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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김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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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우석(67) 기후변화생태계연구소장과 강원도 양양군 주전골을 걸었다. 신록이 우거진 설악산 계곡엔 탐스러운 함박꽃나무가 꽃을 피웠고, 서울에서 지기 시작한 아까시나무 꽃도 한창이었다.
공 소장은 한국에 많지 않은 식물지리학의 길을 걸었다. 20대 중반부터 한라산(1947m)·지리산(1915m)·설악산(1708m) 등 한국의 고산을 오르내리며, 고산식물과 희귀 식물을 관찰하고 연구했다. 대학에서 정년퇴직한 이후로는 기후변화와 관련한 연구소를 운영하며, 지구온난화가 고산식물과 희귀종 등 생태적 약자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하기 위해 높은 산과 외딴 섬을 돌아다니고 있다. 경희대에서 대나무의 분포와 환경으로 석사학위를, 영국 헐(Hull)대학에서 고산식물의 다양성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요즘 부모들은 아이들 교육열이 넘쳐나잖아요. 산에 갈 때도 아이들한테 ‘어떤 책을 읽어봐라’ 하고, 또 산에 오면 ‘책에서 봤던 식물들을 찾아보자’ 하는데 그냥 두는 게 가장 좋은 교육입니다. 아이들은 스스로 자연에 적응하게 돼 있어요. 길 가다가 나무나 풀을 만지고, 물소리도 들어보고, 땅도 뒤집어보고 손발 더럽히면서 자연스럽게 접하는 거죠. 근데 부모가 학교에서 경쟁하듯이 가르치려 들면 흥미를 잃어버립니다. 그런 게 아이들의 호기심을 막아버려요. 부모들도 자연을 제대로 배운 적이 없으니까, 그러는 겁니다. 그래서 부모가 먼저 배워야 해요. 우리는 등산을 할 때도 무조건 정상을 향해, 빨리 가려고만 하잖아요. 어른들이 그것부터 고쳐야 해요. 천천히 가면서 숲도 보고 물소리도 듣고, 돗자리 깔고 앉아 쉬어가면서 가야죠. 그래야 자연을 느낄 수 있잖아요.”
지난 22일, 강원 양양군 설악산 주전골을 걷는 공우석 기후변화생태계연구소장. 김영주 기자
지난 22일, 주전골 들머리인 오색약수탐방지원센터에서 공 소장이 말했다. 아홉살 아들이 있는 기자가 “아이와 같이 걷고 싶은데, 따라나서려고 하지 않는다”고 하자 이같이 조언했다. 그는 ‘느리게 걷기’ 예찬자다. 아이와 함께 걷고 싶다면 ‘자신부터 천천히 걸어보라’는 것이다.
이날 주전골엔 한계령(920m) 정상 부근에서 발원한 계곡물이 제법 세차게 흘렀다. 맑고 차가운 계곡물이 화강암 바위 표면을 타고 흐르며, 굽이칠 때마다 포말을 만들어냈다. 계곡 양편으로 거대한 절벽이 버티고 선 가운데, 숲엔 신갈나무를 비롯해 소나무·단풍·서어나무 등이 신록을 뽐내고 있었다. 경치를 감상하면서 느리게 걷기 좋은 길이었다.
“신갈나무는 예전 짚신 바닥에 깔았다고 해서 신갈나무입니다. 짚신을 신고 걸으면 바닥에서 질척거리는 게 올라오잖아요. 덜 질척이는 발 상태를 유지하려 이 잎사귀를 짚신 바닥에 깔고 걸었다는 거죠. 짚신에 나뭇잎 한장을 깐다고 별 차이가 없었겠지만, 그래도 생활의 지혜인 거죠. 또 예전부터 우리나라 산길에 신갈나무가 많았다고 해석할 수도 있고요. 신갈보다 잎이 더 큰 떡갈나무는 떡을 싸는 용도로 써서 이름 붙여졌어요. 잎에 방부제 성분이 있다고도 하고요.”
설악산 주전골을 걷는 트레커들. 김영주 기자
떡갈나무의 내력은 알고 있었지만, 신갈나무 작명 얘긴 처음 알았다. 한 가지 더 흥미로운 얘기를 해줬다.
