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022
1월31일 [성 요한 보스코 사제 기념일/연중 제4주간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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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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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6tkuWBl3qAo
(전진 도미니코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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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1)어제의 나를 거두어가시고>
언젠가 단골 이발소에 갔을 때의 일입니다. 그날따라 늘 면도해주시던 자매님이 안계셨습니다. 그 대신에 ‘상당히’ 연세가 있으신 할아버님께서 어울리지 않게 하얀 가운을 입고 면도사 역할을 하고 계셨습니다.
제 앞 사람한테 면도하시는 폼을 봐서 할아버님은 ‘초짜’ 알바가 분명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제 차례 때 저는 무서워 죽는 줄 알았습니다. 하시는 것이 영 서투르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연세가 있으셔서 면도칼을 쥐신 손이 가늘게 떨렸습니다. 그런 할아버님께 얼굴을 맡겨드리고 있노라니 점점 불안해졌습니다.
안 그래도 만만치 않은 얼굴인데, 칼자국이라도 하나 더 생기면 어떡하나, 하는 생각도 들었고, 머릿속에는 별의 별 생각이 다 들었습니다.
꼬마 때 들은 이야기, 어떤 이발소에는 무서운 이발사가 있다, 그 이발소의 특징은 사람들이 들어가기는 하는데 나오지는 않는다, 그 이발소에는 지하실이 있고, 어느 순간 이발의자가 자동으로 바닥이 밑으로 꺼져버린다...
1월 31일은 가난한 청소년들의 사도이자 저희 살레시오 회원들의 사부이신 성 요한 보스코(혹은 돈보스코)의 축일입니다.
돈보스코께서도 어느 날 저와 비슷한 체험을 하셨습니다.돈보스코가 사제로 서품된 지 2년 정도 지난 때, 가난한 청소년들을 위한 사랑으로 활활 타오르던 1943년 어느 날이었습니다.
머리를 깎으러 단골 이발소에 가셨던 돈보스코는 거기서 한 어린 소년을 만납니다. 당연히 그 소년은 갓 이발소 일을 시작한 왕초보였습니다. 바닥이나 쓸고, 이발 도구를 정리하고, 겨우 면도를 위한 비누칠 정도 하던 아이였습니다. 그 소년이 돈보스코의 얼굴에 비누칠을 하기 위해 다가왔습니다.
“친구야, 네 이름이 뭐지? 나이는 몇 살이고?”
“카를리노예요, 열 한 살이고요.”
“좋아 카를리노 비누칠을 잘 해다오. 아버지는 안녕하시냐?”
“돌아가셨어요. 엄마 밖에 안계세요.”
“저런 저런, 가엽구나.”
대화가 오가는 중에 카를리노는 비누칠을 끝내고 자기 자리로 돌아가려고 했습니다. 그때 돈보스코는 소년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카를리노, 어디 가니? 면도를 해줘야지. 자, 이제 용기를 내고 면도칼을 가져와서 내 수염을 깎아다오.”
그 순간 주인이 깜짝 놀라서 달려와 이렇게 말했습니다.
“맙소사, 신부님! 이 아이는 초짜예요. 아직 면도를 못하지요. 그저 비누칠만 하는 아이랍니다.”
돈보스코는 막무가내였습니다.
“언젠가는 이 아이도 면도를 시작해야 할 것 아닙니까? 그렇다면 내게 시험 삼아 한번 해보게 기회를 주는 것도 좋을 겁니다. 자 카를리노, 용기를 내거라!”
카를리노는 사시나무 떨듯 하면서 돈보스코의 수염을 깎았습니다. 사실 돈보스코도 카를리노가 면도칼을 턱 주변에 댈 때에는 등골이 오싹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너무 세게 깍은 곳도 있었고, 몇 군데 작은 상처가 나긴 했지만 카롤리노는 면도를 끝냈습니다.
돈보스코는 긴장으로 얼굴이 잔뜩 경직된 카롤리노를 향해 활짝 미소를 지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잘했다. 카롤리노! 이제 우리는 친구니까 자주 나를 만나러 와주길 바란다.”
나중에 카롤리노는 돈보스코의 오라토리오로 들어왔습니다. 그가 오라토리오에 들어오던 날 돈보스코는 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애야, 보다시피 난 가난한 신부란다. 그러나 어느 순간 내게 빵이 단 한 조각 밖에 남지 않는다하더라도
난 그걸 너와 나눠 먹을거란다.”
그 후 카롤리노는 훌륭한 살레시오 회원이자 돈보스코의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동반자가 되어 50년간 오라토리오에서 살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돈보스코는 당시 어른들이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길거리 청소년들에게 다가섰습니다. 그들을 둘러싸고 있던 억압과 죄와 고통의 족쇄를 끊어버렸습니다. 그들을 해방시켜준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돈보스코는 그들 안에 깃들어있던 가능성을 눈여겨보셨습니다. 끊임없이 그들을 격려하고 지지했습니다. 그들에게 기회를 제공하고 그들에게 장밋빛 청사진을 펼쳐놓았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더러운 영 때문에 죽을 고생을 다하고 있는 한 사람을 치유하십니다. 더러운 영의 활동으로 인해 그는 사람들 사이에서 살지 못하고 무덤가에서 살았습니다. 더러운 영이 활개를 치기 시작할 때 마다 그의 영혼과 육체는 처참하게 망가져갔습니다.
이토록 비참한 삶을 견뎌내던 그에게 예수님께서 다가가십니다. 그를 사로잡고 있던 더러운 영을 몰아내십니다. 그를 자유롭게 만들어주시며 새 삶을 부여하십니다. 그가 지니고 있었던 태초의 아름다움을 회복시켜주시며 새롭게 출발하도록 초대하십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똑같은 방식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어제의 나를 거두어가시고, 새로운 나를 선물로 주십니다.
지난 날 내 삶을 휘감고 있었던 어둠과 슬픔의 자취를 말끔히 거두어가시고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해맑은 하늘을 선물로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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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안녕? 친구들, 어떻게 지내지?>
오늘 저희 살레시오회 창립자 돈보스코 성인(1815~1888)의 축일입니다. 성인께서 그리도 사랑하셨던 청소년들과는 이제는 멀찌감치 떨어져 하루 온 종일 청소나 세탁, 조리나 벌목으로 보내고 있는 제 모습이 많이 서글펐지만, 그래도 마음만은 언제나 피 끓는 청춘입니다. 언제나 갈 곳 없는 아이들을 향한 불타는 사랑으로 이글거립니다.
젊은 사제 돈보스코가 밤낮 가리지 않고 토리노 뒷골목 청소년들을 위해 헌신하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발도코에 인접한 그로사 도라 가리를 지나다가 그는 마주 오는 20여 명의 껌 좀 씹는 청소년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돈보스코와 오라토리오에 대해서 들어본 적이 없는 아이들이었습니다.
돈보스코를 본 아이들은 사제들을 조롱하는 말을 하며 비웃기 시작했습니다. 돈보스코는 못 들은척하며 아이들에게 다가가 인사했습니다. “안녕? 친구들, 어떻게 지내지?”
아이들의 대답을 한번 들어보십시오. 참으로 놀랍습니다. “잘 못 지내는데요, 신학박사님, 목이 마른 데 땡전 한 푼 없어요. 마실 것 한잔 사주시겠어요?”
돈보스코는 가까이 있는 카페로 그들을 데리고 가 주머니를 탈탈 털어 모두에게 음료수를 한잔 씩 사주었습니다. 아이들이 목을 축이고 어느 정도 평온해졌을 때 돈보스코가 말했습니다. “애들아, 너희가 내 친구가 되고 싶다면 오늘 저녁에 누군가가 했던 것처럼 하느님과 예수님을 모독하는 말은 하지 않으면 좋겠구나.”
음료수까지 얻어먹었겠다, 아이들은 그러겠노라고 대답했습니다. 신이 난 돈보스코는 그 아이들을 자신의 오라토리오로 초대했습니다. “좋아, 참 고맙구나. 주일에 오라토리오에서 너희를 기다리고 있을게. 이젠 여기서 나가야겠다. 애들아, 이제 집으로 가거라.”
아이들의 대답에 또한 기가 막혔습니다. “저희는 집이 없어요.” 할 수 없이 돈보스코는 열 명이나 되는 아이들을 데리고 자신의 숙소인 발도코로 돌아왔습니다.
오라토리오에 도착한 돈보스코는 아이들에게 주님의 기도와 성모송을 바치게 했습니다. 본격적인 기숙사가 없었기에 여기저기 적당한 장소에 그들의 침구를 펼쳐놓고 잠이라도 편안히 자게 배려해주었습니다.
그 다음 날 아침, 돈보스코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아이들이 자고 있던 장소로 가보았습니다. 결과는 역시나였습니다. 아이들은 어제저녁에 깔아준 담요와 이불을 챙겨서 가버린 것입니다. 그만큼 1800년대 중반 이탈리아 토리노 뒷골목 청소년들이 직면한 처지는 열악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던 어느 날, 소나기가 억수같이 퍼붓던 5월의 어느 날, 돈보스코와 어머니 마르가리타는 누군가가 강하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듣고 밖으로 나가 문을 열었습니다.
아이가 그 모진 비를 온몸으로 흠뻑 맞고 서 있었습니다. 많이도 말고 하룻밤만 재워달라고 사정을 했습니다. 돈보스코를 잘 알고 있던 사람이 그 딱한 아이에게 그리로 가보라고 알려준 것이었습니다.
돈보스코와 어머니 마르가리타는 추위에 오들오들 떨고 있는 아이를 부엌으로 들어오게 했습니다. 따뜻한 불가에 앉힌 다음 옷을 말리게 했고, 따뜻한 스프와 빵 몇 조각을 건넸습니다. 아이가 지독한 허기를 채운 뒤 돈보스코는 몇 가지 질문을 던졌습니다. 아이의 대답을 들은 돈보스코의 눈은 눈물로 그렁그렁했습니다.
