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한글날’ 국경일로 승격
‘한글날’을 국경일로 승격시키는 법률이 2005년 12월 29일에 공포되었다. 그동안 기념일로 규정되어 있었던 ‘한글날’이 국경일이 된 것은 정부(행정자치부)가 「국경일에 관한 법률」의 내용 일부를 개정하여 ‘한글날’을 국경일에 포함했기 때문이다
「국경일에 관한 법률」은 1949년 10월 1일 제정된 이후 한 번도 개정되지 않다가 2005년 12월 29일 처음 개정되었다. 제정 당시 국경일을 삼일절, 제헌절, 광복절, 개천절로 정했는데 이번에 개정되면서 한글날이 국경일에 추가되었다.
다만 한글날은 「관공서의 공휴일에 관한 규정」(일부 개정 2005. 6. 30. 대통령령 제18893호)의 적용을 받아 ‘국경일’이기는 해도 ‘공휴일’은 아닌 상태로 남게 되었다(제헌절도 2008년부터는 공휴일이 아닌 국경일이 됨). /Google
[1989년] 바츨라프 하벨(Václav Havel), 체코사상 최초 비공산계 대통령에 취임
← 바츨라프 하벨
체코슬로바키아 민주화운동을 이끌어온 반체제 작가 바츨라프 하벨이 1989년 12월 29일 의회에서 만장일치로 신임 대통령으로 선출돼 체코 역사상 41년 만에 처음으로 비공산당 출신이 대통령으로 등장했다. 하벨은 대통령 선출투표에서 재적의원 3백23명 전원 찬성을 받아 체코 9대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77헌장그룹 창설 멤버이기도 한 하벨은 반정부 활동으로 지금까지 통산 5년에 걸친 수차례의 수감생활을 했으며 민주화 요구 시위를 주도해 온 재야 연합세력 `시민포럼`의 지도자 역할을 맡아왔다.
하벨은 프라하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1948년 체코에 공산정권이 수립되면서 부르주아적인 배경으로 정규교육을 받지 못하고, 택시운전기사 등에 종사했다. 그 후 프라하 예술아카데미를 졸업, 작가의 길로 매진하였으며, 1963년 희곡 `뜰의 축제`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공산당에 대한 비판적인 작품과 검열거부로 체코에서는 20여 년 동안 작품발표가 금지되기도 했다. 1977년 8월 ‘인권헌장77’을 공동 기초해 투옥됐고, 1979년에는 공화국 전복기도 혐의로 4년 동안 옥고를 치렀다.
하벨은 '타협과 조정'으로 체코와 슬로바키아를 분리시켰으며, 연방이 두 동강 난 데 대한 책임을 지고 대통령직을 사임했으나, 독립된 체코 국민들의 지지로 다시 정계로 돌아왔다. 1993년 초대 대통령에 선출돼 13년간 대통령으로 재임하다 2003년에 물러났다./조선
2004년 10월 제7회 서울평화상을 수상했다.
[1985년] 연극배우 추송웅씨 타계
← ‘빠알간 피터의 고백’에서 열연했던 추송웅씨
`빨간 피터` `우리들의 광대` `영원한 연극인` 추송웅이 1985년 12월 29일 급성신부전증 등 복합증세가 겹쳐 44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1941년 경남 고성에서 태어난 추송웅은 친구들에게 `사팔뜨기`라 따돌림을 받으며 상처 투성이로 성장기를 보냈다.
두꺼운 장막속에 자신을 감추려는 의도에서 시작했다는 그의 연극은 상처와 콤플렉스로 신음하던 추송웅을 세상속으로 드러냈다. 중앙대 연영과에 입학한 그는 교실에서 커튼을 뜯어 덮고 자면서 악전고투, 경상도 사투리와 사시라는 콤플렉스를 극복했다.
추송웅의 신화를 만든 `빠알간 피터의 고백`은 그의 표현대로 `원숭이를 몸 속에 넣는 동화작업`을 거친 후에야 비로소 탄생했다. 창경원 허락을 받아 원숭이 우리 안으로 들어가기도 하는 우여곡절 끝에 추송웅은 원숭이와 사람을 구분할 수 없는 `피터`로 변신했다. 그는 이 연극으로 `한국 현대사에 신화 탄생`이라는 격찬을 받았다. 아내의 곗돈 75만원을 쏟아부어 만든 `빠알간 피터`는 1년간 163회나 공연해 8만5천명을 끌어들였다. `빠알간 피터의 고백`으로 482회 15만2천명, 1인 6역을 맡은 `우리들의 광대`에 512회 23만5천명을 모아 `1000회 모노드라마 출연, 40만명의 관객 동원`이라는 전무후무한 모노드라마 출연기록을 세운 추송웅은 결국 자신의 삶의 에너지를 무대 위에서 모두 탕진함으로써 죽음을 재촉했다./조선
[1973년] 박정희 대통령 개헌운동 즉각중지 담화문 발표
1973년의 11월 한 달이 온통 대학가의 시위로 뜨겁던 이때, 야당과 재야의 정치인들, 그리고 반정부 지식인들은 무얼 하고 있었을까. 학생들의 반정부운동을 지켜보면서 야당과 재야의 정치인들, 종교인들, 반정부 지식인들은 조용히 구체적으로 움직이고 있었으니, 길잡이 행사처럼 학생시위가 한바탕 전국을 휩쓸고 지나간 12월, 장준하 함석헌 법정 김동길 유진오 이희승 김수환 백락준 지학순 김지하 문동환 박두진 계훈제 이호철 백기완 홍남순 등 서른 명의, 정치인 종교인 문인 교수 법조인이 ‘현행 헌법 개정 백만인 청원운동본부’를 결성하고 그 취지문을 발표한다.
