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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히11:36-40)-2012.6.3
우리는 히브리서11장을 믿음장이라고 부릅니다. 왜냐면 믿음의 정의와 본질로부터 시작해서 최고의 믿음을 소유한 선진들의 행적을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정말 영광스러운 이름들이지요. 아주 간단하게 그들의 믿음의 특징을 소개하고 있지만 그들의 믿음을 우리는 한눈으로 볼 수 있습니다. 비록 짧은 기록이지만 영웅 같은 그들의 믿음을 우리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믿음의 용사들이 사역한 시기나 방법은 달랐지만 그들의 믿음은 하나였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믿음이었습니다.
구체적으로 믿음의 거장들의 이름도 나오고, 이름 없는 무명용사들도 나옵니다. 아벨로부터 시작하여 에녹, 노아,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모세 등 기라성 같은 믿음의 거장들입니다. 굳이 이곳에서 다루지 않더라도 믿음을 가진 자라면 그들의 믿음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름 없는 거장들도 많습니다. 대표적으로 오늘 우리가 다루고 싶은 본문입니다. 36절만 보더라도 ‘어떤 이들’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그들이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이들도 역시 하나님이 기억하시는 믿음의 반열에 세움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 믿음의 공통점은 하나님으로부터 인정을 받는 믿음이었습니다.
그들은 두루뭉실한 믿음을 가진 자들이 아니라 자기만의 분명한 색깔을 가진 믿음의 소유자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믿음의 본을 보여주기에 충분한 사람들인 것이지요. 하지만 우리가 기억할 것은 그들 모두다 우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들이요, 그들 모두다 세상에서 불신자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입니다. 험한 세상에서 믿지 않는 자들과 함께 살아가던 사람들이라는 말이에요. 하지만 그들은 시대를 초월해서, 그리고 환경을 초월해서 자기들의 믿음을 지키고 하나님의 인정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어찌하여 그들에게 외로울 때가 없었겠습니까? 아픔과 슬픔이 없었겠습니까?
그들도 세상에서 아픔을 겪었고, 고통을 겪었으며, 왕따를 당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것으로 자기 믿음을 파선하지 않았습니다. 신앙을 저버리지 않았다는 말이지요. 오히려 고난 때문에 그들의 신앙이 성숙해진 인물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을 믿음의 선진으로 부르는 것입니다. 아무리 험한 시대와 환경 속에서도 믿음의 지조를 저버리지 않는 그들의 믿음 때문에 세상은 더 이상 그들을 건들 수 없었던 것이지요. 물론 그들을 그냥 내버려두었다는 말은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은 그들에게 거센 환난을 가했을 것입니다. 때로는 믿음을 지켜내기 힘든 핍박이 주어졌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어떤 것으로도 그들의 신앙을 포기하지 않았고, 약해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환난의 강도가 깊어질수록 그들의 신앙은 견고해졌고, 든든히 세워졌을 것입니다. 오히려 환난이나 고통이 그들의 믿음을 강화시켜주는 촉매제가 되었을 것입니다. 세상은 더 이상 그들을 건들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한마디로 그들은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이 된 것이지요. 그러면 그럴수록 환난의 강도가 극심했을 것이지만 그들은 신앙을 굳게 지키었던 것이지요. 그들은 세상을 이기는 믿음을 가진 자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들을 향해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이라고 했을 것입니다. 세상이 감당치 못할 사람들이라는 말은 도저히 자기들의 생각이나 삶의 방식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자기들의 수준이나 상식으로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이라는 말이지요. 한마디로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은 세상을 초월한 사람들입니다. 이른바 사람을 초월하고, 환경을 초월하며, 명예와 권세를 초월하고, 돈을 초월하고, 욕심을 초월한 사람이요, 죽음까지도 초월한 사람들이라는 말입니다. 세상을 초월한 사람들에게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죽음을 초월한 사람들에게 무엇이 겁나겠습니까?