“예전 조상들은 산에 갈 때 짚신 바닥을 일부러 헐겁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짚신을 성기게 짜게 되면 작은 식물들이 발에 밟혀 죽게 되니까 그걸 피하려고요. 그래서 이런 산에 들 때 일부러 구멍이 송송 뚫린 짚신을 신고 걸었다는 거죠. 선조들의 자연을 대하는 태도가 경이롭지 않나요? ”
이런 산 지식은 그가 20대부터 40여년 동안 남들이 가지 않는 곳을 걷게 된 후, 길에서 주워듣고 이후 책에서 찾아보게 된 것들이다. 지금까지 식물·지리와 관련한 책만 십수권을 펴냈다. 그는 한국인만큼 자연에 잘 적응하는 사람도 없을 것이라고 했다.
“언젠가 미국 인류학자가 흥미로운 실험을 했다고 해요. 미국은 전 세계에서 온 이민자들이 많잖아요. 각국에서 온 사람들을 데려고 산에 가서 ‘이 산에서 먹을 수 있는 것을 따오세요’라고 했답니다. 유럽이나 서양 사람들은 빈손으로 왔는데, 한국 사람들 특히 한국 여성들은 고사리를 비롯한 각종 나물, 도토리 같은 걸 한가득 가져왔더라는 겁니다. 그 학자가 고사리를 보고 ‘왜 따왔냐’고 했더니 한국인이 ‘살짝 데쳐서 말리면 (유독 성분을 뺀 후) 먹을 수 있다’고 했다는 거죠. 미국은 산에서 고사리가 번성해 주변 환경에 악영향을 끼치고 있는데, 한국 사람들은 그걸 채취해서 먹는다는 것에 놀랐다고 해요. 산나물을 먹기 시작한 건 굶주림을 피하기 위해서였지만, 한편으로 우리가 그만큼 자연을 잘 이용하고 적응한다는 뜻도 되지요.”
5월 주전골엔 함박꽃·서어나무 한창
설악산 주전골애 활짝 핀 함박꽃나무. 김영주 기자
주전골은 설악산과 점봉산(1424m) 사이, 한계령에서 양양 방향으로 흐르는 계곡이다. 오래전, 이 지역을 지나는 강화도 관찰사가 계곡에서 쇠를 두드리는 소리가 듣고 좇아가 보니 도적 떼들이 동굴에 모여 가짜 엽전을 주조하고 있었다는 데서 주전(鑄錢)골이라 불리게 됐다. 또 이 계곡에 있는 용소폭포 입구에 시루떡바위가 마치 엽전을 쌓아 놓은 것처럼 보여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도 있다. 오색약수탐방센터에서 흘림골 입구 용소폭포 삼거리까지 약 2.7㎞. 빠른 걸음으로 1시간이지만, 쉬엄쉬엄 가면 2시간을 가도 시간이 모자를 정도로 볼 게 많다.
오색탐방센터(해발 약 350m)에서 시작해 약 1.5㎞까진 ‘무장애’ 길이다. 평탄한 길에 계곡 옆으로 나무 데크가 깔려 남녀노소 누구나 편히 걸을 수 있다. 출발 지점에서 700m 정도 올라가면 성국사라는 작은 절이 나오는데, 여기가 예전 위조 엽전을 주조한 터라는 설이 있다. 절 마당 한편에 계곡에서 발원한 물을 끌어들인 약수가 있다. 정작 이 골짜기를 유명하게 만든 오색약수는 음용 부적합 판정이 내려졌다고 한다. 대신 이곳에서 약수 한 사발을 들이켰다. 날이 더워서인지 시원한 맛이 없고, 텁텁했다.
성국사 이후론 오솔길이 펼쳐지지만, 경사가 급하진 않다. 이날 거는 사람은 대부분 중장년층이었는데, 등산화를 신은 사람도 있지만, 운동화 차림도 꽤 있었다. 미끄러운 밑창이 아니라면 운동화도 무난한 코스다. 트레일은 계곡을 이리저리 넘나들며 이어지는데, 그때마다 소담한 목조 다리가 길을 안내한다. 다리 위에서 되돌아보면, 연둣빛 신록 사이로 시원한 계곡이 펼쳐진다. 계곡 옆으로 탐스러운 함박꽃나무가 눈에 띄었다.
“북한의 국화(國花)가 뭔지 아세요?” 공 소장이 물었다. 한참 생각했지만, 알 수 없었다. 북한의 국화는 무엇일까.
