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레산드로 다말 드류(Alessandro Damar Drew)는 미 남장로교 파송 최초의 의사 선교사였으며, 1895년 3월부터 호남 최초로 한국의 나사렛, 군산에서 의료 선교 사역을 펼친 분이었다. 그는 군산의 지정학적 위치가 향후 호남 선교의 교두보로서 중요하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한국선교부의 군산 스테이션 존속을 강하게 주장하여 군산이 호남 선교 최초의 의료 선교 기지가 되도록 결정적 역할을 감당했다. 밀려드는 환자들을 치료하면서 황포돛단배를 마련하여 도서지역과 외진 곳을 방문하여 육체와 영혼을 돌보는데 혼신을 힘을 다했다. 그러다가 심신이 쇠약해져서 미국으로 일시 귀국할 수 밖에 없었다. 고향인 버지니아주 메켈렌버그 카운티로 돌아가는 대신, 드류 선교사는 한국으로 가는 관문인 샌프란시스코와 오클랜드에 임시 거처를 정하고 군산으로 복귀할 기회를 보고 있었다. 그는 주택을 구입하여 자신의 가족만을 위한 안정된 삶을 얼마든지 누릴 수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백인들이 거주하던 오클랜드 힐스가 아닌 다인종들이 유입되면서 모든 면에서 열악했던 이스트 오클랜드에서 셋집을 전전하였다.
현재까지 밝혀진 바에 의하면, 드류(유대모) 선교사는 1902년 도산 안창호 선생과 부인 이혜련 여사의 미국 정착을 돕고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 신문과의 인터뷰를 주선 하는 등 해외 독립운동의 기초를 놓는데 기여한 공로가 확실하다. 아울러 1906년 샌프란시스코 대지진이 발생했을 때, 이스트 오클랜드에 있던 자신의 셋집을 개방하여 이재민들을 수용하여 도왔고, 고종 황제가 보낸 $1,900불을 받아서 분배하는 역할을 감당하였다. 이와 더불어, 드류 선교사는 샌프란시스코와 오클랜드 한인교회의 형성과 발전, 그리고 그들을 중심으로 전개된 해외 독립운동에 직간접적으로 기여하였다. 드류 선교사는 현재 잉글랜드 캠브릿지 대학 도서관에 보관중인 한국어로 된 희귀문서들을 외국에 소개함으로 한국과 한국 기독교의 정체성 함양에도 큰 족적을 남겼다. 기존의 자료들을 점검해 보고 새로운 자료들을 발굴하여 드류 선교사가 해외 독립운동에 끼친 공로를 객관적 자료들로 증명함으로, 그에 상응하는 대우가 한국 정부 차원에서 이루어지도록 최선을 다하고자 하는 것이다.
드류 선교사가 잉글랜드의 채널 아일랜드에 속한 건지 섬에서 출생하였기 때문에 그의 흔적이 남아 있는 케임브릿지 대학교 도서관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생각된다. 앞으로 필자는 드류 선교사와 연관된 극히 작은 족적이라도 찾아가서 사필귀정의 사명을 감당할 예정이며, 그런 자료 발굴을 하다 보면 좀 더 구체적인 해외 독립운동 관련 자료들이 나오리라고 기대한다.
필자가 최근에 잉글랜드 케임브릿지 대학교 도서관을 방문한 적이 있다. 물론 유학할 당시나 그후에 연구와 관련하여 방문했던 때와는 주제가 완전히 다른 자료를 찾아 온 것이었으니 말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드류 선교사가 기증했다고 하는 한국 기독교 초기 자료들을 확인하기 위해서 들렀다고 하는 편이 자연스럽겠다. 멀리서 보니 높은 탑으로 상징되는 케임브릿지 대학교 도서관이 한 눈에 들어왔다. 마침 이슬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기 때문에 작은 우산을 받쳐들고 도서관 출입을 담당하는 직원들이 있는 곳으로 갔다. 이전의 방문처럼 간단한 신분증 확인 정도면 출입증이나 임시 도서관 카드를 받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였지만, 그동안 변화된 부분도 있고 전세계에서 연구를 위해 방문하려는 학자들이 많아서 온라인으로 신청을 미리해도 수일은 걸린다는 직원의 원론적인 답변만 돌아왔다. 필자가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긴급하게 확인할 것이 있다고 말해도 도서관 직원은 같은 말을 반복했고 난색을 표하면서 자신의 일에 열중하고 있었다.
몇 번의 설명을 반복하며 사정을 말하다보니 그 직원이 성의를 보이며 최소한의 절차에 따라야 한다며 온라인으로 먼저 등록하고 개인 사진을 첨부하여 이메일로 보내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밑져야 본전이라는 평소의 지론이 역시나 통하고 있었다. 도서관 직원이 말한대로 온라인에서 절차를 밟으니 잠시 기다리라고 정중하게 말한 후, 다른 방으로 사라지더니 지루하지 않을만큼 시간이 지나자 임시 도서관증을 만들어서 가져다 주었다. 너무 고마운 나머지 직원의 이름을 알려달라고 했고, 그의 아름을 부르며 연신 고맙다고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그 직원의 말인즉, 전세계적으로 너무 많은 신청자들이 밀려 있어서 여러날을 기다려야 임시 도서관증을 받는게 현실인데, 이번에는 특별히 발급하여 드린다는 고마운 말이었다.