개헌청원운동 취지문 낭독
오늘의 모든 사태는 궁극적으로 민주주의를 완전히 회복하는 문제로 귀착한다. 경제의 파탄, 민심의 혼란, 남북긴장의 재현이란 상황 속에서 학원과 교회, 언론계와 가두에서 울부짖는 자유화의 요구 등, 이 모든 것을 종합하면, 오늘의 헌법하에서는 살 수가 없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그러나 오늘의 헌법은 그 개정의 발언권이 사실상 대통령에게만 속해 있는 것이다. 이에 우리 국민은, 이와 같이 헌법개정 발의권으로부터의 소외를 극복하고 우리들 천부의 권리를 제시하는 방법으로, 대통령에게 현행헌법의 개정을 요구하는 백만인 청원운동을 전개하는 바이다.
해 설
12월 24일 서울 YMCA회관에서 발족한 '헌법개정 청원운동본부'가, 바로 그날부터 백만인 서명운동에 들어가자 국무총리 김종필은 방송담화를 통해 개헌청원 백만인 서명운동을 중단해줄 것을 요구했고, 개헌청원운동본부는 국무총리 담화를 반박하는 담화문을 발표한다. 그리고 야당에서는 통일당이 당론으로 개헌청원운동을 지지한 데 이어 신민당에서는 정일형이 개인적으로 지지 의사를 밝히면서 당 차원의 지지를 촉구한다. 개헌서명운동을 즉각 중단하라는 박정희의 담화가 방송을 통해 발표된 것은 12월 29일이었다.
박정희(방송)
나는 최근 일부 지각 없는 인사들 중에, 현 유신체제를 뒤집어 엎고 사회혼란을 조장하려는 불순한 움직임이 있다는 것을 알고, 지난 26일 국무총리로 하여금 현 시국의 중대성과 백척간두에 서 있는 조국의 현실에 비추어 우리의 생존과 독립과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서는 유신체제가 불가피함을 설명하고 경거망동이 있어서는 안되겠다는 점을 온 국민에게 호소한 바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일부 불순분자들은 아직도 과대망상증에 사로잡혀 가지가지 교묘한 방법과 수단으로 선동과 유언비어를 유포하면서 동조세력을 규합하는 데 여념이 없는가 하면...
해 설
국가안보에 위해요인이 되는 개헌청원 백만인 서명운동을 즉각중단하라는 박정희의 담화가 발표되자 이번에도 개헌청원운동본부에서는 대통령 담화에 대한 반박 성명서를 발표하는데, 그 성명서를 발표하는 1974년 1월 5일, 그때 개헌청원 백만인 서명운동은 이미 30만 명의 서명을 확보하고 있었으니, 백만인 서명의 목표달성은 시간문제였고, 그것은 유신정권에 대한 시민의 근본적인 불신을 확인시켜주는 것이었다. 그랬으니 유신정부가 위기감을 느끼지 않을 도리가 없었는데, 공화당의 초대 총재와 당의장을 지낸 정구영이 공화당을 탈당한 뒤에 개헌 서명운동에 동참을 하고, 예순한 명의 문인들이 서울 명동 코스모폴리탄다방에서 개헌지지 문인성명을 발표하는 등 개헌청원운동의 불길이 걷잡을 수 없이 번져가자 박정희는 특단의 조치를 결심하게 된다. 유신헌법 제53조가 규정하고 있는 ‘대통령 긴급조치권’의 발령, 바로 그것이었다. 긴급조치 제1호와 제2호가 동시에 선포된 것은 1974년 1월 8일의 일이다.
다큐멘터리 20세기 한국사 제158회 그 어둡고 살벌했던 6년 - 긴급조치시대 2000-05-17
[1948] 산악인 고상돈[高相敦] 출생
청주상업고등학교를 졸업했고 전매청 청주 연초제조창에 근무하면서 청주대학교 경영학과 2년을 수료했다. 대학산악연맹에 소속되어 활동하다가 한국일보사와 대한산악연맹이 공동후원한 한국 에베레스트 원정대(대장 김영도, 대원 19명)의 제주대표로 참가, 1977년 9월 15일 한국인 최초로 에베레스트(해발 8,848m) 정복에 성공하였다. 그후 대한산악연맹 충청북도지부 이사로 있으면서 1979년 북아메리카 최고봉인 알래스카 매킨리(해발 6,191m) 원정대의 대장으로 참가했다. 등정에는 성공했으나 이일교·박훈규와 함께 5월 29일 하산 도중 자일사고로 추락, 사망했다. 제주도의 한라산 해발 1,100m 고지에 묘소가 있으며 고(故) 고상돈대원 기념사업회가 조직되어 매년 추모사업을 벌이고 있다.
