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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아파트 중앙통로는 어린이들의 등교 길입니다. 아파트 뒷문이 초등학교 정문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지요. 가까이 사는 아이들이 모두 이 통로를 지나 학교에 갑니다. 아침에는 아이들의 조잘대며 지나가는 소리가 들립니다. 노래는 아니더라도 미래가 다가오는 소리입니다. 어린이들의 떠드는 소리는 음악이 아니더라도 즐겁게 들립니다. 한참 떨어진 나 자신의 세계가 비쳐오는 소리이기도 하지요. 돌아갈 수 없는 시간입니다. 여기까지 온 것이 다행인지 아니면 아쉬움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때로는 그저 살아왔다는 사실만으로도 안도의 한숨이 나옵니다. 얼마를 더 나아가야할지는 모르지만 문제는 기계가 노쇠해간다는 것이지요. 거참!
‘미래’ 이야기를 하다 보니 요즘 뜨고 있는 가수 ‘신미래’가 생각납니다. 별명까지 붙여놓았습니다. ‘인간축음기’라고요. 1950년대 목소리입니다. 요즘 세대에 도무지 상상도 하지 못한 목소리죠. 예쁜 모습에 목소리가 너무 잘 어울려서 ‘트로트 전국체전’에서 입상에 들지도 못했는데 그 이상으로 떴습니다. 하기야 지금도 채점에 의문이 갑니다. 심사위원 평가로는 전체 2등이었거든요. 아무튼 추억을 벗 삼아 가끔 듣습니다. 괜찮아요. 한 번 경험해보시라요. 젊은이들도 좋아하니 별난 현상이기도 합니다. 거참!
기온이 오르락내리락 정신을 못 차리게 합니다. 더욱 몸조심해야지요. 역시 봄은 봄이라, 누구의 마음처럼 헷갈립니다. 건강한 한 주를 빕니다. ^&^
2021년 4월 17일 김종우 목사
첨부 : 21-04-11주일설교(천국에 들어가기)
성경 마태복음 19 : 23 - 26 2021년 4월 11일
설교 : 천국에 들어가기 김종우 목사
이 땅에 죽음이 없다면 우리는 구태여 천국을 소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죽음이 없는 곳이 곧 천국이니까요. 죽음이 없다면 세상이 이렇게 살기 힘들지도 않을 것입니다. 병이 든다 할지라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덥고 추워도 걱정하지 않습니다. 설령 먹을 것이 없다 할지라도 염려하지 않습니다. 밤길이 무섭다고 벌벌 떨 것도 없고 도둑이나 강도가 나타나도 두렵지 않습니다. 어차피 죽지 않을 텐데 무엇이 두렵고 무엇이 불안합니까? 지금처럼 부동산 투기로 나라가 뒤집어질 지경이 되지도 않을 것입니다. 집이 있으면 뭐 하고 없다한들 어쩌겠습니까? 이래도 저래도 죽지 않을 테니 아무 염려도 없을 것이고 아무 거리낌도 없을 것이며 도무지 두려워하거나 근심할 일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천국이겠지요. 그렇게만 된다면 오죽이나 좋겠습니까? 과연 그런 날이 있을까요? 세상 사람들이 불로장생을 꿈꾸어 왔습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무엇을 꿈꾸어 왔습니까? 불로장생 정도가 아니라 영생입니다. 그런데 단순히 꿈일 뿐인가요? 그냥 말이 그렇다는 것이지 하는 정도일 뿐 그 의미를 생각해보았습니까? 과연 얼마나 많은 성도들이 이 영생에 대하여 깊이 생각해보았을까요?
