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사 산책-9 통영의 진산 여황산(艅艎山)
‘여황(艅艎)’은 훌륭하게 위세를 갖춘 큰 군선(軍船)을 상징 艅齋 金一龍
<한산신문>2012.1.21.연재
새해를 맞아 북포루(北鋪樓)에 올랐다. 통영항 강구(江口) 주변의 시가지와 한산도 앞바다가 한 눈에 조망되는 곳이다.
북쪽으로는 백두대간을 이어내린 벽방산(碧芳山)이 마치 꿈틀거리는 용의 형세로 솟았으며, 그 중 한 산맥이 생기 충만하여 남쪽으로 굳세게 뻗치다가 곧장 바다로 들어가는 곳에 통영의 터를 열고 있는 형국을 이루고 있다.
역술가는 올해가 임진년 ‘흑룡(黑龍)의 해’라고들 한다. 통영은 옛 임진왜란 때 왜적을 무찔러 풍전등화에 처한 나라를 구한 그 역사의 현장이기에 그 감회가 유별한 해라 하겠다.
예전에는 이곳 산정을 ‘북장대(北將臺)’ 또는 ‘북장대먼당’이라 일컬었다. 옛날 통영성곽을 지키던 장수가 북포루에 올라 군사들을 호령했던 것에서 연유된 지명이다. 그리고 토박이 산이름은 마을 뒷산이란 뜻인 ‘안뒤산’에서 유래하여 속칭 ‘안띠산’이라 했다. 풍수지리적으로는 고을의 으뜸 산인 ‘주산(主山)’, 마을을 진호하는 ‘진산(鎭山)’, 마을 뒤편 북쪽에 위치한 산이라 하여 ‘북산(北山)’ 및 ‘후산(後山)’ 등으로 불리었다.
옛 문헌을 찾아보면 ‘통영의 주산은 여황산(艅艎山)이다’라고 했다. 이러한 산이름 <여황(艅艎)>을 일러 ‘배의 이름’, ‘나룻배’ 및 ‘거룻배’ 또는 ‘임진왜란 때의 배이름’ 그리고 ‘사람이 죽어 그 영혼이 극락정토로 타고 가는 배의 이름’이라며 불교설화에서 유래했다는 등의 그럴싸한 여러 해석들이 있어왔다.
그러나 정작 이 <여황(艅艎)>은 고대 중국의 배이름에서 유래한 것으로 사료된다. 지금으로부터 대략 2천4백50년전(기원전 4백35년)의 장안전투(長岸戰鬪) 이야기이다.
옛 중국 춘추전국시대의 노(魯)나라 소공(昭公) 17년, 오(吳)나라가 먼저 초(楚)나라를 쳤는데 장안전투에서 오히려 패하여 왕이 지극히 아끼던 배 ‘여황(餘皇)’을 초나라 군사들에 빼앗기게 된다. 이에 오나라 공자광(公子光)은 “선왕께서 타시던 배를 잃은 것이 어찌 오직 나만의 죄 뿐 이겠는가? 우리 모두에게 죄가 있으니 힘을 합하여 ‘여황’을 빼앗아 돌아와 사죄를 구해야 할 것이다”라며 설욕을 굳게 다짐하고 군사들을 이끌고 다시 나아가 초나라 군대를 크게 쳐부수었다. 그리고 결국 임금의 배 ‘여황’을 찾아가지고 돌아갔다는 고사이다.(「春秋左氏傳」昭公4篇)
이를 두고 후세의 갈홍(葛洪. 284~364)은 그의「포박자(抱朴子)」에서 ‘여황(艅艎)은 앞에 물새의 형상을 새긴 지극히 화려하며 물을 건너기에 아주 좋은 배를 일컫는데, 이를 일명 여황(餘皇)이라 한다’고 해석했다. 그리고「자전(字典)」에는 ‘여황(艅艎)은 배이름인데, 여(餘)와 여(艅)는 통하니 여황(餘皇)하고도 통용된다’고 했다. 이로써 원래의 배이름 ‘여황(餘皇)’은 후대로 오면서 ‘여황(艅艎)’으로 통용되었음을 알겠다.
한편 임진왜란 때의 여러 문헌에서도 ‘여황(艅艎)’을 찾아볼 수 있다. 당시 조선에 파병된 명나라 장수들을 격려하던 중국인 조환(朝煥)의 시에 ‘여러 고을의 말(馬)은 잘 먹어 살이 쪘으며, 여황(艅艎. 큰 군선들)은 바다에 집결하여 겹겹이 적을 포위해 싸우는 도다(艅艎水集戰重圍)’라는 구절이 있다. 그리고 장수 형개(邢玠)가 요동 땅으로 돌아갈 때 선조임금이 그들을 전송하며 공(功)을 치하하는 글에 ‘여황이 하늘을 가리었으니(艅艎蔽空) 어찌 왜적의 괴수가 죽음에서 도망칠 수 있으랴!’라고 했다.
또 이충무공을 선무일등공신으로 책정하는 선조의 교서(敎書. 策宣武元勳敎書)에도 ‘마침내 여황이 물을 잃은 것 같이 되게 함(艅艎之失水)은 조정의 정책이 잘못됨에서 생긴 일이라, 나는 곧은 충신을 저버린 것이 부끄러워 빨리 장수의 권한을 돌리고 그대는 충성과 의분에 더욱 힘써서...’라는 구절이 있다.
이와 같이 고대의 지극히 호화로운 임금의 배이름이었던 ‘여황(餘皇)’은 점차 후세로 오면서 훌륭하게 위세를 갖춘 큰 군선(軍船)을 상징하는 의미로 쓰였던 것이다.
옛 통제영의 주산이었던 이곳 통영의 ‘안뒤산’을 이렇게 ‘여황산’이라 칭하게 된 까닭은 아마도 임진왜란 때, 왜적의 침략을 이곳 앞바다에서 무찔러 설욕한 이충무공의 통쾌한 승첩을 옛 춘추전국시대의 고사에 비견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나아가 이 고장 옛 두룡포(頭龍浦)에 통제영을 옮겨 설치 한 이래 더욱 번창하는 조선 수군의 당당한 위용과 함께, 이곳 통영성(統營城)을 진호하는 주산(主山 ․ 鎭山)으로서의 상징성에 걸 맞는 산이름을 갖추기 위함이 아니었던가 싶다.
또한 역(易)으로는 ‘안뒤산’이 위치한 북쪽 방위는 감(坎)이요 오행은 물(水)로 상징되며, 풍수지리로는 통영의 형세를 마치 거대한 배가 대양을 항해하는 행주형(行舟形)이라 했다. 그리고 바다 가운데 공주섬(拱珠島)을 두고, 주산(主山. 여황산)은 마치 거대한 게(蟹)가 두개의 큰 집게발을 벌려 구슬을 희롱하는 형상이요, 객산(客山. 미륵산)은 신묘한 용(龍)이 여의주를 받들어 주산에 헌상하는 형세라는 등의 많은 항설(巷說)이 전해지기도 한다.
결국 ‘여황산(艅艎山)’ 지명은 이러한 옛 중국의 고사와 함께 이충무공의 한산승첩과 그 후 조선수군의 작전사령부였던 통영성의 진산으로서의 상징성, 그리고 풍수지리 및 음양오행의 역술까지도 충분히 고려된 산이름이라 하겠다.
여황산과 세병관 전경
「춘추좌전」부분 「교서」부분