[1932년] 최일남[崔一男] (한국 소설가·언론인) 출생
1932. 12. 29 전북 전주~.
1956년 서울대학교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민국일보〉·〈경향신문〉 문화부장 및 〈동아일보〉 논설위원, 〈한겨레신문〉 논설고문 등을 지냈다. 대학 재학시절인 1953년 12월 〈문예〉에 단편 〈쑥이야기〉가 추천된 데 이어, 1956년 〈현대문학〉에 단편 〈파양 爬痒〉이 추천되어 문단에 나왔다. 이후 물질만능의 세태, 타락한 정치, 위선적인 지식을 역설과 풍자로 드러냈고 소외된 서민층의 생활을 자세히 그려냈다. 대표작 〈서울사람들〉(한국문학, 1975. 1)은 도시 소시민들의 안일한 삶을 신랄하게 풍자한 작품이며, 〈흐르는 북〉(문학사상, 1986. 6)은 현실적이고 이기주의적인 삶과 대비되는 본원적 삶의 모습을 할아버지에서 손자로 이어지는 가족사소설 형태로 그려냈다. 소설집으로 〈서울사람들〉(1975)·〈타령〉(1977)·〈흔들리는 성〉(1977)·〈홰치는 소리〉(1981)·〈누님의 겨울〉(1984)·〈그리고 흔들리는 배〉(1984)·〈장씨의 수염〉(1986) 등이 있다. 1975년 월탄문학상, 1981년 창작문학상, 1986년 이상문학상 등을 받았다.
[1928년] 중국 국민정부, 중국을 통일
러일전쟁 후 쑨원[孫文]이 신해혁명(辛亥革命)에 의하여 임시 대통령에 취임하여(1912) 2,000년 이래의 전제군주제가 무너지고 공화제의 중화민국(中華民國)이 탄생되었다. 그러나 그후 약 20년간 군벌의 압제에 시달려야 했다.
쑨원의 사후에 후계자가 된 장제스[蔣介石]는 북벌(北伐)의 성공으로 양쯔강 유역에 진출하였다. 난징사건[南京事件]이 일어나 소련과 단교한 장제스는 군벌 장쭤린[張作霖]을 몰아내어 국민정부를 정통정부로 만들었다(1928). 장제스는 소련과 단교하였을 때 중국 공산당도 탄압하였다. 이때 공산당은 지하로 숨어 소련의 원조를 받았다. 일본의 침공이 격화되자 장제스는 다시 공산당과 화해하여 일본에 대항하였다. 그 동안에 공산당의 세력이 증대해갔다. 공동의 적인 일본이 패하자 국민정부와 공산당은 다시 적대관계로 돌아가 국공 내전이 계속되다가 국민정부가 패하여 타이완으로 물러가고 공산당은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을 세웠다. /naver
[1926년] 릴케(Rilke, Rainer Maria) 사망
1875. 12. 4 ~ 1926. 12. 29
독일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1926년 12월 29일 사망했다. 릴케는 어느 가을날 자신을 찾아온 이집트 여자 친구를 위해 장미꽃을 꺾다가 가시에 찔려 이것이 화근이 돼 패혈증으로 고생하다가 51세를 일기로 삶을 마감했다.
만년의 대작 ‘두이노의 비가(悲歌)’(Duino Elegies)나 ‘오로페우스에게 부치는 소네트’(Sonnets to Orpheus)는 보들레르 이래 내면화의 길을 걸어온 유럽 시의 한 정점이라고 할 만하지만, 장미 가시에 찔려 죽었다는 그의 마지막도 무척이나 ‘시적’이라 할 만하다. 전문가들은 릴케의 생을 흔히 4기로 구분한다.
제1기는 ‘꿈의 관’ ‘강림절’ 등의 시집으로 묶인 몽상적인 신낭만파 풍의 시를 쓰던 고향 프라하 시절이고, 제2기는 뮌헨으로 거처를 옮긴 뒤 루 안드레아스 살로메와의 러시아 여행 체험을 밑바탕으로 자신의 작품세계에 종교성을 가미하던 시기다. 제3기는 파리에서 조각가 로댕의 비서로 일하며 그의 영향을 받아 마치 조각품처럼 그 자체로 하나의 독립된 우주를 형성하는 ‘사물(事物)로서의 시’를 지향하던 시기다. 제4기는 ‘두이노의 비가’ 등으로 자신의 내면을 응시하며 존재론적 탐구를 행한 만년이다. /
[1911년] 손문, 남경혁명정부 중화민국임시대총통 선출
1897년 미국을 거쳐 일본으로 건너가, 미야사키 도텐[宮崎滔天] 등 일본의 지사들과 사귀는 한편, 캉유웨이[康有爲] 등과의 제휴로 필리핀 독립원조를 꾀하였고, 1900년 제2차 거병(후이저우[惠州]사건)을 시도하였지만 실패로 끝났다. 그 뒤 1905년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일본 도쿄[東京]에서의 유학생 등 혁명세력을 통합하여 중국혁명동맹회를 결성하고, 반청(反淸)무장봉기를 되풀이하였다.