목사님이 성도들에게 물었답니다. 여러분 어떻게 해야 천국에 갈 수 있지요?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영접해야지요. 기도 많이 해야 합니다. 여러 가지 대답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나이 지긋한 고참 성도님이 그랬다지요. ‘그야 먼저 죽어야 가지요.’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답니다. 우리가 여태 배우고 알고 믿어 온 신앙으로는 그랬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천국은 죽어야만 가는 곳입니다. 그렇습니까? 예, 지금까지는 그랬습니다. 그렇다면 지금은 어떻게 해야 천국에 갈 수 있나요? 좀 달라지기는 했습니다. 마 7 : 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렇군요. 아버지 뜻대로, 곧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들어갑니다. 문제는 살아서 들어가는가, 죽어서 들어가는가, 그것이지요. 역시 죽어서 들어간다면 여태 말해온 그대로입니다. 살아있을 때 하나님 뜻대로 행해야 하고 그 다음에는 죽어야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사실 우리가 가장 꺼리는 일이 바로 이 죽음 아닙니까? 도대체 죽지 않고 가는 방법은 없나요?
우리 신앙의 선배들 가운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맞선 사람들이 많습니다. 지금도 선교의 현장에서 그런 소식을 가끔 듣습니다. 얼마 전 신문에 기독교 핍박하는 지역이 소개된 것을 보았습니다. 무신론 국가도 있고 타 종교를 국교처럼 가지고 있는 나라도 있습니다. 그곳에서 선교를 하다가 뜻하지 않게 테러를 당하거나 아니면 공식적으로 핍박을 당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을 무릅쓰고 그 현장으로 들어가는 선교사들이 있습니다. 순교를 각오하는 것이지요. 감히 따라 하기 힘든 신앙입니다. 존경스럽지요. 때로는 그들 앞에서 부끄럽기도 합니다. 물론 개인의 힘으로 또는 개인의 능력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만한 믿음을 주셨기에 가능하지요. 그 믿음만은 참으로 부럽기도 합니다. 현재 우리가 갖게 된 이 신앙도 사실은 그런 신앙인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예수님이 다녀가시고 어언 2천 년의 세월이 지났습니다. 언제까지 이런 아픔이 지속되어야 하는가, 의문을 가지곤 합니다. 계 21 : 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아멘! 우리가 소망하는 바가 바로 이런 나라 아닙니까? 약속하셨으니 이루실 줄 믿습니다. 반드시 그런 날이 오리라 믿습니다.
흔히 우리는 예수 믿고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구원과 영생은 차후의 일이고 우리는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났을 뿐입니다. 앞으로 살아가야할 인생이 있습니다. 마치 아담이 태어난 것과도 같습니다. 그 아담에게 하나님의 약속이 주어집니다. 창 2 : 16 - 17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여기서 꼭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아담이 누구인가 하는 것이지요. 창 2 : 7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흙에 불과한 사람에게 하나님의 생기가 들어가서 생령이 되었습니다. ‘생령’ 즉 살아있는 영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흙 즉 육체에 불과했던 사람이 살아있는 영이 된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생기가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하나님의 생기가 무엇입니까?
선지자 에스겔이 하나님의 신에 감동되어 한 골짜기로 갑니다. 그런데 거기 뼈가 가득하였습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겔 37 : 3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하시기로 내가 대답하되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 그렇지요. 살고 죽는 일이 어찌 사람의 일입니까? 하나님만이 아시지요. 그래서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4절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뼈에게 대언하랍니다. 이해가 됩니까? 아니 마른 뼈가 살아있습니까? 마른 뼈들이 어떻게 말을 들을 수 있다는 겁니까? 그러니 이것이 과연 뼈입니까? 이제 5절을 봅니다.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로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리라” 역시 생기가 들어가니 그 뼈들이 살아납니다. 7절 “이에 내가 명을 좇아 대언하니 대언할 때에 소리가 나고 움직이더니 이 뼈, 저 뼈가 들어맞아서 뼈들이 서로 연락하더라” 아멘! 언제 살아나는 겁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할 때 살아나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니 육체뿐이었던 자들이 생명을 얻게 되는 것이지요.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요 6 : 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주님의 말씀이 곧 영이고 생명입니다. 그 말씀이 들어가니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냥 육체에 불과했던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 생기가 들어가니 그 영이 살아납니다. 그래서 ‘생령’이 되는 것입니다.