물론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이라는 말은 좋은 의미로 사용되지만,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하는 것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극단적으로는 세상의 물정을 모르는 바보들, 혹은 세상에 협조하지 않는 수구꼴통이라는 이미지를 함축하고 있다는 말이에요. 자기들의 눈으로 보는 그리스도인들은 정말 이해하기 곤란한 사람들이라는 말이지요. 도저히 자기들의 상식으로는 이해가 안되는 사람들이라는 말이지요. 어쩌면 정신이 약간 이상한 사람들이라는 생각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더러 세상 사람들은 믿는 자들을 향해 무슨 재미로 사느냐고 비아냥거립니다. 그리고 지금 어느 시대인데 그런 고리타분한 믿음을 가지고 사느냐고 반문합니다. 자기들의 생각으로는 도대체 이해가 안되는 사람들이라는 말이지요.
믿음의 사람들은 자기들이 아무리 약을 올려도 화를 내지 않습니다. 아무리 수모와 조롱을 받아도 얼굴한번 찡그리지 아니합니다. 아무리 형편이 안 좋아도 불평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감사를 외칩니다. 어려운 일을 당해도 불평하거나 징징거리지 않습니다. 아무리 세상 것으로 유혹해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들은 아무리 피곤해도 교회 가서 예배를 드립니다. 아무리 슬픈 환경 속에도 기쁨을 잃지 않습니다.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오뚜기처럼 벌떡 일어납니다. 아무리 없어도 죽겠다고 탄식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불법과 불의와 부정이 유혹해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습니다.
쉬운 길이 보이는데도 답답할 정도로 어려운 길을 자청합니다. 넓은 길을 마다하고 좁은 길로 갑니다. 빠른 길도 바보처럼 돌아서 갑니다. 지금 자기들의 눈앞에 부귀영화가 아른거려도 다가서지 않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너무나 고지식합니다. 정말 인생을 재미없이 사는 사람들 같습니다. 때로는 융통성이 전혀 없어 보입니다. 때로는 옹고집처럼 보입니다. 아무리 봐도 세상 사람들의 눈에 비친 그리스도인들은 자기들 생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의 눈에 믿음의 사람들은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로 비쳐진 것입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정말 우리 믿음의 선진들은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과연 지금 우리는 그렇게 살아가는 것일까요? 솔직히 아까 말씀드린 그런 삶은 우리의 믿음이 아니라 우리 믿음의 선진들의 믿음이었습니다. 왜 믿음은 하나인데 우리 믿음의 선진들의 믿음과 우리의 믿음은 이렇게 다른 것일까요? 어쩌면 우리의 믿음이 우리 믿음의 선진들의 믿음보다 순수하지 못함일 것입니다. 여러 가지 원인이 많겠지만 그만큼 우리 시대의 타락이 우리의 믿음을 부추겼고 우리의 마음을 세상에 빼앗겼기 때문일 것입니다. 한마디로 우리의 마음이 세상 것으로 인하여 부요해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신앙의 세속화가 일차적인 타락의 원인일 것입니다.
지금 우리 시대 어떤 사람이 우리 믿음의 선진들의 신앙의 발자취를 밟고 따라갈 수 있을까요? 과연 누가 그렇게 살아가는 것일까요?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런 믿음으로 사는 것일까요? 어쩌면 지금 우리 시대 그런 믿음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을 찾아보기가 하늘에서 별을 따오는 것처럼 어려운 일인지 모릅니다. 어쩌면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향해 같은 믿음을 가진 사람들조차도 시대적인 감각이 떨어진 사람이라고 비난할지 모릅니다. 혹은 융통성이 없는 사람이라고 혹평을 할는지 모릅니다. 비참한 일이지요.