1911년 10월 미국에서 군자금을 모금하던 중 신해혁명(辛亥革命)의 발발 사실을 알고, 열강의 원조를 기대하며 유럽을 거쳐 귀국하였다. 귀국 후 임시 대총통(大總統)에 추대된 그는 1912년 1월 1일 중화민국을 발족시켰으나, 얼마 후 북부의 군벌들과 타협하여 정권을 위안스카이[袁世凱]에게 넘겨 주었다. /naver
[1902년] 한경직[韓景職] 목사 출생
1902. 12. 29 평남 평원~2000. 4. 19 서울.
호는 추양(秋陽). 1917년 진광학교를 거쳐 1917년 오산학교에서 수학했다. 오산학교에서 남강 이승훈과 고당 조만식을 만나 가르침을 받고 평생 큰 영향을 받았다. 1925년 숭실전문을 졸업하고 미국에 유학하여, 1929년 프린스턴신학대학을 졸업한 후 1932년 귀국했다. 1933년 의산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1945년 9월 국내 최초의 정당인 '기독교사회민주당'을 윤하영과 함께 조직했으나 소련군의 진주로 같은 해 10월 월남했다. 1945년 12월 월남한 신도들을 위한 베다니 전도교회(지금의 영락교회)를 설립하여 세계 최대의 장로교회로 성장시켰다. 또한 김성호·김치복·박학전·백영엽·이인식 등과 함께 그리스도교계 학교인 대광학교를 설립했다. 1949년 십자군전도대를 조직, 전국 순회전도를 벌이기도 했다. 1954년 숭실대학교 학장에 취임했고 1955년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장, 1956년 한국기독교연합회(KNCC) 회장을 역임했다. 영락보린원·영락중학교·영락상업고등학교 등 각종 사회사업기관과 교육기관을 설립했으며, 전국 200여 개소의 개척교회 설립에 관여했다. 또한 해외선교를 비롯한 각종 복음전도에 앞장서 한국 그리스도교계의 대표적 인물로 전세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1973년부터 영락교회 원로목사로 있으면서 여러 세계전도대회에 참석하는 한편, 1982년 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사업협의회 총재로서 초교파적인 기념사업을 지휘하기도 했다. 1996년 그의 복음주의 신앙을 계승·발전시켜 세계 복음화에 이바지할 것을 목적으로 하는 추양선교재단이 설립되었으며, 1998년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숭실대학교에 한경직기념관이 개관했다.
한경직은 사랑과 청빈을 몸소 실천하고 '민족 복음화'와 '세계 복음화'를 위해 헌신한 복음주의 지도자로서는 크게 존경받았으나, 일제강점기 때 신사참배를 한 데 이어 5·16 군사 쿠데타 직후 정일권·김활란·최두선 등과 함께 민간사절단으로 미국에 건너가 군사정권에 대한 지지를 호소하고 1980년에는 12·12 쿠데타(1979)로 정권을 장악한 전두환 장군을 위해 조찬기도회를 집전하는 등의 행위로 그리스도교계 안팎으로부터 거센 비판을 받았다. 국민훈장 무궁화장(1970)과 종교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템플턴 상(1992)을 받았다. 〈건국과 기독교〉(1956)·〈신자의 사회적 사명〉(1960)·〈민주국가의 정신적 기초〉(1968)·〈내일을 사는 인생〉(1978)·〈한경직 칼럼〉(1984)·〈산상보훈 강해〉(1986)·〈한경직 칼럼〉(1986) 등의 많은 저서와 다수의 논문이 있다.
[1899년] 소설가 방인근(方仁根) 출생
1899. 12. 29 충남 예산~1975. 1. 1.
호는 춘해(春海). 배재고등보통학교를 거쳐 일본 아오야마학원[靑山學院]에서 공부하고 주오대학[中央大學]에서 독문학을 전공했다. 1920년 〈창조〉 제6호에 소설 〈눈 오는 밤〉을 발표해 문단에 나왔으며 처음에는 소설 외에 시·평론도 썼다. 1924년 사재를 털어 〈조선문단〉을 창간했고 숭덕중학교에서 교사로 일하다가 〈기독교신보〉에 입사했다. 〈문예공론〉·〈신생〉·〈여시 如是〉·〈시조〉 등에서 편집일을 했다. 1930년대 중반 이후에 〈쌍홍무 雙虹舞〉(조선일보, 1936. 9. 29~1937. 4. 27)·〈새벽길〉(매일신보, 1938. 6. 4~10. 21) 등의 통속소설을 발표했으며 8·15해방 후에는 영화에도 손을 대어 1954년에 춘해 프로덕션을 세웠다. 〈조선문단〉의 창간은 당시 박영희·김기진 등이 관여한 프롤레타리아 문학운동 잡지인 〈개벽〉에 맞서 민족주의 문학을 옹호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최서해(崔曙海)·박화성(朴花城)·채만식(蔡萬植) 등의 문인배출에 큰 힘이 되었다. 소설집으로 〈명랑 明朗〉(1940)·〈마도(魔都)의 향불〉(1947)·〈인생극장〉(1952) 등이 있다.
