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둡다고 두려움을 갖는다는 건 나는 아직 삶의 욕구가 강하다는 반증입니다.
사실 이 어둠을 걷어내고 나면 전혀 두렵지 않은데
보이지 않는 세계는 때로는 신비의 매력으로 다가오지만
알 수 없음에서 느끼는 두려움이 더한 건 살아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사유의 힘을 주는 지리산
아직 어둡다. 할 수없이 혼자서 다시 떠난다.
그래도 사람들을 깊은 산속에서 만난 이후로 두려운 마음은 한결 적어진다.
그렇게 다시 15분가량 갔을까 다시 5-6명의 사람들과 만난다.
출발한 시간을 알아보니, 나보다 한 시간 전에 떠났다고 한다.
조금은 훤해지는 기미가 있어서 그들을 앞서서 다시 걸음을 재촉한다.
먼동이 확연하게 트기 시작하고 이제는 두려움 따위는 없다.
같은 장소에 있으면서도 어두워지면 두려워지는 인간의 마음,
신은 인간에게 그런 약점을 만들어 준 이유가 분명 있을 것이다.
오전 6시 15분, 3각형 모양의 뾰족한 모양을 박아 놓은 곳, 삼도봉이다.
남서쪽에서 보면 전라남도라고 새겨져 있고, 동쪽을 보면 경상남도, 북서쪽으로는
전라북도라고 새겨져 있는 곳, 3도가 나눠지는 곳이라서 삼도봉이다.
1초 동안에 3도 땅을 언제든 밟을 수 있는 곳이다.
잠시 물 한 모금을 마시며, 카메라를 꺼내 삼각뿔을 찍는다.
잠시 휴식을 취하고 출발해서 조금 더 가다보면 지난여름 백무동에서 출발하여 역으로
종주를 할 때 지긋지긋하게 느껴졌던 595계단이나 되는 목재 계단이 나를 반긴다.
지금은 내리막이라 전혀 염려가 안 된다. 시계를 보니 6시 20분이다.
저 먼 산봉우리위로 빨간 태양이 솟아오른다.
막 물들기 시작한 단풍나무에 얹힌 붉은 태양이 유난히 곱다.
처녀의 홍조 띤 얼굴만큼이나 곱다.
몇 컷 찰칵 찰칵하고 계단을 내려간다.
휴식할 만한 자리가 마련된 공간들이 있다.
화개재라고도 하고, 뱀사골 정상이라고도 한다.
시간은 6시 30분, 떡 한 덩이를 꺼내 먹고, 초콜릿 5개를 먹어 치운다.
잠시 휴식을 취한 후 다시 언덕길을 오른다.
제법 계속되는 오르막길이다.
토끼봉, 반야봉에서 묘시 방향이라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이어서 내리막 오르막을 반복하다 보니 가파른 내리막길이다.
잠시 쉬기로 마음먹은 곳, 연하천 산장이다. 8시 10분이다.
언제 보아도 물이 콸콸 솟아 나오는 곳,
능선에 있지 않고 약간은 아늑하게 파고 앉은 곳에 자리 잡은 산장이다.
이미 많은 이들이 아침을 준비해서 먹고, 치우고, 떠나는 사람 등, 북적거리고 있다.
등걸위에 배낭을 내려놓고 약수를 한바가지 쭉 들이킨다.
목구멍이 상쾌하다.
남아있던 초콜릿과 밤빵을 다 먹어 치운 후 휴대용 면도기로 수염을 밀어낸다.
15분을 쉬고 난 후 다시 출발이다.
여러 사람을 앞질러서 오르막을 오르다가 중간쯤에 갈래길이 나온다.
무심코 표지판도 보지 않은 것이 불찰이었다.
한참 내려가다 보니 낯설다.
그래도 지리산은 여러 번 와 본 터라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어 되짚어 올라가서 갈래 길에서 이정표를 보니 음정으로 내려가는
하산 길로 갔던 것이다.
시간을 잃은 만큼 조금 더 속도를 내서 벽소령 대피소까지 가기로 한다.
명선봉을 지나고 형제봉을 지나가야만 벽소령에 도달한다.
오르락내리락 하는 길이지만 오르막이 훨씬 더 많은 조금은 힘든 노정이다.
두 형제가 득도를 하다가 요녀의 유혹을 이기기 위해 서로가 등을 맞대고 견디다가 돌이
되었다는 전설의 형제봉의 암석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나를 돌아본다.
지리산을 종주하듯이 한평생 산다는 것이 종주라면 이런 정도의 지리산 종주를 닮은
삶이라도 행운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넘어져도 일어나되 굴러 떨어지지만 않으면 그런대로 인생을 잘 사는 것일 테니까 말이다
비틀거리며 살아도 넘어지지 않고, 결국 중심을 잡아가면서 살아가는 인생,
언젠가는 종막을 고할 내 인생을 돌아본다.
등에 짊어진 짐은 먹을 것을 먹어서 비워내도 무게는 줄지 않는다.
지리산
언제 찾아도 거부함이 없이
반겨주는
너
때로는 삶이 버거워
그 삶을 위안받거나 피할 길 없어
찾으면 말없이 속깊은 가슴으로
안아주는
너
나를 훌훌 털고 너의
넉넉한 가슴을 파고들면
내 모두를 털어주고 쓰다듬어
돌아갈 길에
용기의 융단을 깔아 주는 너
내 부끄러움을
내 아린 가슴을
털어 놓고 나는 떠난다.
그리고
훗날 너를 다시 찾을 것이다.
말은 없지만 침묵으로 나를 가르치는
너
너를 사랑하는 까닭에...
이 마음을 느끼시려거든 일단 짐을 꾸리고 산을 향해 가보시지요.
기어이 당신을 포근하게 맞이해 줄 지리산이 부릅니다.
최복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