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빙점] 눈보라
내리는 족족 녹던 눈도 어느새 단단하게 얼어붙는 계절로 접어들었다.
12월초의 일이었다. 출근한 게이조가 원장실 문을 열었더니,
“어이!”
하는 소리가 안에서 들려왔다. 다카기였다. 그는 평소와는 달리 약간 지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깜짝 놀랐잖나? 이렇게 일찍 웬일이야?”
“샤리(斜里)에서 오는 길이네.”
“샤리라면 자네 여동생이 사는 곳 말인가?”
“응, 여동생의 큰아들 장례식에 갔다 오는 길이야.”
“저런! 무슨 병이라도 있었어?”
“아니, 달구지에 치었대.”
“그건 또 무슨 일이야?”
“여동생은 샤리의 안쪽 마을에 살고 있었지. 거긴 달구지가 자주 지나다니는 곳이야.”
“그래서 달구지에 치었단 말인가?”
“눈보라가 심하게 치는 날이어서 학교에서 오는 길을 질러 왔던 모양이야. 세찬 눈보라에 얼굴도 제대로 들지 못했던가봐. 얼굴을 들었더라도 눈보라가 몰아치면 앞이 잘 보이지 않았겠지. 말 옆구리에 부딪쳐 곤두박질 친 것 같아.”
“저런! 쯧쯧, 몇 학년인데?”
“이제 1학년이야. 가엾게도.”
하고 담뱃불을 붙이고 다카기는 말을 이었다.
“그런데 자네의 그 1학년짜리는 어떻게 지내고 있나? 저번에 시코쓰 호에 왔을 때 꼭 한번 보고 싶었는데.”
“아이들에 대한 관심은 여전하군. 그때 나쓰에가 자네 병원에 함께 들르자고 하니까 요코를 데려온 당시가 생각날 것 같아 싫다잖아. 그래 전화로 실례했지.”
“작년 봄에 보고 못 보았군. 그래, 어떤가? 초등학생이 된 모습은?”
“응, 가서 직접 보게. 전엔 남들이 나쓰에를 닮았다고 했는데, 요즘은 얼굴이 둥그스름해졌어. 아이들의 얼굴은 여러 차례 변하는가봐.”
‘눈썹만은 여전히 사이시를 닮았네.”
하고 생각하면서 게이조는 말했다.
“아무튼 요코는 참한 아가씨로 자랄 거야. 그 애의 눈은 굉장한 매력이 있어. 그 애가 빤히 쳐다보면 어른인 나도 가슴이 이상해진단 말이야.”
“응, 나쓰에의 자랑거리지. 밖에 데리고 나가면 다른 사람들도 귀엽다고 말하는 모양이야.”
“허, 슬픔 끝에 낙이라, 그 말이군.”
“게다가 어딘가 초연해 보이는 데도 있거든. 주위 사람의 기분이 좋은 언짢든 그다지 아랑곳하지 않아.”
게이조의 말에는 제법 부모다운 데가 묻어났다. 다카기가 일어섰다.
“그럼 자네 아내와 예쁜 요코를 만나고 갈까?”
긴 복도를 걸으면서 두 사람은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럼……..”
“응.”
눈위에 검은 그림자를 늘어뜨리며 다카기가 사라졌다.
“나쓰에 씨, 큰일났어요! 쓰지구치한테 일이 생겼어요!”
다카기가 쓰지구치 집 현관에 들어서며 큰소리로 외쳤다.
나쓰에가 모습을 나타내더니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어서 오세요! 자, 올라오시죠.”
나쓰에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니, 쓰지구치한테 큰일이 났다는데, 그래 놀라지도 않아요?”
다카기가 질렸다는 듯이 머리를 끍적거렸다.
“놀라기는요, 누가 그런 속임수에 넘어간대요?”
응접실은 햇볕이 가득 들어 따뜻했다.
“다카기 씨는 학창 시절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군요. 언젠가는 쓰가와 선생이 방금 연구실에서 쓰러졌다며 뛰어오신 적이 있었죠? 그때 우리 아버지께서 쓰러진 게 어디 쓰가와 선생이냐 하시며 안에서 나오셨잖아요?”
