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 먹는 풍경/안주철
둥그렇게 어둠을 밀어올린가로등 불빛이 십원일 때
차오르기 시작하는 달이 손잡이 떨어진 숟가락일 때
엠보싱 화장지가 없다고 등 돌리고 손님이 욕할 때
동전을 바뀌기 위해 껌 사는 사람을 볼 때
전화하다 잘못 뱉은 침이 가게 유리창을 타고
유성처럼 흘러내릴 때
아이가 아이스크림을 사러 와
냉장고 문을 열고 닫을 때마다
진열대와 엄마의 경제가 흔들릴 때
가게 평상에서 사내들이 술 마시며 떠들 때
그러다 목소리가 소주 두병일 때
물건을 찾다 엉덩이와 입을 삐죽거리며 나가는 아가씨가
술 취한 사내들을 보고 공짜로 겁먹을 때
이놈의 가게 팔아버리라고 내가 소릴 지를 때
아무 말 없이 엄마가
내 뒤통수를 후려칠 때
이런 때
나와 엄마는 꼭 밥 먹고 있었다
<시 읽기> 밥 먹는 풍경/안주철
가난은 왜 우리를 소리 지르게 하는가
사는 일의 고단함은 밥벌이의 고단함과 겹쳐진다. 밥을 벌기 위해 활동하는 것은 사람이나 동물이 다 같다. 집을 짓고, 빵을 굽고, 병자를 치료하고, 가축을 도살하고, 누군가를 가르치고, 건물 바닥을 쓸고, 닦고 하는 그게 다 사람의 일이다. 동물은 주린 배를 채우려고 먹이 활동을 한다. 반면 사람에게 일이란 재화와 영역의 생산 방식이자 ‘인간의 조건human condition’을 실현하는 중요한 수단이다.
일을 통한 생산은 교환 가능한 재화와 용역을 넘어서서 바로 인간을 규정하는 조건이다. 개는 제가 얻은 뼈를 다른 개의 먹잇감과 교환하지 않는다. 공동체 사회에 뿌리를 내려야만 소외와 주변화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밥벌이와 사회에 뿌리를 내리는 수단인 일자리를 빼앗는 것은 사회적 죽음을 낳는다. 일자리는 일의 ‘자리’이고. 동시에 사회관계 촉매의 ‘자리’이며, 생존을 잇는 ‘자리’다. 일자리를 잃은 사람은 배가 바다에 침몰하듯이 곤궁함에 빠져 존재의 나락으로 가라앉는다. 그렇다 실업은 경제활동의 중단과 더불어 공공 영역에서의 소외의 초래하는 사태다. 그 실업의 당사자는 사회에서 뿌리 뽑힌 채 방치된다. 따라서 모든 사람에게 생계의 방편인 일자리를 만들어주는 것은 국가의 의무이기도 하다.
비천한 노동은 자아를 위축시키고 삶을 피폐하게 한다. 사회적 의미의 생산에 매개되지 않는 일에 매달리는 것은 존재를 탕진으로 이끌고 영혼을 부패시킨다. 어떤 일을 하느냐에 따라 사회적 지위와 신문이 결정되는 탓에 더 좋은 일자리를 구하려는 경쟁이 치열해지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다. 이 경쟁에서 밀린 자들은 빈곤이라는 막장으로 내몰린다. 강제 퇴직을 당하거나 날품팔이 노동자, 노숙자, 폐지를 주워 끼니를 잇는 노인들은 이 사회의 약자들이다. 이들이 얼마나 고단한 삶을 살고 있는지. 한 끼의 밥을 위해 그들이 어떤 수고를 치르는지를 나 몰라라 해서는 안 된다.
여기 대물림하는 가난에 처한 자의 풍경을 그려내는 시가 있다. 이 시는 모종의 사건들이 일어나는 순간들, 즉 ‘때’를 관찰하고 그에 대한 사유를 펼친다. 때는 시간이 분절되는 점들, 계기적 기점을 가리킨다. 이 시의 배경은 동네에서 운영하는 소규모 구멍가게이고, 이 장소는 ‘엄마’와 ‘나’의 2인극이 펼쳐지는 소규모 무대다.
태양계는 우리 은하 중심에서 2만 7000억 광년 떨어져 있고 이 은하는 지름이 1억 광년이 넘는 처녀자리 초은하단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이 작은 무대는 우주의 변방 끄트머리쯤에 있다. 삶의 물질적 실감이 주르륵 펼쳐지는 이 무대를 지배하는 힘은 가난이 만든 중력이다. 손님이 욕할 때, 잘못 뱉은 침이 가게 유리창에 흘러내릴 때 “이놈의 가게 팔아버리라고 내가 소리지”르고, 엄마는 “내 뒤통수를 후려”친다.
