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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618. 묵상글 ( 연중 제11주간 토요일. - 어떻게 하면 걱정없이 살 수 있을까?.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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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618. 연중 제11주간 토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어떻게 하면 걱정없이 살 수 있을까?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입을까?’ 하며 걱정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다. 그날 고생은 그날로 충분하다.”"
어떻게하면 걱정없이 살 수 있을까?
걱정이 떠나지 않는 우리 삶을 생각할 때
이 문제는 행복의 열쇠라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문제를 생각하면 우리는 즉시 걱정거리가 없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제 생각에 많은 경우 사서 걱정한다는 말이 딱 맞는 말이고
오늘 주님께서도 비슷한 취지에서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하게 하라고 하십니다.
사실 걱정은 내일 것을 앞당겨하는 마음 고생이요,
오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을 괜히 하는 마음 고생이고,
신앙적으로는 믿음이 없기 때문에 하는 쓸데없는 마음 고생입니다.
예를 들어 부모 특히 엄마는 자식이 집을 나설 때부터 걱정합니다.
이때의 걱정은 물론 사랑이지만
다른 경우, 상당수의 걱정은 욕심의 산물이고
그리고 신앙인의 경우는 불신의 결과입니다.
무엇을 먹을까 걱정하지 않은 성인의 대표가 성녀 클라라입니다.
아시다시피 클라라는 가난 특전을 교황청에 청했습니다.
가난 특전이란 가난 서원을 지키지 않는 특전이 아니라
프란치스코의 정신대로 가난을 살 수 있는 특전이지요.
클라라는 어쩌면 프란치스코의 가난보다도 더 철저한 가난을 살고자 했지요.
프란치스코는 아무 소유없이 그리고 정처없이 가난을 철저히 살고자 했지만
클라라는 남자들처럼 떠돌아다닐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수도원 안에서 살되
외부로부터 고정적이고 안정적인 수입이 없이 그때그때 주어지는 대로
하루하루 살고자 다시 말해서 하루살이를 하고자 했는데 그렇게 살 수 있게
해달라고 청한 것이 가난 특전이지요.
왜냐면 주교들이 그것은 너무 엄격한 가난이고 불가능하다고 자주 클라라에게
완화된 가난을 살라고 사랑과 염려의 압력을 가하기 때문이었지요.
그러나 그럼에도 클라라는 가난을 끝까지 고수하였는데
그것은 자비하신 하느님께 대한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하느님을 믿는 것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하느님의 능력을 믿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하느님의 사랑을 믿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듯 인간 애비도 제 자식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아는데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더 좋은 것을 주실 것이고,
풀과 새에게도 필요한 것을 주시는 하느님 아버지께서 인간에겐
더더욱 필요한 것을 주실 거라는 믿음입니다.
사랑과 자비의 하느님께 대한 이 믿음은 고통과 죽음을 주셔도,
지금은 그것이 악이어도 내일의 내게 좋은 것이고 필요한 것이기에 주신 것이고,
내일의 고통과 죽음도 모레의 내게 좋고 필요한 것이기에 주신 거라고 믿습니다.
그러니 걱정,
곧 앞당겨 하는 마음 고생은 할 필요가 없습니다.
내일 걱정은 내가 아니라 '내일'이라는 자가 하는 거라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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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618. 연중 제11주간 토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먼저 하느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마태 6,33)
대체 어떻게 사는 것이 신앙인의 길일까? 어떻게 사는 사람이 신앙인일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마태 6,24)
그렇습니다. 신앙인은 섬기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아무나 섬기는 사람이 아니라, 주인이신 한 분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곧 물질이나 자기 자신 등의 피조물을 우상으로 섬기거나, 자기의 판단이나 주장이나 뜻을 섬기지 않고 주인이신 하느님과 그분의 뜻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이 아닌 다른 것을 섬기는 것은 우상숭배요, 하느님을 업신여기는 일이요 모독하는 일이 됩니다.