아담도 흙에 불과한 육체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가자 그 영이 살게 된 것입니다. 소위 ‘살아있는 영 곧 생령’이 된 것이지요. 생명체가 물을 먹어야 살 수 있듯이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먹어야 사는 것입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다른 말을 먹기 때문에 생깁니다. 아담이 그랬습니다. 먼저 하와에게 찾아왔지요. 창 3 : 1 “여호와 하나님의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가로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우선 이 뱀이 뱀입니까? 아직도 파충류 뱀이 하와에게 와서 말을 걸었다고 믿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좋게 말해서 순진하다고 할까요, 무지해서 어리석다고 할까요? 계 20 : 2 “용을 잡으니 곧 옛 뱀이요 마귀요 사단이라잡아 일천 년 동안 결박하여” 옛 뱀이니 곧 창세 때의 그 뱀입니다. 그 뱀이 누구라고요? 사단 마귀랍니다. 우리가 밥 많이 먹으면 ‘돼지’라고 말하고 간사하게 굴면 ‘여우’라고 말하고 미련하면 ‘곰’이라고 말하듯이 사단을 뱀이라고 말하는 겁니다. 마귀가 찾아와서 하와를 미혹한 것이지요.
하와는 아담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이미 들었습니다. 그래서 여자가 대답을 합니다. 창 3 : 2 - 3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분명 듣기는 들었지요. 그런데 자기 생각을 껴 넣었습니다. 그렇다 치고 이제 마귀가 대뜸 받아 말합니다. 4절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이 마귀의 말이 사실입니까? 속된 말로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정녕 죽으리라” 하셨습니다. 반드시 죽을 거라는 말씀이지요. 그런데 결코 죽지 않는다고 하니 완전한 거짓말입니다. 문제는 이 거짓말을 아담과 하와가 의심 없이 그냥 먹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먹지 않고 마귀의 말을 먹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일진대 마귀의 말은 거짓이고 비진리입니다. 다시 말해서 거짓말 곧 비진리를 먹으면 우리의 영은 죽는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먹지 않으면 진리가 없는 겁니다. 진리가 없으면 생명도 없습니다. 죽은 영이지요. 그냥 육체뿐인 사람입니다. 소위 ‘흙’이라는 말이지요. 그래서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창 3 : 19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하시니라” 처음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사람을 만들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생기 즉 하나님 말씀을 주셨고 경계를 하셨습니다. 창 2 : 16 - 17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 그것이 사과, 배, 감, 대추, 오렌지 같은 열매입니까? 하나님이 그런 수준으로 말씀하신 겁니까? 다시 봅니다. 요 6 : 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생명이라” 아멘! 하나님은 영을 말씀하시는데 우리가 육으로 들으면 이해가 되겠습니까? 전혀 다른 말이 되어버리지요.
정리해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먹지 않고 마귀의 말을 먹으면 어떻게 됩니까? 죽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마땅히 하나님의 말씀 곧 진리를 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사는 겁니다. 그런데 말은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면서 마귀의 말을 듣고 있으니 문제가 생기는 겁니다. 옛날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그랬고 지금도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그리스도인이 그렇습니다. 호 6 : 7 “저희는 아담처럼 언약을 어기고 거기서 내게 패역을 행하였느니라” 우리는 그렇게 되지 말아야 하는데. 정말 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문제는 예수님의 밭에 두 가지 씨가 있다는 것이지요. 마 13 : 24 - 26 “예수께서 그들 앞에 또 비유를 베풀어 가라사대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 싹이 나고 결실할 때에 가라지도 보이거늘” 좋은 씨와 가라지가 예수님의 밭에 같이 있습니다. 언제까지 공존할까요? 30절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어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 아멘! 그렇습니다. 추수 때 곧 세상 끝(39절) 마지막 때까지입니다.
