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라켈수스 Paracelsus】 〔독성학의 아버지〕
‘용량이 독을 만든다’
약 500년 전, 이탈리아의 페라라에서 테오프라스투스 봄바스투스 폰 호엔하임Theophrastus Bombastus von Hohenheim 이라는 젊은이가 박사논문을 쓰고 있었다. 그는 박사학위를 따기가 쉽지 않았다. 똑똑하지 않거나, 논문이 학문적 수준을 충족시키지 못해서가 아니었다. 그가 당시 의학계에서 일반적이던 규칙들을 따르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스위스에서 태어난 이 젊은이는 당시 주류 의학에 반기를 들고, 기존의 치료법과 이론적 원칙을 의문시했다.
결국 박사학위를 따고 명망 있는 자리에 올랐지만, 그는 일생 동안 사회적으로 매장당하다시피 하며 살았다. 고대의 갈렌Galen과 히포크라테스Hippocrates에게서 유래한 4체액설을 바탕으로 하는 치료 원칙들에 의문을 제기하다가 반감을 산 나머지, 1528년에는 자신이 활동하던 바젤에서 추방당하기까지 했다.
그의 삶과 행적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많지 않다. 박사논문을 쓰던 시기, ‘파라켈수스’로 개명한 이유도 알 수 없다. 독일식 이름인 ‘호엔하임’을 단순히 라틴어식으로 바꾼 것일까? 그러나 파라켈수스는 ‘켈수스Celsus를 넘어서는’이라는 뜻으로 읽힐 수도 있다. 켈수스가 고대의 의학서 저술가였으므로, 파라켈수스라는 이름은 고대의 의학을 넘어서겠다고 천명한 것일 수도 있다. 어쨌든 그는 이런 이중적인 의미를 의식했을 것이고, 그 이름으로 의학과 연금술, 철학과 점성술을 논했다. 전통에 반기를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최초의 ‘현대적’ 의사로 불리지 않는 것은 그의 저술과 가르침이 실험보다는 사상과 확신에서 연유했기 때문이다. 질병의 주된 원인을 별들의 영향으로 설명하거나, 신이나 ‘정령’의 활동에 대해 언급한 것은 극히 개인적인 의견이었다.
하지만 —광물이든, 식물이든— 물질이 인체에 미치는 영향과 관련하여 올바른 방향을 취함으로써 그는 현대 약리학의 기초를 놓았다. 그의 믿음에 근거한 성공적인 치료는 당대 그를 살아 있는 전설로 만들어주었던 것이다.
용량이 독을 만든다.
파라켈수스는 이미 500년 전에 그렇게 가르쳤다. 단순하면서도 머리에 쏙 들어오는 멋진 말이다. 파라켈수스는 단순히 아무런 영향이 없는 것과 해로운 작용을 하는 것을 구분하려 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치유적인 작용과 해로운 작용을 구분하고자 했다. 이것은 그냥 진부한 인식이 아니라, 살아 있는 자연의 메커니즘, 생리학, 삶 자체를 근본적으로 꿰뚫어보는 인식이다.
파라켈수스의 원래 표현에 더 가깝게 말하자면 ‘용량만이 어떤 것이 독이 될지를 결정한다’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어떤 물질 혹은 혼합물이 독으로 작용할 만큼 용량이 많지 않을 경우에는 이런 물질이 아무 작용 없이 남는 건 아니다. 전혀 다른 작용이 있을 수 있다. 그리하여 높은 용량에서와는 반대로, 치료나 예방 작용을 할 수도 있다.
다시 말해 용량이 독을 만들 뿐 아니라, 치료제도 만드는 것이다. 사실 모든 물질이 높은 용량에서는 독으로 작용할 수 있다. 그리고 아주 많은 물질들이 적절한 용량 —그리고 낮은 용량—에서는 치료제나 예방제로 작용할 수 있다.
파라켈수스는 독성학의 아버지로 불린다. 그의 유명한 문장에 ‘독’이라는 말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파라켈수스에게 중요한 것은 독성학, 즉 유독작용이 아니라 치료작용이었다. 요즘 학제간 연구의 중요성이 부각되고 있다. 학문의 발전에도, 환자의 치료에도 이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실제로는 학제간 연구가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지 않은 분야도 꽤 있다. 용량에 따라 유독하게 작용하기도 하고, 치료적으로 작용하기도 하는 물질의 경우가 그러한 예다.
독성학은 독성물질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그것이 어느 정도 용량부터 유독한지, 이런 독성작용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를 다룬다. 독성학은 약리학의 한 부문이다. 사실 파라켈수스는 독성학이 아니라 약리학의 아버지로 일컬어져야 한다. 물질과 생물의 상호작용, 한 물질이 유기체의 세포에 미치는 긍정적 부정적 영향을 다루는 것이 바로 약리학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물질의 치료작용에 대한 연구는 약리학의 한 분야인 조제학(제약학)이 담당한다.
상온에서 은빛의 액체로 존재하는 수은은 인체에 치명적인 중독현상을 일으킬 수 있다.
(출처: https://youtu.be/KqNwAOTquwY)
용량이 독을 만든다. 그리고 용량이 치료제를 만들기도 한다. 간단하게 들리지만 어려운 말이다. 적절한 용량을 찾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높은 용량은 물론 바람직한 효과를 낳지 않는다. 용량을 과하게 하면 위험해진다. 파라켈수스도 이런 위험을 저질렀던 듯하다. 그는 자신의 고질적인 귀 염증을 수은으로 치료하다가 수은중독으로 죽은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수은을 많이 사용했다고 파라켈수스가 돌팔이 의사였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의 죽음은 용량–영향 관계에서 유익한 작용과 유독한 작용이 종이 한 장 차이일 수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준다. 2015년 독일에서 한 여성이 수은중독으로 사망했다. 그녀가 복용한 수은은 스리랑카의 아유르베다 치료사가 처방해준 것이었다. 함부르크의 의사들이 진찰했을 때 그녀 체내의 수은 농도는 한계치의 수천 배에 달했다.
호르메시스는 단순한 원칙이다. 쉽게 말하면 '적응적 스트레스 반응'을 뜻하며, 과하지 않고 오래 지속되지 않는 용량의 스트레스 자극에는 생명이 적응을 하고 더 건강한 상태로 나아갈 잠재력을 지닌다는 것이다. 운동이나, ‘건강에 좋은’ 식품처럼 과용량에 이르기가 쉽지 않은 분야에서는 건강에 이롭게 적용하는 것도 간단할 수 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어렵고 복잡하고, 때로는 위험할 수도 있다. 파라켈수스조차 이 부분에서 치명적인 실수를 했다는 것은 우리에게 경고를 해주는 셈이다.
「독성학의 아버지 파라켈수스 Paracelsus 는 단식은 마치 의사가 환자 속에 들어간처럼 훌륭한 치료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