사실, ‘섬김’은 자신이 누구에게 속해 있느냐의 신원과 정체성의 문제라 할 수 있습니다. 곧 주님께 속하며, 주님을 믿고 따르는가? 아니면, 다른 피조물, 곧 물질이나 자기 자신에 속하며, 자기 뜻과 생각을 주인처럼 섬기고 따르는가의 문제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먼저 우리가 주님께 속해 있고, 하느님 나라에 속해 있음을 깨닫고 받아들여야 할 일입니다.
그러니 그리스도인의 삶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않는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을 믿는 이는 당연히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이신 하느님의 돌보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먼저 하느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마태 6,33)
그렇습니다. 우리는하느님과 하느님 나라에 속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는 사람”입니다. 곧 자신의 성취나 자신의 편리나 이기, 자신의 의로움을 찾는 사람이 아니라, 그 모든 것에 앞서,“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는 사람”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느님 찾기’를 삶의 본질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인 것입니다. 곧 그 모든 것을 통해서, 하느님께 응답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혹 내가 지금물질이나 자기 자신을 섬기고 있다면, 하느님을 업신여기고 있음을 보아야 할 일입니다.또 자신의 입을 것이나 먹을 것 등 자신의 처지나 형편만을 탓하고 걱정하고 있다면, 주님이신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찾아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언제 어디서나 항상 주님을 ‘첫 자리’에 모시고, 믿고 따르며 섬겨야 할 일입니다.
하오니, 주님! 당신을 업신여기지 않게 하소서!
재물을 섬기느라, 저 자신을 섬기느라, 주인이신 당신을 업신여기지 않게 하소서!
제가 아니라, 당신이 재물의 주인이요, 저의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있다가도 없어질 것이 아니라, 진정 있는 것,
이미 선물로 준 당신의 나라와 의로움을 찾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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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618. 연중 제11주간 토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온전히 의탁하라
일상을 살아가면서 근심걱정 없이 살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겉으로 평화로워 보이는 사람도 알고 보면 남모르는 걱정을 안고 살아갑니다. 사실 모두가 근심 걱정을 하지만 결정적으로 무엇을 걱정하느냐가 다를 뿐입니다. 걱정해 봤자 아무 소용없는 것을 걱정하는 어리석음은 그만둬야 하겠습니다.
한 통계에 의하면, 우리가 하는 걱정거리의 40%는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에 대한 것이고, 30%는 이미 일어난 사건들, 22%는 사소한 사건들, 4%는 우리가 바꿀 수 없는 것들이랍니다. 나머지 4%만이 우리가 대처할 수 있는 진짜 사건이라고 합니다. 즉 96%의 걱정거리가 쓸데없는 걱정입니다.
시편저자는 “주님 안에서 즐거워하여라. 그분께서 네 마음이 청하는 바를 주시리라. 네 길을 주님께 맡기고 그분을 신뢰하여라. 그분께서 몸소 해 주시리라”(시편37,4-5).하였습니다. 결국 믿음을 가진 사람은 쓸데없는 걱정을 하지 않습니다. 모두가 걱정거리를 가지고 있지만 어떤이는 주님께 의탁하고, 어떤 사람은 그렇지 못하여 근심을 끌어안고 삽니다. 그러나 실상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입니다. 믿고 맡기며 최선에 최선을 다하고는 주님의 처분을 기다릴 뿐입니다. 아무리 걱정해도 해결되지 않는 걱정거리에 매이면 걱정거리만 커집니다. 눈을 돌려 “야훼이례”, 주님께서 마련해 주신다는 믿음에로 한발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루카복음에 보면 시중드는 일로 분주한 마르타에게 주님께서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루카10,41-42). 하시며 주님의 말씀을 듣는 마리아의 위치를 확인해 주셨습니다. 말씀을 듣고 그 말씀 안에 머물면 쓸데없는 일로 바쁘지 않을 것이요, 또 괜한 걱정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생명을 유지하기위한 음식과 몸을 보호하기위한 의복의 걱정에 앞서서 그보다 더 가치 있는 것에 마음을 두어야 하겠습니다. 순간의 선택이 영원을 좌우합니다. 