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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불교평론에 서평이 실리다
작년(2015년) 불교평론에 내 책 바가바드기타의 철학적 이해(올리브그린, 2015)에 대한 서평이 실렸다. 의외의 일이었다. 전혀 뜻밖이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바가바드기타의 철학적 이해는 전혀 불교와 무관하다면 무관하기 때문이었다. 힌두교의 성전인 기타에 대한 5편의 논문을 모은 것인데, 그 논문들은 내가 쓴 논문들 중에서는 매우 이례적으로 불교와의 관련성을 가능하면 삼가 하려 했기 때문이다.
어떻게 해서 불교평론에서는 서평을 게재하겠다고 결정하였는지 알 수는 없다. 다만 이 소식을 알려주면서, 필자 추천을 부탁해 온 서재영 편집위원의 주문은 “힌두교와 불교 둘 다 잘 아는 분으로 추천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래야만 “불교적인 입장을 살리면서, 불교와의 관련성을 부각하는 쪽으로 서평이 가능할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후자의 실현을 위해서 전자의 조건을 갖춘 필자를 찾아달라는 것이었다. 불교평론이 불교의 평론임을 생각한다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주문이 아니겠는가.
사실 우리 선생님들 - 인도철학 1세대 - 들은 모두가 불교를 하시다가 인도철학으로까지 범위를 넓힌 분들이어서, “인도철학과 불교를 함께 한다”는 인불공학(印佛共學) 내지 “인도철학과 불교를 함께 생각한다”는 인불공관(印佛共觀)은 기본적 학문방법론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요즘은 반드시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다. 우리 학과(동국대 대학원 인도철학과)에서도 인도철학 - 불교를 제외한 좁은 의미에서의 인도철학 - 만 공부하고 연구하거나, 아니면 불교 - 인도불교 - 만을 공부하거나 하는 것이 더 많은 것 같다. 그런 까닭에 서평자를 찾아서 추천하는 것은 그다지 넓은 선택지 속에서의 고뇌를 필요로 하는 일은 아니었다.
심준보 선생. 내가 추천한 분이다. 심준보 선생은 전공으로 말하면 힌두교의 탄트리즘(Tantrim) - 특히 시바파(Śaivism)철학 - 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학부를 불교학과에서 했고, 석사논문은 불교의 오신채(五辛菜)에 대해서 썼다. 그리고 “백화도량” 법사를 역임하는 등 불교계에서도 많은 활약을 하신 분이었다. 그래서 적임자로 판단된 것이었다.
그런데 나는 심준보 선생의 서평, 「해석 관점의 차이에 대한 비판과 회통」(불교평론 제63호, 2015)을 읽기 전부터, “내가 만약 바가바드기타의 철학적 이해에 대해서 서평, 즉 자평이라도 쓰게 된다면 무슨 이야기를 할까”라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어떻게 쓸 것인가? 어떤 이야기를 할 것인가? 특히, 겉으로 보았을 때, 즉 드러난 문면(文面)으로만 본다면 전혀 불교적인 이야기를 하지 않았던 글들을 앞에 놓고 어떻게 불교와의 관련을 지을 것인가? 이런 생각을 지속적으로 해보게 되었다.
심준보 선생의 서평에서는 이 책의 의미를 평가하면서도 아쉬웠던 점도 토로하고 있다.
이 책에서 아쉬웠던 점은 이와 같은 바갑마드기타의 역사적, 사회적 맥락을 다루어
이 문헌의 성격 이해와 그리고 샹카라와 틸락의 해석이 가진 특징을 보다 깊이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지 못한 점이다.(367쪽)
서평자로서는 당연히 지적할 만한 이야기였다. 책의 제목이 잘 말해주는 것처럼, 바가바드기타의 철학적 이해는 기타에 대한 해석학자로서 하나의 철학적 이해의 사례를 내보이는 데 목적이 있었지, 기타 성립의 역사적, 사회적 맥락이나 샹카라나 틸락의 해석이 나올 당시의 역사적, 사회적 맥락을 연구한 연구서는 아니었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역사에는 그다지 능하지 못한 사람이다. 어쩌면 관심사가 아닌지도 몰랐다. 물론 나 역시 역사에 대해서 글을 쓰고 사유를 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럴 때조차, 나는 언제나 역사를 ‘철학’하고자 한다. 그렇기 때문에 심준보 선생이 비판한 것처럼, 그런 약점은 부각될 수밖에 없는지 모른다.