솔직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지금 세상과 타협하며 살아가는지 모릅니다. 어쩌면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먼저 세상에 손을 내밀고 사는지 모릅니다. 문제는 우리가 세상을 동경하고 세상과 타협하고 살아가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로부터 호감도 받지 못하고 존중도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세상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당하는 것이지요. 이제는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향해 ‘만만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냥 그렇고 그런 사람들’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요즘 세상 사람들은 믿는 자들을 어려워하지 않습니다. 어떤 신뢰도 주지 않습니다. 솔직히 믿는 우리가 그렇게 만든 것일 것입니다.
그동안 한국교회는 기독교의 양적 부흥을 목표로 하여 브레이크 없는 질주를 거듭해 왔습니다. 정말 괄목할만한 양적인 성장을 가져온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양적성장만큼 질적인 성장이 동반되었는지를 한번쯤 되돌아 볼 때입니다. 양적성장을 향한 한국교회의 열정은 이해하지만 질적 성장은 미치지 못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다보니 질적 성장의 한계와 치부가 드러난 것입니다. 어쩌면 코로나라는 위기 때에 교회의 진면목이 여실히 드러나기도 했습니다. 교회가 하나된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분열된 양상을 보인 것도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33절에서 38절까지 보면, 믿음을 지킨 선진들이 겪어야했던 박해의 방법들과 사례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 믿음의 선진들은 자기들의 믿음을 지키기 위해 이런 수모와 환난과 고통을 겪었던 것입니다. 혹시 우리 중에 자기의 믿음을 지키기 위해 이런 환난을 당해 보신 적 있으십니까? 혹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 이런 고난을 당해보신 적 있으십니까? 솔직히 우리 중에 아무도 이런 비슷한 사례를 당해보신 분은 없는 것 같습니다. 아마도 그런 분이 계셨다면 우리는 일찍이 그분의 간증을 들었을 테니까요.
어쩌면 우리는 아무 고난의 흔적 없이 너무나 편한 방법으로 믿음생활을 하는 것은 아닐까요? 예수 믿은 어떤 흔적도 없이 말입니다. 만일 우리 시대에 이런 시련이나 환난이 주어졌다면 믿음으로 통과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요? 부끄럽지만 어느 것 하나도 자신 있게 통과할 사람은 없을는지 모릅니다. 저도 역시 제 자신의 믿음을 점검해 보면서 한없이 초라해지는 모습을 숨길 수 없습니다. 정말 부끄러운 믿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 믿음의 선진들은 이러한 시련과 고난을 거부하지 않고 통과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들을 세상이 감당치 못할 사람들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이라는 것은 예수 믿는 성도들을 향한 세상의 외침이었던 것이지요. 정말 예수 믿는 사람들은 자기들 힘으로는 절대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이라는 말입니다. 그들이 생각하기에는 더 이상 저들의 열심을 막을 수 없고, 저들의 믿음의 열정을 막을 길이 없다는 말이지요. 한마디로 그들의 믿음을 인정하는 말입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세상을 이기고 나라들을 이겼습니다.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고,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했습니다. 칼날을 피하기도 하고, 이방인들의 진을 파하기도 했습니다.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했습니다. 희롱과 채찍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통과했습니다.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했습니다.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습니다. 세상말로 우리시대 우리와는 동떨어진 믿음의 시련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런 모든 것을 이겨냈습니다. 믿음으로 이겨낸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세상을 이기는 것입니다.