변함없이 주님을 선택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주님의 섭리 안에 있고, 주님께서 세상 모든 것을 주관하십니다. 공중의 새나 들판의 꽃들조차도 하느님의 안배 없이 존재하는 것은 없습니다. 그리고 특별히 인간은 하느님의 모습을 닮은 존재로 ‘만물의 영장’입니다. 이 만물의 영장인 인간이 우주 만물을 다스릴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그러한 하느님의 돌보심을 믿고 신뢰하며 모든 근심걱정을 송두리째 맡겨야 함은 당연한 것입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 입을까?’ 이러한 물음은 인간적인 걱정입니다. 여기에는 인간의 노력으로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고 거기에 행복이 있다는 생각이 깔려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노력도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지지 않으면 헛된 일이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의 의로움을 찾으시기 바랍니다. 인생여정에 우선적인 선택이 주님이기를 희망합니다. 하느님을 차지하면 모든 것을 얻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께 의탁하고 섭리에 맡기면 모든 일이 잘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모든 걱정을 그분께 내 맡기십시오. 그분께서 여러분을 돌보고 계십니다”(1베드5,7). 하느님께서 나를 선택하신 과거를 기억하고 미래의 영원한 생명에의 약속에로 이끌고 계시다는 확신 속에 뽑아주신 좋으신 분께 대한 응답으로 오늘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최선에 최선을 다하고 주님께 온전히 의탁할 때 영원한 새 삶이 시작됩니다.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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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618. 연중 제11주간 토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제 무릎에는 커다란 상처 자국이 하나 남아 있습니다. 자전거를 타다가 넘어져서 생긴 상처인데, 넘어졌을 때를 떠올리면 아직도 어이가 없습니다.
동창 신부와 자전거를 함께 타고 있었습니다. 동창 신부가 앞서가고 있었는데, 돌부리 위를 휙 지나가는 것입니다. 저 역시 동창 신부처럼 휙 지나가려고 했는데, 순간적으로 겁이 났습니다. ‘돌부리에 걸려서 넘어지지 않을까?’라는 두려움이 생긴 것입니다.
결과는 예측대로 이곳에서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걸려 넘어진 것이 아니라 순간적으로 겁이 나서 손으로 브레이크 레버를 확 잡았을 때 미끄러진 것입니다. 자전거에 제 몸을 온전히 맡기지 못했습니다. 자전거를 믿지 못해서 작은 돌부리에도 겁을 낸 것이었습니다.
인생이라는 삶 안에서 우리는 참으로 많은 두려움 속에 살게 됩니다. 분명히 주님께서 함께하시는데도 주님은 보지 않고 작은 돌부리와 같은 장애물만 보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믿음의 눈으로 주님께 시선을 떼지 말아야 합니다. 나를 넘어지게 하는 쓸데없는 두려움의 늪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복음을 통해서 “걱정하지 마라.”라고 강조해서 말씀해 주십니다. 이는 단순히 무심함이나 무관심해지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 모든 근심 걱정에서 해방해 주시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느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통해서 걱정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늘의 새들과 들에 핀 나리꽃들을 예를 드시면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입을까 하며 걱정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이 모든 것을 다 알아서 해결해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으라고 하십니다.
하느님의 의로움을 떠올리면서 하느님의 뜻에 맞게 살아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하느님의 뜻에 맞게 사는 사람은 굳은 믿음을 통해 걱정하지 않게 됩니다. 하느님만을 바라보면서 삶의 방향을 정확하게 알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많은 걱정과 두려움 속에서 힘든 삶을 사는 사람이 많습니다. 걱정하고 두려움을 간직하고 있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더 힘든 시간의 연속성 안에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걱정과 두려움은 하느님 나라를 바라볼 때 별것 아님을 깨닫습니다.
