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티베트-쓰촨 여행 중에 알게된 사실입니다.
이 절은 이백의 시에도 등장하는 고찰입니다.
사천성 성도 근교의 아미산은 중국 불교의 4대 명산으로 보현보살 상주도량 성지이다. 이 산의 중턱에 만년사가 있다.
미륵보전을 지나 위쪽으로 올라가니 사방이 둥근 문으로 트인 특이한 건물이 보였다. 천년 고찰인 이 절도 오랜 세월에 불에 타고 오직 이 건물만이 옛 모습대로 전한다. 이 무념전은 벽돌로 축조하였는데 마치 몽골 유목민들의 천막집 파오나 티베트 불교의 초르텐을 닮았다. 몽골에 전해진 티베트 불교의 영향이 강하게 배어 있는 건축이었다. 안에는 980년 송대에 주조한 청동 보현보살상이 6개 상아를 가진 흰 코끼리 위에 봉안되어 있는데 높이가 7.3미터이고 무게가 62톤이며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고 한다. 손에 연꽃을 들고 화려한 보관을 쓴 보살상 머리 위의 천정에는 둥근 연꽃이 그려져 있다. 그 둘레에는 젓대, 공후, 생황, 비파를 연주하며 옷자락을 휘날리며 하늘을 나는 천녀상이 그려져 있었고, 사방 벽에는 작은 불상 307구가 안치되어 있었다.
위로 올라가니 외아보전(巍峨寶殿)이 나온다. 전각 안에는 내 보기에 과거 7불로 보이는 부처님이 앉아 있었다. 우리나라와 달리 불상은 나발(螺髮)색이 청색이고 뒤쪽에도 불단이 있으며 출입문이 나 있었다. 지세를 감안한 건물 배치와 그에 따른 사람의 동선을 고려한 것이다. 그 전각 안에는 왼손에 약병을, 오른 손에 염주를 잡은 한 스님의 상이 새로 조성되어 있고 옆에는 안내문이 있었다.
그는 무진(茂眞) 스님으로 5명<內明(불교학), 醫方明(의학), 聲明(문학), 因明(논리학), 工巧明(기술, 예술)>을 닦고, 자비와 지혜를 행하였는데 송 태종의 부름을 받아 980년에 궁중에 나아가 황제를 위하여 강경 설법을 하고 불전을 편찬하였다. 황제가 스님의 은덕에 깊이 감동 받아 시를 지어 스님을 칭송했다. 아울러 황금 3,000냥을 내리고 무게 62톤에 높이 7.2미터의 보현보살상을 대부 장인찬(張仁贊)이 감독이 되어 주조하여 백수보현사에 바쳤다. 그리하여 이 절이 보현도량의 중심이 되고 대대로 세상의 중생을 보호하고 도우도록 하였다.
무진 스님상
<의학에 정통한 스님은 대자대비의 마음을 내어 당시 인류의 건강을 심각히 위협하던 ‘천연두(天然痘-天花病)’에 ‘인두접종법(人痘接種法)’을 개발하여 수많은 어린이들의 목숨을 구해 내었다. 스님의 이 치료법은 즉각 비단길을 따라 아라비아, 터키, 영국, 인도, 러시아, 일본, 북비돌니사(북페르시아?) 등 유라시아 각국으로 널리 전파되어 쓰였다. 영국에 전파된 뒤 40년이 지나 1796년에야 의사 금납(琴納, 제너)이 스님의 이 치유법에 근거하여 우두종두법을 개발하였는데 스님보다 700여 년이 뒤지는 일이다. 세계 예방 의학에 크게 공헌한 스님은 실로 보현보살의 화신이었다.>
티베트 제일의 성소인 라사의 조캉사원 앞에 장경회맹비(티베트 당의 평화조약기념비)와 나란히 버드나무 밑에 세워진 비석이 있었다. 1794년에 세워진 그 비석은 티베트에 천연두가 만연하였을 때 예방 접종을 시행한 기념비라 한다. 티베트에는 공기가 건조하고 차갑기에 전염병은 없지만 천연두만은 있다고 한다. 7년 전에 영축산 정상에서 뵌 ‘지혜의 바다’ 라고 세인들이 부르는 달라이 라마 성하와 이번 여행을 함께하고 있는 정광화 보살님의 민소매 팔뚝에 ‘마마’ 예방접종 ‘불 주사’ 자국이 새롭게 각인된다. 여행을 하고 집에 와서 ‘정보의 바다’라고 하는 인터넷 네이버 포탈 사이트를 뒤져 보았다. 어느 분의 소상하고 친절한 글을 들어 보자. 이 분도 아마 의사일 것이란 생각이 든다.