[1890년] 수족 인디언 학살 사건 발생
1890년 12월 29일 미국 군대는 여자와 어린이를 포함한 북아메리카 인디언 수족(族) 200여 명을 학살했다. 1848년 캘리포니아에서 금이 발견되자 백인들이 서부를 향해 대규모로 이주했고, 수많은 조약을 통해 인디언의 영토는 점점 줄어들었다. 수족은 완강하게 저항했으나 백인들이 지정한 ‘보호구역’으로 쫓겨가야 했다. 1880년대말 보호구역 축소로 인해 반아사 상태에 빠진 테톤수족은 백인의 멸망과 풍요로웠던 과거의 재현을 꿈꾸며 예언자 워보카의 말에 따라 고스트 댄스라 불리는 의식을 거행하기로 했다. 새로운 종교적 열광은 백인들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며 결국 연방정부군 개입을 야기했다. 정부군이 고스트 댄스를 저지하자 1890년 12월 28일 인디언들은 제7기병대 추적대에 조용히 투항했다. 그날 밤 무장해제당한 인디언들이 운디드니 강가에서 야영을 하던 중 백인 병사가 소총에 피살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이 도화선이 되어 정부군은 인디언들을 살육하기 시작했다. 이 학살은 북아메리카에서 백인들이 인디언을 정복하게 되는 결정적인 사건이 되었다.
(참고)워보카 (아메리카 인디언의 종교적 지도자) [Wovoka, 윌슨]
Jack Wilson이라고도 함. 1858(?) 유타 준주 출생 ~ 1932. 10 네브래스카 워커리버 인디언 보호구역 사망
1890년대에 일어난 메시아 운동인 제2차 고스트 댄스 의식을 주도했다. 아버지인 타비보는 1870년대 제1차 고스트 댄스 운동을 주도했던 파이우트족의 지도자 워드지워브를 도운 사람이었다. 역시 파이우트족이었던 워보카('자르는 사람'이라는 뜻)는 청소년기에 데이비드 윌슨이라는 백인의 목장에서 일하면서 윌슨이라는 성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1888년 자신의 부족에 돌아온 뒤 워보카는 주술사로서 명성을 얻게 되었다. 1889년 그의 주장에 따르면 몽환(夢幻)의 경지에서 2년 안에 조상들이 다시 살아나며, 대평원에는 물소떼들이 다시 들어차고 백인들은 멸망할 것이라는 내용을 신에게서 전해 듣는 체험을 했다. 워보카는 늘어나는 자신의 추종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을 강조했다. 즉 인디언들은 언제나 평화를 사랑해야 하며 이른바 고스트 댄스에 참여하면서 죽은 자들과 영혼이 되살아날 것이라는 신념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의식은 다른 부족들 사이에 아주 빠른 속도로 퍼져나갔으며, 호전적인 수족(族)은 이 의식이 백인에 대한 최후의 복수가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워보카는 새로운 구세주로서 널리 숭배되었다. 인디언의 지도자 시팅 불이 이 운동을 봉기로 전화시키려고 기도했을 만큼 고스트 댄스 의식에 의해 야기된 종교적 열광은 주변의 백인들을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이들과 백인들 사이에 커져가던 적대감은 마침내 1890년 12월 29일 운디드니에서 미국 군대가 어린이를 포함하여 200여 명의 수족을 대학살하면서 절정에 이르렀다. 이 비극적인 사건이 있은 후 워보카를 추종하던 수많은 사람들의 구원에 대한 믿음이 절망에 이르자 고스트 댄스 운동은 마침내 끝나게 되었다.
[1885년] 독립운동가 신숙(申肅) 출생
1885. 12. 29 경기 가평~1967. 11. 22.