비록 그것이 그들의 영적인 고집이라도 좋습니다. 아니면 정직함과 고지식함과 구별된 삶의 방식이라도 좋습니다. 성도들의 독특한 칼라라도 좋습니다. 우리는 우리만의 믿음의 색깔이 있어야 하거든요. 그래야 세상을 이기는 것입니다. 우리 믿음의 성도들이 믿음으로만 산다면 감히 세상이 어떻게 우리를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감히 어느 누가 우리들의 복음에 대한 열정을 꺾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 믿음의 열심을 그들이 무엇으로 막을 수 있단 말입니까? 감히 어떻게 주님의 몸된 교회를 건들며, 하나님의 종들을 건들 수 있단 말입니까? 절대 건들 수 없습니다. 우리가 믿음 안에 서있다면 세상은 감히 우리를 향해 이러쿵저러쿵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어떠할까요? 세상이 교회와 성도를 어떻게 생각할까요? 지금 우리는 우리의 모습을 정직하게 바라 볼 필요가 있습니다. 정말 우리가 속한 교회가 세상이 감당치 못할 교회일까요? 과연 성도된 우리가 세상이 감당치 못할 사람들일까요? 요즘 세상이 정말 교회를 두려워할까요? 성도들을 감당치 못할 사람들이라고 생각할까요? 어림없는 소리입니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은 교회와 성도들을 자기들의 손안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지금 교회를 향한 세상의 공권력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이제 교회를 자기들이 다루기 쉬운 집단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아마도 우리가 속한 교회들이 세상으로부터 신뢰를 잃어버렸다는 증거일 것입니다. 성도들도 세상 사람들로부터 호기심을 잃어버린 채 무관심속에 살고 있다는 증거일 것입니다. 세상은 성도와 교회에 대한 어떤 기대도, 어떤 관심도 없습니다. 솔직히 세상으로부터 교회가 관심을 받지 못한다면 교회가 존재할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제 우리는 교회와 우리 자신을 생각해 볼 때입니다. 우리 믿음의 선진들이 걸어온 믿음의 발자취를 통해 우리들의 믿음을 돌아보자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에게 세상이 감당치 못할 믿음의 유전자가 있는지를 말입니다. 이른바 교회와 성도들에게 세상을 이기는 능력이 있는지를 말입니다.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믿음에는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유전자가 있습니다. 믿음안에 세상을 이기는 에너지가 충만합니다. 다만 우리에게 그런 믿음이 없기 때문에 문제가 심각한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믿음의 에너지를 나타내지 못하고, 믿음의 역량을 보여주지 못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지금 우리는 지금까지 우리 믿음의 선진들이 닦아놓은 믿음의 터전을 다 무너뜨리고 살았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세상이 교회를 아주 만만한 집단으로 인식하고 있는지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세상은 기독교를 개독교라는 신조어를 만들어서 공격합니다. 물론 앞장서서 한국교회를 공격하는 안티세력들이 상존하고 있습니다. 이른바 수백명의 안티기독교 사이버공격수들이 그 일만 전담하여 일하고 있다합니다.
지금 우리는 정신 차리고 근신할 때입니다. 교회와 성도는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다시 한번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믿음으로 회복되어져야 할 줄로 믿습니다. 독일의 유명한 신학자가 한국교회를 방문해서 두 가지 사실에 놀랐다고 합니다. 그가 한국의 큰 교회 새벽예배를 참석했는데 예배당에 들어가기 위해 수 천 명이 줄을 서서 기다리는 것을 보고 놀랐답니다. 그리고 기도회를 끝낸 성도들이 교회 앞에서 신호등을 기다리다가 신호등을 무시하고 무단으로 횡단하는 것을 보고 놀랬답니다. 우리 믿음의 이중성이 아닐는지요?
그러므로 교회와 성도를 공격하는 세상에 대해 그들만 탓할 것은 아닙니다. 우리들이 믿음대로 살지 못해서 당하는 자업자득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제는 다시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믿음으로 회복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세상이 감당치 못할 사람들의 믿음은 어떤 것 때문일까요?
(1) 고난보다 더 큰 상급을 믿는 믿음 때문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롬8:18절)고 말입니다. 지금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당하는 고난은 장차 주님으로부터 받게 될 상급과는 비교가 안됩니다. 고난이 클수록 상급은 더 커집니다. 고난과 상급은 정비례하거든요. 그래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산상수훈에서 말씀하십니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마5:10-12절)고 말입니다.