“그땐 제 쪽에서 놀라 자빠질 뻔했어요. 두손들고 말았지요.”
“그 이후로 다카기 씨의 ‘큰일’은 전혀 통하지 않게 되었지요.”
얼굴을 마주보면서 두 사람은 피식 웃었다. 다카기는 내놓은 방석을 밟고 마루로 갔다.
“이 집은 바로 옆에 숲이 있어서 정말 근사하군요. 추운 날 아침엔 더욱 아름다워 보이겠는데요.”
“네, 나무에 매달린 얼음이 정말 아름다워요. 식물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을 정도로 처연한 아름다움이죠.”
“나무가 좀 줄어들었나? 어쩐지 숲이 좀 밝아진 것 같군요.”
“네, 저 소리가 들리지 않으세요?”
귀를 기울이니 무슨 딱딱한 물건을 두들기는 소리 같은 게 들려왔다.
“나무를 후려치는 도끼 소리예요.”
“허, 나무를 찍어대는 소리가 나는군요. 하지만 좀 안타깝네요. 학창 시절에는 저 숲도 컴컴하여 무시무시한 느낌이 들어서 좋았는데 말입니다.”
다카기는 응접실로 돌아와 팔짱을 끼고 앉았다.
“몇 시 차로 오셨어요?”
다카기는 샤리의 장례식에서 막 돌아오는 길이라고 말했다.
“인간의 목숨이란 정말 알 수 없는 것이더군요. 무라이는 한때 자연기흉으로 죽을 뻔했지만 그 후 기력이 많이 회복된 것 같던데요.”
“그거 참 다행이네요.”
나쓰에는 태연하게 말했다.
“참, 다쓰코 씨는 어떻게 지내고 있어요? 2,3년, 아니 거의 4,5년 동안 만나지 못했는데요.”
“어머, 벌써 그렇게 되셨어요? 여전해요.”
“그게 언제였더라. ‘만사가 귀찮은데 다쓰코 씨하고 결혼이나 할까보다’하고 말했더니, ‘다카기 씨하고 결혼하면 만사가 더욱 귀찮아질 거예요’라고 말하지 않겠어요. 보기 좋게 한 방 얻어맞은 적이 있지요.”
“어머, 다쓰코가 그랬어요?”
이때,
“다녀왔어요!”
하고 뒷문 쪽에서 요코의 밝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요코의 목소리에 다카기는 아랫입술을 가볍게 깨물고 귀를 기울였다.
“엄마, 어디 있어요?”
옆방에서 요코의 목소리가 들렸다. 다카기는 물었다.
“쓰기코는 집에 없어요?”
“네, 갑자기 결혼을 했지 뭐예요.”
나쓰에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쓰기코는 갑자기 혼담이 들어와 가을에 결혼햇다. 그 후 다른 가정부를 두지 않았는데, 다행히 쓰기코가 이웃에 새살림을 차렸기 때문에 계속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나쓰에와 요코가 들어왔다.
“아저씨, 안녕하세요!”
“허, 정말 닮았군.”
하고 다카기는 요코를 보고 나서 말했다.
“네?”
나쓰에는 의아한 얼굴로 다카기를 바라보았다.
“엄마를 그대로 닮았군요.”
하고 다카기는 나쓰에의 의아해하는 눈치를 받아넘기듯이 쳐다보았다.
“어디, 아저씨가 안아 줄까?”
하고 손을 내밀자 요코는 방긋방긋 웃으면서 다가와 다카기의 무릎에 조그마한 엉덩이를 살짝 걸쳤다. 다카기는 눈을 가늘게 뜨고 뺨을 부볐다. 요코는 수염이 덥수룩한 다카기를 조금도 싫어하지 않는 눈치였다.
“요코, 학교 다니는 거 재미있어?”
“아주 재미있어요.”
“아주 재매있어? 그거 잘 됐구나. 선생님의 이름이 뭐지?”
“와타나베 미사오 선생님이에요.”
“남자야, 여자야?”
“여자 선생님이에요. 눈이 크고 아주 착해요.”
“짝꿍은 누구야?”
“미와 마사코요.”
“좋은 애야?”
