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기사
# 인왕산은 ‘야등의 성지’로 부른다.
이곳에는 대략 6월부터 9월까지 평일 오후 6시가 넘으면 탐방객이 늘어난다.
오후 6시는 오묘한 시각이다. 주 52시간제 도입(2018년 7월~)으로 근무시간 조절을 위해 사내 PC가 꺼지는 때이다.
‘칼퇴’로 부르는 회사 공식 퇴근의 시각이기도 하다. 문화체육관광부가 2017년 취업커뮤니티 등 500여 곳의 7000만
건 텍스트를 분석한 결과, 2030세대는 연봉과 함께 ‘칼퇴(정해진 시간에 맞춰 퇴근함)’와 여가를 중시한다고 발표했다.
또 오후 6시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회적 거리두기 4단계 조처(지난달 12일~)에 따른 3인 이상
사적모임 금지가 적용되는 시점이다. 보건복지부 관계자는 “등산도 사적모임에 해당돼 오후 6시 이전에는 4명이
함께 올라가더라도, 그 이후에는 2명씩 다녀야 한다”고 밝혔다.
오후 6시. 인왕산 야등객(야간 등산객)도 두 명씩 다닌다. 굳이 분류하자면 부부, 연인, 2030, 4050 등 다양하다.
세대별로 보면 2030이 절반을 넘는다. 그 중 직장인 최주진(31)씨는 한 달에 한 번은 인왕산 야등을 한다. 그는
“교통이 좋고, 산행 코스도 그렇게 험하지 않은 데다가, 구간 곳곳에 전등이 있어 안전하다”며 인왕산의 인기
이유를 밝혔다.
중앙일보
최씨의 말을 풀어보면 이렇다. 지하철 3호선 라인이 인왕산 동·서·남 쪽을 두르고 있다. 군사시설이 들어서면서 생긴
순찰로는 최적의 코스를 만들었다. 게다가 야등(夜燈)이 있어 야등(夜登)이 용이하다는 것.
인왕산에서 바라본 북한산. 바로 앞 능선의 암석 지대는 인왕산 기차바위다. 김홍준 기자
# 불빛은 야등의 동반자다. 인왕산에는 서울성곽을 따라 조명시설이 설치돼 있다. 그 전깃불이 인왕산 저만치 아래,
경복궁에서 우리나라 최초로 촉을 밝혔다. 1887년 3월 6일 저녁. 석탄을 연료로 향원정 연못물을 끓여 발전기를 돌렸다.
16촉광 백열등 750개를 켤 수 있는 규모의 발전기는 천둥처럼 소리를 냈다. 연못 수온이 올라 물고기가 떼죽음을 당했다.
그래서 전등을 일러 물고기를 끓인다는 뜻인 ‘증어(蒸魚)’라 부르기도 했다.
한국에 5년째 머무는 미국인 응유엔 호아(42)는 “조명과 산책로가 잘 정비돼 있어, 인왕산 야등은 세계 어떤 산의 밤길보다
수월하다”라고 말했다.
인왕산에 군사시설이 들어선 건 1968년 1월 21일의 ‘김신조 사건’ 때문이다. 북한 124부대 소속 무장군인 31명은 "청와대
까러 왔다"고 했다. 청와대 뒤편 북악산과 인왕산 사이의 자하문고개에서 군경에 발각돼 교전이 벌어졌다. 당시 김신조가
연행된 홍제파출소는 현재도 3호선 홍제역 바로 앞에 있다. 홍제역은 경복궁역, 독립문역, 무악재역과 함께 인왕산에 쉽게
다다르게 해주는 3호선 라인이다.
소셜미디어(SNS) 기반의 2030 산악회인 ‘젊산모’의 진주영(33)씨는 “인왕산 야등을 위해 경복궁역을 이용하는 경우가
많은데, 인왕산 가는 길도 찾기 쉽고 하산 뒤 친구와 둘이 출출한 배를 달랠 곳이 많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 불빛은 야등의 지향점이기도 하다. 서울 시내 가로등은 일몰 전에라도 켜진다. 2017년에 기존 ‘일몰 15분 후 점등’에서
'해가 지기 전이라도 밝기가 30룩스(㏓) 이하인 어두운 지역부터 점등' 하도록 방침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서울 27만여
개의 가로등 중 일부의 빛은 하루해의 마지막 빛과 공존하는 셈.