초명은 태련(泰鍊), 개명은 태치(泰癡). 호는 강재(剛齋)·시정(是丁)·치정(癡丁). 군서기(郡書記)로 약 2년간 근무하다가 1903년 12월 1일 동학(東學)에 들어갔다. 1905년 한성대동전문학교 법학과를 수료했다. 1906년 순검(巡檢)에 임명되었으나 사직하고 〈국민신보〉 기자로 6개월간 일을 한 뒤 약 4년 동안 탁지부 인쇄국 교정원으로 있었다. 1907년 김남수(金南壽)·김남로(金南老)와 함께 문창학교(文昌學校)를 설립하여 교장을 지냈다. 1910년 천도교 가평 교구장, 1912년 천도교 종학강습소 간사, 1914년 대구 대교구장, 1919년 중앙대종사 종법원 겸 외사원을 지냈다. 1919년 3·1운동 때에는 김영륜(金永倫)과 〈기미독립선언서〉를 교정·인쇄하는 데 참여하여 각 지방에 배포했다. 1920년 4월 임시정부의 요청에 따라 천도교 대표로서 상하이[上海]에 망명하여 천도교 상하이 전도실을 설치하고 〈천도교의 실사(實事)〉를 간행하여 천도교 선전에 노력했다. 한편 박재혁(朴在赫)을 국내에 파견하여 부산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하게 했다. 1920년 12월 상하이 대한인거류민단의사회의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임시정부의 외교노선에 반대하고 무장투쟁노선을 주장하여, 1921년 9월 신채호(申采浩)·박용만(朴容萬) 등과 함께 베이징[北京]에서 군사통일회를 조직, 국내외에서 활동하고 있는 항일운동단체·독립군을 총망라하여 국민대표회의를 개최하고 이 회의에서 장차 전개될 독립운동의 새로운 방략을 모색할 것을 주장했다. 같은 해 11월 반(反)임정계 요인들에 의해 조선공화정부가 수립되자 국무총리로 임명되었다. 1922년 5월 국민대표회의 준비위원회 위원으로 참여했으며, 1923년 1월부터 상하이에서 약 5개월 동안 계속된 국민대표회의에서 창조파의 주요이론가로서 활동했다. 그러나 독립운동방략을 둘러싸고 개조파·창조파·중도파·임정유지파 등이 대립하여 국민대표회의가 진척이 없고, 더욱이 1923년 5월 김동삼(金東三) 등이 국민대표회의에서 탈퇴하자, 부의장으로서 창조파를 중심으로 헌법을 통과시켰다. 그러나 김구(金九)를 중심으로 하여 국민대표회의의 무효가 선언되자 다시 만주로 갔다.
1924년 만주 교하(蛟河)의 농촌에 정착하여 천도교 납법구종리원(拉法溝宗理院)을 설립하고 학생지도와 농촌계몽 및 교리전파에 힘썼다. 1926년 10월 중동선(中東線) 빈현(賓縣) 이도하자(二道河子)의 삼청궁농장(三淸宮農場)으로 옮기고, 1927년 2월에는 송봉산 개간농장으로 이주하여 신창학교를 설립하고 교장이 되었다. 그리고 빈현·쌍성현 지방의 한인농장을 연합하여 쌍빈지방자치회를 조직하고 위원장이 되었다. 1927년 이우석(李雨錫)·심만호(沈萬湖) 등과 더불어 지린 성[吉林省] 아성 현[阿城縣] 대석하(大石河)에서 농장을 경영하던 중 신민부가 군정위원회와 민정위원회로 나뉘어 대립하자, 그는 민정위원회의 입장으로 3부 통합운동에 참가했다. 1930년 7월 북만주에서 홍진(洪震)·이청천(李靑天)·정신(鄭信)·남대관(南大觀) 등과 함께 한족총연합회를 모체로 하여 한국독립당과 그 산하 무장부대인 한국독립군을 조직하고 한국독립당의 총무위원장·문화부장으로 활동했다.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킨 일제가 괴뢰정부인 만주국을 수립하자 한국독립당은 1931년 11월 긴급중앙회의를 개최, 모든 역량을 항일전에 집중시키기로 하고 중국군과의 연합작전을 전개할 것을 결정하고 신숙을 중국호로군연합군총부(中國護路軍聯合軍總部)에 파견했다. 교섭 결과 한중연합군을 편성했는데, 그는 1932년 솽싱푸[雙星堡] 전투에 한국독립군의 참모장으로 참전했다. 1933년 상하이·난징[南京]에 파견되어 중국 국민당정부와 군사협력을 강구했다. 1935년 만주로 돌아오던 도중 잉커우[營口]에서 일본경찰에 체포되었으나, 1936년 3월 보석으로 석방되었다. 1945년 하얼빈[哈爾濱]에서 한하인(韓荷仁)·한형권(韓馨權)·오광선(吳光鮮) 등과 재만동지회를 결성, 위원장으로 활동하면서 광복군 본영과 연합작전을 계획하다가 8·15해방을 맞았다. 같은 해 8월 26일 조직된 지린 한국인회의 위원장에 선임되어 교민들의 귀국을 위해 노력했다. 귀국한 뒤 1947년 4월 16일 입법의회 의원에 피임되었고, 1948년 4월 남북협상을 위하여 김구·김규식(金圭植) 등과 함께 평양에 다녀왔다. 1949년 1월 천도교 도사에 선임되었으며 만화회(萬化會)를 조직하여 위원장이 되었다. 1956년 11월 15일 이동화(李東華)·장건상(張建相)·최익환(崔益煥)·고정훈(高政勳)·김성숙(金星淑) 등과 함께 민주혁신당을 조직하고 중앙위원에 취임했다. 1963년 건국훈장 국민장을 받았다.