“저는 고아예요. 벽돌공인데 일자리를 찾으러 며칠 전에 발세시아에서 왔어요. 3리라를 갖고 있었는데 일자리를 얻기도 전에 다 써버렸어요. 이제 저는 한 푼도 없어요.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구요.”
여러분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들이 저 아이의 입장이었다면... 아이는 자신의 현재 상황을 설명한 후 굵은 눈물방울을 뚝뚝 떨어트리며 울기 시작했습니다. 그 가련한 아이의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본 돈보스코와 어머니 마르가리타 역시 눈시울을 적시며 아이의 잠자리를 마련해주었습니다.
지금은 전 세계 140여개국에 진출해 있는 살레시오회 오라토리오 기숙사의 첫 출발점이 된 은혜로운 사건이었습니다. 을씨년스런 소나기가 데려온 그 아이의 오라토리오 입소 이후 수십, 수백, 수천, 수만 명의 아이들이 그 뒤를 이어 살레시오 오라토리오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돈보스코가 만난 아이들, 클라우디오 루소, 돈보스코 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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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복음묵상 동영상)
https://youtu.be/yFvQQn1sx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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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령보다 무서운 것이 자아임을 모를 때 벌어지는 일>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게라사인들의 지방으로 가서 군대라는 마귀 들린 사람을 치유하시는 장면입니다. 당시 로마 한 군단은 6천 명이었으니, 한 사람 안에 얼마나 많은 악령이 들어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들이 들어가서 물에 빠져 죽은 돼지들만 2천 마리가 넘었습니다. 엄청난 숫자입니다.
그리스도 덕분으로 마귀 군단의 압제에서 벗어난 사람은 온전한 모습이 되어 그리스도와 함께 머물며 그분의 제자가 되고 싶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거부하십니다. 참으로 이상한 일입니다. 가리옷 유다와 같은 인물은 받아주시면서 이제 악령으로부터 깨끗해진 이는 받아들이지 않으십니다.
이것은 다 이유가 있습니다. 악령에서 해방되면 성인일까요? 아닙니다. 그냥 평범한 인간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 악령을 쫓아내는 것은 일도 아닙니다. 너무 쉽습니다. 저도 보좌였을 때 군대에서 죽은 귀신을 보는 군인에게 “그냥 안 보이는 척 하세요”라고 했더니 사흘 만에 그 귀신이 보이지 않게 된 일이 있습니다. 또 어떤 신부님은 신자들이 묵주기도를 하라고 했더니 악령이 그냥 나가버렸다는 이야기도 들려주셨습니다. 이렇듯 악령을 쫓아내는 것은 일도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 안에 더 무서운 것이 있음을 잊고 악령을 더 무서워합니다. 게라사 인들도 그랬습니다. 그들은 악령이 들린 사람을 휘어잡기 위해 쇠사슬과 족쇄를 채우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악령이 들린 사람은 그것들을 다 끊어버렸습니다. 이러는 와중에 게라사인들은 자신들 안에 그 악령들보다 더 무서운 것이 살고 있다는 사실을 잊었습니다. 바로 ‘자아’입니다.
게라사인들은 자신들의 재산인 돼지 2천 마리가 물에 빠져 죽는 것을 보고 예수님을 떠나가 달라고 말합니다. 적어도 악령에서 해방된 이는 예수님과 함께 있고 싶어 하였습니다. 그러나 ‘탐욕’에 사로잡힌 이들은 예수님을 밀어냅니다. 예수님은 악령에 대해서는 그 숫자에 상관없이 엄청난 힘을 발휘하시지만 자아가 자아내는 탐욕, 성욕, 명예욕에 대해서는 아무 힘도 없으십니다. 그냥 조용히 떠나십니다. 오늘 복음은 하느님도 어쩔 수 없는 무서운 자아가 우리 안에 있음을 잊는다는 것은 곧 악령이 걸려있는 사람보다 위험한 상태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포스터에 “처음부터 잘못된 건 없어…. 그냥 너만 없었으면 돼…”라는 섬뜩한 메시지가 담긴 영화 ‘파수꾼’(2011)입니다. 과연 학교 일진의 친구들은 행복할까요?
기태, 희준, 동윤은 절친한 친구입니다. 기태는 여자친구 세 명과 함께 월미도에서 미팅을 주선합니다. 희준이 관심 있는 보경은 기태에게 관심을 보이고 기태는 희준을 생각해 고백을 거절합니다. 보경이 기태에게 고백하는 장면을 본 희준은 자기가 좋아하는 여자까지 빼앗는다고 기태에게 오해 아닌 오해를 하게 됩니다.
기태는 지금 다니는 학교에 일진이고 그런 기태에게 어머니가 없다는 사실은 무척 예민한 부분이었습니다. 희준은 기태가 부모님 이야기만 나오면 과민반응한다는 말을 흘리게 되고, 기태도 희준에게 망을 보라고 시키는 등 자존심에 상처를 입힙니다. 이를 계기로 둘의 사이는 본격적으로 나빠집니다.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무것도 모르는 동윤은 희준을 보고 이상함을 느낍니다. 기태는 희준의 가방까지 빼앗아가고 가방을 찾으러 온 희준의 뺨을 때리는 등 친구들이 보는 앞에서 농락합니다.
동윤은 기태에게 진심 어린 조언을 합니다. 기태는 마음을 바꾸어 다음날 사과하러 희준에게 다가갑니다. 기태는 이제 그만하자고 사과하는데, 희준은 너무 큰 상처를 받았기에 사과를 받아주지 않습니다. 그는 이미 전학하기로 마음먹은 상태였습니다. 마지막까지 좋은 이미지로 남기를 원했는지 기태는 전학하는 희준에게 셋의 우정과 추억이 담긴 야구공을 건네며 작별인사를 합니다.
희준이 전학 간 뒤 기태의 폭주는 계속됩니다. 이에 동윤은 기태를 말려보려 또 충고합니다. 기태도 이번에는 동윤의 여자친구 세정이가 건전하지 못하다며 동윤에게 충고하며 그런 충고가 얼마나 마음 아픈 것인지 알려줍니다. 세정이를 만난 동윤은 표정 관리를 못하고 헤어지자고 합니다. 이에 세정은 자신의 소문으로 인해 상처받고 자해를 하다가 병원에 실려 갑니다.
이에 동윤은 기태를 찾아가고 그 소문에 있어서 자신이 그 소문을 알고 있는 것을 세정이에게 말했느냐고 따집니다. 기태는 그런 오해를 하느냐며 어이없어합니다. 이에 동윤이 기태에게 먼저 폭력을 가합니다. 기태와 한 패거리들이 동윤을 둘러싸 때렸고, 기태가 일어나 그들을 말리며 동윤에게 그건 오해라고 이야기합니다.
동윤이 학교에 나오지 않자 기태는 과일 바구니를 들고 동윤의 집에 찾아갑니다. 동윤은 기태에게 그냥 가라고 말합니다. 기태는 이제 한 명밖에 남지 않은 친구 동윤에게 한 번 더 진심 어린 사과를 합니다. 동윤은 이렇게 비수가 꽂히는 말을 합니다.
“내가 네 진정한 친구다. 이해해 줄 사람은 나뿐이라고 지껄일 때 속으로 얼마나 비웃었는 줄 알아? 네가 역겨우니까 네 주변 애들이 다 너 떠나는 거야.”
“그래? 그게 내 모습이야?”
“어!”
결국, 자신의 소중한 사람들이 자신을 모두 떠나가자 기태는 자살하게 되고 결국 동윤은 그 사실을 알고 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청소년의 성장 이야깃거리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의 현실일 수 있습니다. 친구들 사이에서까지 자신이 힘이 세다는 자존심을 내려놓지 못하고 있는 모습이 친구들에게는 역겹게 보인다는 사실을 누구도 기태에게 알려주지 않은 것입니다.
기태는 항상 “이만큼 머리 숙이고 사과했으면 되는 거 아니야?”라는 자기 주도적인 관계를 해오고 있었습니다. 힘과 권력, 명예나 교만함을 버리지 않고는 결코 진정한 친구를 사귈 수 없음을 누구도 알려주지 않은 것입니다. 진정한 적이 우리 안에 있음을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에 기태는 원인도 모른 채 그냥 자신이 죽어야 마땅한 존재라 믿게 된 것입니다. 기태는 도대체 뭐가 잘못된 것인지도 모른 채 죽어가는 게라사인들의 대표적인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영화 ‘얼 포인트’(2004)는 베트남 전쟁 당시 군인들이 귀신과 싸우는 내용입니다. 사실 귀신과 싸우기보다는 자신 안의 두려움과 싸우는 것이 더 옳은 이야기입니다. 귀신을 보느라 자신 안의 두려움을 보지 못한 이들은 다 죽어갑니다. 귀신은 결국 우리 안의 자아와 결탁하지 않으면 힘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나를 이기는 자는 귀신을 쉽게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는 꼭 가장 먼저, 그리고 마지막까지 우리 안에 있는 자아가, 그리고 그 자아가 만들어내는 삼구라는 욕구가 마귀에 들리는 것보다 더 무서운 것임을 자녀들에게 알려주어야 합니다. 마귀는 쫓아낼 줄 알면서 그것보다 더 무서운 자아의 존재에 대해서는 말해주지 않는 것은 말도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마귀는 그것이 군단으로 있을지라도 한 마디로 쫓아낼 수 있으셨지만 게라사인들의 탐욕에는 아무 힘도 쓰실 수 없으셨음을 잊지 맙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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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5,1-20 : 더러운 영아,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예수님께서는 게라사로 가셨다. 그런데 이 지방의 본 이름은 게르게사인데 성경을 필사하면서 잘못 옮긴 이름이다. 게르게사는 ‘쫓아낸 자들이 사는 곳’이라는 뜻이다. 구세주이신 주님을 대하는 주민들의 처신에 대한 예언적 암시를 담고 있는 듯하다. 그 지역 주민들은 예수님께 자기들 고장에서 떠나 달라고 요청하였기 때문이다.(참조: 마태 8,34; 마르 5,17; 루카 8,37)
예수님은 마귀 들린 사람을 만나신다. 그 사람은 어디에서 살고 있는가? 썩은 시체로 악취를 풍기는 무덤에서 산다. 이 세상의 영광을 약속받았던 자가 그곳에 살고 있다. 이러한 곳에서 또한 악령 들린 사람은 무덤에 거처하면서 쇠고랑과 쇠사슬로 묶여 있으면서 밤이나 낮이나 산에서 소리를 지르고 돌로 제 몸을 짓찧곤 했다는 것은 그가 더 이상 비참해질 수 없는 삶을 살고 있었던 것을 보여주고 있다.