인왕산에 오른 인도 출신 디브야 싱(42, 한국 거주 8년)은 “서울 밤의 이런저런 불빛과 그 불빛이 만들어 낸 산 그림자,
불빛을 안은 한강의 조합은 신세계”라며 엄지를 치켜세웠다. 서울시에서는 몇 년 전 ‘도시빛’ 프로젝트를 만들기도 했다.
수도권의 야등 명소인 남한산성의 서문전망대에서 찍은 일몰 장면. [사진 김성준]
서울 광진구와 구리시에 걸쳐 있는 아차산(287m),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527m), 수원 광교산(582m) 등도 수도권 야등
핫 플레이스다. 부산 황령산(427m), 대구 앞산(660m) 등도 야경이 아름다운 야등 명소다.
지난 18일 아차산에서 만난 김정민(30)씨는 “근처 천호동에 살지만, 아차산에는 처음 온다”고 했다. 그는 “배신감을 느낄
정도로 야경이 놀랍다”라며 웃었다. 김씨는 “전직을 앞두고 평일에 마음을 비우러 왔는데, 다른 뭔가가 가득 차서 돌아가는
것 같다”고 했다. 빠듯한 평일 속 비움의 장소이되 오히려 무엇인가 가득함을 주는 공간. 바로 야등의 이유가 아닐까.
지난 8월 18일 김정민씨가 아차산에서 한강 야경을 촬영하고 있다. 김홍준 기자.
# 야등은 2030의 전유물이 아니다. 한 60대 부부는 “요즘 석양이 장관인데, 우리 둘이 오붓하게 커피 마시면서 야경 보는
재미, 자식 또래 청년들 열심히 산에 다니는 모습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고 밝혔다.
외국인 등산모임 CIK의 김성원(58) 대장은 “외국인들은 한국의 문화를 알기 위한 첫 번째 관문으로 등산을 택하는 경우가
많은데, 다른 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도심 산행지에서의 야경에 매료되는 경우가 많다”며 “코로나19 이전에는 야등에 40명
의 외국인이 모일 정도”라고 말했다. 김 대장은 “간혹 방역 지침을 어기고 마스크를 내리고 걷거나, 3명 이상이 다니거나,
성곽에 올라 사진을 찍기도 하는 다른 산행객도 있는데, 위법 여부 이전에 서로 불편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지난 8월 18일 경기도 구리시와 서울 광진구 경계의 아차산에서 바라본 서울 강동구의 야경. 시민들이 카메라와 스마트폰을
이용해 풍경음 담고 있다. 김홍준 기자.
지난 8월 18일 아차산에서 한 시민이 카메라로 야경을 담고 있다. 김홍준 기자.
북한산, 설악산 등 국립공원에서는 야등을 할 수 없다. 북한산의 경우 하절기(3월~11월) 오전 4시~오후 5시, 동절기
(12월~2월) 오전 4시~오후 4시 외에는 출입 금지다. 산이 깊고 험하기 때문에 안전을 우려한 조치다. 인왕산을 관리하는
서울 종로구청 관계자는 “인왕산은 산길이 명확하게 나 있고 조명 시설이 잘 갖춰져 있어 출입 시간제한을 두지 않는다”
고 밝혔다. 서울 광진구청과 함께 아차산을 관리하는 구리시청 관계자도 “산이 낮은 데다 길이 잘 닦여 있어 주민을 위해
상시 개방한다"고 말했다.
경기도 구리시와 서울 광진구 경계의 아차산에서 바라본 빛과 어둠의 공존. 김홍준 기자.
햇빛이 사그라진다. 가로등 불빛이 뜬다. 서울타워가 반짝인다. 롯데월드타워가, 암사대교가 빛을 발한다. 한강은 그
불빛을 고스란히 안고 흐른다. 하루 빛의 소멸을 보고, 새로운 빛에 눈을 돌린다. 빛이 빚는 산행. 그게 야등이다.
김홍준기자rimrim@joongang.co.kr
첫댓글 로따님
빛이 빚는 산행,
야등의 맛에 빠져보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