“여기 핀 함박꽃나무가 북한의 국화입니다. 김일성이 어느 산에서 이 꽃을 봤는데, 아주 마음에 들어 해서 주변 사람들한테 이름을 물었대요. 사람들이 ‘함박꽃나무’라고 하니 그건 너무 평범하다고 ‘나무에 핀 난처럼 예쁘다’고 해서 목란(木蘭)이라고 부르자고 했대요. 그 이후로 북한의 국화가 됐다고 해요. 함박꽃나무가 북한의 국화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 겁니다. 밉든 곱든, 그래도 우리가 북한의 국화 정도는 알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새하얀 꽃잎이 탐스럽게 달린 함박꽃나무는 이 계절 ‘주전골의 여왕’이라고 해도 손색 없을 만큼 아름다웠다. ‘숲속의 귀부인’으로도 불리는 함박꽃나무는 5~6월에 꽃을 피우며, 깊은 산 중턱 골짜기에서 주로 서식하는 낙엽 소교목이다. 서어나무 군락지도 다른 데선 쉽지 볼 수 없는 수종이다. 음지에서 잘 자라는 서어나무는 완숙기에 접어든 숲을 대표하는 나무다. 공 소장은 “온대 지방에서 이렇게 아름드리 서어나무가 군락을 이루려면 숲이 최소한 150~200년은 돼야 한다”고 했다. 함박꽃나무와 서어나무 군락지, 선녀탕을 지나 다리를 하나 더 건넌 뒤 바위에 앉아 휴식을 취했다.
설악산 주전골에 떨어진 떼죽나무 꽃. 김영주 기자
“우리 세대는 대부분 자연 교육을 못 받고 자랐잖아요. 70~80년대에 태어난 세대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학교에서 입시 준비하듯 해서 자연을 볼 줄 몰라요. 그래서 학교에서 배운 대로 아이한테 뭘 설명한 다음 으레 물어보죠. 아이가 답을 못하면 ‘엄마가 다 얘기해줬잖아, 왜 집중해서 안 들었어’라고 혼을 내요. 학교 선생님도 다르지 않아요. 숲체험 한다고 하면 퀴즈 내고 문제 내고, 식물 5개 채집해서 이름 적어오라고 하고. 그러면 아이들이 스트레스 받아서 다시 안 오려고 해요. 자연 교육은 가르치는 게 아닙니다. 스스로 느끼고 관심 갖고, 호기심을 갖도록 숲에 아이들을 풀어놓는 거예요. 길 가다 썩은 나무가 있으면 들춰보고요. 아이들이 그걸 얼마나 들춰보고 싶겠어요. 그러면 그 안에서 무궁무진한 호기심 꺼리가 나옵니다. 그러면서 상상력, 창의력이 키워지는 거죠. 근데 부모들은 ‘위험하다, 손 더럽혀진다’ 하면서 근처도 못 가게 하죠. 하고 싶은 대로 두되, 아이가 물어오면 그때 부모가 답을 하면 돼요. 그래서 부모가 먼저 공부해야 하는 거죠. 제가 학생 시절에 외국에 나갔는데, 그 사람들은 가다 서다 하면서 쉼없이 아이들과 뭔가를 해요. 처음엔 ‘경치 좋은 데 와서 왜 저러고 있나’ 싶었는데, 지금 생각하니 그게 참 좋은 교육이에요.”
설악산 주전골을 걷는 공우석 기후변화생태계연구소장. 김영주 기자
1970년대에 초등학교를 다닌 그는 더 했다고 한다.
“저는 김제의 평야지대가 나고 자라서 산을 몰랐어요. 저 멀리 산자락이 보이긴 하는데, 집 근처엔 산이나 계곡이 없었거든요. 그래서 교과서에 나오는 이런 맑은 계곡물에 들어가서 아이들이 가재잡고 하는 걸 이해를 못했어요. 제가 그때까지 본 강물이라곤 서해로 느릿느릿 흘러드는 흙탕물뿐이었거든요. 소풍을 가도 송충이 잡느라 정신 없었어요. 그 당시엔 소나무에 송충이가 가득했잖아요, 그걸 아이들 시켜서 잡느라고. 도시락에 송충이를 가득 채워야 집에 보내준다고 해서, 자연을 관찰할 시간이 없었죠.”