그렇다고 해서, 그 일이 내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내가 볼 때, 오늘날 “인도철학을 한다”는 것은 대부분 그러한 역사적 연구가 아니었던가. 인도철학에 대한 철학사적 연구 말이다. 그런 점에서 오히려 나의 공부는 “인도철학을 연구한다”기 보다는 그냥 “인도철학을 (철학)한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심준보 선생이 지적한 부분의 연구는 나보다는 다른 학자들이 극복하거나 보충해주기를 바랄 수밖에 없다. 어쩌면 우리가 몰라서 그렇지, 외국의 어떤 학자들은 이미 다 해명해 놓았는지 알 수 없다.
이 점을 분명히 하는 이유는, 지금 내가 쓰고 있는 이 글이 심준보 선생의 서평에 대한 대답 내지 반론으로 기획된 것이 아님을 밝히기 위해서이다. 이 글을 시작하면서 밝힌 것처럼, 불교평론으로부터 받은 서평 - 저자에게 청하는 서평은 있을 수 없지만 - 이 나에게 왔다고 생각하고, 그 서평을 써보려는 것일 뿐이다. 이는 심준보 선생의 서평에 대한 답변이 아니라, 심준보 선생의 서평 대신, 그 서평이 하지 못한 이야기를 대신해서 해보고(代理), 또 보충(補充)하려는 것이다. ('대리'와 '보충'은 데리다의 말이다. 상호텍스트성을 잘 드러내는 말이므로, 빌려서 쓴 것이다.)
이는 곧 평생 불교인으로, 불교학자로, 불교철학자로 살아온 나/저자의 배경 - 컨텍스트 –이 어떻게 바가바드기타의 철학적 이해와 관련하는가를 물어보고 답해보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가능하면 불교와 관련지우지 않고서 힌두교 철학 안에서만 기타를 논의한 책 바가바드기타의 철학적 이해가 도대체 어떻게 불교와 관련되는가 하는 점을 문제로 삼는다. (사실, 서평자 심준보 선생은 바로 이 점 때문에 참으로 고생을 많이 하셨다. 그 점에 대해서 깊이 감사드린다.)
그 점을 밝히는 것은 바로 불교인으로, 불교학자로, 불교철학자로 살아온 나와 인도철학- 힌두교 - 과의 관련양상을 밝히는 일일 수도 있을 것이다. 내가 왜 인불공학을 하는지, 왜 인불공관을 부르짖는지를 정리하는 일이 될 것이기도 하리라.
2. 바가바드기타의 철학적 이해와 불교
바가바드기타의 철학적 이해에서 문제로 삼는 것은 간단하다. 과연 “기타의 주제는 무엇인가”라는 점이다. 도대체 기타라는 책은 무엇을 가장 중점적으로 말하는 것인가? 이 물음을 문제 삼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간단해 보이는 문제가 하나의 문제로서 새삼 제기되는 것은 기타의 주제론을 둘러싸고 오랜 동안 다양한 의견이 있어왔기 때문이다. 18장 700송으로 이루어져 있는 기타라는 책에는 다양한 가르침이 설해지고 있는데, 크게 세 가지 길이 설해지는 것으로 말해진다. 지혜, 행위, 그리고 믿음이다.
이렇게 세 가지 길이 설해지고 있는데, 그 중에서 정녕 기타의 주제라고 할 만한 것은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종래의 주석가들 사이에서도 다양한 의견이 제시되어 있었다. 가장 대표적인 인물은 샹카라(Śaṅkara, 700〜750)이다. 그는 단연코 “기타의 주제는 지혜이다”라고 말한 것이다. 지혜중심의 해석을 행하였다. 그의 해석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행위와 믿음을 소홀히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아무래도 지혜보다는 낮게 평가되고 마는 것이다.