지금 우리가 믿음을 지키기 위해 주어지는 고난이라면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합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기 위해 환난을 당한다면 오히려 즐거워해야 합니다. 왜냐면 우리가 당하는 환난의 무게가 장차 우리가 받을 영광의 무게요, 상급의 무게이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11장에 나오는 믿음의 선진들은 이러한 성경의 원리를 철저히 믿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세상이 주는 어떤 환난이나 고통이나 시련도 감당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믿음은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최고의 행위인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이 자기에게 행한 대로 보응하신다는 원리를 믿는 것입니다(6절).
세상은 결코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끊어낼 수 없습니다. 아무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어떤 환난이나 곤고, 핍박이나 기근, 적신이나 위험, 칼이라도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 안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분이 주시는 믿음으로 세상을 이기는 것입니다. 그것도 아주 넉넉히 이기는 것입니다. 완전한 승리를 거둔다는 말이지요.
때문에 믿는 자는 고난보다도 더 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고난 뒤에 감추어진 하나님의 축복을 믿어야 합니다. 고난 뒤에 감추어진 상급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때문에 우리 앞에 주어진 어떠한 환난이나 고통이라도 감당할 수 있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이 우리를 감당치 못할 사람으로 인정하게 됩니다. 우리가 세상이 주는 고난이나 환난을 감당하지 못하면 세상은 우리를 조롱합니다. 세상은 우리를 아주 만만하게 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세상을 이기는 믿음으로 살면 세상은 우리를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이라고 꼬리를 내릴 것입니다. 마치 다니엘이 사자굴속에서 살아나오고, 다니엘의 세친구들이 풀무불 속에서 살아나오듯이 말입니다.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과연 세상이 우리를 어떻게 인정하는지를 말입니다. 세상이 우리를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이라고 추켜세울는지, 아니면 세상이 우리를 아주 만만한 사람들이라고 조롱할는지 말입니다.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이라는 인정을 받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물론 세상이 우리를 인정하는 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믿는 자는 세상으로부터도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세상이 주는 어떤 고난이나 환난이라도 기쁨으로 감당하여 장차 우리가 받을 하늘의 상급을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언제나 세상은 우리가 고난을 당할 때 어떻게 처신하는지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어떠한 환난이 올지라도 믿음으로 이겨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2) 죽음보다 더 좋은 부활을 믿는 믿음 때문입니다(35절)
세상이 감당치 못할 사람들이라는 것은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믿음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죽음 저 너머의 세계를 믿는 믿음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농담으로 하는 말 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사람이 소방수랍니다. 이유는 소방수는 물불을 안 가리기 때문이라지요. 그런데 소방수보다 더 무서운 사람이 있답니다. 시각장애인이랍니다. 왜냐면 눈에 보이는 것이 없기 때문이라네요. 그냥 웃자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흘려버리세요. 혹시라도 마음에 상처받는 분들이 있을까봐서 그럽니다.
그런데 세상에는 진짜 무서운 것이 있습니다. 죽음일 것입니다. 사후세계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죽음은 최고로 무섭고 두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그 두렵고 무서운 죽음은 믿음으로 해결됩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으면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믿음 안에서 죽음은 두려워 할 것이 아닙니다. 죽음은 죄의 삯입니다. 그런데 그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오셨고,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사흘 만에 부활 승천하사 하늘 보좌 우편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탕감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이 왕권을 가지고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 성령과 함께 영으로, 그리스도로 오신 것입니다.
그 예수가 나를 성전삼고 왕으로, 주인으로, 전부로 들어오셔서 하나님의 생명으로 거듭나게 하여 예수님과 한 생명 되어서 예수님은 머리가 되고 나는 그분의 몸이 되어 예수님이 주시는 마음에서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살도록 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이 복음을 믿는 자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만 영생을 얻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기만 하면 죽음의 공포에서 해방되는 것입니다.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예수 믿는 자에게는 죽음이 두렵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11:25-26).