“얼굴이 예쁘고 목소리도 곱고 공부도 잘해요.”
“앞에는 누가 앉아?”
“사사이 이쿠하고 요네쓰 도요코요.”
“이쿠는 어떤 애야?”
“글씨를 잘 쓰고 피부도 하얗지만 아주 약은 애에요.”
“허, 그럼 도요코는 어때? 나쁜 애야?”
“나쁜 애는 아녜요. 시원시원하고 공부도 열심히 하는데 말이 별로 없어요.”
“그럼 뭐야?”
하고 다카기는 나쓰에의 얼굴을 보며 웃었다.
“나쁜 애가 하나도 없는 반인가, 요코의 반은?”
“왜 없겠어요. 잘은 모르겠지만.”
“안 되겠는걸, 이렇게 얌전하기만 해서는. 요코, 좀 말썽꾸러기가 되어야겠다.”
“요코 말썽꾸러기예요. 나무에도 곧잘 올라가는 걸요.”
“허, 요코가 나무에 올라가? 그거 잘됐군.”
“그것도 원숭이처럼 얼마나 잘 올라가는데요.”
“그래? 그런데 요코, 아빠와 엄마 중에 누가 더 좋아?”
다카기는 요코의 얼굴을 등뒤에서 엿보았다.
다카기의 물음은 다른 뜻이 없었다. 그러나 나쓰에는 불안했다.
“똑같이 좋아요.”
요코는 순진하게 대답했다.
‘내가 훨씬 더 많이 귀여워해 주는데…..’
나쓰에는 약간 서운했다. 다카기 앞에서 엄마가 더 좋다는 말을 듣고 싶었다. 요코에 말에 나쓰에는 어머니로서는 차라리 감동해야만 했다. 그러나 나쓰에는 그것이 안 되었다.
요코는 점심을 먹고 나서 스키를 타러 밖으로 나갔다.
“좋은 애군요.”
“정말 덕분에 전 행복하게 살고 있어요.”
“행복하세요?”
순간 다카기의 눈이 번쩍 빛났다.
“네, 정말 제 배 아파 낳은 것만 같아요.”
다카기는 말없이 차를 마셨다.
“한번 찾아뵈려고 했는데…….”
나쓰에는 말을 맺지 못했다.
“뭔데요? 골치 아픈 얘기라면 듣고 싶지 않은데요.”
다카기가 선수를 쳤다.
“………….”
“무슨 말씀인데요? 궁금하군요.”
“하지만……..골치 아픈 얘기는 듣고 싶지 않다면서요.”
“글쎄요. 다카기는 좋은 남자라는 정도의 말이라면 괜찮지만요.”
“또 그런 말씀을 하시네요.”
나쓰에는 자신도 모르게 웃어 보였다.
“말을 꺼내 놓고 맺지 않으면 궁금하잖아요. 무슨 얘긴데요? 자, 무슨 얘기든 좋으니 해보세요, 들을테니까.”
“요코 얘긴데요..보시다시피 성격도 머리도 얼굴도 나무랄 데가 없어요. 그런데 때때로 그 애의 부모가 어떤 분인지 정말 궁금해요.”
다카기는 흑단 테이블에 턱을 괴었다.
“그 애의 부모는 지금 제 눈앞에 있어요.”
“또 그런 말씀을………..”
“그런 말씀이고 저런 말씀이고 할 것 없어요. 방금 나쓰에 씨가 말씀하시지 않았어요, 정말 자기 배 아파 낳은 것 같다고요.”
“하지만………”
“부모를 알아서 뭐하려고요? 이런 좋은 아이를 기르게 되어서 미안하다며 되돌려줄 겁니까?”
다카기는 나쓰에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설마 그런………”
나쓰에는 말끝을 흐렸다.
“처음부터 쓰지구치와도 분명히 약속했어요. 데려온 아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친자식으로 생각하기로 말이에요. 그리고 전 요코에 대한 일은 일체 모르는 것으로 하기로 약속했어요. 그것으로 족하지 않아요, 나쓰에 씨?”
갑자기 지붕의 눈이 마당에 떨어져 땅이 약간 울렸다.
눈가루가 안개처럼 아름다웠다. 그리고 이내 정적이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