나도 없어.
의미 없는 건 하나도 없다고 다 이 짐을 지고 지극히 적은 거 하나도 다 제자리에 놓였지 놓이지 않을 자리에 놓인 건 없어. 그렇게 해서야만 이집이 된다고 하는 거 모양으로 그러니까 믿음이라는 건 그 이 우주 막막한 우주 전체에 우리 알 수 있는 거 있고 우리 알 수 없는 것도 있고, 내 맘에 좋은 것도 있고 언짢은 것도 있고 내 맘에 선해 보이는 것도 악해 보이는 것도 있긴 있지만 그러나 내가 구원 얻는 자리에 갔다고 그런다면 내가 만일 구원 얻었다고 그런다면 이 우주 안에 구원 못 얻은 게 하나도 없을 거예요. 다른 말로 하면 이 우주 안에 의미 없는 하나도 없다. 잘못된 일은 하나도 없다. 그렇게 생각이 돼야 내가 구원 얻는 거지 구원 얻었다고 그러면서도 저 사람은 왜 그렇게 됐을까? 유다란 놈은 어찌 그랬을까?
그 점이 상기도 의미가 풀리지 않고 있다면 내가 구원이라는 말이 그 말 안된 소리라고. 그러니까 내가 만일 구원 얻었다고 형식적인 말입니다만 구원 얻었다고 가정을 한다면 내 눈에 틀린 게 하나도 없을 겁니다. 다 까닭이요. 다 제자리에서 다 하나님의 뜻대로 “예 아버지의 뜻대로 됐습니다.” 그렇게 되는 자리엘 가야 그게.
그러니까 예수님이 그 마지막에 자기에 기도하고 뽑았던 사랑하는 유다한테 팔리어서 십자가에 돌아가면서도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그런다. 그렇게 했다는 데가 그가 정말 하나님의 아들 되는 데야요. 하나님의 아들 되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었던 요만큼도 의심 전적으로 믿는 자리에 갔다. 그럼 믿은 고로 하나님의 아들이 됐다. 그러니까 유다도 우연하게 그런 거예요. 자기가 잘못한 게 그런 거 아니에요. 모르고해서 그런 거 아니에요. 그럴만한 그 까닭이 있어 하나님 무슨 의미가 있어 그랬던 거야 그런 거라 그 말이야 그런데 그런 생각을 그렇게 하려면 어드런고 하니 모든 시점을 이렇게 응시해서 직면해 들여다보지 않고는 안 되는데 모든 시점을 직면을 하면 거길 뭐 있는고 하니 우선 내 죽음이 거기에 들어있다 그 말이야 그런 시점이란 그런 거야.
시간을 바로보고 산다는 사람이 있을 수 없어 그런 점이 이제 옛날식으로 표시가 되면 뭐냐 그러면 시내산에 모세가 올라가는데 여기 올라오면 죽는다 하나님의 얼굴 보면 죽는다 하나님의 얼굴 못 본다 한 게 그게 그 후 그걸 그렇게 그걸 지금에 하나님의 얼굴을 보면 죽는다. 그러니까 어이쿠 내가 인간으로 하나님의 얼굴을 보았으니깐 못 살 겁니다. (녹음27, 32: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