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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과 근대 토론방 조선의 임란반격과 호란 전략미스에 대하여...
추모왕 추천 0 조회 328 08.03.14 01:01 댓글 26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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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08.03.14 02:14

    첫댓글 우선적으로 당시 청군의 기동에 있어서 후방의 산성에 조선이 기병을 운용했다면.. 역사는 어떻게 되었을지 모른다 판단됩니다. 고구려의 사례를 봐도 산성에 기병의 존재가 있었기 때문에 수시로 적의 후방을 기동타격하고 보급로를 차단한 사례가 있었지만.. 조선후기에는 조선군 기병의 세력 자체가 워낙 없었다는 점이 관건이었고.. 이괄의 난으로 인해서 북방의 군사훈련조차 중지할정도의 조선정부의 당시 상황이었다는 점에서 더더욱 조선군의 전력적 열세와 동시에 전략적 카드가 사실상 없었다는 것입니다.

  • 08.03.14 13:17

    그리고 야전에서 팔기군을 당하지 못했다기 보다는 조선군 조직자체와 병사의 숙련도와 군기문제였다고 판단됩니다. 실제로 조선군 4만명을 상대로 팔기군 300명에게 와해되었던 전투인..상령전투의 사례만 봐도.. 훈련및 군기가 제대로 갖추어지지 못했던 조선군은 팔기군에게 사격통제조차 제대로 못하고 순식간에 탄약을 다 써버림으로서 탄약배분에서 제대로 군기조차 잡지 못하고 팔기군 몇백에 총 지휘관이 깔려죽는 어이없는 사태로 끝남과 동시에 다른 군에서는 지휘관에게 앙심을 품은 인간이 있어서 적전행동을 할정도였다는 점에서.. 조선군의 군기통제및 훈련도등에 확실한 문제점이 있었다고 봐야합니다.

  • 08.03.14 13:46

    우선적으로 전략 미스라기 보다는.. 전략미스가 필연적으로 날수 밖에 없었던 문제라 보여집니다. 조선군의 주력군과 더불어서 조선군의 사정적 모습이 말이죠. 사실.. 산성으로 들어가서 방어전술 하는 청야전술은.. 방자에게 있어서 전략적 미스인 것은 아닙니라 봅니다. 청군의 주력이 기병이었다고 해도 말이죠. 당시 조선측 역시 기병을 산성에서 운용하면서 기병의 존재가 세력상으로서의 위치상에 비중을 둔 편제였다면.. 산성에 들어가더라도 수시로 청의 보급루트및 배후를 공격해줄수 있었을 것이죠.

  • 08.03.14 13:47

    고구려를 침공한 중국군대의 사례를 봐도 고구려의 기병대의 활약이 중국군에게 고구려의 산성은 무조건 다 공격해여 다 점령해야한다 전술적 전략적 강요만이 선택되었다는 점을 볼수 있잖습니까? 그래서 당이 2차 전쟁에서 해로를 이용한 셈이고 말이죠.

  • 08.03.14 15:52

    밀리터리나그네님이 말씀하신 상령전투는 4만이 아니라 8천명이며, 청군도 8천명이었습니다. 4만은 오기지요. 그리고 이준용의 전라도근왕군이 청장 앙굴리를 사살하고 승리를 거두고 남한산성에 도달하기까진 시간이 부족했습니다. 인조와 신하들은 남한산성에 안들어가고 곧바로 남하했어야 했는데(당시 청군이 아직 전부 남하하지 못해서 남한산성을 포위하지 못했죠.) 그걸 바보같이 남하하지않고 식량도 없는데 버티기 전술이라니..-_-; 암튼 인조 이하 서인정권은 욕들어먹어야 합니다..;; 병자호란사 보면 정말 한심해서 말이 안나오니까요..;

  • 08.03.14 18:55

    실질적으로 전투에 참가한 청군은 300입니다. 기병으로 말이죠. 상령전투 4만으로 기억은 합니다만.. 4만에 대한 언급에 대한 문제가 있는건..뭐 인지는 하고 있습니다.

  • 08.03.14 16:09

    병자호란 같은 경우는 일단 의주에서 뻘짓하고 뻥뻥뚫린거죠. 척후를 믿지 못하고 오히려 목을 베려던 막장 김자점 덕분에 말입니다. 게다가 능양군은 도망갈줄도 모르는 찌질 군주. 이리저리 헤메다가 결국 산성으로 틀어박혔는데, 인조가 항복하려던 시기에 조선군은 간신히 청군과 접전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청태종 홍타이치는 거의 목숨을 건 친정을 한 셈입니다. 만약 능양군 이 멍청한 인간이 제대로 도망갈줄만 알았으면 보급로도 끊기고 전국의 조선군에게 청군이 포위되는 최악의 상황까지 닥쳤을테니까요. 즉, 모든게 다 능양군 탓입니다.

