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부고속도로 개통 40주년을 하루 앞둔 지난 6일 오전 11시. 충북 옥천군 금강휴게소 인근의 한 야산에서 추모객 차림의 남녀 100여명이 터벅터벅 발길을 재촉하고 있었다. 땀이 절로 나는 날씨였지만, 양복 재킷을 벗는 이는 없었다. 손에는 흰 장갑을 끼고 있었고, 왼쪽 가슴에는 ‘追慕’(추모) 리본이 달렸다.
이들이 도착한 곳은 ‘경부고속도로 순직 위령탑’이었다. 경부고속도로 건설현장에서 숨진 77명의 순직자를 기리기 위해 박정희 전 대통령이 40년 전에 세운 탑이다. 6m 높이의 위령탑에는 ‘서울 부산간 고속도로 순직자 위령탑’이라는 글귀가 돋을새김으로 새겨져 있었다.
순직자 유가족과 경부고속도로 건설자 모임인 ‘7.7회’ 회원들, 한국도로공사 관계자들은 매년 이곳에서 순직자 77명의 넋을 기리는 위령제를 지내고 있다. 40년간 한 해도 빼먹은 적이 없다. 그 세월 동안 순직자의 동료들은 피끓는 청년에서 흰머리 가득한 노인이 됐고, 젖먹이였던 순직자의 아들은 또 다른 젖먹이를 낳았다.
탑 앞에 도착한 유가족들은 탑 하단부에 새겨진 순직자들의 이름을 어루만지며 눈시울을 붉혔다. 위령제가 시작되자, 한 도로공사 직원이 참석자를 대표해 헌시를 낭독했다. 지난 1970년에 이은상 시인이 지은 시다.
“조국근대화를 향한… 거룩한 초석이 된 것이니… 우리 어찌 그들이 흘린 피와 땀의 은혜와 공을 잊을 것이랴….”
◆단군 이래 최대의 역사, 경부고속도로에 목숨 바친 77명
경부고속도로 건설은 지난 1968년 2월부터 1970년 7월 7일까지 2년 5개월간 165만대의 장비와 연인원 893만 명이 동원된 유례 없던 국책사업이었다. 사업 자금은 한일기본조약에서 얻은 차관과 미국에서 베트남전쟁 파병의 대가로 받은 돈이 쓰였다.
현장 상황은 열악했다. 당시 공사에 참여했던 16개 국내외 시공업체 중 고속도로 건설 경험이 있는 곳은 현대건설 뿐이었다. 그나마도 태국에서 하도급으로 참여한 업체가 많았다. 공사에 사용된 중장비도 대부분 6·25전쟁 이후 들여온 노후장비였다.
기댈 데는 ‘사람’ 밖에 없었다. ‘단군 이래 최대 역사(役事)’를 위해, 현장 인부들은 휴일 없이 밤낮으로 공사에 매달렸다. 대부분 20~30대 청년들이었고, 휴일은커녕 명절도 제대로 지내지 못한 채 현장을 지켰다. 하지만 열악한 기술력과 살인적인 공사속도는 필연적으로 사상자를 초래했다.
고(故) 김치룡 씨(당시 26세)는 지난 1970년 3월 대전공구(옥산~청성)에서 차량 전복사고로 숨졌다. 트럭 운전사였던 김씨는 당시 막바지 작업을 위해 하루 3교대로 일을 하고 있었다. 숨진 당일에도 김씨는 휴일 근무를 하던 중 미끄러운 길에서 무리하게 공사자재를 운반하다가 사고를 당했다. 동생 복룡(62·경남 거제)씨는 “형이 공사 현장 근처 막사에서 먹고 자며, 거의 매일 쉬지않고 일했다”고 했다.
순직자 대부분은 집안의 대들보였다. 지난 1969년 여름 언양 공구(경북 칠성~부산 금정)에서 오토바이 전복사고로 숨진 고(故) 차상건(당시 26세)씨는 5남매 중 장남이었다. 형제 중 유일하게 대학에 진학한 차씨는 한양대 토목과를 졸업하고 당시 중견 건설기업에 취직했다. 취업 후 차씨는 곧바로 경부고속도로 건설 현장에 투입됐다. 젊은 나이였지만 대학 출신이라는 배경과 일손이 부족한 현장 상황 때문에 현장 감독까지 맡았다.
그런 차씨가 순직하자, 집안은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 차씨의 어머니는 충격으로 뇌일혈에 걸려 2년 후 사망했다. 아버지도 이후 급속히 건강을 잃었다. 동생 상배(64·서울 효창동)씨는 “당시 회사에서 보상비 명목으로 지급한 52만원으로는 일곱 식구가 먹고 살 수 없었다”고 했다. 결국 당시 군복무 중이던 상배씨가 제대 후 생활전선에 뛰어들었다.
◆“산업화 역군에 자부심” “유가족에게 고속도로 통행료라도 면제해줬으면...”
당시 순직자 유가족들은 정부차원의 보상을 받지 못했다. 다만 소속 건설사에서 유가족에 50만원(현재 가치로 약 500만원) 정도의 위로금을 지급한 것으로 알려졌다.
오랜 시간이 흐른 탓인지, 이를 정확히 기억하는 사람도 없었다. 당시 사업에 참여했던 업체들도 대부분 사라졌다. 1970년 당재터널(현 옥천터널)에서 아버지를 잃은 김기일(39·대전)씨는 “그 당시에는 주면 주는 대로 받아야했다”며 “유가족들이 (감히) 보상 액수를 생각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7.7회’ 회장 방동식(80)씨도 “당시 시공업체는 보상 문제를 챙길 여력도 경황도 없었을 것”이라며 “위령제 때마다 순직자들에게 미안한 심정”이라고 했다.
생계 걱정때문에 위령제에 참석하지 않는 유가족도 적지 않다. 한국도로공사 충청지부 김성환 기획차장은 “현재 연락이 닿는 유가족은 31가족 정도인데, 이중에서 8~9가족이 위령제에 온다”며 “연락을 해도 하루 일 쉬는 게 부담스러운지 잘 참석하지 않는다”고 했다. 경부고속도로 건설에서 아버지를 잃은 김순자(49·경기 의정부)씨는 “집안이 어려워 아버지 제사도 제대로 지내지 못했다”며 “그러다가 6~7년 전부터 아버지 제사 명목으로 세 자매가 위령제에 참석하고 있다”고 했다.
40년이 지난 시점에서, 보상을 아쉬워하는 유가족들은 많지 않았다. 고(故) 차상건씨의 동생 상배씨는 “40년이 지날 정도로 오래된 일”이라며 “가족 중 한명이 산업화 역군으로 기억되는 것만으로도 만족한다”고 했다. 경부고속도로 건설 중 형을 잃은 조태암(65·경주) 씨는 “어려운 시대였던 만큼 당시로써는 어쩔 수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다만 섭섭함은 남았다. 고(故) 김치룡씨의 동생 복룡씨는 “유가족들에게 고속도로 통행료라도 면제해주면 고맙지 않겠느냐”며 사소한 배려를 바랐다. 조태암씨도 “지금이라도 도로공사 취업에 유가족을 우대해주는 등의 배려가 있으면 좋겠다”고 했다.
유가족 대표인 김순례(53·충북 옥천)씨는 “현실적으로 보상이 어려운 것은 알고 있다”면서도 “지금도 어렵게 사는 유가족인 있으니 얼마간이라도 보상이 지급되면 좋겠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