시간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도서관 직원의 안내대로 아오이 파빌리온에 있는 한국 관련 전문 컬렉션으로 직행했다. 도서관 입구를 기준으로 왼쪽 끝에 극동 아시아 관련 자료들이 보관되어 있었다.
일단 한국 컬렉션을 담당하는 도서관 사서를 찾을 수 없어서 지상층에 있는 서고부터 찾다보니 한국 자료들을 지하 서고에 보관하고 있다는 사실을 표지판을 통해서 알 수 있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 서고에 도착하니 현재 공개하지 않고 필요하면 도서관 직원이 열어준다고 적혀 있었다. 그래서 다시 승강기를 타고 선임 직원으로 보이는 사서를 대동하고 들어가서 마침내 한국 관련 자료들을 볼 수 있었다. 네 개의 큰 선반에 빼곡이 들어찬 책들 가운데 드류 선교사 관련 서적들을 볼 수 없었다. 동시에 뇌리를 스쳐가는 생각이 대영제국 성서공회 도서관이 케임브릿지에 들어와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지하 서고의 문을 열어준 직원을 다시 만나서 성서공회 도서관 및 고문서 보관소로 발걸음을 했다. 다행히 그 직원이 열쇠를 가지고 있어서 잠겨 있던 성서공회 고문서 보관소 서고를 열어 주었다. 원래는 학자든 누구든 그곳을 출입할 수 없었는데, 그 직원의 배려로 직접 가서 셀 수 없는 세계 각국의 고문서들을 볼 수 있었다.
아무리 희귀한 고문서들로 가득찬 공간이라도 이번 방문의 목적이 분명히 있었기 때문에 또 다시 그 직원을 설득하여 성서공회 고문서 보관소의 지하 서고를 안내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 직원이 자신의 담당 구역이 아닌 곳을 안내하는 것에 대하여 처음에는 난색을 표하다가 하도 열정이 가상해서인지 곧 길을 잡아 주었다. 참으로 고맙고 감사한 분이 아닐 수 없었다. 지하 서고에는 한국어로 된 자료들이 별도의 공간에서 비교적 잘 보관되고 있었다. 존 로스역과 같이 오래된 책들은 특수 용기에 담겨서 보존되는 관계로 자세히 볼 수는 없었다. 아울러 그 직원도 그렇고, 곧 이어 만난 성서공회 담당 사서도 마찬가지로 드류에 대하여 금시초문이라고 이구동성으로 말하면서 지금은 어떤 책들이 누가 기증했는지도 알 수 없다고 하는 것이 아닌가! 아뿔싸 드류 선교사의 흔적을 찾아 왔는데 그의 기증본들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다고 생각하니 약간 실망이 되었다.
그렇지만 더 큰 소득이 있었다. 대영제국 성서공회의 고문서를 담당하는 사서와 대화를 하면서 자료의 역사를 정확하게 알게 된 것이었다. 성서공회의 역사를 보니, 1804년 설립 이후 줄곧 런던에 있던 본부가 1985년에 윌트샤야에 속한 스윈든으로 이전을 하면서 역사적으로 희귀한 가치를 지닌 고문서들을 맡아줄 대학교를 수소문하다가 마침 케임브릿지 대학에서 적극적으로 수장 의사를 밝힘으로 그곳에 보관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같은 사실은 지금까지 알려져 왔던 내용, 즉 드류 선교사가 케임브릿지 대학에 직접 한국 기독교 초기 자료들을 기증했다는 입장에 대하여 수정이 불가피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필자가 성서공회의 역사를 검토하고, 케임브릿지 대학의 성서공회 고문서 보관소의 사서와 나눈 대화를 통해, 드류 선교사가 케임브릿지 대학에 자신의 소장품들을 직접 기증하지 않았고, 그가 당시 런던에 있었던 성서공회 고문서 보관소에 기증했었다는 사실이 입증되었다. 1985년 케임브릿지 대학교 도서관으로 자료들이 이전된 후에 얼마동안은 지하 수장고에 방치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다가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의 지원으로 구한말 주한 영국 공사를 역임했던 에스턴이 케임브릿지 대학에 기증한 한국 자료들을 찾아 방문했던 학자들이 드류 선교사가 기증한 것으로 추정되는 한국 초기 기독교 문헌들을 발견하고 그들의 보고서 논문에서 이 점을 언급하면서 세간에 알려지게 되었음이다. 이분들의 노고에 감사를 드리고 싶다.
드류 선교사의 해외 독립유공자 추천을 위한 자료들을 찾아가는 첫 단계인 잉글랜드와 케임브릿지 대학교를 통해 직접적인 관련 자료를 찾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드류 선교사가 한국 기독교 초기 자료들을 케임브릿지 대학교에 직접 기증했다고 알려져 왔던 기존의 사실에 대하여, 필자의 사필규정을 통해 그가 케임브릿지 대학이 아닌, 런던에 본부를 둔 대영제국 성서공회의 고문서 보관소에 자료들을 기증했다는 사실을 입증하게 되는 큰 수확을 거두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