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쪽 지방이라 해도 겨울날씨는 만만치 않다. 석빙고에서 보물 제227호 창녕탑금당치성문기비(昌寧塔金堂治成文記碑)로 가는 도로변 병원에 환자로 보이는 사람들이 연신 들락거리고 있다. 겨울철 반갑지 않은 독감으로 사람들의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닌 모양이다.
창녕 탑금당치성문기비는 군청 정문에서 왼쪽으로 난 좁은 길을 따라가면 삼진아파트 뒤쪽 전각 안에 있다. 비석 옆 잔디밭에서 초등 학생으로 보이는 여자아이들이 추운 줄도 모르고 신나게 고무줄 놀이에 한창이다. 어린이들 놀이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변한 것이 없는 듯 하다. 초등학교 동창회가 있는 날이면 친구들은 옛날로 돌아가 여학생들 고무줄을 끊으며 심술을 부렸던 이야기가 자주 등장한다.
지난 추석에 왔을 때만 해도 비석 주변에는 도회지 부잣집 담장에나 있을 법한 쇠창살 울타리가 있어 황당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울타리가 철거되고 보수작업을 하고 있어 다행이다.
탑금당치성문기비는 안내판에 한자가 병기되어 있지 않으면 제목부터 이해하기가 수월하지 않다. 이 비석은 붉은 색이 도는 화강암으로 일명 「인양사비석」(仁陽寺碑石)이라고도 한다. 높이가 158㎝, 너비 45㎝, 두께167㎝로 앞면과 양측면에 비문을 새기고 뒷면에는 입상(立像)이 두껍게 양각(陽刻)돼 있다. 통일신라시대인 9세기초 불찰(佛刹) 조성에 관하여 기록하고 있는 특수한 비석이다.
앞면의 비문은 제목없이 10행 육조체로 새겼다. 비문의 내용은 신라 혜공왕(惠恭王) 7년(771) 인양사 종을 주조한 일로부터 이 비석을 세운 원화(元和) 5년, 즉 신라 헌덕왕(憲德王) 2년(810)까지 40년간 인양사를 비롯하여 봉덕사, 영흥사, 천엄사, 보장사, 원지사, 상락사, 대곡사 등의 사찰에 범종(梵鐘), 탑(塔), 불상(佛像), 금당(金堂), 요사(寮舍) 등의 조성연대와 소요된 양식(糧食)을 낱낱이 기재하고 있다. 봉덕사, 영흥사, 천엄사, 보장사는 경주에 있는 사찰이고 그 뒤에 나오는 원지사, 상락사, 대곡사, 인양사는 창녕 지방에 있던 사찰이라고 추정된다. 더욱이 이곳에서 각각 500여m 떨어진 곳에 술정리 동삼층석탑과 서삼층석탑이 있으니 이 지역이 옛날 대가람(大伽藍)의 터이었음을 더욱 믿게 한다.
비 뒷면에는 승상(僧像)이 양각되어 있는데 이는 사찰조성에 관련된 당시의 고승을 기리기 위해 새긴 것으로 추측된다. 승상은 동안(童顔)의 자비로운 모습이며 인체를 모방한 부드러운 선이 8·9세기 조각수법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비석에는 이례적으로 옥개형(屋蓋形)의 머릿돌을 얹어 놓았다.
지금도 가끔 비석 부근에서는 오래된 기와조각이 나오는 것을 본다. 예전에 수집한 기와 조각들에는 신라시대부터 고려시대에 이르는 문양들이 그려져 있었다. 그러나 이 기와 조각들은 창녕초등학교에 보관돼 있었으나 6.25 때 없어져 버려 아쉽다.
군청을 나와 큰길로 나오면 대구와 영산, 고속도로 방향으로 갈리는 교차로가 나온다. 고속도로 방향으로 잠시 걸음을 옮기면 구 창녕공설운동장이 있다. 운동장을 가로질러 좁은 논길로 들어서면 폐허가 된 공장 사이에 보물 제520호 술정리 서삼층석탑(述亭里西三層石塔)이 있다. 이 탑은 신라식 일반형 석탑으로 이중기단 위에 세운 삼층석탑이다.
상층(上層) 기단 면석(面石) 가운데는 별석으로 문비(門扉:문짝)가 새겨 져 있으며, 탑신에는 양우주(兩隅柱)가 조각되고, 옥개받침은 5단이다. 위층 기단의 각면석의 조각은 곡선의 아름다운 안상(眼象:새김질하여 파낸 조각의 일종)이 새겨져 있다. 상륜부는 노반(露盤:머리장식받침)위로 복발(覆鉢:엎어놓은 그릇모양의 장식)만이 남아 있다.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이나 전체적인 조각수법으로 보아 술정리 동삼층석탑보다 다소 떨어지며, 조성시기도 뒤지는 것으로 추정된다. 높이는 5.1m다.
/심재근(옛그늘문화유산답사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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