그 때 약속대로 주님이 오시겠지요. 그런데 그 마지막 때가 언제이기를 원하십니까? 2010년? 영화처럼 2012년? 2030년? 아니면 우리가 죽고 나서? 우리 시대에는 말고 아주 천천히 오면 좋겠습니까? 어떤 사람이 그랬잖아요? 천국에서는 심심해서 어떻게 사느냐고. 둘러앉아 찬양이나 하고 다른 것은 할 일이 없다면서요? TV도 없고 오락실도 없고 컴퓨터도 없고 도무지 놀 거리가 없다는 것이지요. 무슨 재미로 살까 걱정되지요? 그러니 차라리 여기 그냥 있으면 좋겠지요? 아무래도 천국보다는 이 세상이 훨씬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요. 돈만 있다면 구태여 천국은 없어도 될 겁니다. 그래서 부자는 더욱 천국 가는 것이 그다지 탐탁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마도 예수님이 그래서 말씀하신 것 같습니다. 마 19 : 23 - 24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신대” 아멘!
부자들은 참으로 듣기가 괴로울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그런가요? 역시 영으로 말씀하시는 건데 육으로 듣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한 예를 보겠습니다. 눅 18장에 한 부자 관원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께 와서 영생을 구합니다. 그는 이미 율법을 잘 지키며 살아온 사람입니다. 어쩌면 자신 있어서 확인하러 왔는지 아니면 그것으로는 부족함을 깨달아서 정말 알기를 원해서 왔는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22절 “예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이르시되 네가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나눠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그러자 이 사람이 어떻게 반응합니까? 23절 “그 사람이 큰 부자인고로 이 말씀을 듣고 심히 근심하더라” 근심했습니다. 왜요? 부자인데 다 팔아 나눠주고 오라니 하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24 - 25절 “예수께서 저를 보시고 가라사대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떻게 어려운지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신대”
생각해봅니다. ‘하늘의 보화’가 무엇입니까? 이 땅의 보화와 같이 금은보석들입니까? 이 부자는 그런 거 여기에 이미 가지고 있는데 뭐가 아쉬워서 그런 것을 기대하겠습니까? 하늘에 가서 사는데도 필요합니까? 이상하지 않습니까? 천국에서 살 때도 돈이 필요한가요? 앞에서도 말했듯이 하늘의 언어를 땅의 언어로 들으면 엉뚱한 이야기가 되고 맙니다. 우리에게 가장 귀한 것이 무엇입니까?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것이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마 16 : 2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그렇습니다. 목숨 곧 생명과 바꿀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생명 곧 영생을 구하려 신앙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생명을 얻으려니 하나님 말씀 곧 생기를 먹어야 합니다. 보화 중에 보화는 다른 것이 아니라 생명을 주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문제는 하나님 말씀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사실은 가짜가 있다는 것이지요. 가라지입니다. 어디 있다고 합니까? 예수님의 밭 곧 교회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천국에 관한 말씀을 하실 때 반드시 비유를 사용하셨습니다. 그 이유가 있습니다. 천국은 하나님 나라입니다. 하나님 나라에는 하나님 백성만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만이 출입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예컨대 우리 집에는 우리 식구만 들어가야 합니다. 동네 사람들이 다 들락날락해서는 안 됩니다. 그 가운데 특히 도둑이나 강도가 끼여 있다면 더 큰일이겠지요. 마찬가지로 하나님 나라에 마귀 자식들이 들어오면 결코 안 됩니다. 마귀는 이미 하나님 나라에서 쫓겨난 자입니다. 그가 땅으로 쫓겨나 이 세상을 장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당신의 나라로 회복하려 당신의 목자를 세우고 당신의 나라를 확장시켜 나갑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고 다스려라, 이것이 주어진 사명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하고 전신갑주를 하여 마귀와 대적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 진리를 먹는 것이 아니라 마귀의 말, 거짓말 곧 비진리를 먹고 있다면 이미 하나님을 등진 자들입니다. 아담처럼, 육적 이스라엘처럼 말이지요. 오늘은 누구입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요 14 : 2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 아멘! 예수님이 오셔서 거처를 함께 하시려면 그 분의 말씀을 지켜야 합니다. 그러자면 먼저 그 분의 말씀을 들어야 하겠지요. 