하나님의 사랑이 죽음을 이깁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이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습니다. 그 믿음은 죄와 사망과 율법에서 우리를 자유케 합니다. 그러므로 죽음도 겁나지 않습니다. 믿는 자는 죽음 이후의 세계를 영생으로 보장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선진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하여 죽음이라는 무서운 형벌을 겁내거나 두려워하지 않았던 것입니다(35절). 믿음에는 부활의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은 예수 믿는 사람들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에스더와 같이 죽으면 죽으리라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순교자적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지요. 비록 우리가 죽을지라도 죽음 이후에는 더 좋은 부활이 예비 되어 있다는 사실을 믿는 사람들이에요. 때문에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을 바라보며 세상은 감당치 못할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믿는 성도들은 결코 죽음을 초월하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사람들이 됩니다. 세상이 두려워하는 죽음 앞에서 우리도 똑같이 두려워한다면 그들과 우리의 다른 점이 무엇이겠습니까?
세상은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우리들의 모습을 통해 그들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실감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죽음 앞에 이방인들처럼 벌벌 떨거나 몸부림을 친다면 아마도 그들 눈에 비친 우리들의 모습이나 자기들의 모습에 다를 것이 전혀 없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기에 부활을 전해도 그들은 믿지 아니할 것입니다. 그리고 부활의 주님을 영접하지 않을 것입니다. 어차피 인간은 누구든지 한번 나고 한번 죽는 것이 불변의 법칙입니다.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말입니다.
그런데 죽음보다 강한 것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비록 우리가 죽을지라도 하나님의 사랑으로 우리는 더 좋은 부활을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아무리 무서운 형벌이나 고통이나 환난이 엄습한다할지라도 겁내지 마십시오. 심지어 죽음이 지금 우리 앞에 기다린다할지라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우리에게는 더 좋은 부활이 예비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믿음이 있어야 세상이 우리를 감당치 못할 사람으로 인정할 것입니다.
(3) 세상보다 더 좋은 영원한 천국을 믿는 믿음 때문입니다(40절)
세상이 감당치 못할 사람들에게는 지금 살고 있는 세상보다 더 좋은 천국이 예비되어 있음을 믿는 믿음이 있습니다. 그런 믿음만 가지고 있으면 세상에 무슨 미련이 있겠습니까? 우리에게 더 좋은 천국이 예비 되어 있는데 말입니다. 그래서 장차 주어질 영원한 천국이 준비되어 있는 것을 믿는 자는 이 세상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좋은 것도 미련을 두지 않습니다. 그런 우리들을 세상 사람들은 전혀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육신의 본성이나 욕심으로 살지 아니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의 탐욕이나 탐심을 버려야 합니다. 마땅히 우리가 그렇게 살 때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때문에 그들이 욕심을 부릴지라도 우리는 양보해야 합니다. 그들이 화를 낼지라도 우리는 잠잠해야 합니다. 그들이 분노해도 우리는 침묵해야 합니다. 그들이 쓸데없이 참견할지라도 우리는 묵묵히 들어 주어야 합니다. 그들이 우리에게 비상식적인 행동이나 말을 할지라도 우리는 웃음으로 받아 주어야 합니다. 그들이 우리에게 손가락질을 하며 삿대질을 할지라도 우리는 관용으로 받아 주어야 합니다.
우리의 그런 모습을 그들은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비로소 그때 그들은 우리를 감당할 수 없는 사람으로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요즘 그리스도인들은 그러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한술 더 뜹니다. 오른뺨을 맞으면 우리는 오른 쪽은 물론 왼쪽 뺨까지 치면서 분풀이를 할지 모릅니다. 이것은 분명히 우리에게 세상을 이길만한 믿음이 없다는 증거일 것입니다. 세상을 이기는 것은 보복이나 복수가 아닙니다. 세상적인 방법으로는 절대 세상을 이길 수 없습니다. 세상을 이기는 방법은 오직 믿음입니다. 우리 안에 그 믿음이 있을 때 세상은 우리를 자기들이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이 되려면 그들과는 다른 사고방식을 가져야 합니다. 의식구조가 달라야 합니다. 삶의 자세가 달라야 합니다. 삶의 방식도 달라야 합니다. 무엇보다 세상을 이기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면 그들이 우리를 향해 자기들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저 사람들은 정말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이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들의 믿음의 방식으로는 안됩니다. 지금 우리의 믿음의 수준으로는 결코 세상을 이길 수 없습니다. 그들의 눈에 비친 우리의 모습은 자기들과 다를 것이 전혀 없거든요. 자기들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다고 생각하지 않거든요.
