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지중추부사 주세붕(周世鵬)이 졸(卒)하였다.
세붕은 영남 사람이다. 마음가짐이 너그럽고 온화하며 학문과 덕업(德業)을 닦고 어진 이와 선한 일을 좋아하며 자기 자신을 부족하게 여겼고, 매양 선현(先賢)들의 격언이나 좋은 글을 보게 되면 반드시 창이나 벽에 붙여놓고 끊임없이 외었다. 장사와 제사에 있어서도 한결같이 《주문공가례(朱文公家禮)》로 법칙을 삼았고, 선영(先塋)이 나지막한 산의 기슭에 있으므로 후세에 논밭으로 변할까 염려되어 묘역(墓域) 둘레에 기와와 돌을 모아 묻어 놓느라 갖은 고생을 다하였으니, 그 효성이 순실하고 지극했다.
여러 고을의 원이 되었고 한 도의 관찰사가 되었었는데, 고무 격려시킬 것을 생각하여 교화를 존숭했고 상례의 격식에 매달리지 않았다. 백성들을 권면할 적에는 효제(孝悌)와 농상(農桑)으로 깨우치고 환과 고독(鰥寡孤獨)들까지도 살아갈 수 있게 해주고자 했다. 인륜을 노래로 부르게 하고 학교를 세우기도 했는데, 일찍이 풍기군(豊基郡)에서 안유(安裕)의 옛터를 발견하여 서원(書院)을 세워 제사지내고, 안보(安輔)ㆍ안축(安軸)을 배향(配享)하고 가사(歌辭)를 지어 바쳤으며 선비들을 맞아들여 그 안에서 글을 읽게 하였는데, 그들을 봉양하는 경비를 모두 규모있게 하였다. 또 해주(海州)에다 서원을 세워 최충(崔沖)을 제사지냈는데, 제도는 풍기의 서원과 다름이 없었다. 【해주는 곧 최충의 고향이다.】 벼슬은 아경(亞卿)에 이르렀는데 마음가짐을 가난한 선비처럼 하여 맑은 기상과 굳은 절개가 변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당초에 허자(許磁)ㆍ남곤(南袞)의 추천을 받아 옥당(玉堂)의 정자에 제수되었는데, 남곤이 몰락하게 되자 세붕도 시사(時事)를 말한 것 때문에 파직되었다. 을사년의 화가 일어나고는 세붕이 사람들을 대해서는 번번이 세상에 대해 분개하는 말을 하고 권간들을 대해서는 굽신굽신하면서 두려워하였으며, 이기(李芑)ㆍ윤원형(尹元衡)의 집을 드나들며 여러 벼슬을 역임하여 부제학이 되었다. 인종(仁宗)의 담제(禫祭) 뒤에 자전(慈殿)이 따로 연은전(延恩殿)에 부제(祔祭)하도록 명하자 옥당이 글을 올려 논했었는데, 이때 진복창(陳復昌)이 응교로 있으면서 그 차자(箚子)를 지었다. 세붕이 그것을 두세 차례 숙독(熟讀)하고 눈을 둥그렇게 뜨고 말하기를 ‘이 글이 만세에 전해지더라도 어찌 가볍게 여길 사람이 있겠는가.’ 하였고, 일찍이 이행(李荇)의 행장(行狀)을 지으면서는 극도로 칭찬하여 충성은 유향(劉向)에게 비하고 지조는 공융(孔融)에게 비하고 용맹은 제갈양(諸葛亮)에게 비하기까지 했으므로 식견있는 사람들이 비루하게 여겼었다. 이때에 졸했는데 상이 듣고서 매우 애도하며 관원을 보내 치제(致祭)하고, 또한 일로(一路)에서 널을 호송(護送)하여 집으로 돌아가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