이 찰나를 지시하는 ‘때’란 무엇인가. 가게는 밥을 버는 소규모 노동의 현장이고. 이곳에서 사람을 상대하는 순간은 비천한 노동이 삶을 모욕하는 때다. 소규모 가게를 꾸리며 미성숙한 인격을 가진 사람들을 상대하는 노동의 비천함은 자아의 존엄성을 훼손하고 정체성을 망가뜨린다. 시인은 그 사례를 열거하며 “이런 때”가난의 모욕과 모독을 견디며 “나와 엄마는 꼭 밥 먹고 있었다”라고 매조진다. 밥을 먹을 수 있는 것은 이 비루한 노동을 견뎌낸 결과이고, 공짜 밥은 없다는 엄혹한 진실의 외시外視일 테다.
식구는 한 식탁에서 밥을 먹으려 정을 쌓고 유대감을 두텁게 한다.
“모여 앉아 밥을 먹지 않으면/밥상은 한쪽으로 기울어 스르르 미끄러진다.”
가게는 지켜야만 하는 노동의 현장인데. 그걸 없애자는 생각은 가족 생계를 위태롭게 할 수도 있다. 가난은 밥벌이의 고단함을 낳는다. 세계의 부조리 중에서 가장 흔하고 하찮은 것이 가난이라고 할 때 그것은 버려지고, 허물어지고, 희박해지고, 사라지고, 말라붙는 일이다. 가난한 시인이 집 한 채를 사거나 아프리카에 가서 모래를 만져보는 일이 “다음 생에 할 일 일들”이라고 한다면 궁상을 떨며 겪어내야 하는 가난은 필경 “이번 생”의 일이리라.
시인은 가난이라는 바다를 탐색하는 심해 잠수부다. 가난의 일이란 소규모로 운영하는 가게 문을 열고 닫는 몸의 노동이자 감정 노동이다. 이 노동이 떠받치는 게 가난이다. 가난의 나날을 버텨내는 일과 그 비천한 노동을 몸으로 받아내는 주체는 하나다.
사람은 밥을 먹어야 산다는 명제에 따르면, 밥은 한 끼의 식사만이 아니라 생명 부양에 필요한 모든 생물학적 필요를 뭉뚱그려 드러내는 표상이다. 밥이 입으로 오기까지 벌이가 있어야 하고, 그 벌이를 위해 몸을 부려야 한다. 입으로 오는 단 한 숟가락의 밥도 공짜는 없다. 그게 밥이 품은 보편성이고, 예외가 없는 삶의 진실이다. 일하지 않는 자는 밥을 먹지도 말라고 한다. 하지만 일하지 않더라도 더운밥이든지 찬밥이든지 먹어야 생명을 건사할 수 있다. 이 생물학적 엄연함 속에서 일하는 자와 일하지 않는 자는 먹어야 산다.
밥 먹는 풍경과 밥을 버는 풍경이 하나로 겹쳐지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다. 시의 화자는 “이놈의 가게를 팔아버리라고” 소리친다. 사람답게 살아보자는 아들의 저항에 엄마는 뒤통수를 후려치는 것을 대응한다. ‘나’는 비루한 삶은 삶이 아니라고 저항하지만 “엄마‘는 ’나‘의 생각을 잘못된 것이라고 말한다. 물론 엄마는 그 말을 입 밖에 내지는 않는다. 그저 아들이 뒤통수를 후려치고 잠자코 밥을 먹은 행위로 그 대답을 대신한다.
밥이 입에 들어가는 일은 생명을 부양하는 행위일 테다. 그것은 인류 종족이 수천 년 동안 지구에 살아남은 거룩한 방식이다. “밥 먹는 풍경”이 거룩한 것은 밥을 어떻게 구하고 먹느냐 하는 일이 곧 우리가 어떤 사람인가를, 그 인격과 내면의 가치를 낱낱으로 드러내는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 주변에 널린 생활의 척박함이 가난이고, 이것이 사회적 질병이라고 한다면, 그 질병으로 말미암아 꿈을 꺾거나 모멸감에 젖은 채로 절망하는 사람도 드물지는 않을 테다. 가난은 사회적 기회의 박탈이고, 중심에서 주변으로의 내침이며, 모멸감을 강제하는 인간 차별의 한 방식이다. 사람은 가난으로 비굴에 무릎을 꿇고, 그 모독을 묵묵히 견딘다. 가난은 언제나 힘이 세다. 가난이 삶의 의미와 기쁨을 앗아간다는 점에서 그것은 견뎌야 하는 굴욕이고 비참일 것이다.
시에서 가난의 세목이나 가난이 작동하는 구체적 양태를 찾는 건 어렵지 않다. ‘나’는 부모의 가난을 대물림하고, 이미 충분히 가난한 살림에 적응한다. 어떤 이들에게 가난은 태어날 때부터의 관례다. <밥 먹는 풍경>은 가난에 관한 시가 아니다. 가난 속에서 어떻게 삶을 올바름과 품격, 자기의 올곧음과 존엄을 지켜낼 수 있을 것인가를, 젊은 시인은 묻는다.
―장석주, 『지금은 시가 필요한 시간』, 나무생각, 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