마귀들은 그분이 하느님이시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본다. “하느님의 아드님, 당신께서 저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를 괴롭히지 말아 주십시오.”(7절) 여기서 예수께서는 그 악령 들린 사람에게 구원의 손길을 펴주신다. 예수님께서는 “더러운 영아,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8절) 하시자 마귀들은 그에게서 나와 돼지 떼들에게 들어갔고 돼지들은 물에 빠져 몰사했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마귀들이 사람들에게 똑같은 짓을 해서 바다에 빠져 죽게 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이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마귀들을 막으셨고,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으셨다. 마귀들이 인간들에게도 저지를 수 있었던 일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마귀들이 돼지들을 소유할 수 있는 힘이 있었다면 인간을 소유할 수도 있었으리라는 것이다.
마귀에게 사로잡혔던 사람은 성한 몸으로 예수님을 따르려고 한다. 마귀들의 군대가 자기에게서 쫓겨난 것을 알았다. 이제는 모든 것을 잊고 오로지 주님의 발치에서 마냥 쉬고 싶다고 한다. 그러나 주님은 그 사람의 뜻과는 달리 이렇게 말씀하셨다. “집으로 가족들에게 돌아가, 주님께서 너에게 해 주신 일과 자비를 베풀어 주신 일을 모두 알려라.”(19절)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볼 것은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고 복음을 받아들이는 데는 지금까지의 나의 생활에서 어떠한 근본적인 변화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변화는 나의 희생과 노력의 결과로 얻어질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을 못 알아들을 때, 우리도 그 주민들처럼 예수님께 떠나달라고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도 다른 사람의 구원을 위해 나 자신의 희생이 따를 때, 그 희생을 꺼려하여 예수님께 “나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하는 마음의 자세가 아니고 그것을 기쁜 마음으로 수용하고 주님께 감사드릴 수 있는 자세를 갖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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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마귀들과 돼지 떼>
“그는 멀리서 예수님을 보고 달려와 그 앞에 엎드려 절하며, 큰 소리로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 당신께서 저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하느님의 이름으로 당신께 말합니다. 저를 괴롭히지 말아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더러운 영아,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하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네 이름이 무엇이냐?’ 하고 물으시자, 그가 ‘제 이름은 군대입니다. 저희 수가 많기 때문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 자기들을 그 지방 밖으로 쫓아내지 말아 달라고 간곡히 청하였다."(마르 5,6-10)
예수님께서는 ‘더러운 영’이 들린(마귀 들린) 사람과 마주치자마자 곧바로 마귀에게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마귀는 예수님의 명령에 복종할 수밖에 없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고 자기를 ‘그 지방 밖으로 쫓아내지 말아 달라고’ 예수님께 애원합니다. <쫓겨난 마귀가 가야 할 곳은 ‘지옥’입니다. ‘지옥’은 원래 사탄과 마귀들을 가두어 놓는 감옥입니다.(묵시 20,3) 그래서 ‘지옥’은 마귀들도 무서워하는 곳입니다.> 마귀가 예수님을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이라고 부른 것은, 예수님에 대한 신앙을 표현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말을 흉내 낸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예수님의 신성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귀가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부르는 것은 예수님의 신성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당신께서 저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라는 말은,
자기가 하는 일에 상관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당신께 말합니다.”라는 말은, 당시에 구마자들이 마귀를 쫓아낼 때 “하느님의 이름으로 너에게 명령한다.”라고 말하는 것을 흉내 낸 말입니다. 마귀는 원래 ‘하느님의 이름으로’ 말할 자격이 없습니다. “저를 괴롭히지 말아 주십시오.”라는 말은, 쫓겨나는 것을 피하려고 애원하는 말이지만, 이 말은 진실을 왜곡하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마귀를 ‘괴롭히시는’ 분이 아니라, 쫓아내시는 분입니다.
예수님께서 마귀에게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으신 것은,
그것의 정체를 밝혀서 무력화시키기 위해서입니다. 마귀는 자기들의 수가 많아서 이름이 ‘군대’라고 말하는데, ‘군대’ 라는 이름은 그것들의 단결력과 폭력성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마귀의 이름이 ‘군대’ 라는 점에서 ‘군사독재 정권’이 연상됩니다. 지금도 일부 국가에서 군사독재 정권이 무자비하고 잔인하게 인권을 탄압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데, 그 군부의 모습은 마귀의 지배를 받고 있는 모습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마침 그곳 산 쪽에는 놓아기르는 많은 돼지 떼가 있었다. 그래서 더러운 영들이 예수님께, ‘저희를 돼지들에게 보내시어 그 속으로 들어가게 해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 예수님께서 허락하시니 더러운 영들이 나와 돼지들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이천 마리쯤 되는 돼지 떼가 호수를 향해 비탈을 내리 달려 호수에 빠져 죽고 말았다."(마르 5,11-13)
마귀가 예수님께 돼지들 속으로 들어가게 해 달라고 간청한 것은, 인간 세상에 있을 수 없다면 짐승들 속에라도 있게 해 달라고, 즉 지옥으로는 보내지 말아 달라고 간청한 것입니다.(루카 8,31) 왜 돼지였을까? 마침 그곳에 돼지 떼가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마귀의 간청을 허락하셨을까? 그것은 모릅니다. 돼지들은 왜 집단 자살을 했을까? 말 못하는 짐승들이긴 하지만, 돼지들은 마귀가 들어오는 것을 싫어했고, 거부했기 때문이라고 해석됩니다. <돼지들은 마귀를 거부했는데, 게라사인들은 예수님을 거부합니다.(17절) 게라사인들은 마귀와 함께 사는 것이 별로 괴롭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돼지를 치던 이들이 달아나 그 고을과 여러 촌락에 알렸다. 사람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보려고 왔다. 그들은 예수님께 와서 마귀 들렸던 사람, 곧 군대라는 마귀가 들렸던 사람이 옷을 입고 제정신으로 앉아 있는 것을 보고는 그만 겁이 났다. 그 일을 본 사람들이 마귀 들렸던 이와 돼지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그들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그러자 그들은 예수님께 저희 고장에서 떠나 주십사고 청하기 시작하였다."(마르 5,14-17)
여기서 ‘겁이 났다.’라는 말은, 게라사인들이 예수님의 권능과 권한을 무서워했음을 나타냅니다. 그들은 ‘군대’ 라는 이름의 마귀보다, 그 마귀를 쫓아내신 예수님을 더 무서운 존재로 생각했습니다. “떠나 주십사고 청하기 시작하였다.”는 “떠나라고 요구했다.”, 즉 “쫓아냈다.”입니다. 게라사인들이 예수님께 떠나라고 요구한 것은, 예수님이 무서워서, 재산 피해만 생각했기 때문에, 유대교와 유대인들에 대한 반감 때문에, 생활에 변화가 생기는 것이 싫어서 등으로 해석됩니다. (은총이 내린다고 해서 아무나 그것을 받게 되는 것은 아니고, 받을 준비가 되어 있고, 받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만이 은총이 내렸을 때 그 은총을 온전히 받게 됩니다.) 예수님 덕분에 그 지역에서 마귀가 제거되었지만, 사람들이 예수님을 거부함으로써 그 지역은 ‘빈 집’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빈 집’으로 방치하면 처음보다 더 나쁜 상태로 떨어진다고 경고하셨습니다.(마태 12,43-45) 마귀가 제거된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하느님의 다스림’이 펼쳐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영혼과 마음과 정신을 성령으로 채우지 않고 ‘빈 집’으로 방치하면, 악령이 들어와서 자리 잡게 됩니다. 게라사 지역도 그렇게 되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마귀 들렸던 이가 예수님께 같이 있게 해 달라고 요청하는데(18절), 그 요청은 제자로 삼아 달라는 요청입니다. 예수님께서 그의 요청을 허락하지 않으신 것은, 예수님과 함께 지내는 것보다 돌아가서 ‘예수님의 일’을 사람들에게 알리는 일을 하는 것이 그에게 더 적합한 ‘성소’ 라고 판단하셨기 때문입니다. 마귀 들렸던 이가 예수님께서 시키신 대로, 자기에게 일어난 일을 사람들에게 널리 알린 일은 ‘복음 선포’는 아니고, 나중에 그 지역에 복음이 선포될 때를 대비해서 사전 작업을 한 것과 같다고 말할 수는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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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김대건 안드레아 부제님이 중국에서 의주, 평양을 거쳐서 한양으로 왔던 이야기를 가톨릭평화신문에서 읽었습니다. 읽으면서 내용이 생생하고,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1845년이면 김대건 안드레아 부제님은 25살이었습니다. 영하 20도가 넘는 길을, 눈이 허리까지 쌓인 길을 신발도 벗고 12킬로를 걸었다고 합니다. 그것도 캄캄한 밤에 걸었다고 합니다. 오직 기댈 곳은 하느님이기에 묵주를 돌리고 또 돌렸다고 합니다. 겨우 약속 장소에 도착했지만 마중 나오기로 한 신자들과는 만날 수 없었다고 합니다. 지치고, 지쳐서 거의 죽음의 문턱에 이르렀을 때 드디어 신자들을 만났고.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발은 동상에 걸렸고, 한양에 도착해서는 보름동안 몹시 앓았다고 합니다. 긴장이 풀렸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성인은 한국인 첫 번째 사제요, 순교자입니다. 생각해 보니 성인이 걸은 길은 언제나 가시밭길이었습니다. 성인은 가시밭길에서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영광을 찾았고, 천국에서 빛나는 별이 되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우리는 다윗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랑하고, 존경하는 왕, 이스라엘을 통일했던 왕 다윗이지만 그의 길도 꽃길만 있지는 않았습니다. 전쟁에 나가 승리했지만 그 때문에 사울 왕의 질투를 받아서 도망 다니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아들 압살롬의 반란으로 도망가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충실한 부하를 전쟁에서 죽게 하였고, 부하의 아내를 아내로 맞이했습니다. 다윗은 깊이 뉘우쳤고, 뉘우치는 다윗의 기도는 시편에 남아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습니다. “하느님, 당신 자애에 따라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당신의 크신 자비에 따라 저의 죄악을 지워 주소서. 저의 죄에서 저를 말끔히 씻으시고 저의 잘못에서 저를 깨끗이 하소서. 저의 죄악을 제가 알고 있으며 저의 잘못이 늘 제 앞에 있습니다. 당신께, 하느님, 깨끗한 마음을 제게 만들어 주시고 굳건한 영을 제 안에 새롭게 하소서. 죽음의 형벌에서 저를 구하소서, 제가 악인들에게 당신의 길을 가르쳐 죄인들이 당신께 돌아오리이다. 하느님께 맞갖은 제물은 부서진 영. 부서지고 꺾인 마음을 하느님, 당신께서는 업신여기지 않으십니다.” 아름다운 기도입니다. 교회는 고인을 위한 연도에서 다윗의 기도를 바칩니다. 고인이 하느님의 자비하심으로 천국으로 들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기도합니다.