  • 작성자 08.03.14 23:44

    뭐 어째든 인조가 좋은방어기지에서 철저 항전했다면 보급로까지 무시한 청군이 얼마나 버틸 수 있었을까요? 당시에는 겨울이었고, 청야전술을 하고 말고도 없습니다. 보급로까지 무시된 상태에서 겨울에 타국에서 정치적, 군사적 성과가 없다면 그원정군은 끝장나는 것입니다. 청태종은 분명 국서에도 썼습니다. 자신은 큰길로 간다고... 인조는 당연히 빨리 전라도로 가든 강화도로 가든 했어야죠.

  • 08.03.15 00:15

    엄연히 말하면 조선의관군이 일본군을 눌러버린것은 아니지 말입니다. 물론 추모왕님의 말씀처럼 명군이 참전하고나서 평양성 이후 전투에서 기습에 꼬리를 말고 뒷짐지고 물러나면서 조선 자체의 전투력등이 떨어졌다는 말이 있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 뒷짐을 진 명군이 오지 않았더라면 일본군을 누르는 건 힘들었지요. 숫적, 질적으로 있다는 존재만으로 일본군에게 큰 압력이니까요. 조명연합군으로도 공성전을 벌여서 성을 탈취한적이 거의 없는데, 조선 관군만으로 일본군을 눌렀다고 생각하시는건 아니시겠지요? 후방에서 의병의 게릴라와 전방에서 밀려오는 명군의 압박으로 일본군이 자진 철.수. 한거지 조선군에 의

  • 08.03.15 00:17

    상령전투는 8천대 8천의 싸움입니다...4만은 잘못 기술된 것일뿐더러 청군 300이라뇨...연려실기술의 잘못된 기록을 믿으면 말이 안됩니다. 병자호란사 보면 자세히 나옵니다..뭐 네이버 검색으로도 그 기록이 오기였다는 게 잘 나오는군요...

  • 08.03.15 01:38

    실질적으로 전투에 동원되어서 조선군을 와해시킨 병력이 300명의 기병대라는겁니다. 실제로 조선군 탄약배급에서의 팔기군 저 병력의 기동때문에 조선군 진형이 완전히 무너진 전투이니까요.

  • 08.03.15 00:19

    해 밀려났다고 보시는건 다소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나머지 부분에서는 추모왕님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조선의 국방기술이나 다른 부분이 크게 밀리는건 아니었습니다만, 단지 그것을 알고 활용할 수 있는 이들이 적었을뿐이지요. 솔직히 해전에서 명량이나 노량같이 너무 크게 밀리는 전투가 아니라면 충무공의 염려처럼 이억기 정도의 인물이 맡아도 칠천량의 꼴은 되지 않았겠지요. 그러나, 조선의 방비는 너무 안일했다는건 간과할 수 없을것입니다. 방비 상황을 순찰하러 보낸 감찰하는 녀석(신립)이 양반집 규수를 첩으로 삼고 온다던가, 성벽을 보수하다가 중지한다던가 이런것들은 말입니다.

  • 08.03.15 18:27

    그런데 추모왕님은 '물론'을 '물런'으로 쓰시는데 그런 이유가 있으신 건가요? ㅎㅎ; 늘 궁금했던 점입니다

  • 작성자 08.03.16 00:11

    그게 제가 인터넷 쓰면서 물론을 물런으로 종종 썼습니다. ㅡㅡ;; 그게 박히거 같습니다. 으.... 국어공부를 다시 해야할듯 ㅡㅡ;;

  • 08.03.18 01:07

    추모왕님 질문이 있습니다// 본문중에 도르곤이란 무엇입니까?

  • 작성자 08.03.18 04:04

    도르곤은 청나라 태조 누루하치의 14번째 아들입니다. 청태종이 8번째 아들이죠. 그리고 말만 형제지 나이차이는 거의 아들뻘이나 조카뻘이죠. 청태종 시기에 청나라 최고의 카드였습니다. 청태종 사후 그의 아들 호격과 제위를 놓고 정치적 갈등을 빚습니다. 그러다가 청태종의 9번째 아들 애시각라 복림을 황제로 세우고 도르곤과 정친왕이 섭정왕이 되는 선에서 정치적갈등은 매듭이 지어지고 청나라는 오삼계의 도움으로 중원으로 들어갈 수 있었죠. 순치제 초기의 국정은 다 도르곤에서 머리에서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 08.03.18 08:53

    아.. 제가 알고 있던 구왕을 말씀하시는거 같군요.. (아닌가요?) 여튼 답변 감사드립니다!

  • 작성자 08.03.19 00:56

    구왕이요? 일명 예친왕이라고 하죠.