[1876년] 카잘스 Pablo Casals 출생
1876년 12월 29일 태어남 / 1973년 10월 22일 죽음 "우리는 모두 한 그루의 나무에 달린 잎새이다. 한 그루의 나무란 바로 온 인류이다. 우리는 다른 잎새들 없이는 살 수 없다. 우리에게는 지성이 필요하며 모름지기 지성이 있는 곳에 사랑이 있다." - 파블로 카잘스
카잘스는 바흐 음악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연주로 첼로 음악의 지평을 넓힌 스페인 출신의 첼로 연주가이자 지휘자, 작곡가이다. 그가 개발한 첼로 연주 기법은 현대적 연주법의 표준이 되었다. 그는 13세 때 우연히 헌책방에서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 악보를 발견했지만 12년의 연구를 거친 후에야 첫 공개 연주를 하고, 다시 35년이 지나서야 연주 음반을 제작할 정도로 완벽주의자였다. 이 곡은 이후 첼로 연주가들의 주요 레퍼토리가 되었다. 그는 위대한 음악가였을 뿐만 아니라 독재와 억압에 항거한 자유인이었다. 프랑코 군부정권이 지배하는 스페인과 히틀러의 독일, 파시스트 무솔리니의 이탈리아에서 연주하기를 거부하고 파시즘에 공공연히 반대했다. 스페인 내란 중에 공화파를 지지했다가 1936년 피레네 산맥 지역의 프라드로 이주했고, 내란 종료 후에도 프랑코가 지배하는 스페인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1946년 세계적으로 프랑코 정권을 인정하는 추세에 항의하기 위해 연주 활동을 중단했다가 1950년 바흐 서거 200주기 음악회를 계기로 활동을 재개했다.
[1856년] 한말의 관리, 독립운동가 이범윤(李範允) 출생
1856. 12. 29 경기 고양~1940. 10. 20.
(1856년 5월 3일생이라고도 한다.)
경기도 고양 출생이다. 본관은 전주(全州). 아버지는 경하(景夏)이고, 범진(範晉)의 동생이다.
구한말 간도 문제로 청나라와의 갈등 끝에 변계경무서가 설치된 뒤 1902년 간도시찰로 임명되기까지의 경력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간도로 파견되었고, 이듬해에는 간도관리사로 임명되어 간도 지역 조선인에 대한 행정 업무를 전담하게 되었다. 이범윤은 이 지역의 포수들로 자위적 성격의 군대인 사포대를 조직하였는데, 이 사포대가 향후 간도 지역 의병운동의 한 기반이 된다.
간도관리사로 재직 중이던 1904년 러일 전쟁이 발발했다. 그는 러시아 군대와 연대하여 함경북도 지역에서 일본군과 교전했다. 러일 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자 1906년 이범윤은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을 이끌고 러시아령으로 망명했다.
이 지역에 미리 이민해온 거부 최재형의 도움으로 의병 부대(연추의병부대)가 조직되었으며, 러시아제 무기로 무장할 수 있었다. 의병 지원을 위한 동의회(총장 최재형)과 창의회도 결성했고, 그는 연추의병부대 총독에 취임했다. 안중근과 엄의섭 등이 참가한 연추의병부대는 러시아령에 머물면서 수차례 국내에 진입하여 많은 전과를 올렸다.
1909년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 이후 그는 유인석의 13도의군(十三道義軍, 도총재 유인석) 조직에 참가했다. 의병장 출신들이 중심이 된 13도의군에는 안창호와 이갑 등 계몽 운동 계열의 인사들도 참가하여 연합 조직 성격을 띄고 있었다. 이범윤이 창의군 총재를 맡은 이 조직과 한일 병합 조약 무효를 주장하는 성명회(聲明會)는 그러나 러시아 정부의 체포령과 탄압에 곧 해체되었다. 이범윤은 숨어지내다가 러시아 당국에 체포되어 7개월간 유형 생활을 했다.
1911년 연해주로 돌아와 홍범도, 이상설 등 이 지역의 독립 운동가들과 권업회(회장 최재형)를 조직해 얼마후부터 총재를 맡았고, 《권업신문》도 발행했다. 그는 의군부와 대한독립군단의 총재, 신민부의 참의원 원장로 추대되는 등 북간도와 연해주 지역 무장 독립 운동의 대부로 활동하다가 1940년 서울에서 병사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1800년] 미국 발명가 굿이어(Goodyear, Charles) 출생
1800. 12. 29 미국 코네티컷 뉴헤이븐~1860. 7. 1 뉴욕.
고무를 상업적으로 이용할 수 있게 한 가황처리법을 고안했다. 그는 아버지의 철물상 동업자로 직업을 시작했으나 1830년 회사가 도산하자 그때부터 고온이나 저온에서 끈적끈적해지거나 딱딱해지는 고무의 성질을 없애기 위해 인도 고무의 처리법에 골몰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질산처리법을 개량해 1837년 정부와 계약까지 맺고 우편행낭을 생산했지만 온도가 높을 때는 쓸모없는 것이 되고 말았다.
