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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우내 텅 비었던 수선화 언덕이 진초록 새싹들로 가득하다. 며칠 안으로 이곳은 ‘백만 송이 수선화’라는 팻말이 무색하지 않을 만큼 꽃들로 가득 덮일 것이다. 소나무 껍질을 곱게 갈아 만든 멀칭으로 말끔하게 덮인 숲 가장자리 화단은 설강화와 헬레보루스, 히아신스가 만개했다. 이른 봄을 깨우는 복수초와 크로커스, 바람꽃 종류와 더불어 새봄의 환희를 강렬하게 표현하는 이 꽃들은 모두 알뿌리, 즉 구근식물이다. 이 식물들 가운데 잘 알려지지 않은 실라(Scilla)라는 꽃이 있다. 백합과(科) 무릇속(屬)에 속한 식물인데, 이맘때면 식물원 화단에 가득 피어 봄 정원을 환하게 빛낸다. 며칠 전 자연주의 정원가들이 활동하는 온라인 커뮤니티에 사진이 하나 올라왔다. 실라가 가득 피어난 고즈넉한 숲속 풍경이었다. 사진을 올린 우크라이나 조경 디자이너는 그곳의 봄도 이 꽃과 함께 시작된다고 적었다. 그런데 숲 한가운데 러시아에서 날아온 미사일이 불발탄이 된 채 박혀있었다. 우크라이나의 봄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실라가 가득 피어난 숲에 박힌 러시아 미사일. 우크라이나의 봄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사진: 스타니슬라프 쿠즈네초프 제공)
바깥 정원이 가장 아름다워지는 이때, 아쉽게도 나는 여름 전시에 필요한 식물들을 길러내느라 재배 온실에 갇혀 분주한 시기를 보내고 있다. 4월 말 난 축제(Orchid Show)가 끝나면 본격적으로 여름 전시가 시작된다. 컨서버토리(Conservatory)라고 불리는 전시 온실 안에서 열리는 다른 행사와 달리, 여름 전시는 5월부터 9월까지 식물원 전역에서 열린다. 규모도 크고 기간도 길기 때문에 당연히 소요되는 식물의 양도 엄청나다. 해마다 명망 있는 디자이너와 계약을 맺고 전시를 기획하는데, 올해는 중미 자메이카 출신 아티스트 에보니 패터슨(Ebony Patterson)이 디자인을 맡았다. 정원 곳곳에 구현할 여러 주제 중 하나는 ‘대지의 상처’(Wound of the Earth)이다. 이 주제 정원은 컨서버토리 앞에 넓게 펼쳐진 잔디 마당에 꾸며질 예정이다. 이곳에 심겨 대지의 상처를 형상화할 식물들은 대부분 붉은색 계통이다. 여러 종류의 백일홍과 코스모스, 그리고 우리나라에는 아직 잘 알려지지 않은 아욱과와 비름과 계통의 여러 식물들을 재배 온실에서 준비하고 있는데, 요구한 수량이 너무 많아서 곤욕을 치르는 중이다.
전시 준비는 언제나 힘들지만, 매번 새로운 주제가 발표될 때마다 나는 그 의미를 묵상하느라 머릿속이 분주하다. ‘대지의 상처’는 더더욱 그랬다. “Sin is a wound, not a stain(죄는 상처이지 얼룩이 아닙니다).” 영화 〈두 교황〉의 대사처럼 사람들이 대지에 만든 죄의 흔적도 지우기 어려운, 치유하고 다루어야 할 깊은 상처들이다. 성경에는 사람들의 죄 때문에 땅이 입은 상처에 관한 이야기가 많다. 첫 인류의 첫 타락 순간부터 땅은 저주를 받았고(창 3:17), 그들의 첫 후손이 흘린 피를 받아 마셔야 했다(창 4:11). 인류가 부패하면서 땅도 부패했고(창 6:11), 사람들이 심판을 받은 땅은 황폐해졌다(레 26:33). 그리고 모든 피조물이 새로워질 그날, 땅도 새로워지길 고대하고 있다(사 65:17). 대지는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 거의 모든 역사의 배경이 되어왔지만, 신학적으로든 신앙적으로든 의미를 충분히 조명받지 못한 것 같다. 이번 전시가 기독교 세계관과 직접적인 연관은 없지만, 대지의 상처라는 주제가 어떻게 정원이라는 소재를 통해 구현될지, 정원은 또 어떻게 이 메시지를 담아내고 소통하는지 지켜보는 것은 정원가로서 설레는 일이다.