그런데 그 분의 말씀을 듣는 것이 아니라 마귀의 말을 듣는다면 처음부터 잘못된 것입니다. 무엇이 마귀의 말이고 거짓말이며 비진리입니까? 예수님이 경계하셨습니다. 마 24 : 24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어디서 활동하며 무슨 일을 하겠습니까? 살후 2 : 4 “저는 대적하는 자라 범사에 일컫는 하나님이나 숭배함을 받는 자 위에 뛰어나 자존하여 하나님 성전에 앉아 자기를 보여 하나님이라 하느니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성전 곧 오늘날 교회에서 활동하지요. 선지자가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말씀을 선포하는 겁니다. 그런데 누구 말을 선포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일까요? 그럴 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선포하는 것이지요. 그러니 성도들이 아멘, 아멘, 하고 따라갑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분변하지 못하면 내가 하나님 말씀 진리를 먹고 있는지 마귀의 말, 비진리를 먹고 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경계하셨지요. 마 7 : 15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겉으로 보아서는 결코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교회에 하나님의 종으로 섰으니 누가 의심을 합니까? 그런데 문제는 겉은 양이지만 속은 이리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알 수 있다는 말이지요? 그 하는 말을 들어보면 알게 됩니다. 양과 이리는 우는 소리가 다릅니다. 진리와 비진리는 그 말씀이 다릅니다. 이것을 분별하려면 당연히 먼저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야 합니다. 누가 가지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아무나에게 한꺼번에 주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옛날에도 그렇고 하나님은 그렇게 일해 오셨습니다. 당신의 종, 소위 이 땅에 당신의 목자를 세워서 그에게 말씀을 주십니다. 옛날에는 그를 ‘선지자’ 또는 ‘선견자’라고 불렀습니다.
다시 말해서 먼저 받는 목자가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그러셨지요. 마 11 : 27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아멘! 아버지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자는 두 사람입니다. 하나는 아들 예수님입니다. 그 다음에는 그 아들 예수님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항상 미래를 바라보며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신의 초림 때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십자가 지시기 전날 밤 새 언약을 하셨지요. 그 새 언약이 이루어질 때 곧 다시 오실 때 이루어집니다. 그러니 그 때를 바라보며 말씀하신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도 그 때 나타날 것입니다. 그가 누구입니까? 마지막 때의 이야기를 보면 나옵니다. 계 1 : 1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될 일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지시하신 것이라”
여기 계시 전달 과정이 자세하게 나옵니다. 처음 하나님이 갖고 계신 것을 예수님에게 주십니다. 나중에 보면 알겠지만 그 말씀을 예수님이 여십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열어서(하늘의 비밀이 열리는 것입니다) 천사에게 주고 그 천사가 요한에게 건네줍니다. 실제로 사건이 일어날 때는 2천 년 전의 요한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겠지요. 그 역할을 하는 일꾼이 등장할 것입니다. 그가 받아서 종들에게 전해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요한의 역할을 하는 일꾼을 찾아 그 비밀을 들어야 합니다. 구원과 영생 - 천국 가는 길은 결코 쉬운 길이 아닙니다. ‘믿으면 천국’ 마귀는 그렇게 우리를 단순무지한 성도로 만들어 멸망의 길로 인도합니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호 4 : 6) 모르면 하나님 백성이라고 하는 내가 망하는 겁니다. 똑바로 배우기 바랍니다.
<모리타니안>
단지 혐오와 의심이 있을 뿐 다른 어떤 증거도 증인도 없습니다. 요즘도 그렇지만 인종차별이고 선입관일 뿐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집단으로 발생하면 그 어떤 증거보다도 무섭습니다. 일방적으로 몰고 갑니다. 합리적인 판단이 개입할 여지가 없습니다. 유색인종에 대한 차별과 더불어 이슬람 세계에 대한 차별도 세계적으로 번져 있습니다. 특히 20년 전 9.11테러 사건 후 전 세계적으로 은밀하게 내재되어 왔습니다. 아직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좀처럼 지워지지 않습니다. 한 나라 안에서조차 차별과 선입관은 존재합니다. 특히 지방색이 두드러집니다. 각 나라마다 다 있을 것입니다. 자기들끼리도 차별합니다. 하물며 다른 나라, 다른 민족이라면 그 마음의 거리는 더 멀어집니다. 물론 그것도 개인적인 차이는 있게 마련입니다. 유난을 떠는 사람이 있습니다. 다루기 매우 힘들지요.
