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울진친환경세계농업엑스포!
야간홍보가 그럴싸 해서 카메라에 담아보았는데 왜 이럴까.
겉보기와 달리 이 꼴인 것을 서투른 무당이 장구만 나무라듯 디카 탓으로 돌리려 한다.
야경(夜景)만으로는 대도시를 방불케 했는데.
한데, 울진은 이 엑스포에 맛을 들였나.
2005년에 개최했는데 거푸 하고 있으니.

옛 수산역이 있던 수산리는 살기 좋은 곳이겠다.
범죄 없는 마을이니까.
그렇다면, 담장은 물론 울타리도 아예 철거하고 그 사유를 밝혀두면 마을의 자긍심
살리는 효과도 있을텐데.
그런데, 울진군 당국이 엑스포를 대비해 전액 부담하여 담장들을 헐고 모양새 있는
주물 울타리로 개량해 주었단다.
엑스포 덕을 본 셈이지만, 범죄 없는 마을 이미지에 맞지 않은 울타리 아닌가.
그러니, 낭비라 할 수 밖에.
게다가, 천편일률이다.
조형미를 살리는 지혜는 없는가.

2005년친환경세계농업엑스포를 개최할 때 울진교에 건립한 아치다.
2009년에 또 사용하게 되리라는 선견지명(?)이 있었던가.

동해안은 극소지역을 제하면 전체가 망양제일경(望洋第一景)이다.
온양리 양정항에서 바라보는 죽변항(아래 그림1)
봉평해수욕장의 鳳凰亭(봉황정: 아래 그림2)


태고적부터 길은 사람을 중심으로 생멸(生滅)을 반복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 어느 길도 수명을 보장받을 수 없다.
게다가, 급변하는 세상 따라 그 속도도 빨라지고 있다.
더구나, 차량중심 체계로 변질되면서 사람마저 소외당하는 처지가 되었다.
옛 평해대로의 대부분이 신작로로 업그레이드된 후에도 생멸은 계속되었으나
이제는 거의 한계점에 이르렀나 보다.
신작로가 7번국도로 승격되는가 싶더니 원자력발전소로 인해 막다른 골목이
됨으로서 생명력을 잃고 말았다.
신설된 우회 7번국도 구간뿐 아니라 신7번국도에 편입된 구간을 제외한 잔존
7번국도 역시 존재의의를 상실해 가는 중이다.
옥계서원(玉溪)은 우암 송시열(尤菴 宋時烈), 석당 김상정(石堂 金相定), 만은
전선(晩隱田銑)을 봉향하는 곳이다.
이사를 거듭한 끝에 2005년 현재 위치(울진군 북면 고목1리 우회7번국도변)에
정착한 것이 오히려 전화위복일 수 있겠다.(아래 그림)
서원의 성격상 번잡한 것 보다.

울진원자력발전소의 원자력공원이 맑고 푸른 하늘 아래 이국적 정취를 풍기고 있다.
사활을 건 듯 맹렬한 데모를 하던 곳이라고 상상할 수도 없겠다.
평화롭기만 한 저 공원처럼 원자력이 우리의 행복지수를 높이는데만 공헌하면 더 바랄
나위 없이 고마우련만....