미국으로 건너와 지금까지 나는 영어보다 정원이라는 언어를 배우는 데 더 몰두해왔는지 모른다. 이제 미국 생활 7년 차로 접어드는데, 나의 영어 수준을 생각하면 기가 찰 노릇이다. 한국에 있을 때는 절박하지 않아서 늘지 않았다고 핑계 댈 수 있었으나, 이곳에서 학교를 다니고 직장 생활을 하면서, 심지어 우리말보다 영어가 익숙한 고등부 아이들 성경 공부를 맡고 있는데도 이 수준인 것에 무슨 핑계를 댈 수 있겠는가. 언어 장벽으로 인한 스트레스를 생각하면 아직 나지도 않은 머리카락이 하얘지는 느낌이다. 그럼에도 당분간은 영어보다 정원의 언어에 더 집중할 작정이다. 정원사이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는 각자의 언어를 갖고 있다. 환대의 언어, 평화의 언어, 생명의 언어, 공감의 언어…. 언어는 곧 삶이다. 그 삶에 복음의 정수가 담긴다. 누군가는 요리에, 누군가는 노래에, 누군가는 제품을 통해 그 언어를 구사할 수 있듯이, 정원사라면 마땅히 정원이라는 언어를 구사하고 또 해석할 힘을 길러야 한다.
뉴욕식물원 재배 온실은 ‘대지의 상처’를 표현하기 위한 검붉은 식물들로 가득하다. (이하 사진: 필자 제공)
아름다운 슬픔
정원을 생각하면 당연히 예쁜 꽃과 나무가 연상된다. 정원사로 살다 보니 이런 선입견이 오히려 정원의 의미를 대단히 축소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정원 일을 시작하기 전, 남도의 한 섬에서 느꼈던 어떤 혼란스러움도 이런 선입견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래전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슬픈 사연을 간직한 섬 소록도를 찾았을 때의 일이다. 처음 눈에 띈 것은 소록도 중앙공원 입구의 소나무들로, 일그러진 모습이었다. 병원인지 형무소인지 알 수 없는 섬뜩한 느낌의 기념관을 둘러본 뒤라서 그런지 더욱 그래 보였다. 사람들도 나무들도 고통받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안으로 들어갈수록 경관이 달라졌다. 아름다운 정원이 펼쳐졌다. 소나무와 편백나무 그리고 온갖 난대성 수종들로 잘 가꿔진 모습이 너무도 인상적이었다. 오래된 향나무의 붉은빛 수피(樹皮)를 타고 햇살이 쏟아지는 모습은 경이롭기까지 했다. 깊은 슬픔이 서린 곳인데 정원이 그토록 아름다울 수 있다는 사실 때문에 그 경관이 감동보다는 혼란스러움으로 다가왔다.
여행을 다녀온 후 몇 달이 지나 다시 한번 당혹스러운 일이 벌어졌다. 아이가 학교 숙제로 ‘우리나라에서 자랑하고 싶은 곳’을 조사해야 하는데 지난여름 방문했던 소록도를 소개하고 싶다고 했다. “거긴 엄청 슬픈 곳이야.” 설득 아닌 설득에도 아이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곳이 너무 아름다웠고 누나와 소나무 밑에서 재미있게 놀던 기억이 좋다는 말이었다. 아이에게 정답을 강요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과 더불어, 어쩌면 그 정원에 대한 아이의 해석이 옳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고정관념 속 소록도는 아픔의 섬이지만, 이제 그곳은 치유와 회복의, 그래서 아이에게도 기분 좋은 추억을 남길 수 있는 정원이 되었다. “한센병은 낫는다.” 커다란 석조물에 새긴 믿음의 선언대로, 그분들은 스스로를 치유해 왔는지도 모른다. 그 흔적이 고스란히 담긴 곳이 소록도의 정원이었다. 그곳에서 찍은 모자의 사진은 나의 연작 〈나무 아래서〉에 속한 첫 번째 사진이자, 내가 가장 아끼는 장면 중 하나가 되었다.