믿음의 눈으로 하느님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는데 더 큰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그 노력을 통해 조금씩 하느님을 보고 하느님 나라에 가까워질수록 우리의 걱정과 두려움은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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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은 세상의 가면을 벗기고 모든 것에서 하느님을 드러낸다(샤를 드 푸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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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618. 연중 제11주간 토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한국과 미국의 문화는 다른 점이 있습니다. 기부와 상속에 있어서 조금 다른 것 같습니다. 미국의 부자들은 ‘기부’에 인색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서 명예와 부를 얻었지만 그것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리기 때문입니다. 미국 유수의 대학들은 대부분 부자들의 기부에 의해서 설립되었고, 운영되고 있습니다. 엄청난 부를 이루었던 록펠러는 50이 넘으면서 회복될 수 없는 병에 걸렸습니다. 가족들과 지인들은 록펠러에게 이왕 죽게 된다면 이웃에게 나누면서 죽으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그 말을 들은 록펠러는 자신의 재산을 이웃에게 나누었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록펠러는 나누면서 건강을 회복하였다고 합니다. 그렇게 건강해진 록펠러는 그 뒤로 40년을 더 살았고 97세에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비단 록펠러뿐만 아니라 미국의 부자들은 학교, 도서관, 공연장, 미술관 등의 설립에 엄청난 기부를 하였다고 합니다. 이런 기부문화는 지금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고 합니다. 이것이 미국 문화의 진정한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의 부자들도 요즘은 이런 기부문화에 동참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상속에 대해서도 미국은 한국과 조금 다른 점이 있습니다. 부모도 자식에게 재산을 물려줄 생각을 많이 하지 않습니다. 잘 키워주고 독립할 수 있도록 해 주면 그것으로 끝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식들도 부모의 재산에 마음을 두지 않습니다. 독립하면 스스로 살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부보와 자식이 재산으로 묶이는 것이 아니라 존경과 사랑으로 묶이는 것입니다. 제가 만나본 이민 2세대들도 대부분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부모님의 재산은 부모님의 것이니 부모님이 알아서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이야기하였습니다. 재산을 자식에게 물려주는 것이 아니라 자식에게는 세상을 살아갈 지혜를 물려주는 것이 더 좋을 것입니다. 상속 때문에 형제들이 법정에서 재판을 받는 경우를 보았습니다. 상속 때문에 형제들이 갈등과 불화가 생기는 것도 보았습니다. 부모의 재산은 전적으로 부모의 선택에 달려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으로 기부를 한다면 그것도 부모의 선택입니다. 그것으로 여행을 다닌다면 그것도 부모의 선택입니다.
다행히도 저의 부모님은 세상의 재물은 물려주지 않았습니다. 덕분에 형제들이 상속 때문에 머리 아플 일도 없었습니다. 감사드릴 일입니다. 그러나 부모님께서는 다른 것을 물려 주셨습니다. 하느님을 믿고 구원받아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신앙’입니다. 부모님께서는 기도로서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생전에 많은 대자와 대녀를 두셨습니다. 대부와 대모로서 신앙인의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자식들에게 신앙을 물려줄 수 있다면 그것보다 더 값진 상속은 없을 것입니다. 부모님 모두 건강하게 사시다가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선종하였습니다. 미국에서도 한국에서도 비슷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자식들에게 부모의 신앙이 전해지지 않는 것입니다. 바쁘다는 이유로, 세상에서 성공해야 한다는 이유로 신앙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릇은 무엇을 담느냐가 중요합니다. 쓰레기를 담으면 쓰레기통이 될 것입니다. 보석을 담으면 보석함이 될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도 그릇과 같습니다. 무엇을 담아야하는지 늘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우리가 담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입을까?’ 하며 걱정하지 마라. 이런 것들은 모두 다른 민족들이 애써 찾는 것이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함을 아신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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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618. 연중 제11주간 토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 중심의 관상적觀想的 삶
-섬겨라, 보라, 믿어라-
라틴어 짧은 세 격언을 기억할 것입니다.