그뒤 그는 고무를 황으로 처리하면 들러붙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했던 N. M. 헤이워드(1808~65)와 일을 같이하게 되었고, 헤이워드의 처리방법을 사들였다. 1839년 그는 우연히 황과 혼합된 인도 고무를 뜨거운 난로에 떨어뜨렸는데, 이 일을 계기로 가황처리법을 발견해 1844년 처음으로 특허를 얻었다. 그렇지만 오랫동안 그는 수많은 특허도용 행위와 법정싸움을 해야 했고, 1852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완전히 승소했다. 그해 자신의 특허 상품들을 전시했던 1851년 국제박람회의 개최지인 잉글랜드로 건너가 공장을 세우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게다가 기술적·법적 문제 때문에 그는 영국과 프랑스에서 특허권을 잃었을 뿐 아니라 프랑스에서 그의 가황고무를 생산하던 회사가 망하면서 빚을 져 1855년 12월에는 감옥살이까지 했다. 한편 미국에서는 여전히 특허권 침해가 계속되고 있었다. 결국 다른 사람들에게 일확천금을 안겨주었던 발명이 죽음을 맞은 그에게는 20여 만 달러에 이르는 빚만을 남겨주었다. 그의 저서로 〈고무와 그 변화형 Gum Elastic and Its Varieties〉(2권, 1853~55)이 있다.
[1170년] 캔터베리 대주교 베켓 피살
←영어로 된 <시편>에 나오는 베켓의 죽음을 묘사한 삽화(1200경)
1170년 12월 29일 잉글랜드의 캔터베리 대주교 토머스 베켓이 왕과 귀족들과의 대립 끝에 캔터베리 대성당에서 살해당했다. 베켓은 교회 재산의 불가침성, 로마 교황청에 직접 탄원할 수 있는 자유, 성직자의 면책 특권 등을 내용으로 한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의 개혁 운동이 잉글랜드까지 영향을 미치던 시기에 캔터베리 대주교로 선임되었다. 그는 원래 국왕인 헨리 2세와 절친한 사이였고 그의 정책을 지지했으나 대주교가 되자 상황이 달라졌다. 그는 왕의 신하들에 대한 파문을 강행했고, 국왕의 정책에 반대하여 교황에게 탄원서를 제출했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교회의 권한을 축소하고 왕권을 강화하려던 국왕 헨리 2세의 방침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었다. 여러 해 동안 계속되던 그들의 대립은 베켓이 왕을 지지하던 기사들에 의해 살해되면서 끝을 맺었다. 교황 알렉산데르 3세는 1173년에 그를 성인으로 시성했다.
그밖에
1997 2002년 월드컵 개최 10개시 확정
1997 밀란 밀루티노비치 신임 세르비아공화국 대통령 취임
1992 브라질 새 대통령에 이타마르 프랑코 취임
1992 미국 및 러시아, 전략핵무기를 현재의 3분의 1로 감축키로 하는 제2단계 전략무기감축협정 타결
1986 영국 정치가 맥밀런 사망
1983 미국, 유네스코 탈퇴 공식 발표
1982 대구 금호호텔 화재. 10명 사망
1980 정부, 공무원윤리헌장 5개항 선포
1980 한국-리비아, 국교수립
1979 서울북방, 수도권 방위벽 준공
1977 한국인권운동협의회 결성
1975 영국, 남녀차별금지법 및 균등보수법 발효
1971 그린벨트(개발제한구역) 부산권 지정
1968 질식성, 독성 또는 기타 가스 및 세균학적 전쟁수단의 전시사용 금지에 관한 의정서, 한국 가입
1967 지리산 우리 나라 최초로 국립공원으로 지정
1965 국민학교 교원 단일호봉제 실시 발표(66년부터)
1958 박태선 장로 구속기소
1958 미국 현대무용의 개척자 도리스 험프리 사망
1956 라오스, 통일정부수립협정 조인
1953 미국, 주한미군 점차감축을 발표
1951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베네룩스3국 등 6개국 유럽군 창설계획안에 합의
1949 프랑스, 베트남 독립협정 체결
1945 미국 소설가 드라이저 사망
1945 반탁국민총동원중앙위 결성
1944 프랑스 작가 로망로랑 사망
1934 일본, 워싱턴 해군군축조약폐기를 미국에 통고
1934 쿠웨이트, 석유채굴권을 미국 영국에 허가
1914 흥사단, 미국에서 1차대회(세크라멘트와 클레멘트)
1911 독립운동가 이원대 선생 출생
1910 회사령 공포 시행
1907 미국의 경제학자 로버트 위버 출생
1894 영국 여성시인 크리스티나 로제티 사망
1876 첼리스트 파블로 카살스 출생
1859 멕시코 초대 대통령 카란사 출생
1816 독일 물리화학파의 창시자 루트비히 출생
1809 영국의 정치가 윌리엄 글래드스턴 출생
1808 앤드류 존슨 미국 제17대 대통령 출생
1636 청 태종, 한성 입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