31년 저의 사제생활을 돌아보면 대부분 꽃길이었습니다. 보좌신부 8년, 본당 신부 8년, 사목국 3년, 연수 3년, 청소년국 1년, 성소국 5년, 평화신문 미주지사 3년입니다. 추운겨울이면 따뜻한 사제관에서 지낼 수 있었습니다. 더운 여름에도 시원한 사제관에서 있었습니다. 제 스스로 어디를 찾아가기보다는 늘 교우들과 함께 다닐 수 있었습니다. 원하기만 하면 강론 자료를 쉽게 얻을 수 있었습니다. 교무금과 헌금이 있기에 본당 재정에 큰 신경을 쓰지도 않았습니다. 교구에서는 1년에 한번 피정을 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으면 마음을 열고 대화할 수 있는 동창신부들도 많았습니다. 미국 뉴욕으로 올 때 비자 신청도 평화신문 본사에서 서류 준비를 다 해 주었습니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가톨릭평화신문 미주지사의 재정에 어려움이 있지만 아직은 잘 지내고 있습니다. 꽃길을 걸으면서도 때로 짜증내고, 걱정하고, 불평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어느덧 2022년 1월의 마지막 날입니다. 가시밭길일지라도, 꽃길일지라도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2월을 시작하려고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마귀 들린 사람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군대라고 불리는 마귀였습니다. 수천의 마귀가 사람을 괴롭혔으니, 사는 것이 힘들었을 겁니다. 삶 자체가 가시밭길이었을 것입니다. 마귀 들린 사람은 예수님을 만났고, 마귀에서 벗어났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귀에서 벗어난 사람에게 가족들에게 돌아가라고 하셨습니다. 마귀에서 벗어나 자유를 찾은 사람은 이제 하느님의 영광을 찬미하며 예수님께서 이루신 놀라운 일을 전하였습니다. 가시밭길이 주어진다 할지라도 하느님의 영광을 찾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꽃길이 주어진다면 좀 더 겸손하게 감사드리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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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한국천주교주교회의 홍보국]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비유로 가르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거센 돌풍이 이는 호수를 건너 “게라사인들의 지방”에 도착하십니다. 이곳은 이방인들이 거주하며, 곳곳에 무덤이 있고, 유다인들에게는 부정한 돼지 떼가 방목되는 지역입니다.(이사 65,4 참조)
‘군대’라고 불리는 더러운 영은 아무도 휘어잡을 수 없을 만큼 강하고 위험한 존재입니다. 그러한 더러운 영도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 앞에서는 엎드려 절하며 복종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 간곡히 청하여 돼지들에게 들어가서라도 목숨을 부지하려던 더러운 영 ‘군대’는, 돼지들이 호수로 달려가 빠져 죽음으로써 결국 파멸하고 맙니다. 그렇게 이 부정한 지역에서 마귀의 세력이 사라지고, 이제 하느님의 다스림이 펼쳐집니다.
돼지를 치던 이들에게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 몰려와 “마귀가 들렸던 사람이 옷을 입고 제정신으로 앉아 있는 것을 보고는” 두려워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자신들의 고장을 떠나 달라고 청합니다. 반면에 치유받은 이는 예수님과 함께 있게 해 달라고 청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음’은 열두 제자의 특징이고 사명입니다.(마르 3,14 참조)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주님께서 해 주신 일과 자비를 베풀어 주신 일”을 가족에게 알리라는 사명을 주십니다. 치유받은 이는 물러가서,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일을 자기의 가족들뿐만 아니라, 요르단강의 동쪽에 자리 잡은 열 개의 도시, 데카폴리스 지역에 선포하기 시작합니다.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의 치유가 복음 선포로 이어집니다. 마르코 복음이 전하는 이민족을 향한 복음 선포의 시작으로 볼 수 있는 이 사건은, 하느님 나라의 선포에는 어떠한 경계나 제한이 없음을 드러냅니다. 이는 우리의 복음 선포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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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도회(부산 분도명상의 집) 박재찬 안셀모 신부님]
<“그 아이를 위해 기도했습니까?”>
‘내 아이들아~ 죄가 되지 않는 한 마음껏 뛰어 놀아라.’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고아들의 아버지, 요한 보스코 성인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근엄하고 엄격한 청소년 교육을 하던 당시 사제들과는 달리 왁자지껄 떠들고 놀면서 항상 아이들과 함께 하는 그의 모습은 자비로운 예수님의 마음을 느끼게 해 줍니다. 미사를 봉헌하기에 앞서 우리는 지금 자녀들을 어떤 맘으로 사랑하고 있는지, 그리고 사랑하는 이를 자신의 틀에 가두려고 하고 있지는 않은 지 반성하며 주님의 자비를 청하도록 합시다.
1825년 9살된 꼬마 아이는 꿈 속에서 신비로운 체험을 하게 됩니다. 꿈 속에서 친구들과 노는 중에 욕과 폭력을 쓰는 친구가 있어 싸움이 일어났고 이를 말리던 중에 싸움에 휘말리고 맙니다. 그 때 한 남자가 나타나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먹다짐으로 하지 말고 온유와 사랑으로 그들을 너의 친구로 삼아야 하느니라. 바로 이 일이 불가능하게 여겨지기 때문에 너는 순명과 지식의 연마로써 이것을 가능하게 만들어야 하느니라. '나는 네 어머니가 하루에 3번 인사 드리라고 가르쳐준 그분의 아들이다’ 라고 한다.”
이에 꼬마가 당황하자, 이번에는 여인이 나타나 ‘자, 여기가 너의 일터다. 겸손하고 강인한 사람이 되어라. 네가 보는 이 동물에게 일어난 것처럼 너는 나의 자녀들에게 하게 될 것이다’라고 말하니 갑자기 사나운 짐승들이 모두 순한 양으로 변해서 뛰어놀고 있었다. 이것을 본 꼬마는 놀라 울면서 무슨 말인지 알려 달라고 하자 ‘때가 되면 모든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라고 말한다. 이 말을 듣고 꼬마는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이 꼬마 아이는 이 체험 후에 가톨릭 사제가 될 결심을 하게 됩니다. 이 꼬마 아이가 바로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고아들의 아버지요 청소년들에게 참된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해 준 요한 보스코 성인입니다.
저는 요한 보스코 성인의 영성을 통해 우리가 다음의 세 가지를 배울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먼저, 기도를 통해 하느님의 사랑을 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루는 한 후원자가 “저는 한 아이를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성인은 “그 아이를 위해 기도했습니까?”라고 질문을 했다고 합니다. “그 아이를 위해 기도했습니까?” 우리가 물질적인 것인 것이든 영적인 것이든 기도 가운데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할 때 참된 사랑을 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할 때,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선행을 하거나 선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 하느님께서 영광 받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자신의 사랑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을 나누기 위해 먼저 상대방을 위해 기도하는 자세를 지녀야 할 것입니다. 기도는 우리를 겸손하게 하고 선행이나 선물의 결과에 연연하지 않게 하고 본래 하느님의 것을 하느님을 위해 아낌없이 나누게 합니다.
둘째, 우리는 사람들에게 하느님 사랑을 나누기 위해 “자신이 먼저 하느님의 사랑 속에 있어야” 합니다. 성인이 청소년들에게 준 것은 물질적인 것이만이 아니었습니다. 가장 큰 것은 바로 “사랑”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랑은 자신을 위한 사랑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을 전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 먼저 자신이 하느님의 사랑에 항상 의탁하였습니다. 청소년들에게 중요한 것은 스스로 독립할 수 있는 교육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하느님의 사랑과 신앙으로 이끌고자 했던 성인의 모습은 우리가 어떤 자세로 자녀들과 사람들을 만나야 하는지 좋은 귀감이 됩니다. 내 방식대로 많이 사랑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진정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방식으로 함께 사랑의 길을 찾아가도록 스스로 먼저 하느님 사랑 속으로 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셋째, 하느님의 사랑받는 것을 “느끼게 해 주는 것”입니다. 성인이 청소년을 돌보는데 사용한 방법은 그 무엇보다 ‘사랑’이었습니다. 성인은 청소년들에게 “여러분은 젊은이라는 이유만으로 나의 사랑을 받기에 충분합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청소년을 대하는 사람들에게는 “사랑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면서 “사랑받는다는 것을 느끼게 해줘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성인은 청소년들을 하느님의 사랑으로 대하고 청소년 각자의 개성과 신앙을 격려하면서 훌륭한 인격을 갖추도록 도왔습니다. 이렇게 청소년들을 교육하는 방법을 정리해 ‘예방 교육법’을 강조했는데, 그 주된 원리는 “감응(感應, 어떤 느낌을 받아 마음이 따라 움직임)하는 사랑”이요, “감흥(感興, 마음속 깊이 감동받아 일어나는 흥취')하는 사랑”이었습니다. 천사 같고 순수한 아이들의 내면에 죄나 악이 들어서기 전에 미리 좋은 것들로 가득 채우기 위해 따뜻함과 사랑의 체험을 많이 주는 것이었습니다. 때때로 이미 성인이 된 이들은 아무리 따뜻함을 주어도 자신의 선입견이나 편견으로 그것을 왜곡하거나 거부하는 경우가 있는 것 같습니다.