어느 일을 진행하거나 글을 쓰다가 신기스런 느낌일 때가 종종 있다.
우연이라기 보다는 의도적 치밀성이 있는 것 같아서다.
무심코, 평해대로 그림들을 올리고 흥부장터(옛 흥부역)의 기미(3.1독립)만세기념탑을
설명하려는데 바로 3월 1일이다.
요원의 불길처럼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인데 어느 지역엔들 없는가.
옛 대로변 도처에 있는 기념탑이다.
빈궁기(貧窮期)에는 현실적 여력이 없었으나 경제규모가 커지고 삶의 질적 향상을 도모
하는 시점에 이르러서는 민족적 자산들을 챙기는 것이 당연하다.
원자력발전소의 등장 이전에도 옛 역말이었다는 점으로 미루어 흥부장터의 독립만세는
역사성을 인정해야 할 것 같다.
하긴, 독립만세 거사가 특기할 만한 준비성이 없어도 장날을 기하는 치밀성이 있었기에
성공적이었다.
여기, 흥부장의 만세는 원남면의 매화장과 더불어 동해안에서 가장 큰 규모의 기미독립
만세운동이 일어났던 곳이란다.
4월 11일의 매화장날에 이어서 40리상거인 흥부장에서 4월 13일(장날)에 독립을 외치는
함성으로 일대가 진동했다는 것.
흥부장 지근인 나곡1리 노변의 500세 당산목(느티나무:아래 그림3)은 뭐라 증언할까.
머언 도성의 일이야 알 리 없지만 오가는 길손들의 대화나 표정에서 듣고 느낀 것들은
있지 않을까.
오랜 세월이 흘러 옛 일은 모른다 해도 근 현대에 벌어진 일들은 다 보고 들었을 터.

누가, 언제, 어디에서 여기 망양정이 들어서야 할 전망좋은 곳으로 옮겨왔을까.
철책 보호와 계단 조성 등 지극정성이었으나 정작 비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말하지 않는다.
글씨 대부분이 마멸되었고 觀察使라는 글자가 흐릿이나마 보이는 것으로 보아 한 관찰사의
공덕비 정도가 아닐까.
예나 지금이나 하찮은 적선, 공덕도 과장해 비(碑)들을 하도 남입(濫立)해 진짜 공적까지도
묻히거나 저평가받기 일쑤다.
진정한 선행은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거라는데.

삼척시 원덕읍으로 넘어가는 갈령(葛嶺) 직전에 도화동산(道花)이 조성돼 있다.
예전엔 고개마루 직전 노변에 목백일홍(道花)과 잔디, 그늘막과 벤치 등의 소공원이
길손을 쉬고 가게 했을 뿐이었는데.
나는 회갑날인 1995년 추석 전날, 포항발 동해안일주 자전거여행중에 이 소공원에서
30여분의 오수로 피로를 풀고 간 적이 있다.
배낭을 벗어논채 10여km 이상 달려간 임원항에서 점심식사중 비로소 배낭이 없음을
알고 허겁지겁 되돌아 달려갔다.
그 자리에서 날 기다리고 있는 배낭이 어찌나 고맙고 반가웠던지.
그 때, 주인 올 때까지 아무도 건드리지 않는 선진국으로 업그레이드됐다는 자긍심이
긴장과 피로를 깡그리 몰아내는 듯 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런데, 대규모 도화동산이 조성된 내력이 돌비에 적혀 있다.
2000년 4월에 있었던 동해안의 초대형 화재사건으로 소급된다.
나와 인연관계인 원덕읍 어촌(노실)의 보트피플(Boat People)영상이 TV뉴스를 통해
알려져 발을 구르게 했던 화재다.
"23.794ha의 피해를 입은 사상최대의 동해안 산불이 2000년 4월 12일 강원도에서
울진군으로 넘어오자 민. 관. 군이 합심하여 22시간만인 4월 13일 11에 진화하고
산불 피해지인 이곳에 도화(백일홍)동산을 조성하다"
강원 북쪽 고성발 산불이 강력한 바람을 타고 실로 요원의 불길이 되어 남하를 거듭해
원덕읍 월천리 가곡천 앞에 당도했다.
꽤 넓은 가곡천이 방화벽이 될 줄 기대했으나 거센 바람을 탄 도깨비불이 되어 울진땅
으로 월경했다.
지척의 원자력발전소를 보호하는 일이 어찌 울진군만의 일인가.
국가적 비상사태가 아닐 수 없지 않은가.
거국적 진화작전에도 불은 좀처럼 기세를 꺾지 않았다.
화마가 벽에 부딛힌 것은 아이로니하게도 신7번국도 공사장이었다.
자기 우군인 바람의 협조가 없어 자연 파괴라는 비판중에 산을 깎아 길고 넓게 펼쳐논
공터를 뛰어넘지 못해 소멸된 것.
돌비에 올린 울진군수의 말과는 다른 지역민의 증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