그 뒤에 라마누자(Rāmānuja, 1017〜1137)와 마드바(Madhva, 1199〜1276)와 같은 해석자는 기타의 주제는 믿음이라 말한다. 신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에 의해서 해탈하라는 가르침이 기타가 제시하는 것이라는 입장이다. 한편 행위가 기타의 주제라는 것은, 근대 인도에 이르러서 제시된다. 그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틸락(B.G.Tilak, 1856〜1920)이다. 틸락은 분노한다. 이전의 여러 주석가들의 해석은 말도 안 된다고 한탄한다. 그리고 그 스스로 행위를 기타의 주제로 파악하는 새로운 해석을 제시한다.
내가 바가바드기타의 철학적 이해에 실린 5편의 논문을 쓰기 전 상황은 이러했다. 종래의 세 가지 입장 중에서, 나는 샹카라와 틸락을 집중적으로 살펴보고 또 양자를 비교하였다. (믿음에 대해서는 또 다른 저술로 미루고자 했다. 그때는 간디의 해석이 중심이 될 것이다.) 먼저 샹카라의 지혜 중심 해석을 틸락의 관점에 의지하면서 함께 비판했다. 그렇다고 한다면, 나는 과연 틸락의 해석에는 공감했던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부분적으로 공감하고, 부분적으로 공감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다시 틸락의 행위 중심 해석을 또 비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샹카라와 마찬가지로 틸락 역시, 믿음을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나는 기타의 주제를 바라보는 나의 관점 하나를 제시하거나, 아니면 적어도 암시하고자 하였다. 지혜, 행위, 그리고 믿음 이 세 가지는 다 기타의 주제와 관련된다는 것이었다. 이를 나는 삼도회통(三道會通)이라 말한다. 인도의 해석자들 중에서 이러한 입장을 취하는 것은 간디(Mahatma Gandhi, 1869〜1948)가 그렇고, 오로빈도(Aurobindo Ghose, 1872〜1950)가 그러했다고 본다. 내가 앞에서 “암시하거나”라는 말을 쓴 것은, 이러한 입장은 기타의 믿음에 대한 나의 연구를 책으로 편집하게 될 때 비로소 다 드러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 책의 범위는 거기까지 미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암시하거나”라고 하였던 것이다.
기타의 주제에 세 가지가 다 관련된다는 것은 어떤 양상을 말하는 것일까? 첫째는 지혜와 행위의 관련성이다. 내가 기타에 대해서 처음으로 쓴 논문이 바로 이러한 주제와 관련한 것이었다. 「바가바드기타의 카르마요가에 대한 윤리적 입장」(인도철학 제2집, 1992)이라는 논문이 바로 그것이다. 지혜에 기반하여 행위하는 것, 즉 지혜와 행위의 회통의 모습을 확인하고자 하였다. 기타에 이러한 측면이 보인다는 것은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다. 그보다 좀 더 세밀하게 살펴보아야 보이는 것이, 믿음에 기반하여 행위하는 것, 즉 믿음과 행위의 회통의 모습이다. 틸락의 경우, 행위에 대한 강조를 지나치게 하느라 이러한 측면을 놓치고 있다. 그 반면 간디는 이러한 측면을 보고 있다.
이쯤해서 독자들은 의문을 제기할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뭐 그렇게 중요하냐고 말이다. 아무렴 어떤가,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그런데 내게는 그렇지 않았다. 지혜가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하여 기타로부터 그러한 점에서 지지를 얻으려고 한다면, 내가 해야 할 일은 “지혜”를 얻어야 하는 것 아닌가.(내게는 삶과 분리된 학문만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앎과 삶, 학문과 삶의 일치가 늘 소망의 대상이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참선이나 명상에 매진해야 한다. 샹카라가 말하듯이, 모든 세속적인 행위를 다 포기하고 출가하는 것이 좋다. 불교 역시 지혜나 깨달음, 혹은 출가를 중요시하지 않던가. 이러한 측면이 없지 않다. 아니, 지금의 한국불교도, 혹은 내가 이러한 문제를 고민하던 90년대에도 우리 불교는 이러한 측면에 대해서 강조(지나친 강조?)를 해왔던 것 아닌가? 오늘날에도 일각에서 제기되는 “깨달음 지상주의”라는 비판 역시 이러한 맥락과 연결되는 문제인 것이다.