셋째, 약한 이들을 사랑하는 자세입니다. 성인 당시 토리노는 정치와 산업화의 중심으로 공장에서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는 소년노동자들, 전쟁고아들, 방황하는 소년들이 가득했습니다. 또 방황하는 소년들은 범죄에 빠지기 쉬웠고 교도소는 항상 수용자들로 넘쳐났습니다. 그래서 성인은 사회의 약자였던 고아들을 돌보기 시작했습니다. 지금도 우리 주변에는 약자들이 참 많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미숙하고 약하고 힘없는 이들을 위해 사랑의 마음으로 다가가는 것은 바로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자매 형제 여러분, 강요와 지시가 아닌 온유와 사랑으로 청소년들의 교육과 영성에 이바지한 요한 보스코 성인을 기념하는 오늘, 우리는 사랑하고 싶지만 제대로 사랑하지 못하고, 하느님 사랑보다는 물질적이고 외적인 가치가 더 우선하는 세상 속에서 청소년들에게 그리고 우리의 이웃들에게 어떻게 다가가야 하는지를 다시금 묵상하며 반성하게 합니다. 우리 안에 오늘 복음의 군대와 같은 악령이 아니라 사랑의 성령으로 충만하도록 오늘도 우리의 미숙한 사랑의 마음을 주님께 봉헌하도록 합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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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단절과 분열의 집에서 나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인간다운 삶을 이어가기 힘든 여건 한복판으로 찾아가시어 구원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찾아가신 게라사인들의 지역은 이방인들이 사는 곳이었습니다. 그곳은 불결했고, 더러운 영들이 출몰하는 무덤들이 널려 있었으며(5,2-5), 돼지들을 방목하기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배에서 내리시자마자 더러운 영에 들린 사람이 무덤에서 나와 그분께 절하며,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 당신께서 저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5,7) 하고 말합니다.
그는 즉시 그분을 알아보긴 했지만 '괴롭히지 말아 달라'며(5,8) 관계 맺기를 거부한 것입니다. 그는 무덤 곧, 폐쇄와 단절과 죽음의 집에서 살았던 것입니다.
더러운 영에 들린 사람은 밤낮으로 무덤과 산에서 소리를 지르고 돌로 제 몸을 치곤했습니다(5,5).
쇠사슬과 족쇄를 채워보았지만 그것을 끊어버려 아무도 그를 휘어잡을 수 없었지요(5,4) 이는 자아가 왜곡되어 분열에 빠진 것이고 사회적으로는 유다인들의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악의 세력에 휘둘려 불의하고 비정상적인 상황을 초래한 것입니다.
이처럼 더러운 영에 들렸다는 것은 인간의 순수한 본질인 거룩한 영이 악으로 오염되고 뒤틀린 상태를 뜻합니다.
더러운 영에 사로잡히면 폐쇄, 단절, 거짓과 거부, 자아분열과 왜곡, 두려움 등에 빠지게 됩니다. 한 마디로 고통과 불행과 죽음을 자초할 뿐이지요.
더러운 영은 자기 이름을 ‘군대’라고 합니다.(5,9) 한 사람 안에 있는 더러운 영의 이름이 군대라는 것은 의미심장합니다. 여기서 '군대'란 개인으로 보면 극심한 분열과 자기소외를 겪고 있는 상태를 뜻합니다.
한편 사회적 맥락으로 보면 군대는 팔래스타인에 주둔하던 로마 군대에 대한 증오심을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을 거부하고 자기 몸을 돌로 찧는 사람은 자아분열에 이르고, 사회를 비정상화 하여 고통을 안겨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더러운 영을 몰아내주시자 '옷을 입고 제정신을 차리게 된' 그는 그분께 “함께 있게 해달라”(5,18)고 청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가족들에게 돌아가 주님께서 해주신 일과 자비를 베풀어주신 것을 모두 알리라."(5,19)고 하십니다.
자아회복과 인간다운 사회로 되돌아감은 죄로부터의 자유와 해방이며 예수님을 통해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우리도 이웃 형제의 거친 마음, 닫힌 마음, 상처받은 마음, 무디고, 분노와 증오로 가득찬 마음 속으로 찾아들어가야겠습니다. 이것이 우리 구원의 길로 가는 길이기 때문이지요.
또한 하느님의 선과 자비의 손길을 거부하고 관계를 단절한 채 무덤에 거처하는 자폐인이나 주검이 되지는 말아야겠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내다보시는 하느님을 믿고(히브 11,8), 무덤에서 나와 순수한 영을 회복함으로써 사랑의 집, 정의의 집, 받아들임의 집으로 돌아가 자아를 통합하는 성숙한 사람이 되었으면 합니다.
나아가 거짓과 탐욕, 불의와 불평등의 악에 과감히 맞섬으로써 인간다운 삶을 실현해가는 정상적인 사회가 되도록 힘써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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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류한영 베드로 신부님]
유다인들은 돼지를 정결하지 않은 동물로 보아 가까이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게라사인들은 이교인이어서 마을에서 돼지를 키웠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더러운 영에 사로잡힌 사람에 의해 괴로움을 당했습니다. 그들은 괴성을 지르고 이상한 행동을 하는 그 사람을 골칫거리로 여겨 소외시켰습니다.
어둠이 가득한 그 마을에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구세주께서는 한마디 말씀으로 마귀 들린 사람을 구원해 주셨습니다. ‘군대’라는 더러운 영들은 돼지 떼 속으로 들어가게 해달라고 청하였으며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허락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천 마리의 돼지 떼보다 한 사람의 영혼을 더 귀중하게 여기셔서 그것을 허락하셨습니다. 돈벌이가 되는 돼지 떼들이 한꺼번에 죽자 마을 사람들은 크게 실망하였습니다. 그들은 다음에도 그러한 일이 또 생겨 손해를 볼까봐 두려워서 예수님께 자기네 고향에서 떠나 주십사고 청합니다.
그들은 재물과 더러운 영을 선택한 것입니다. 마귀 들렸던 사람은 예수님의 곁에 머물기를 청하였으나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자비를 가족들에게 알리라고 하셨습니다.
재산 때문에 형제와 불화하는 사람들, 알코올과 마약과 게임 중독에 빠진 사람들도 예수님을 만나면 무엇을 청하고 선택하게 됩니다.
이 세상의 혼돈 속에서 우리는 예수님께 무엇을 청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예수님 앞에서 무엇을 선택하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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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이 민 미카엘 신부님]
<더러운 영>
오늘 복음은 마르코 복음 5장 1절부터 20절까지 입니다. 조금 긴 내용을 우리에게 전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게라사 지방에 가셨는데 거기서 더러운 영에 사로잡힌 사람 한 명을 구마해주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더러운 영에 사로잡힌 사람은 무덤에서 살고 있었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사는 집이 아니고 죽은 자들이 누워있는 무덤에 살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는 정상적인 삶이 아니라 비정상적인 삶이고 비사회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와도 교류하지 않고 오직 더러운 영에 사로잡혀서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어느 누구도 그를 묶어 둘 수 없었다고 합니다.
게라사 주민들은 쇠사슬을 이용해서라도 그를 묶어 두려 했지만 그는 쇠사슬도 끊고 쇠고랑도 부수어 버리는 무서운 괴력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래서 아무도 그를 휘어잡지 못했습니다. 그만큼 그는 더러운 영에 강하게 사로잡혀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더이상 어느 누구도 그를 돌보아 줄 수 없으며 이끌어 줄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쇠사슬도 끊고 쇠고랑도 부수어 버린 정도라면 어느 누가 그를 제어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그는 밤낮없이 무덤과 산에서 소리를 지르며 돌로 제 몸을 짓찧곤 했다고 합니다.
이는 자해행위요 자기파괴행위인 것입니다. 자신을 돌보기는 커녕 오히려 자신을 망가뜨리고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더러운 영에 사로잡힌 사람은 그 삶에 있어서 생명의 영역이 아닌 죽음의 영역에 놓여져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사람이 예수님과 마주치게 됩니다. 그런데 그가 예수님을 보자 얼른 달려와서는 예수님 앞에 엎드려 경배하고 자신을 방어하고자 합니다. 이상한 일입니다.
마을 사람들 어느 누구도 그를 통제하지 못했는데 그 사람이 오히려 예수님을 보자 스스로 꼬리를 낮추며 예수님께 하소연하다시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앞에서는 꼼짝을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당신이 저와 무슨 상관이 있냐고, 그러니 제발 자기를 괴롭히지 말라고 말합니다. 그것도 하느님의 이름으로 명령한다고 합니다.
귀신인 주제에 구마자가 귀신을 내쫓을 때 하는 말을 합니다. 우스꽝스러운 일입니다. 이는 얼마나 다급했으면 그런 말을 썼겠는가 하는 것이고 또한 자신을 철저히 지키기 위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더러운 영아,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고 하십니다. 그 사람을 보고 더러운 영이라고 부르십니다.
마을 사람 어느 누구도 그 사람을 통제하지 못했는데 그 사람이 예수님께 와서 벌벌 떠는 이유는 예수께서 더러운 영의 정체를 파악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더러운 영의 실체를 아시는 것입니다.