지리학과를 가게 된 것도 엉뚱했다. 당시 동해에도 석유가 있다고 하던 시절, 고등학교 담임 선생님이 “앞으로 한국도 석유가 날 테니 지리학과가 유망하다”고 해서였다. 하지만, 석유 시추 관련 전공은 지리가 아닌 지질학과인데, 교사도 모르고 추천한 것이다. 그러나, 입학하고 나니 적성에 딱 맞았다. 무엇보다 유년 시절부터 그리던 산을 마음껏 다닐 수 있었다. 특히 해발 1500m 아고산 지역을 주로 다녔다.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가고 싶었기 때문이다.
“대나무를 좋아해서 그걸로 논문을 썼는데, 교수가 보고 ‘남들이 한 것 말고 네가 직접 한 건 뭐냐’고 하는 거예요. 그때 현장 경험이 부족하다는 걸 느꼈죠. 그때부터 지리산 천왕봉을 오르내리며 고산 식물을 찾아다녔어요. 처음엔 남쪽 중산리(경남 산청군) 방면을 다녔는데, 맞은편 북쪽도 연구해야겠구나 생각이 들어 북쪽 칠선계곡(함양군 마천면)을 홀로 다녔죠. 지금도 칠선은 험하지만, 80년대 초반엔 아예 길이 없었어요. 거기를 혼자 비박하면서 돌아다녔죠. 그 덕분인지 지금은 어딜 가도 무섭지 않아요. 그때 칠선 계곡에서 ‘귀신 소리’를 하도 많이 들어서요.”
왕복 5㎞를 다녀오는 데 꼬박 3시간이 걸렸다. 천천히 걸어도 2시간이면 충분한 길인데, 거의 흐느적거리며 걸었다고 할만큼 느리게 걸었다. 공 소장은 걷는 게 힐링이라고 했다.
“고산식물을 연구하면서 가장 좋았던 게 남들은 산을 내려가야 할 시간에 나는 그 곳에 남아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 거였어요. 허가를 받아 한라산·설악산 정상 부근에서 1주일씩 야영을 하는 날이 많았으니까요. 남들은 ‘왜 그런 고생을 하냐’ ‘앞으로 밥벌이 못할 거다’ 했지만, 저는 내가 좋아하는 것을 택했기 때문에 그런 게 호사라고 생각했어요. 지금 와서 보니 더 그래요. 트렌드가 빠르게 바뀌는 이공계 출신 교수들은 후배들이 치고 올라오면서 설 자리가 없어지지만, 저 같은 사람은 세월이 가도 할 게 많거든요. 경험이 쌓이면서 할 얘기도 더 많아지고요, 무엇보다 이렇게 현장을 지키는 삶이 좋습니다.”
주전골·흘림골 가는 길
수도권에서 대중교통으로 설악산 주전골에 가려면 서울 동서울터미널에서 강원도 오색으로 가는 고속버스를 타면 된다. 하루 6회(6시 30분, 7시 30분, 10시 45분, 13시, 14시, 18시 40분) 운행한다. 다만 중간에 정차하는 곳이 많아 조금 번거롭다. 강원도 인제·원통·장수대·한계령·흘림골에 차례로 들른 다음 오색터미널에 정차한다.
설악산 주전골을 걷는 공우석 기후변화생태연구소장. 김영주 기자
트레킹 시작을 오색이 아닌 흘림골로 할 경우, 흘림골 입구에서등선대에 오른 뒤 주전골로 내려올 수 있다. 그러나 반대로 주전골에서 흘림골로 올라갈 수는 없다. 이 지역이 낙석 위험 지역이라 계곡 아래서 위로는 입산을 제한하고 있어서다.
용소폭포를 가려면 오색탐방지원센터가 아닌 용소폭포탐방지원센터를 들머리로 잡아야 한다. 마찬가지로 이곳으로 들어오면 다시 원점으로 나가야 한다. 본래 용소폭포와 주전골 트레일은 이어지지만, 이 지역도 낙석 위험이 있어 운행을 막고 있다.
신재민 기자
오색에서 용소폭포 못미처 삼거리까지 2.7㎞ 왕복하는데 2~3시간 정도 걸린다. 흘림골 입구에서 오색으로 내려오는 5.8㎞ 길은 2~3시간 소요된다. 용소폭포는 왕복 1시간 이내로 다녀올 수 있는 짧은 길이다.
신재민 기자
에디터
관심
중앙일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