그런데 나는 이 지혜의 길 하나만을 선택해서 올인(all in)해야 한다는 입장을 내 스스로의 입장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지금도 그러한 입장에는 변함이 없다. 여기에는 내 나름으로 인간을 생각하는 관점이 투영되어 있다.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 이러한 질문에 대해서,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인간은 인간 스스로와의 관계 속에서 존재하는 존재이면서, 동시에 다른 존재 - 인간은 물론, 동물 생태계까지 포함하는 - 와의 관계 속에서도 존재하는 존재이다. 이 두 가지 관계를 다 고려하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고 말이다. 전자는 대자(對自)의 존재이고, 후자는 대타(對他)의 존재이다. 선이나 깨달음, 혹은 지혜만으로 좋다고 하는 그러한 입장은 대자적 측면은 만족시켜줄 수 있지만, 대타적 측면은 만족시켜 줄 수 없는 것 아닌가. 대타적 측면에서 타자와 관계맺는 것은 행위를 통해서이고, 사랑/자비를 통해서일 것이다. 대승불교에서 보살행을 말하는 것도 바로 이 차원이다. 그렇다고 해서, 대타적 행위만 있고 대자적 차원의 수행 - 깨달음, 그리고 지혜 - 은 없어도 좋을까? 아니다. 대타적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대자적 차원의 문제도 해결하지 않고서는 인간은 결코 행복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조화가 가능한 것을 어디서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불교 안에서만 본다면, 대자적 차원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으로는 선(禪)이 있다. 지금은 정토 역시 가능한 것 - 선보다는 오히려 정토 쪽에 의지하고 있지만 - 으로 생각하지만, 90년대만 해도 나는 오직 선만을 생각했다. 그리고 대타적 차원의 행위의 문제는 대승불교의 보살행, 특히 화엄경에서 설하는 보살행에 의존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대자와 대타를 둘 다 갖추어야 하는 것처럼, 선과 화엄을 공유하고 함께 살려나가는 불교가 나에게는 ‘정답’이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보조지눌(普照知訥, 1153〜1210)의 선사상이 그러하였다. 보조선 안에 선과 함께 화엄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암(漢岩, 1876〜19511)스님을 좋아한 것 역시 그런 이유에서였다. 스님은 보조스님을 계승하면서, 선과 함께 화엄을 공유했기 때문이었다. 내게는 그러한 지평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것이 90년대 초반에 형성된 나의 불교관이었다. 이를 처음에는 선엄일치(禪嚴一致)라고 이름하였지만, 학위논문 - 그것을 책으로 낸 『대승경전과 선(민족사, 2002) - 에서는 “화엄선”이라 불렀다. 그것은 나의 불교에 대한 명명(命名)이었다.
나는 기타를 본격적으로 이야기하기 전에 이미 이러한 불교관을 정립해 놓고 있었다. 1987년에서 1992년 사이에 보조사상연구원의 간사를 하면서였다. 보조스님과 한암스님의 공부를 통해서였다. 이러한 나의 불교관을 하나의 해석학적 선이해(先理解)로 삼아서 바라다 본 것이 바로 기타였다. 아니, 바라다 볼 수밖에 없었다. 내가 불교에서 고민하면서 정리한 문제와 답이 기타에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기타에는, 앞에서 말한 세 가지 길이 착종(錯綜)된 채 설해지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이미 불교 안에서 나름의 해답을 찾았고, 정리했지만 다시 한번 더 이러한 작업을 힌두교 안에서 행하고 싶어졌다. 그것은 단순한 반복이 아니다. 반복을 넘어서 강화(强化)이다. 그것이 바로 기타에 대한 나의 초기연구였다. 그리고 그 결과의 일부가 바가바드기타의 철학적 이해 속으로 편집되고 정리된 것이다.