마을 사람들은 더러운 영에 사로잡힌 사람의 겉모습만을 봅니다. 미친 사람이라고, 제 인생 망친 사람이라고, 도대체 제 정신이 아니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더러운 영과 그 사람을 분리하시고 더러운 영만을 상대하십니다. 그 사람이 그렇게 행동하는 것은 그 사람 안에 있는 더러운 영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더러운 영인 것이지 그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제 더러운 영이 예수님께 간청합니다. 제발 자기들을 마을 밖으로 쫓아내지 말고 부탁합니다. 그러다가 안 될 것 같으니까 한 가지 잔꾀를 부립니다.
자기들을 돼지떼 속으로 보내 달라는 것입니다. 돼지는 불결하기 때문에 자신들이 있을만한 곳이라 생각하는 것이고 또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들이 계속 그 마을에 머물 수 있다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착각이었습니다. 오히려 그로 인해서 전부 자멸하게 되었습니다.
더러운 영들이 돼지떼 속으로 들어가니까 돼지들이 미쳐 날뛰기 시작했고 모두 호수에 뛰어들었습니다. 결국 더러운 영들도 모두 사라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마을 사람들이 이 사실을 전해 듣고 달려 나왔습니다. 그들은 더러운 영에 사로잡힌 사람이 멀쩡한 정신으로 앉아 있는 것을 보고는 두려움에 사로 잡혔고 예수께 자기네 마을을 떠나 달라고 간청합니다. 쇠사슬로도 묶어둘 수 없었던 사람이 멀쩡한 정신으로 앉아 있으니 겁이 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더러운 영에 사로잡힌 사람이 어떻게 구원되었는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겁에 질려 무조건 떠나 달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귀신들렸던 사람은 자신이 회복된 것에 감사하면서 예수님 곁에 있게 해달라고 간청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에게 "집으로 가족들에게 가서 주님이 그대에게 어떻게 자비를 베푸셨는지를 모두 알리시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하여 그는 물러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행하신 모든 일을 선포합니다. 더러운 영에게 엄청나게 사로잡혔던 사람이 이제는 예수님께로부터 구원을 받아 복음의 선포자가 된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메시지는 죽음의 세계 속에서 삶을 살았던 사람일지라도 예수님에 의해 구원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그 사람이 오히려 복음의 선포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잠시 오늘 복음이 오늘날 우리들에게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묵상해 보겠습니다. 더러운 영에 사로잡힌 사람은 도대체 어떤 상태에 있는 사람일까요? 단지 귀신 들린 사람, 정신병 걸린 사람이라고 생각해 버리면 오늘 복음은 우리와 별로 상관이 없게 됩니다. 왜냐 하면 우리 모두가 어떤 정신병에걸려 있거나 미친 사람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무언가에 강하게 '중독'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중독'이라는 현상을 머리속에 떠올리고 싶습니다. 도박에 중독되어 있는 사람, 그는 누가 뭐래도 다른 사람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아무리 그를 붙자아 놓고 가두어 놓아도 그는 도박장으로 달려갑니다. 안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는 서서히 자신을 멸망의 구렁텅이로 몰고 갑니다. 왜 그렇게 된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정신적인 '공허감'과 '결핍'입니다.
이것이 바로 더러운 영의 정체인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깨닫고 나면 그 사람은 예수님께 도움을 청할 수 있게 되고 더러운 영이 벗어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는 더러운 영이 아닌 하느님의 영, 즉 성령이 그 사람 안에 머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 밖에도 여러 경우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마약에 중독된 사람, 술에 중독된 사람들도 마찬가지 입니다. 오늘 제가 특별히 말하고 싶은 것은 TV 보는 것과 컴퓨터 게임하는 것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절제없이 무제한 TV 보는 것은 사람을 수동적으로 만들며 머리속에 일어나는 현상은 마약을 먹고 일어나는 현상과 비슷하다고 합니다. 서서히 중독을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통제가 안되는 것입니다.
현대인들은 마음의 공허함을 잊어버리기 위해 끊임없이 TV에 빠지게 되며 TV에 나오는 가짜현실에 매달리게 되는 것입니다. 10년에서 12년을 평생 TV 보는 것으로서 시간으로 보낸다고 합니다. 절제없이 무제한 컴퓨터 게임을 하는 것도 마찬가지 입니다. 아무리 컴퓨터 게임을 하지 말래도 합니다.
결국 전원을 뽑아 버리고 컴퓨터를 박살내어도 어린 학생들은 PC방에 가서 기어코 하고야 맙니다. 하루 10시간 동안 하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가상 세계에 빠져버린 것입니다. 거기에 사로잡혀 있고 중독되어 있습니다.
살아가면서 우리는 많은 경우 무언가에 사로잡혀 있고 무언가에 미쳐 있습니다. 그것이 좋은 것이면 상관이 없지만 많은 경우 우리 자신의 삶을 낭비하고 무력하게 만듭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직시하면서 우리의 삶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새롭게 변화될 수 있도록 해야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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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첫 이방인지역 나들이로, 게라사인 지역에서 더러운 영을 쫒아내시는 장면입니다. 거센 돌풍을 잠재우신 예수님께서는 이제 호수를 건너왔지만, 또 다른 거센 돌풍을 만나게 됩니다. 마치 모세가 갈대바다를 건너왔지만 여전히 사막에서 또 다른 거센 돌풍을 마주했듯이 말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바다에 부는 돌풍이 아니라, 인간에게 부는 거센 돌풍을 잠재우십니다. 곧 더러운 영에 들린 사람이 족쇄나 쇠사슬로 묶어둘 수 없을 만큼 거센 돌풍에 휘둘려 밤낮으로 소리 지르며 무덤을 헤집고 다녔습니다.
“더러운 영에 들린 사람은 무덤에서 나와 예수님께 마주 왔다.”(마르 5,2)
이제 마귀 들렸던 사람에게서 마귀들은 나가고, 그는 “옷을 입고 제정신으로 앉아”(마르 5,15) 있었습니다. ‘옷을 입고 앉아 있는 것’은 더러운 영에 들렸던 왜곡된 인간성을 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이는 바오로 사도의 표현을 빌리면, “그리스도를 옷 입듯이 입었다.”(갈라 3,27)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또한, ‘제정신이 들었다’는 것은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서와 같이, ‘제자리로 돌아왔다.’(루카 15,17-20) 곧 ‘하느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새사람으로 되었다.’(에페 4,21-24)는 것을 말해줍니다. 사실, 마귀를 내쫓는 이 이야기는 병을 고치는 다른 이야기들의 범위를 넘어서, 사탄의 왕국에 대한 예수님의 승리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돼지 떼들의 익사는 이 고장에 대한 마귀들의 권세가 끝났음을, 곧 그곳이 더러움에서 해방되었음을 나타냅니다. 그렇지만 이곳에서도 예수님께서는 배척을 받으셨습니다. 어둠은 빛을 반기기보다 오히려 배척하고 저항하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마귀 들렸던 사람에게 말씀하십니다.
“집으로 가족들에게 돌아가 주님께서 너에게 해주신 일과 자비를 베풀어주신 일을 모두 알려라.”(마르 5,19)
이렇게 그는 첫 이방인 선교사로 파견됩니다. 그리스도의 자비의 선교사로 파견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물러가,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해 주신 일을 데카폴리스 지방에 선포하기 시작하였다.”(마르 5,20)
오늘, 우리도 “주님께서 우리에게 해주신 일과 자비를 베풀어주신 일”을 알려야 할 일입니다. 그러려면, 먼저 “주님께서 우리에게 해주신 일과 자비를 베푸신 일”을 깨달아야 할 일입니다. 그래야 우리도 주님께서 하신 일과 자비를 베풀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오늘도 우리는 죽은 이들의 무덤 가운데가 아니라, 살아계신 주님의 사랑 가운데 앉아 있어야 할 일입니다. 제 정신으로 ‘그리스도의 옷’을 입고, 그리스도의 말씀 앞에 앉아 있어야 할 일입니다. ‘먼저 베풀어지고 선사되는 하느님의 사랑’을 수락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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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그들은 그분을 보고 저희 고장에서 떠나가 주십사고 청하였다.”(마르 5,17)
주님!
어둠을 몰아내소서.
제 안에 돼지 떼가 판치지 않게 하소서.
본래부터 주님의 거처이니, 제 안에 빛을 밝히소서.
죽은 이들의 무덤이 아니라, 살아계신 당신의 사랑 가운데 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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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더러운 영아,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마르5,8)
오늘은 청소년들과 고아들의 아버지요 스승이라고 불리는 '성 요한 보스코 사제를 기억하는 날'입니다.
먼저 오늘 영명축일을 맞이한 모든 분들과 주보축일을 맞이한 살레시오 가족들에게 축하의 인사를 드립니다.
성 요한 보스코 사제는 청소년들을 위한 목적으로 세워진 살레시오 수도회(남자)와 살레시오 수녀회(여자)를 설립했고, 이 수도회는 특히 가난한 청소년들의 복지와 복음화를 위한 사도직 활동을 해 오고 있습니다.
성 요한 보스코 신부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청소년을 사랑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들이 사랑받고 있음을 느끼게 해야 합니다."
"나는 언제나 그들을 위해 사랑하는 마음으로 일하고 노력하고 또 사제 직분을 이행해 왔습니다."
오늘 복음(마르5,1-20)은 예수님께서 군대라는 이름을 지닌 아주 강한 더러운 영에 사로잡힌 사람을 고쳐주시는 말씀입니다.
"집으로 가족들에게 돌아가, 주님께서 너에게 해 주신 일과 자비를 베풀어 주신 일을 모두 알려라."(마르 5,19)
더러운 영으로부터 해방된 그는 새사람으로 다시 태어나 예수님께서 하신 이 말씀을 그대로 실천합니다.
복음 선포자로 대변신합니다.