  • 08.03.23 01:03

    제가 알고 있는것과는 게시글도 그렇고 댓글도 그렇고..많이 다르군요...조일전쟁부터 전쟁은 화포전쟁입니다..화포의 위력에 따라 전쟁 상황이 많이 달라지는..임란때 평양성도 명군의 블랑기포의 위력에 일본군이 패한걸로 기억을 하는데요..명청과의 전쟁에서도 명군과 청군이 대치하고 있다가 청군이 블랑기포를 얻은 이후 전쟁 상황이 청군으로 기운걸로 아는데요...조선은 홍이포라고 해서 영조때 자체 생산할수 있었구요..청군이 조선군에 가장두려웠던건 조선수군이 명군에 합세하는것이라 인조를 무릎꿇여야만 했던거구요....오래전에 알고있는 기억들이라..잘못 기억하고 있는점 많은 양해바랍니다.

  • 작성자 08.03.18 00:29

    홍이포는 명군이 먼저 들어오지 않나요? 홍이포 위력앞에 누루하치, 홍타이지가 명정벌의 꿈을 접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때 누군가 투항을 해서 홍이포를 가지고 청에 투항한 일이 일어납니다. 이에 홍타이지가 매우 좋아했다고 하더군요.

  • 08.03.18 00:32

    실제로 조선수군은 병자호란에 패하고서도 명군을 도와서 청국의 볼모로 가있는 소현세자가 곤욕을 치뤘죠.. 임경업장군덕에 -_-;;;

  • 08.03.18 00:03

    잼있게 잘 읽었습니다.. 저도 의견을 하나 보태자면.. 역시 당시의 조선국방 시스템이라는것에 여러분들이 주목하고 계시는데 저 또한 이의가 없네요.. 조선은 개국자체가 명국의 눈치를 봐야 하는 입장이었고.. 그간의 (특히 밀리터리 나그네님이 지적해주신) 기동력의 근간이었던 말을 7만필 이상 명국에 조공으로 바치면서 군사기동력면에서 확실히 뒤쳐지는 결과를 나았지요.. 하지만 그덕에 조선 14대왕까지 오면서 국지전이 일어나지 않을수 있었으며.. 조선 또한 지존 명국이 멸망하지 않는 이상 국가적 위협을 느낄필요가 없었기에.. 계속 평화적인 시대가 도래했음을 간과하지 않을수 없습니다..

  • 08.03.18 00:07

    조선은 누구나 다 알듯이 고구려 처럼 힘이 강했던 나라가 아닙니다.. 조선은 사대를 통한 평화시대노선을 택했고 그것은 크게 틀리지 않았지만.. 일본이 변수가 되지요..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을 통일하고.. 좁은섬에 억눌려 있는 힘들의 표출구로서 조선을 택합니다.. 하지만 이를 토시이에와 이에야스가 반대하지요.. 그 이유는 "조선은 화포를 가지고 있기 떄문입니다" 그들은 조선과의 전쟁에서 일본이 이길가능성을 매우 낮게 보고 있었고.. 사실 당시 국제정세상 조선을 치는 것은 명국에 대한 도전과도 같았기 떄문이기도 하지요..

  • 08.03.18 00:12

    그런데 아이러니 하게도 이런점이 문제입니다.. 조선은 14대왕까지 오면서 평온했던 시대에 잠자고 있었던것입니다.. 당시 조선은 징집병 정책에서 모집병(직업군인) 체제의 정책으로 국방개혁기간이었습니다.. 징집한 병사들을 고향으로 돌려보내고 새로이 직업군을 모으려는 도중에 전쟁이 터져버린 것이죠.. 더군다나 오랜 평화시대덕에 무기에 대한 관리가 전혀 이루어 지지 못해 전쟁시 제대로된 무기보급이 이뤄질수 없었습니다.. 날도 서지 않은 칼과 창으로 싸운것이죠.. 게다가 일본은 조선화포의 위험성을 확실히 인지하고 있었던 반면에 조선은 일본의 조총을 간과한 나머지 탄금대등지에서 대패를 당하죠..

  • 08.03.18 00:17

    저는 임진왜란이야 말로 조선의 완벽한 첩보전 실패라고 생각합니다.. 조선은 사대감각에 너무 익숙해져.. 커져버린 일본을 전혀 인식하지 못했지요.. 조금 더 안타까운 점은 그 당시 일본은 아직도 백병전으로 전투의 승부를 찍는 후진적인 시스템에.. 백년전쟁을 통한 전술적 노하우.. 그리고 조총.. 그것이 전부였음에도 불구하고.. 배에까지 화포달린 조선이 초반 승부에서 패했다는 점입니다.. 관동에 있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병사를 파병하지 않았음에도 그렇게 크게 밀렸다는 것은.. 일본이 최소한 자국수호로 조선을 침략했다면 결과는 정말 어찌될수 알수 없었겠지요..

  • 08.03.18 00:23

    여진족의 누르하치는.. 젊은 시절 조선에 조공과 함께 조선관직을 줄것을 청하지만 조선 정부는 "오랑캐가 감히 관직을 달라고 한다" 는 명분으로 그를 내쫒지요.. 훗날 그가 후금을 세워 조선의 왕에게 절을 받고 그의 아들이 명국을 멸망시킬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선조와 인조 정권은 사대주의에 눈이 멀어 국제정세 사리판단이 확실히 떨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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