물론 세월과 함께 사람의 생각도 바뀌게 마련이다. 어쩌면 세월과 함께 조금은 공부가 익어갔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특히 정토신앙에 대한 눈을 뜨면서, 기타를 바라보는 데 있어서도 믿음(bhakti)을 중시하게 되었다. 그런 경우에도 믿음과 행위를 관련시켜서 생각하는 방법론은 잃지 않고 있다. 물론 이러한 연구는 아직 미완성이다. 그런 까닭에 몇 편의 성과물을 발표했지만, 역시 『바가바드기타의 철학적 이해』에는 편집되지 못했다. 장래를 기약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런 경우에도 ‘행위’로 나아가는 그 방향성만은 잃지 않는다. ‘지혜에서 행위로’, 그리고 ‘믿음에서 행위로’라는 방향 말이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불교의 정토신앙은 ‘나무아미타불’ 염불을 통해서 극락에 가는 신앙이라고 본다. 틀린 말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이 다는 아니다. 그것은 절반에 불과하다. 바로 그렇게 정토세계로 가는 방향을 왕상회향(往相廻向)이라 하고, 극락에서 다시 돌아와서 중생을 제도하는 것을 환상회향(還相廻向)이라 한다. 극락에 가는 것이 끝이 아니다. 다시 돌아와야 한다. 그리고 중생을 제도해야 한다. 이는 범부중생의 입장에서 볼 때 그렇다는 것이다. 아미타불의 입장에서 본다면, 아미타불은 언제나 환상회향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그것이 중생구제행이다.
기타에서 말하는 행위, 즉 카르마요가와 정토신앙에서 말하는 환상회향의 관련성이나 유사성에 대해서는 앞으로의 과제로 남겨둔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여기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대자적 차원의 선 - 지혜 – 이나 정토신앙 - 믿음 – 은 공히 모두 행위의 문제와 연결된다는 것이다.
그 행위의 문제를 기타의 핵심적인 주제로서 부각한 것이 바가바드기타의 철학적 이해라고 한다면, 그 행위의 문제 안에서 좀더 구체적으로 전쟁과 폭력, 권력과 탈권력의 문제를 사회윤리 – 내지 사회철학, 더 나아가서 정치철학 – 의 영역에서 세밀하게 다루고자 한 것이 이 책 『힌두교와 불교 – 바가바드기타의 불교적 이해 -』에 실은 4편의 논문들이다.
3. 아직도 남아있는 문제
행위의 문제는 곧 우리 삶의 문제이다. 어떻게 살 것인가? 이 물음은 바로 행위의 문제이고, 그것은 또 윤리의 문제이다. 나는 바로 이 지점에 서있다. 인도철학이나 힌두교 연구자들이 국내에서만도 적지는 않지만, 이렇게 윤리학, 사회철학, 내지 더 나아가서 정치철학의 문제를 자신의 철학적 주제로 삼아서 사색하고 글쓰기를 하는 동학(同學)을 나는 아직 알지 못한다. 나 혼자인 것 같다. 그래서 외롭다. 그러나 그 외로움은 껴안고 가야 할 외로움이지, 거부해야 할 외로움은 아니다. 바로 그 외로움 위에다가 내 학문의 집을 지어야 하고, 내가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많은 국내외의 연구자들에게 기타는 이제는 더 이상 연구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영역이 아닌 것으로 생각되는 것같다. 별로 연구를 하지 않는다. 그런데 나는 아직 기타를 좀 더 두고 생각해야 하고, 사색해야 한다. 그것은 해석학자들이 흔히 갖기 쉬운 편집증(?)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행위의 문제나 삶의 문제는 그야말로 살아있는 이상 놓을 수 없는 화두이기에 그런 것이 아닐까. 그래서 나는 오늘도 묻고 있다. 어떻게 살 것인가? 어떻게 행위할 것인가?
(2016년 1월 3일)
첫댓글 지금 편집 중인 책 "힌두교와 불교 --- 바가바드기타의 불교적 이해 ---"(가제)의 부록에 실을 것입니다. 내일 학교에 가서 좀더 보완해서 다시 교체해 두겠습니다. 나무아미타불 감사합니다.
수정한 것을 새로 올려두었습니다. 나무아미타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