날마다 우리 안에서 일어나기를 바라시는 기적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힘으로 내 안에 자리잡고 있는 더러운 영을 몰아내고, 성 요한 보스코 사제처럼 너를 살리는 하느님 구원 사업에 동참하도록 합시다!
특히 세상과 교회의 미래인 청소년들에게 깊은 관심과 따뜻한 사랑을 나누어 줍시다!
"하느님, 복된 요한 사제를 청소년의 아버지요 스승이 되게 하셨으니, 저희도 똑같은 사랑의 불로 타올라, 오직 주님을 섬기며 형제들의 구원을 위하여 힘쓰게 하소서."(본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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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사람을 사람으로>
마르코 5,1-20 (마귀들과 돼지 떼)
그때에 예수님과 제자들은 호수 건너편 게라사인들의 지방으로 갔다. 예수님께서 배에서 내리시자마자,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무덤에서 나와 그분께 마주 왔다. 그는 무덤에서 살았는데, 어느 누구도 더 이상 그를 쇠사슬로 묶어 둘 수가 없었다. 이미 여러 번 족쇄와 쇠사슬로 묶어 두었으나, 그는 쇠사슬도 끊고 족쇄도 부수어 버려 아무도 그를 휘어잡을 수가 없었다. 그는 밤낮으로 무덤과 산에서 소리를 지르고 돌로 제 몸을 치곤 하였다.
그는 멀리서 예수님을 보고 달려와 그 앞에 엎드려 절하며, 큰 소리로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 당신께서 저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하느님의 이름으로 당신께 말합니다. 저를 괴롭히지 말아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더러운 영아,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하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네 이름이 무엇이냐?” 하고 물으시자, 그가 “제 이름은 군대입니다. 저희 수가 많기 때문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 자기들을 그 지방 밖으로 쫓아내지 말아 달라고 간곡히 청하였다.
마침 그곳 산 쪽에는 놓아기르는 많은 돼지 떼가 있었다. 그래서 더러운 영들이 예수님께, “저희를 돼지들에게 보내시어 그 속으로 들어가게 해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 예수님께서 허락하시니 더러운 영들이 나와 돼지들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이천 마리쯤 되는 돼지 떼가 호수를 향해 비탈을 내리 달려, 호수에 빠져 죽고 말았다.
돼지를 치던 이들이 달아나 그 고을과 여러 촌락에 알렸다. 사람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보려고 왔다. 그들은 예수님께 와서 마귀 들렸던 사람, 곧 군대라는 마귀가 들렸던 사람이 옷을 입고 제정신으로 앉아 있는 것을 보고는 그만 겁이 났다. 그 일을 본 사람들이 마귀 들렸던 이와 돼지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그들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그러자 그들은 예수님께 저희 고장에서 떠나 주십사고 청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배에 오르시자, 마귀 들렸던 이가 예수님께 같이 있게 해 주십사고 청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허락하지 않으시고 그에게 말씀하셨다. “집으로 가족들에게 돌아가, 주님께서 너에게 해 주신 일과 자비를 베풀어 주신 일을 모두 알려라.” 그래서 그는 물러가,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해 주신 모든 일을 데카폴리스 지방에 선포하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사람들이 모두 놀랐다.
<사람을 사람으로>
사람은
사람이고
사람이어야지요
사람은
사람답지 못해도
여전히 사람이랍니다
사람답지 못한
사람도
사람이고 싶을 테지요
사람이고 싶은
사람답지 못한 사람을
결코 포기하지 말아야 해요
사람답지 못하게 하는
그 무엇 너머
사람이고 싶은 사람을
다만 보아주고
다만 품어주고
다만 살려야 해요
사람은
사람다울 수 없어도
여전히 사람이랍니다
사람다울 수 없는
사람도
사람이고 싶을 테지요
사람이고 싶은
사람다울 수 없는 사람을
결코 외면하지 말아야 해요
사람다울 수 없게 하는
그 무엇 너머
사람이고 싶은 사람을
다만 보아주고
다만 품어주고
다만 살려야 해요
사람은
사람이고
사람이어야 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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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요즘 가짜 뉴스가 너무 많다고 합니다. 뻔히 보이는 거짓인데도 이를 굳게 믿는 사람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한 연구진은 어떤 사람들이 가짜 뉴스를 더 맹신하는지를 조사했습니다. 그 결과 일반적인 사람보다 분노를 더 많이 느끼는 사람이 가짜 뉴스를 더 잘 믿고 더 쉽게 퍼트린다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분노하게 되면 더 쉽게 속게 됩니다. 왜냐하면 시야가 좁아지기 때문입니다. 분노할 때를 떠올려 보십시오. 분노하면 상대방만 보고 자신을 보지 못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여기서 출발해서 역으로 과거로 들어가게 되면서 분노를 더 키우게 됩니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사람들의 분노는 매우 커졌습니다. 행동의 제약을 받게 되면서 불평불만이 점점 늘어만 갔습니다. 이런 분노가 가짜 뉴스를 제대로 판단하지 못하고 맹신하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분노를 하게 되면 얼른 그 분노를 풀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분노를 더 크게 만드는 내 분노에 동조하는 사람을 만나게 되면 더 판단을 제대로 못 하게 할 뿐입니다. 가짜 뉴스를 진짜 뉴스와 구분할 힘도 잃게 됩니다.
분노 없이 사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또 분노가 생겼을 때, 그 분노를 푸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분노에서 벗어나야 참 진리를 바라볼 수 있으며, 그 진리 안에서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보면, 분노에 가득 찬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그런데 특별히 그 분노를 예수님을 향해 있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알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자기에게 손해를 끼치는 사람으로 판단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주님께서는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을 구해주십니다. 더러운 영이 들어서 고생하고 있는 사람의 고통을 없애주셨습니다.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좋은 일입니까? 나쁜 일입니까?
그런데 여기에 문제 하나가 있었습니다. 구해주는 과정 안에서 재산 피해가 있었던 것입니다. 악령들이 돼지 안으로 들어가면서, 그 고장 사람들이 기르던 돼지들이 모두 호수 안으로 빠져 죽고 말았지요. 그러자 사람들은 예수님께 말합니다. “저희 고장에서 떠나 주십시오.” 아마 사람들은 분노했을 것입니다.
한 사람이 더러운 영에서 자유로워졌음을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재산의 피해만을 보면서 분노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저 사람이 건강해진 것과 내가 무슨 상관이야? 왜 우리가 손해를 봐야 하는 거야?’
놀라운 기적을 보여주셨지만, 예수님을 쫓아냅니다. 예수님께서 참 하느님이심을 알고 있다면 예수님을 쫓아낼 수 있었을까요? 분노가 제대로 된 판단을 못하게 한 것입니다. 지금 혹시 분노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빨리 제거해야 합니다. 주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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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해진다는 것(헤르만 헤세)>
인생에 주어진 의무는 다른 아무것도 없다네. 그저 행복하라는 한 가지 의무뿐 우리는 행복하기 위해 세상에 왔지. 그런데도 그 온갖 도덕 온갖 계명을 갖고서도 사람들은 그다지 행복하지 못하다네.
그것은 사람들 스스로 행복을 만들지 않는 까닭. 인간은 선을 행하는 한 누구나 행복에 이르지. 스스로 행복하고 마음속에서 조화를 찾는 한. 그러니까 사랑을 하는 한…. 사랑은 유일한 가르침. 세상이 우리에게 물려준 단 하나의 교훈이지.
예수도 부처도 공자도 그렇게 가르쳤다네. 모든 인간에게 세상에서 한 가지 중요한 것은 그의 가장 깊은 곳 그의 영혼, 그의 사랑하는 능력이라네.
보리죽을 떠먹든 맛있는 빵을 먹든 누더기를 걸치든 보석을 휘감든 사랑하는 능력이 살아 있는 한 세상은 순수한 영혼의 화음을 울렸고. 언제나 좋은 세상, 옳은 세상이었다네.
헤르만 헤세의 멋진 글입니다. 어디에서 여러분은 행복을 찾고 있습니까? 그 행복을 찾은 사람만이 언제나 좋은 세상, 옳은 세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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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예수님을 만나면>
그날의 기분은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습니다. 마음에 둔 사람을 만나면 기쁨이 크고, 보기 싫은 사람을 만나면 가슴이 아픕니다. 좋은 스승을 만나 훌륭한 사람이 되기도 하고, 못된 사람 만나서 잘못된 길을 걷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을 만나면 운명이 바뀔 수도 있습니다. 이런저런 만남이 있지만 가장 중요한 만남은 예수님을 만나는 일입니다. 예수님을 제대로 만나면 인생이 바뀝니다. 그분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요한 14,6)이시기 때문입니다.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예수님께 마주나왔습니다. 그것은 큰 은총입니다.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남으로써 무덤에서 나올 수 있었습니다. 무덤이란 곧 죽음을 의미하는데 사랑이 없는 미움과 시기, 질투, 분노, 적개심, 무관심 등으로 지옥같이 사는 상태를 말합니다.
더러운 영에 들린 사람이 족쇄와 쇠사슬에 묶여 있었다는 것은 무질서와 혼란 상태에 있었다는 것을 말하고, 소리를 지르며 돌로 제 몸을 치곤 하였다는 것은 분노와 자학으로 괴로워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런데 그 어둠에서 나왔으니 복이 있습니다.
그는 결국 제정신으로 돌아왔습니다.(마르 5,15) 제정신으로 돌아왔다는 것은 새 삶을 시작하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는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그분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 분별”(로마 12,2)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은 예수님을 만나 새 삶을 시작하게 되었고 예수님 곁에 같이 있고 싶어 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이 자기 고향에서 떠나주기를 바랬습니다. 심지어 벼랑까지 끌고 가 떨어뜨리려고 하였습니다.(루카4,28) 더러운 영이 들렸던 사람도 처음에는“당신께서 저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저를 괴롭히지 말아주십시오.”(마르 5,6) 하고 외쳤습니다. 여기서 악령의 속성을 볼 수 있습니다. 악령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정확히 알고 인정하지만, 그분과 소통하고 친교를 나누는 일은 거부합니다. 이렇게 악의 세력은 무엇이 올바른 것인지 잘 알면서도 그릇된 삶에 고집스레 집착하고 거기에서 벗어나기를 극도로 싫어합니다.(손희송)
그런데 제정신이 들자 예수님께 “같이 있게 해 주십시오”(마르5,18). 하고 청하였습니다. 이 청은 제정신이 들기 전과는 전혀 다른 청원입니다. “이제 낡은 것은 사라지고 새것이 나타난 것”(2코린 5,17).입니다.
