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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 시편 / 시편 32편 1-7절
찬송 / 485장 · 어두운 내 눈 밝히사
성서 / 이사야 42장 18-22절, 마가복음 10장 46-52절
말씀 / 내가 다시 보게 하여 주십시오
“너희 귀가 먹은 자들아, 들어라. 너희 눈이 먼 자들아, 환하게 보아라.”(이사야 42장 18절)
그 눈먼 사람이 예수께 말하였다. “선생님, 내가 다시 볼 수 있게 하여 주십시오.”(마가복음 10장 51절)
저는 눈이 아주 밝은 편이었습니다. 젊을 때 두 눈의 시력이 모두 2.0에 이르렀지요. 뭐 자랑은 아니지만, 사격 실력은 선수급이었습니다. 눈이 밝으니 내가 보는 것은 뭐든 다 정확하다는 자신감이 있었지요. 그런데 중년에 접어드는 어느 날, 제 생각은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그날 4차선 횡단보도 앞에 서 있었지요. 그런데 길 저편에 반가운 사람이 하나 서 있었습니다. 정말 친하게 지냈는데, 어쩌다 수십 년 동안 못 보았던 친구입니다. 얼마나 반가운지요. 손을 들고 웃어주었더니, 그 친구도 활짝 웃어주었습니다. 아니, 웃어주는 것 같았습니다. 횡단보도 신호가 초록으로 바뀌자마자 그 친구를 향해 튕겨 나갔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를 두 발짝 앞에 두고, 저는 그만 얼어붙고 말았습니다. 그게 그 친구가 그 친구가 아니었습니다. 생면부지의 전혀 낯선 사람이었습니다. 저 혼자 얼마나 뻘쭘하고 얼마나 민망했는지요. 내 두 눈에 분명히, 확실히, 내 친구였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유는 하나였습니다. 제 눈이 노안이 된 것입니다. 내 눈이 보는 것은 정확한 것이 아니었고, 내 눈에 보이는 게 다가 아니었습니다. 그때 저는 다짐하고 또 다짐했습니다. 이제부터는 내가 본 것이 다 맞는다고 생각하지 말자, 내가 들은 것이 정확하다고 믿지 말자, 내가 아는 것이 진리라고 주장하지 말자. 우기지 말자. 정말 절실히 깨달았지요. 나는 내가 본 만큼만 봅니다. 내가 보는 것보다 못 보는 게 훨씬 더 많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큰 무리를 대동하고 여리고를 떠나서 예루살렘을 향해 가실 때 일입니다. 예수님은 이제 곧 예루살렘이 입성하시게 되지요. 그런데 그 길가에 한 사람이 앉아 있었습니다. 바디매오라는 사람이었습니다. ‘바디매오’라는 이름은 디매오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디매오라는 사람이 누군지, 어떤 사람인지는 모릅니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은 그의 이름을 소개하지 않지요. 아마 그 이름이 그리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바디매오는 어떤 사람일까요? 그는 눈이 먼 사람이었습니다. 눈먼 데다가 집도 절도 없어서 길가에 나앉은 거지입니다. 이 바디매오가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예수님은 지금 어떤 상황입니까?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시고, 제자들을 부르시고, 병자들을 고치시고, 많은 기적을 행하시며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가셨습니다.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복음의 여정의 마지막 목표가 바로 예루살렘이지요. 예루살렘이 그 종착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예루살렘 입선하기 직전에 먼저 여리고에 가셨습니다. 이 여리고는 어떤 곳일까요?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할 때, 여호수아는 가나안을 점령하기 전에 먼저 여리고를 함락시켰지요.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은 여리고를 거점으로 가나안에 본격적으로 진입하게 됩니다. 마가복음이 출애굽 여정을 염두에 두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예수님께서도 예루살렘 입성 전에 이 여리고에 들르셔서, 거기서 제자들과 큰 무리를 이끌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떠나셨습니다. 마침내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복음 여정의 절정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정말 긴박하고 참으로 중차대한 시점이 아닙니까?