소록도
슬픔이 슬픔다워지는 곳
수십 년간 버려진 고가철도를 아름다운 정원으로 변모시킨 뉴욕 맨해튼의 하이라인 파크는 전 세계 조경학도들과 정원사 지망생들에게 성지 같은 곳이다. 하루에도 수만 명이 찾는 도심지 공공정원으로서, 성공적인 도시재생 사례로서, 미학적으로 빼어난 폐허 정원의 진수로서, 토착 생태계를 성공적으로 복원한 자연주의 정원으로서 평가할 수 있는 지점은 일일이 나열할 수 없을 만큼 많지만, 내가 가장 주목하는 점은 시대의 아픔을 품어주는 정원의 공감 능력이다.
하이라인 파크에는 정원 곳곳에 실험적이고 창의적인 작품들이 많이 전시되는데, 많은 작품들이 시대상을 반영한다. 어느 날 조금 섬뜩한 느낌의 조각이 시선을 끌었다. 여러 사람의 동상이었다.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먼 곳을 주시하는 사람들의 눈에서는 끊임없이 눈물이 흘러내린다. 이 작품에는 〈여성들과 아이들〉이라는 제목이 붙었다. 아마도 다른 이름을 붙인다면, ‘슬픔’ 또는 ‘고아와 미망인들’이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 소외와 탄압의 피해상이 참혹하고 적나라하게 표현되어있다. 처음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찾는 공공정원에 왜 이토록 어둡고 아프고 부정적인 분위기의 작품을 세워놓았을까 의아했다. 그런데 한참을 머물러 서있는 동안 그것이 하나도 어색하지 않게 느껴졌다. 오히려 이 작품이 표현하고자 하는 슬픔이 이 아름다운 정원 속에서 더 슬픔다워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곳이 아니면, 정원이 이를 품지 않으면, 이런 작품이 놓일 만한 공간이 없겠구나 싶었다. 소록도에서 마주한 오묘한 느낌과 오버랩되면서, 어쩌면 대지와 자연은, 그 모방으로서 정원은 시대의 아픔에 공감하고 이를 품고 표현하도록 지어진 것일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니나 베이어의 〈여성과 아이들(Women and Children)〉(2019)
일찍이 정원 또는 공원은 추모의 공간으로 이용되어왔다. 추모공원은 희생자 넋을 기리고 유가족을 위로하는 공감의 자리로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할 뿐 아니라 남겨진 사람들, 특히 생존자 치유를 위해 꼭 필요한 곳이다. 미국 오클라호마 연방 정부 청사 폭탄 테러의 희생자를 추모하기 위한 국립박물관과 추모공원, 그리고 세계무역센터 테러 이후 건립된 그라운드 제로(Ground Zero)는 최근의 비극적 참사를 기억하고 추모하고 또 치유하는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향후 몇 세대에 걸쳐 그곳을 찾는 수많은 방문객들에게는,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묵직한 메시지를 전달할 것이다.
우리나라에는 이름과 달리 거의 잊혀가는 공간이 하나 있다. 진도 팽목항 인근에 조성된 ‘기억의 숲’이다. 이 숲은 〈로마의 휴일〉에 출연했던 영화배우 오드리 헵번의 아들 션 헵번 페러의 제안으로 시작되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2016년 사회적 기업 트리플래닛과 416가족협의회가 온라인 모금을 통해 기금을 마련해 팽목항에서 4.16km 떨어진 진도군 백동리 무궁화동산에 은행나무 숲을 조성했다. 지난 2월 지인이 보내온 사진에는 가지만 남은 은행나무에 노란 리본이 매달려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나무는 더욱 자라고 노란 잎들은 풍성해질 것이다. “갈수록 굳세어지는 나무들처럼 세월호가 기억되기를, 더 이상의 희생이 없기를 바랍니다.”1) 헵번의 후손들이 남긴 추모의 메시지를 빌려, 나도 이 공간이 남은 자들에게 던지는 의미를 새겨본다. 기억은 취약하고 기록은 은폐된다. 하지만 숲은 간직하고, 자라고, 외친다. 사람들은 잊고 권력은 숨기는 동안, 이 기억의 숲은 끝까지 남아서 남은 자들에게 진실을 외치는 역할을 해주길 바란다.