예수님께 “같이 있게 해 주십시오” 하는 청은 곧 우리의 기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제정신이 들어 청원한 기도이니 우리는 기도를 할 때 제정신으로 해야 합니다. 그래야 무턱대고 청하지 않고 효과적인 기도, 꼭 이루어지는 기도를 할 수 있으며 주님의 뜻에 의합한 기도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는 기도가 아니라 되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때로는 기도가 들어지지 않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영적 유익을 위해서 거절하신 것으로 믿고 때를 기다리며 주님께 대한 신뢰를 잃지 않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더러운 영이 들렸던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 새 생활을 시작하였듯이 우리도 예수님을 만나 ‘새로 난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만나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지상 것들에 마음을 두지 않고 천상 것에 마음을 두는 사람이 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누군가가 나를 만나서 기쁨을 간직할 수 있는 날이 된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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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온전穩全한 사람>
-주님을 중심中心에 모시고 사는 성인聖人-
누가 온전한 사람입니까? 주님을 중심에 모시고 사는 성인입니다. 성인은 일부 영적 엘리트가 아니라 믿는 이들의 보편적 성소입니다. 누구나 온전한 성인으로 불림받고 있습니다. 참 기쁨과 참 행복도 온전한 성인의 삶에서 나옵니다. 누가 온전한 사람입니까?
진실하고 성실하고 절실한 3실의 사람입니다.
감사와 감동과 감탄의 3감의 사람입니다.
하느님 믿음, 건강, 돈을 우선순위로 하는 사람입니다.
기쁨과 감사, 인내와 절제, 그리고 신망애信望愛의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이런 이들이 영적으로 건강한 성인들입니다. 참 온전한, 건강한 사람은 이렇게 영혼이 튼튼한 사람입니다. 영혼이 튼튼할 때 육신도 뒤를 잇습니다.
한 마디로 주님을 중심에 모시고 사는 사람이 성인이 그러합니다.
요즘 자주 가톡 전송중 수도원 십자로의 예수님 성심상 사진과 더불어 전하는 메시지가 생각납니다. “예수님 축복인사 받으시고 오늘도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우리의 영원한 롤모델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을 삶의 중심에 모시고 살 때 참으로 온전한 삶이겠습니다.
바로 오늘 축일을 지내는 19세기 북부 이탈리아 토리노 출신으로 ‘젊은이들의 사도’라 칭하는 살레시오 수도회 창립자 성 요한 보스코 사제가 그러합니다. 만72세, 당시로 보면 천수를 누린 성인입니다. 성인에 대한 일화도 참 풍부합니다.
“청소년은 젊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사랑받기에 충분합니다.”
“아이들을 사랑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들이 사랑받고 있음을 알도록 사랑하십시오.”
성인의 어록에 나오는 유명한 말씀입니다. 산업화라는 격변기 속에서 빈곤하고 버림받은 청소년들에 대한 교육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몸소 실천한 교육자이자 영성가이며 뛰어난 저술가였던 성인의 유언도 감동적입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선을 행하고 아무에게도 악을 행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나의 아이들에게 천국에서 기다리겠다고 전해 주십시오.”
마침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오늘 성 요한 보스코 축일을 맞이하여 살레시오 수도자들을 축하하며 드린 말씀도 좋았습니다.
“우리는 젊은이들의 아버지이며 스승인 이 위대한 성인을 생각한다. 그분은 자신을 경당敬堂에 가두지도 않았고, 자신의 것들에 갇히지도 않았다. 그분은 자신의 특징적인 창조성을 지니고, 젊은이들을 찾아 거리로 뛰쳐나갔다.”
성 요한 보스코의 후예이자 ‘수단의 돈 보스코’라 일컫던 살레시오 수도회의 이태석 세례자 요한 신부의 삶도 감동 그 자체입니다. 암투병중 임종직전에 성 요한 보스코를 꿈에서 보았고, 간병하던 살레시오 수도회 수도자들에게 “Everything is Good!(모든 것이 좋다!)”라는 유언을 남기고 선종했습니다.
성 요한 보스코, 이태석 세례자 요한 수도사제 두 분 모두 예수님을 닮은 참 사람, 온전한 사람의 전형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 말씀에 접근합니다. 복음에서 게라사의 더러운 영에 들린 미친 사람과 제1독서의 다윗의 처지가 흡사합니다. 완전히 소외되고 버림받은 처지입니다. 주석일부를 소개합니다.
“압살롬 아들의 반역으로 어둠속에 떨어진 다윗이다. 그는 울면서 머리는 산발한채 맨발로 올리브 산을 울면서 걸어갔다. 시므이는 그를 저주하며 돌을 던진다. 여기서 다윗은 게라사의 미친 사람과 큰 차이가 없다. 다윗 역시 그의 아들, 신하들, 그의 왕직으로부터 비극적으로 철저히 소외되어있다.”
외관상 비슷하지만 내용은 천지차이입니다. 다윗의 대죄에 대한 보속의 수련이 참 엄혹합니다. 이런 회개에 따른 보속의 시련을 통해 참으로 비워지고 겸손해진 다윗이었을 것입니다. 삶의 중심에 주님을 모시고 꾿꾿이 한결같이 견뎌내는 다윗의 인내와 겸손이 놀랍습니다. 바로 주님은 다윗의 이점을 주목하셨을 것입니다.
이래서 대죄인임에도 불구하고 회개한 다윗을 성인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이 또한 하느님이 다윗을 교육하는 과정입니다. 이런 주님이 그의 삶의 중심에 자리하지 않았다면 다윗은 진짜 더러운 영에 들려 미쳤을 것입니다. 마지막 다윗의 말마디가 그의 하느님 믿음을 입증합니다.
“내 배 속에서 나온 자식도 내 목숨을 노리는데, 하물며 이 벤야민 사람이야 오죽하겠소? 주님께서 그에게 명령하신 것이니 저주하게 내버려 두시오. 행여 주님께서 나의 불행을 보시고, 오늘 내리시는 저주를 선으로 갚아 주실지 누가 알겠소.”
말한후 부하들과 계속 고난의 피난길에 오릅니다. 반면 복음의 게라사의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은 중심 부재의 사람들 모두의 가능성입니다. 마음의 중심 자리에 주님이 자리하지 않을 때 악령이 자리잡게 되고 공동체에서 소외된, 버림받은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위태하고 약한 인간들인지요! 미치거나 자살 둘 중 하나입니다. 그래서 생존경쟁 치열한 세상에서 살아가자니 병도 많고 폐인이나 괴물도 많고, 자살자도 많습니다. 참으로 온전한 사람으로 살기 힘든 세상이며 참사람 찾아 보기 힘든 시절입니다. 이 모든 궁극의 원인은 중심에 주님을 모시지 못한, 중심 부재의 결과입니다.
“더러운 영아,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마침내 빛이신 주님을 만남으로 더러운 어둠의 영들은 축출되고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은 구원되어 온전한 사람이 됩니다. 오히려 주님의 일꾼이, 복음 선포자가 됩니다. 이제 주님을 삶의 중심에 모신 온전한 사람이 된 것입니다. 주님은 당신과 함께 해달라는 청을 거절하신후 제 삶의 자리로 복귀시킵니다.
“집으로 가족들에게 돌아가, 주님께서 너에게 해 주신 일과 자비를 베풀어 주신 일을 모두 알려라.”
그러나 유비무환의 지혜가, 치유보다는 예방이 백배 낫습니다. 더러운 영이 들리기 전, 내 삶의 중심에 마음의 중심에 살아 계신 주님을 모시고 주님과 일치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수도자들은 평생 매일 끊임없이 규칙적으로 이 거룩한 성전에서 시편성무일도와 미사 공동전례기도를 바칩니다. 사실 이런 영성훈련보다 영육의 건강에 좋은 처방도 없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안에 내재한 온갖 어둠의 더러운 영들을 말끔히 쫓아내시고 당신의 생명과 빛, 영으로 가득 채워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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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zflh0hcRJ6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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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네 이름이 무엇이냐?"(마르 5, 9)
사랑의 힘을
믿는다.
이름이란
소중한
이름을 자주
불러주는
거기에서
뿌리를 내린다.
열매는 그냥
맺히지 않는다.
삶의 목적을
심어주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가장 어렵고
오래 걸리는
것이 교육이다.
교육은 기초와
기본을
가르쳐주는
거기에서
출발한다.
출발이 없으면
도착도 없다.
성 요한 보스코
사제처럼
젊은이들의
교육은 우리의
미래이다.
신앙과 교육을
접목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되풀이되는
교육을 통해
젊은이들은
건강한
사람이
되어간다.
설레임으로
아침을
맞이하게 하는
사랑이 교육이다.
배우는 기쁨보다
더 큰 기쁨은 없다.
배움의 여정이
삶의 여정이다.
기술을 배우고
삶의 자세를
배우고 같이
사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저마다
펼쳐나갈
잠재력을
깨우는 것이다.
사랑을
다시 배우는
시간이다.
새생활이
시작되는
거기에
행복이 있다.
변화를
두려워말자.
교육이 있는
곳에 신앙이
있고 배움이
있는 곳에
사랑의 멋진
성장이 있다.
아픔 없는
성장은 없다.
성장하는 부모
성장하는
자녀들이다.
성 요한
보스코의
사랑으로
교회는
한 단계
더 깊어진다.
사랑은
교육이다.
십자가로
가르치시는
주님을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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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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