1.메멘토 모리(memento mori); 내 죽음을 기억하라.
2.아모르 파티(amor fati): 내 운명을 사랑하라.
3.카르페 디엠(carpe diem); 내 현재를 잡아라.
내 죽음을 기억하면, 내 운명을 사랑하게 되고, 내 현재를 잡고 본질적 깊이의 참 절박한 삶을 살게 됩니다. 바로 하느님 중심의 관상적 삶에 철저할 때 저절로 깨달아 살게 하는 진리입니다. 믿는 이들에게 하느님은 삶의 목표이자 방향이요, 삶의 중심이자 의미입니다. 인간이 물음이라면 하느님은 답입니다. 인간의 근원적 불행은 하느님을 잊음에서 기인합니다. 최근 썼던 두편의 짧은 고백입니다.
-“갈곳이 없다
가고 싶은 곳이 없다
만나뵐 분이
만나고 싶은 분이 없다
오늘 지금 여기 이 자리에서 만나는
주님이시다”-2022.6.12
-“외로움도
그리움도
기다림도 없다네
늘
오늘 지금 여기
꽃자리에서
만나는
함께 하는
주님이시기에”-2022.6.16
이런 글은 제 소망所望의 고백이기도 합니다. 한결같이 오늘 지금 여기서 만나는 주님과의 관계를 중시한 고백들입니다. 오늘 복음은 하느님 중심의 관상적 삶에 대해 참 좋은 가르침을 줍니다.
첫째, “섬겨라!”입니다.
하느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행복의 원천인 하느님을 삶의 중심에 모시고 한결같이 섬기는 것입니다. ‘섬긴다’는 우리 말이 참 좋습니다. 두 주인을 섬길 수 없습니다. 삶의 중심이 둘 일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이냐 재물이냐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과 재물, 둘 다 선택할 수는 없습니다. 정말 힘든 것은 중심이 둘일 때 마음이 갈리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를 택하여 우선순위를 확고히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복음 말씀이 분명합니다.
“아무도 주 주인을 섬길 수는 없다. 한쪽은 미워하고 다른 쪽은 사랑하며, 한쪽은 떠받들고 다른 쪽은 업신여기게 된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는 없다.”
불행의 근원은 하느님이 아닌 세상 우상이, 재물이, 돈이 삶의 중심이 될 때 시작됩니다. 열왕기 하권의 제1독서가 오늘 갑자기 역대기 하권으로 바뀌니 어제의 독서와 자연스럽게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역사는 반복됩니다. 악순환의 반복같습니다. 조선시대 사화士禍의 모습이 오늘의 정치 현실에서도 양상만 달리하듯 그대로 반복되듯 말입니다.
여호야다 사제의 개혁으로 맑게 갠 날씨 분위기가 오늘은 폭풍우 치는 험한 날씨로 변했습니다. 배은망덕하게도 요아스 임금이 유다 대신들의 꾐에 빠져 주 저희 조상들의 하느님의 집을 저버리고, 아세라 목상과 다른 우상들을 섬깁니다. 주님은 예언자들을 보냈지만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마침내 요아스 임금은 즈카르야의 아버지 여호야다가 자기에게 바친 충성을 기억하지 않고, 충언하던 그의 아들 예언자 즈카르야를 죽입니다. 이로 인해 그의 신하들이 모반을 일으켜 요아스 임금을 침상에서 살해합니다. 사람들은 그를 다윗성에 묻기는 하였지만, 임금들의 무덤에는 묻지 않았습니다. 그대로 반복되는 악순환의 역사입니다. 하느님 중심을 떠난 자업자득의 업보입니다. 삶의 중심인 하느님을 망각할 때, 그 중심 자리에 하느님 대신 어김없이 자리 잡는 우상이나 세상 것들을 섬길 때 여지없이 반복되는 악순환의 역사입니다.