그런데 이 중요한 때에, 한 눈먼 거지가 예수님께 자기를 좀 봐 달라고 소리쳤습니다. 이거 예수님의 길을 훼방하는 것 아닙니까? 많은 사람이 그를 보고 꾸짖었습니다. 좀 조용히 해라, 여기서 이러면 안 된다, 지금은 너 같은 눈먼 거지가 끼어들 때가 아니다, 그런 얘기지요. 그러나 그 사람은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더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다윗의 자손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이 사람, 참 딱한 사람 아닙니까? 다윗의 자손이 누구입니까? 자기 같은 거지가 가까이하기에는 너무 엄청나게 큰 분 아닙니까? 다윗의 자손은 나라를 구할 사람이요, 민족을 구할 사람이요, 세상을 구원할 사람입니다. 메시아입니다. 지금 다윗의 자손이, 메시아가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열두 제자에 둘러싸여서, 큰 무리를 거느리고, 하나님 나라의 대업을 이루기 위해 예루살렘을 향해 나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역사적인 시점에, 겨우 한 사람을 불쌍히 여겨달라니, 그것도 눈도 성치 않고 가진 것 하나 없는 거지를 좀 봐 달라니, 이런 딱한 인사가 어디 있겠습니까? 이런 철없는 인사를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그냥 무시하고 지나가야 하지 않을까요? 이 쓸모없는 인사의 입을 틀어막고, 사지를 번쩍 들어다가 바깥에 내팽개쳐 버려야 옳지 않겠습니까?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예수님은 걸음을 멈추셨습니다. 눈먼 거지 한 사람을 위해서 예루살렘 길을, 하나님 나라의 행진을 멈추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을 불러오라 하셨습니다. 다윗의 자손 메시아가, 눈먼 거지 한 사람의 부르짖음에 걸음을 멈추셨습니다! 사람들이 바디매오에게 예수님께서 부르신다고 전했지요. 그러자 그는 자기 겉옷을 벗어 던지고, 앉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예수님께로 달려왔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바라느냐?” 그 눈먼 사람이 예수님께 말했습니다. “선생님, 내가 다시 볼 수 있게 하여 주십시오.”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그러자 그 눈먼 사람은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가시는 길을, 그 길을 따라나섰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디매오라는 사람의 아들, 눈먼 거지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길을 멈추시고, 그 눈먼 거지를 만나주셨습니다. 다시 볼 수 있게 되를 바라는 그의 간절한 부르짖음을 들어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눈멀었던 사람은 ‘자신의 믿음’으로 다시 보게 되었고, 예수님이 가시는 그 길을 따라갔습니다. 그는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단지 사물만 보게 된 게 아니었습니다. 그는 놀랍게도 예수님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 곧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무엇을 말하려는 것일까요? 이 이야기는 그저 한 눈먼 거지가 눈을 뜨게 되었다는, 놀라운 기적 이야기만을 말하려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우리가 살펴본 대로, 바디매오가 눈을 뜨게 된 사건은 예루살렘 입성 직전에 일어났지요. 그런데 바로 그 전에는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예루살렘 입성을 코앞에 두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고난을 예고하셨습니다. 그것도 처음이 아니라 세 번째 수난 예고입니다.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제자들에게 자신이 십자가에 달려 수난당하실 것이라고 예고해 주셨지요. 지금 내가 가는 이 길이, 우리가 가는 이 길이 십자가 고난의 길이다, 영광의 길이 아니리 수난의 길이다, 그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 말씀을 듣고 제자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예수님께서 가시는 길을 이해하고, 자기들도 그 길을 따르겠다고 다짐했을까요? 아니지요. 아닙니다. 애석하게도 제자들은 도무지 그 고난의 길을, 십자가의 길을 보지 못합니다. 아예 알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예수님의 수제자라는 베드로는 어떻게 했습니까? 베드로는 예수님을 가로막고 안 된다고 윽박질렀지요.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사탄아 물러가라’ 하고 책망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제 예루살렘 길 막바지에 다시 한번, 세 번째로, 마지막으로, 제자들을 곁에 가까이 부르셔서 십자가 고난을 예고하셨습니다. 세 번째 거듭 분명하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정도 말씀하셨으면, 이제는 아무리 청맹과니 제자들일지라도 알아들었겠지요. 그런데 제자들은 알아들었을까요? 아닙니다. 예수님은 분명하게 이제 예루살렘에 가면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이 인자를 이방인에게 넘길 것이고, 이방인들은 사형을 선고하고, 조롱하고, 침 뱉고,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나서, 제자들은 무슨 짓을 합니까? 야고보와 요한이 따로 예수님을 찾아오지요. 그들은 예수님께 선생님이 영광을 받으실 때 우리를 좌우에 앉혀 달라고, 인사청탁을 합니다. 그 사실을 다른 열 제자가 알고는 분개하지요. 이게 제자들의 모습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도무지 보지 못합니다.