19세기도 아니고 20세기를 지나 21세기가 되었음에도 편견과 차별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어쩔 수 없는 인간이란 굴레 안에서 살면 그럴 수밖에 없는가 싶기도 합니다. 개인이 극단적으로 나가도 때로는 큰 사고를 일으킵니다. 그러나 집단적으로 발생하면 법이란 치장을 하면서 개인의 삶을 철저히 부술 수 있습니다. 국가 권력까지 등에 지고 있으니 그 누구도 저항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철저히 보안 처리합니다. 그 속에서 개인은 사람으로 다뤄지지도 않습니다. 아무도 모릅니다. 어쩌면 알려고 하지도 않을 수 있습니다. 그래도 자유민주주의 국가라는 세계적 명성을 지니고 있기에 어느 순간 밖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리고 인권운동가 변호사의 손에 들어갔습니다.
수년이 지나도록 기소조차 되지 않은 상태에서 감옥 생활을 한다는 것이 가능한가? 그런 일이 민주국가라는 이름의 나라에서 벌어질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제기합니다. 그래서 맡기로 합니다. 왜 그런 일이 생겼는지, 누가 그렇게 방치하도록 할 수 있는지 알아보려 합니다. 그리고 관타나모 수용소로 향합니다. 죄수(?) 아직 재판도 받지 않았는데, 유죄 판결도 받지 않았는데 죄수라고 명명할 수 있습니까? 그러나 진작부터 죄수입니다. ‘살라히’는 6년 전 바다 건너 저 멀리 고향에서 붙잡혀 어디로 끌려 다니다 관타나모까지 왔습니다. 사실 어디인지도 몰랐지요. 우연히 바깥을 내다볼 기회가 있었는데 무슨 안내판에서 보고 알게 된 것입니다.
정부는 어서 유죄 판결을 만들도록 검찰을 종용합니다. 그래서 군 검찰이 맡아 조사합니다. 검찰은 검찰대로 변호사는 변호사대로 허락을 받고 그 동안의 조사 문서들을 어렵게 열람합니다. 9.11테러 조직의 강력한 혐의자입니다. 당시 빈 라덴의 전화를 받았다는 사실 하나만이 증거입니다. 살라히의 사촌이 어떻게 사용해서 연락을 해온 것이지요. 온 세계가 주목하고 있던 테러집단의 우두머리의 전화를 사용해서 연락한 그것을 살라히가 받았던 적이 있습니다. 통화내용이 무엇인지도 모릅니다. 알 필요도 없습니다. 알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증거도 필요 없습니다. 소위 혐의와 연관성만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그것으로 각본은 이미 짜져 있습니다. 이제 자백만 받으면 됩니다. 그러니 온갖 고문이 동원됩니다. 그렇게 해서 작성되었습니다.
왜 미국 관할의 감옥인데 남의 나라에 만들었을까요? 마땅히 미국 땅에 있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 누구도 접근하지 못하도록 일부러 그런 곳에 만들었을 것입니다. 그 안에 누가 수감되어 있는지도 모릅니다. 아주 제한된 수의 사람들만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당사자의 가족들은 속만 태우며 지내겠지요. 어디에 있는지,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모릅니다. 하기는 그 안에서 도저히 견디다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봤자 그 안에 비밀 서류에나 기록되어 있을 뿐 그 누구도 모를 것입니다. 변호사 ‘낸시’도 살라히의 자백서를 보고는 가슴이 철렁합니다. 살라히가 말합니다. 그것을 믿느냐고? 그럴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모릅니다.