그러니 주님을 삶의 중심에 모시고 한결같이 섬기는 일이 얼마나 본질적인 일인지 깨닫습니다. 우리에게 영성이 있다면 ‘종servant과 섬김service’의 영성이 있을 뿐이요, 직무와 권위가 있다면 단 하나 섬김의 직무와 섬김의 권위가 있을 뿐입니다. 새삼 우리 믿는 이들의 본질적 업종은 ‘서비스업’임을 깨닫게 됩니다. 주님을 섬기고 주님을 섬기듯 이웃을 섬기는 것입니다. 성 베네딕도 역시 그의 수도공동체를 주님을 섬기는 배움터로 정의합니다.
둘째, “보라!”입니다.
경청의 들음도 중요하지만 있는 그대로의 실재를 직시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감사도 행복도 발견이자 선택입니다. 하느님 중심의 관상적 삶에서 발견의 기쁨, 발견의 새로움, 발견의 놀라움입니다. 참으로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발견할 때 저절로 놀랍고 새롭고 좋습니다. 그대로 관상의 삶입니다. 예수님 역시 볼 것을 강조하십니다.
“하늘의 새들을 눈여겨 보아라. 그것들은 씨를 뿌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을뿐만 아니라 곳간에 모아들이지도 않는다. 그러나 하느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그것들을 먹여 주신다. 너희는 그것들 보다 더 귀하지 않으냐? 너희 가운데 누가 걱정한다고 해서 자기 수명을 조금이라도 늘릴 수 있느냐?”
“들에 핀 나리꽃들이 어떻게 자라는지 지켜보아라. 그것들은 애쓰지도 않고 길쌈도 하지 않는다. 솔로몬도 그 온갖 영화 속에서 이 꽃 하나만큼 차려 입지못하였다. 오늘 있다가도 내일이면 아궁이에 던져질 들풀까지 하느님께서 입히시거든, 너희야 훨씬 더 잘 입히시지 않겠느냐?”
예수님의 자연성서 렉시오 디비나 묵상이 정말 깊고 참신합니다. 인간의 불행은 자연에서 떠난 결과요 이런 관상적 눈의 상실에서 기인합니다. 감사와 감동, 감탄을 잃어버려 많은 영혼들이 병든 세상입니다. 그리하여 눈만 열리면 신비롭고, 놀랍고, 새로운 기적들로 가득한 세상인데 이 걸 못보고 지내는 것입니다. 새처럼, 꽃처럼 자유롭고 아름다운 영혼의 소유자 예수님이요, 예언자이자 신비가이요, 관상가이자 시인인 예수님입니다. 관상적 차원이 너무나 결핍된 오늘날의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셋째, “믿어라!”입니다.
늘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을 철석같이 믿는 것이요 걱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믿음 부재를 드러내는 걱정과 두려움, 불안입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주님의 천둥같은 가르침이자 깨우침입니다.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 그러므로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입을까? 하며 걱정하지 마라. 이런 것들은 모두 다른 민족들이 애써 찾는 것이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함을 아신다.”
기도와 사랑뿐 아니라 믿음 역시 초보자인 우리임을 깨닫습니다. 우리 삶은 믿음의 여정입니다. 평생 믿음을 배워가면서 주님과 깊어지는 우정의 사랑입니다. 참으로 탓할 것은 우리의 부족한 믿음이요 청할 것은 단하나 좋은 믿음뿐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으십시오. 하느님 중심의 관상적 삶을 늘 새로이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필요한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입니다. 내일을 걱정하지 마십시오.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입니다. 그날 고생은 그날로 충분합니다. 바로 오늘 지금 여기서 주님과 함께 하늘 나라를 살라는 말씀입니다. 토니 드 멜로 신부는 말합니다.
“당신은 지금 행복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갖추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행복은 발견이자 선택입니다. 바로 오늘 지금 여기서 행복을 발견하고 선택하여 사는 것입니다. 오늘이 내일입니다. 이렇게 오늘 행복을 살면 내일은 내일대로 행복할 것입니다. 행복의 원천인 주님은 오늘이나 내일이나 늘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바로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이렇게 행복을 살도록 도와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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