세월호 기억의 숲. (사진: 장성윤 제공)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
교회가 슬픔을 대하는 방식을 생각한다. 9년 전 세월호가 물에 가라앉았을 때, 지난해 백 명이 넘는 사람들이 이태원 좁은 골목에서 선 채로 목숨을 잃었을 때, 우리가 애도의 길을 찾지 못해 방황하고 국가가 기본적인 책임마저 회피할 때, 진정한 애통과 공의의 도를 가르쳐야 했을 제도교회는 너무나 무기력하고 무관심하고 무책임해 보였다. 교회에 출석하는 성도 수의 변화 등을 토대로 코로나가 한국교회에 큰 타격을 줬다는 분석들이 지배적이다. 그러나 고난 가운데 생겨나고, 그 속에서 존재 이유가 오히려 선명해졌던 교회의 역사를 생각하면, 코로나로 교회들이 타격을 입었다는 표현은 모순처럼 들린다. 코로나가 가져온 환경 자체보다도, 그 기간 보여준 공감 능력 상실, 공감의 언어 상실 그 자체가 교회의 위기 아니었던가.
톰 라이트가 묘사했듯,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당신께 책임을 묻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그들을 책망하거나 회개를 촉구하는 대신 눈물을 흘리셨다. 심지어 그는 슬픔에 빠진 세상 속에서 교회의 첫 번째 부르심은 ‘우는 사람들 사이에 겸허히 자리를 잡는 것’이라 말한다.2) 하지만 교회는 우는 자들과 함께 울지 않는 무심함으로, 고통과 슬픔에서 자기를 분리하는 이기심으로 스스로를 가두는 담을 쌓아왔다. 그 담에 갇혀있는 동안 교회의 언어는 갈라파고스에 고립된 생물들이 독특한 모양으로 진화된 것처럼, 세상과 소통할 수 없는 기묘한 개념들을 발전시켜왔다. 종교 언어만 무성한 어떤 내용들은 교회를 오래 다니지 않았다면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는 것들이 많다. 교회의 언어는 시대의 아픔에 공감할 뿐 아니라, 재미를 넘어선 기쁨으로 묘사될 수 있어야 하고, 미학과 철학과 과학이 향연을 펼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성경은 이런 언어들로 차고 넘치는데, 언제부터인가 우리 종교는 이 모든 언어를, 특히 공감의 언어를 상실했다.
소록도의 정원을 좋아했던 아이는 훗날 영어 한마디 못 하면서 축구공 하나로 많은 친구들을 사귀었고, 그의 누나는 빈 종이에 스케치를 하면서 친구를 얻었다. 아이들은 영어는 못해도 공감의 언어를 구사할 줄 알았다. 이 아이들이 교회를 새롭게 하고, 그동안 교회가 상실했던 언어를 회복해주길 기도한다. 그런 날이 오기까지, 나도 우는 사람들 사이에 자리를 잡는 법을 배워가고자 한다. 아름다운 정원이 슬픔을 외면하거나 가리지 않고, 있는 모습 그대로 품어내는 걸 보면서 공감의 언어를 하나씩 익혀가고자 한다.
■ 주
1) 송화선, ‘우리가 슬픔을 기억하는 방식’, 〈주간동아〉(2016.4.18).
2) 톰 라이트, 《하나님과 팬데믹》(비아토르), 58·99쪽.
첫댓글 언어는 곧 삶이다...공감의 언어.....
글을 읽는 내내 너무 마음이 아파 눈물이 흐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