그래서 세상이 오히려 우리를 만만히 보는 것입니다. 그들은 우리를 자기들의 밥으로 볼지 모릅니다. 우리가 그들을 우리의 밥으로 보지 않는 한 그들이 오히려 우리를 밥으로 볼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세상이 감당치 못할 사람이 되지 못한다면, 우리는 세상을 감당하지 못할 것입니다. 마치 가나안땅을 정탐하던 10명의 정탐꾼들처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두려워하며 연약한 메뚜기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세상이 두려워서 기를 펴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을 이기는 믿음을 소유하면 여호수아 갈렙처럼 그들을 밥이라고 생각하고 자신있게 나아갈 것입니다.
믿는 자는 절대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임을 확신해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이 두렵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담대하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세상이 성도들을 감당치 못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데 오히려 반대로 우리가 세상을 감당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통탄하실 노릇입니다. 지금까지 교회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교회였습니다. 물론 믿음의 성도들 역시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아닙니다. 지금까지 우리 믿음의 선진들이 쌓아놓은 믿음의 좋은 이미지를 오늘날 우리가 송두리 채 다 망가뜨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심히 마음이 무겁고 착잡합니다.
하지만 분명히 우리가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명심하고 그 믿음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전도의 문이 열리지 않습니다. 세상이 우리를 만만히 보는 한 우리는 그들에게 예수 믿으라고 선포할 수 없습니다. 어쩌면 그들은 오히려 우리에게 제발 예수 잘 믿으라고 충고할는지 모릅니다. 이제는 회복하십시다. 우리 믿음의 선진들이 닦아놓은 믿음의 발자취를 다시한번 돌아보고 우리 믿음을 점검하여 정말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어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금방 없어질 세상 것을 취하려고 하늘의 신령한 것을 잃어버리는 우를 범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하늘의 영원한 세계를 사모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늘의 신령한 것을 먹고 마시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합니다. 분명히 그들의 상식으로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결코 우리를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왜 우리가 고난 가운데서도 참고 인내하는지를 말입니다. 왜 우리가 억울한 일을 당하면서도 침묵하는지를 말입니다. 왜 우리가 까닭없이 피해를 당하면서도 잠잠하는지를 말입니다. 왜 우리가 비가오나 눈이오나 예배를 드리는지를 말입니다. 왜 우리가 슬픈 일을 당해도 웃음을 잃지 아니하는지를 말입니다.
세상의 눈에 비친 우리들의 모습은 정말 그들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그것이 정상입니다. 마땅히 그래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에게 그런 냄새가 안납니다. 그런 자신감이 없습니다. 그런 능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세상이 우리를 만만히 보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우리에게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서 어둠을 몰아내는 빛이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우리를 자기들이 감당하기 가장 좋은 사람들로 보는지 모릅니다. 교회와 성도들을 자기들이 다루기 가장 쉬운 집단이라고 생각할는지 모릅니다. 이제는 교회와 성도가 믿음의 힘을 기를 때입니다.
그래서 세상으로부터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이라는 평가를 다시한번 듣기 원합니다. 오직 믿음을 회복함으로 반드시 이루어질 줄 믿습니다. 믿음의 성도된 자들은 세상이 두려워하지 않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이 우리를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여기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절대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자들입니다. 절대 세상을 두려워하거나 세상으로부터 주눅들지 말고, 세상에 동화되지 말고, 세상을 이기고 승리하여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이 되어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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