군 검찰로 담당했던 ‘스투’ 중령도 조사하다 스스로 놀랍니다. 어떻게 이럴 수가! 법적으로도, 자신의 신앙 양심으로도 도저히 용납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기소하지 않기로 하고 그 자리를 물러섭니다. 상관이 ‘반역자’라고 소리칩니다. 글쎄 , 법치를 지키려는 양심적 검찰관이 반역자인지, 인간 양심을 버리고라도 권력에 의지하여 생사람 잡는 자가 애국자인지, 우리 자신 얼마나 편협한 인간인지를 돌아보게 합니다. 사실 우리나라 안에서 지난 반세기 일어난 일들을 되돌아보면 이런 식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는지 마음이 찡해집니다. 그래도 미국이란 나라에서 일어났기에 법이란 테두리로 문제를 이끌고 나올 수 있었다고 봅니다.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살라히의 ‘관타나모 다이어리’가 책으로 출판되어 먼저 알려졌습니다. 온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습니다. 하기야 21세기에도 이런 일이 생길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상상하기도 싫은 고문들을 감내하며 생존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존경스럽습니다. 그런데 그가 자기를 그렇게도 무섭게 다루었던 사람들에 대하여 원망 불평 하나 없이 다 용서하고 평범한 삶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사실에 더욱 감동과 존경을 표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가능한 일인가요? 아랍어의 ‘자유’는 ‘용서’라는 뜻과 같이 사용된답니다. 정말 놀랍습니다. 과연 용서가 없이 어찌 자유로운 삶을 누릴 수 있겠습니까? 영화 ‘모리타니안’(The Mauritanian)을 보았습니다.
<황야의 결투>
여자의 마음을 얻으려면 어찌 해야 하지요? 이 숙제는 처음 이성에 눈을 떴을 때 대단한 숙제로 떠오릅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어서도 그리고 경험을 이미 했든 안 했든, 그 상황에 부딪치면 변하지 않는 숙제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다르고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쩌면 그래서 나이에 관계없이 가슴은 두근대고 마음은 싱숭생숭해지는 모양입니다. 남들과 다른 독특함이 있다든가, 실력이 뛰어나다든가, 부자라든가, 잘 생겼다든가 등등 유별난 것이 있어야만 마음을 얻고 사랑에 빠지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그럴 만한 개연성과 가능성은 클 것입니다. 그러나 꼭 어떤 특징이 있어서 사랑을 얻고 사랑에 빠지는 것은 아닙니다. 참으로 묘하지요.
어느 날 역마차에서 한 여성이 내립니다. 안락의자에 편히 앉아 쉬고 있던 보안관이 그만 황홀함에 빠져 주체를 하지 못합니다. 여성들을 상대해본 적이 전혀 없는 사람도 아닙니다. 물론 사랑에 빠져본 경험이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첫눈에 그만 꽂힌 것입니다. 용기를 내서 다가가 짐을 내려주고 호텔에 안내해줍니다. 알고 보니 술집 주인 ‘닥 홀리데이’를 찾아온 사람입니다. 얼마 전부터 가까이 지내는 사람이지요. 속으로는 실망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꾸 마음이 가는 것은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이래저래 기회가 되는 대로 최대한 호의를 베풀며 지냅니다. 큰 마을도 아니니 행동반경이 넓지 않습니다. 자주 보게 됩니다.
‘와이어트 어프’ 4형제가 소를 몰고 멕시코로 넘어가려 긴 여행을 합니다. 마을도 멀지 않은 곳에 자리를 정하고 밤을 지내려 합니다. 그 때 마차에 탄 두 사람을 만납니다. 잠시 대화를 나누며 서로 통성명하고 보이는 마을이 ‘툼스톤’이라는 곳이며 놀기 좋은 곳이라 소개 받습니다. ‘클랜튼’과 아들인데 자기에게 소를 팔라고 제의합니다. 그러나 소가 귀한 멕시코로 가서 파는 것이 이득이 크다고 거절합니다. 그렇게 헤어집니다. 그 밤에 막내에게 소떼를 맡기고 3형제는 잠시 마을에 갑니다. 한 말썽꾸러기 인디언 때문에 소란이 일어나고 아무도 말릴 엄두를 내지 못합니다. 보안관까지 배지를 내놓으며 자기 목숨을 챙깁니다. 그 때 놀라 달려온 어프가 해결합니다.