그런데 그런 제자들과는 달리, 눈먼 거지 바디매오는 자신이 눈멀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자신이 볼 수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께 ‘내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달라’고 부르짖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이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마태복음(20장)에도 나오는데, 마가복음과는 내용이 같은 듯 다릅니다. 마태복음에서는 눈먼 사람이 둘이지요. 눈먼 두 사람이 예수님께 ‘눈을 뜨게(open) 해달라’고 말합니다. 이 눈먼 두 사람은, 아마도, 예수님께 청탁했던 야고보와 요한을 빗대는 것처럼 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가엾게 여기시고, 그들의 눈에 손을 대서, 눈을 뜨게 해주시지요. 그런데 마가복음에서 눈먼 거지 바디매오는 예수님께 ‘눈을 뜨게 해달라’고 한 것이 아니라, ‘내가 다시 볼 수 있게 해달라’고 간청했습니다. ‘눈을 뜨는 것’이나 ‘다시 보게 되는 것’이나, 표현이 다를 뿐 다 같은 뜻 아니냐고 생각할 수도 있지요. 그런데 여기에는 미세하지만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그저 단순히 물리적으로 눈을 뜨는 게 아닙니다. ‘다시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다시 본다’라는 그리스 말 ‘αναβλεπω’는 ‘꿰뚫어 본다’라는 뜻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그냥 눈을 뜨는 게 아니라, 볼 수 있게, 다시, 똑바로 볼 수 있게 해달라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눈먼 거지 바디매오는 자신이 보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똑바로 보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절실하게 보고 싶어 했습니다. 간절하게 볼 수 있게 해달라고 부르짖었습니다. 그렇게 똑바로 보고 싶어 하는 바디매오에게, 사람들이 꾸중해도 물러서지 않은 그에게, 예수님의 부르심에 겉옷을 벗어 던지고 일어나서 달려온 그에게, 예수님께서는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마태복음에는 이 말씀이 없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무슨 말씀일까요? 어쩌면 “다시 볼 수 있게 되기를 바라는 것” “똑바로 볼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하는 것” 그것이 바로 ‘믿음’이라는 말씀 아닐까요?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습니다. 왜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그토록 분명히 말씀해주셔도 도무지 모를까요? 세 번씩이나 거듭 보여주셔도 어떻게 그렇게 한사코 못 보는 것일까요? 그들은 무엇에 눈멀어서,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는 청맹과니가 된 것일까요? 무엇이겠습니까? 욕심입니다. 왼편 자리냐 오른편 자리냐 하는 ‘자리에 대한 욕망’입니다. 탐욕에 사로잡힌 그들의 눈은 예수님을 제대로 볼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오로지 그저 자기들의 욕심만 뚫어지게 보고 있었습니다. 탐욕에 눈이 먼 사람에게 십자가와 부활의 진리를 보여줄 길은 없습니다. 무엇보다 불행한 것은, 자신들이 보지 못한다는 사실을, 자신들이 눈멀었다는 사실을 전혀 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그리스도를 볼 수 있겠습니까?
“너희 귀가 먹은 자들아, 들어라. 너희 눈이 먼 자들아, 환하게 보아라.”(이사야 42장 18절) 오늘 우리가 읽은 이사야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참 이상한 말씀 아닙니까? 귀가 먹었는데 어떻게 들으라는 말입니까? 눈이 멀었는데 무슨 수로 보라는 말일까요? 무슨 말씀이겠습니까? 먼저 내 귀가 먹었다는 것, 그것부터 알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먼저 내 눈이 멀었다는 것을, 그것을 뼈저리게 알아야 한다, 그 말씀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사야는 그 귀먹고 눈먼 자가 누구라고 말합니까? 길가에 나앉은 거지일까요? 배우지 못해서 무식한 무지렁이들일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바로 ‘하나님의 종’입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하나님의 사자’지요. 지도자들입니다. 높은 자리에 앉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종들이 눈멀었으니 세상은 얼마나 어둡고 혼돈하겠습니까? 하나님의 사자들이 자신들이 눈멀었다는 것조차 모르는 세상은 얼마나 답답하고 얼마나 막막하겠습니까? 어쩌면 이사야는 바로 그런 청맹과니의 세상에서, 자신이 눈멀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아니었을까요? 이사야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뵈었을 때, 자신이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자신은 감히 하나님을 볼 수 없는 부정한 인간이라는 것을, 자신은 이제 죽게 되었다는 것을 보고는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내가 눈멀었다는 것을 아는 것, 그것이 소명의 시작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제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의 길을 볼 수 없었습니다. 그들의 눈이 높은 자리를 탐하는 욕망에 눈멀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눈이 먼 것도 모르고 자기들의 눈이 밝다고 착각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다시 볼 수 있게 해달라고 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눈먼 거지 바디매오는 자신의 눈이 멀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자기가 보지 못한다는 것을, 자기가 잘못 보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바디매오는 예수님께 ‘다시 볼 수 있게 해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그는 다시, 똑바로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가시는 그 길을 따라갔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쩌면 우리가 눈먼 사람이라는 것을 아는 것, 그것이 우리의 믿음의 시작일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우리가 볼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기도하는 것, 그것이 우리의 소망이요, 우리의 믿음일 것입니다. 우리가 탐욕에 눈멀어서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는 청맹과니 맹신에 빠지지 않도록, 성령께서 우리를 지켜주시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겨 주셔서 우리가 눈을 떠 다시 볼 수 있게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날마다 말씀의 빛을 따라 생명의 길로 걸어갈 수 있도록, 성령께서 언제 어디서나 동행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