<몬테규 부인(Lady Mary Wortley Montagu)은 미모가 출중하고 지성을 갖춘 18세기 초 영국 사회의 최고 여성으로 꼽혔다. 더구나 시적인 감각과 문학적 소양이 풍부한 데다 언변도 훌륭해 그야말로 영국 사교계의 찬탄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런데 영국 사교계를 주무르고 있던 몬테규 부인이 터키 주재 대사 남편을 따라 터키로 갔다가 그만 천연두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죽지는 않고 1716년 살아남았지만 당대 최고로 아름다웠던 고운 자태를 천연두가 뺏어 가버리고 곰보가 되버렸습니다. 그 심정이 어떠했을까요? 흔한 이야기로 죽기보다 더 서러웠을까요?
그러나 몬테규 부인은 실망하지 않고 당시 중국으로부터 도입돼 터키에서 부분적으로 행해지고 있는 인두종두법에 관심을 갖기 시작합니다. 의지가 단호했던 그녀는 당시 유명한 영국 외과의사 매트랜드(Charles Matland) 박사를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로 불러 들여 아들에 접종해서 성공을 거둡니다.
1721년 천연두가 영국을 휩쓸기 시작하자 몬테규 부인은 딸에게도 접종해서 성공합니다. 이러한 사실이 알려지자 영국 왕실은 그녀에게 사람을 대상으로 한 접종을 공식 허락합니다. 그리고 흉악범들이 주로 수감된 뉴게이트 감옥(Newgate Prison)의 20여 명의 죄수들을 대상으로 접종을 했는데 모두 완쾌했고 그 덕에 죄수들은 풀려납니다. 인두접종법이 영국의학계에 자리 잡게 된 과정이지요.
제너
1796년 5월 외과의사인 제너(Edward Jenner, 1749-1823)는 손가락에 우두를 금방 앓은 상처가 있는 사라 네머스라는 젊은 목장 소녀를 발견했습니다. 5월 14일 제너는 사라의 상처에 있는 물질을 사용해 제임스 핍스라는 8세 소년에게 접종했죠. 이후 이 소년은 9일 동안 약간 아팠으나 10일째 되는 날 완쾌했습니다. 제너는 7월 1일 그 소년에게 이번에는 (사람에게 걸린) 천연두 물질을 다시 접종했는데 아무런 병도 생기지 않았으며 완전한 면역이 생겼다. 그 후 1798년 제너는 더 많은 사례를 추가해 소책자인 ‘우두 백신의 원인과 결과에 관한 연구’를 개인적으로 출판했습니다. 여러 가지 어려움 속에서 제너가 1773년 소를 이용한 우두접종법으로 예방백신을 만드는 데 성공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지석영이 1876년(고종13) 수신사(修信使) 김기수(金綺秀)의 통역관으로 일본에 갔던 스승 박영선(朴永善)으로부터 구가 가쓰아키[久我克明]의 《종두귀감(種痘龜鑑)》을 전해 받고 종두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습니다. 1879년 부산에 있던 일본 해군병원 제생의원(濟生醫院)에서 종두법을 배우고, 그해 겨울 처가가 있는 충주 덕산면(德山面)에서 한국 최초로 종두를 실시, 이듬해 서울에서도 부산제생의원에서 보내온 두묘(痘苗)로 종두를 실시하였습니다.
1979년 12월 세계보건기구(WHO)는 천연두가 지구상에서 완전히 ‘근절된 질병(eradicated disease)’이라고 공식 선언합니다. 의료방법이나 위생시설이 개선된 이유도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제너의 백신개발 덕분입니다.>
첫댓글 천연두 접종의의 유래가 그렇군요. 좋은 정보 잘 읽었습니다.
천연두 백신이 그리 하여 인류를 천연두에서 구했군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