시장이 나서서 마을의 보안관으로 일해줄 것을 제의합니다. 그러나 소를 몰고 떠나야 한다고 거절하지요. 그리고 소떼가 있는 곳으로 돌아옵니다. 소떼는 없어지고 동생은 살해되었습니다. 모두 마을로 돌아옵니다. 시장을 찾아가 보안관 자리를 맡기로 합니다. 동생들은 부보안관이 됩니다. 술집 겸 호텔에서 주인인 닥을 만납니다. 어프와 닥은 서로 소문으로 알고 있습니다. 지내면서 가까워집니다. 닥은 사업을 하지만 이전에는 꽤 실력이 있는 의사였습니다. 무슨 사연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멀리 외진 곳으로 떠나온 것입니다. 그리고 툼스톤에 자리 잡고 사업을 합니다. 사람들은 그의 총 솜씨를 알기에 함부로 건드리지 못합니다.
술집에서 노래하며 일하는 ‘치와와’가 닥을 좋아합니다. 닥도 가까이 지냅니다. 그런데 어느 날 멀리서 여자가 찾아옵니다. ‘클멘’은 오래도록 닥을 찾아 여러 곳을 돌아다니다 툼스톤까지 왔습니다. 드디어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을 찾아낸 것입니다. 그런데 닥은 매몰차게 거부합니다. 자신은 옛날의 그 사람이 아님을 강조합니다. 잘못 찾아왔으니 잊어버리고 당장 떠나라고 종용합니다. 아니면 자기가 떠나겠다고 위협합니다. 여자가 떠나겠다고 합니다. 옆에서 초조하게 지켜보던 치와와가 덩달아 클멘을 밀어냅니다. 모든 것을 준비하고 떠나려 하는데 역마차 시간이 맞지 않습니다. 그래서 며칠 더 묵으려는데 닥이 내가 간다고 마차를 불러 도망치듯 떠납니다.
어프는 동생을 살해한 자와 소도둑이 바로 클랜튼 일가라는 심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확실한 물증이 없어 찾으며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다 치와와 목에 걸린 목걸이를 봅니다. 죽은 동생이 자기 애인에게 줄 선물이라고 자랑하던 바로 그것입니다. 여자를 붙들고 추궁합니다. 닥이 주었다고 말하지요. 어프는 떠난 닥을 붙잡으려 말을 타고 뒤쫓습니다. 결국 잡아오는데 무슨 소리냐고 자기가 아니라고 합니다. 그래서 다시 치와와를 찾아 추궁합니다. 클랜튼의 아들 ‘빌리’라는 사실을 알아냅니다. 그 순간 창밖에서 숨어있던 빌리가 치와와를 쏘고 달아납니다. 어프의 동생 ‘버질’이 뒤를 쫓아가 사살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집까지 들어갔다가 등에 총을 맞고 죽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 유명한 ‘OK 목장의 결투’가 벌어집니다. 클랜튼 일가를 확실하게 처리하고 어프는 동생들을 데리고 아버지가 기다리는 자기네 집으로 돌아갑니다. 그 마을 입구에 클멘이 서서 환송해줍니다. 클멘은 시장의 권유로 그 마을의 아이들 선생님으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어프가 클멘에게 다짐합니다. 내가 소를 몰고 반드시 다시 올 겁니다. 예, 기다릴게요. 그렇게 잠시 헤어집니다. 우리가 잘 아는 ‘나의 사랑 클레멘타인’ 음악이 흐릅니다. 영화 ‘황야의 결투’(My Darling Clementin)을 보았습니다. 1946년 작입니다. 정말 옛날 서부영화의 정취를 느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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